[유재경교수의 프랑스 수도원 탐방기] <10> 수도원 개혁의 중심 '클뤼니 수도원'
특집부 weekly@imaeil.com
매일신문 입력 2019-03-08
태양을 향해 뻗은 성전,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 상징
중세 수도사 아벨라르와 수녀 엘로이즈의 숭고한 사랑이야기가 묻어있는 클뤼니 수도원.
'나는 당신의 한 마디로 지옥의 불구덩일 향해서라도 당신을 따라나섰을 것이며, 또 앞서기도 했을 것입니다! 나의 마음은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 있는 까닭입니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에 담긴 중세 수도사 아벨라르와 수녀 엘로이즈의 숭고하고도 슬픈 사랑의 이야기다. 아벨라르는 20대에 프랑스 최고의 철학자 반열에 올랐고, 중세의 '보편논쟁'을 평정한 인물이 아닌가! 그리고 엘로이즈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두루 섭렵한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여성이 아니었던가! 결혼을 통한 세속적 사랑엔 실패했지만, 그들의 플라토닉한 사랑은 수도사와 수녀가 되어서도 결코 식지 않았다. 천병석 교수와 나는 중세의 천재 아벨라르가 의탁했던 곳, 두 사람의 전설적인 사랑의 이야기가 묻어 있는 클뤼니 수도원(Cluny abbey)으로 향했다. 우리는 중세 신앙인들의 영적인 세계를 엿보고 싶었다. 그들의 기도와 침묵, 종교적 헌신을 경험하고 싶었다.
그런데 왜 프랑스 수도원인가? 프랑스는 중세 유럽 수도원 개혁의 중심이었다. 아니안의 베네딕트 개혁을 시작으로 클뤼니 수도회와 시토 수도회, 카르투지오 수도회 등이 각자의 방식으로 수도원을 개혁했다. 특히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은 11-12세기 유럽의 종교 지형을 바꾸어 놓을 만큼 그 영향력이 컸다. 우리는 중세 프랑스 수도원의 개혁과 새로운 수도회의 탄생에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개혁 정신을 찾고 싶었다.
클뤼니 수도원 회랑.웅장한 건축물과 그 속에 수놓은 듯한 아름다운 조각들은 로마네스크 건축의 정수를 보는듯 했다.
라 투레트 수도원의 아침은 조용했다. 우리는 옛 수도사들이 사용하던 방을 빠져나와 계단을 내려왔다. 막상 떠나려 하니 라 투레트에서 만난 수도사들의 모습이 아른거리고, 지난 밤 사람들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귓가에 맴돌았다. 클뤼니 수도원은 자동차로 1시간 30분이면 도착한다. 한 여름 부르고뉴의 하늘은 맑았고, 태양은 강렬했다. 자동차는 평원과 낮은 구릉을 반복해서 달렸다. 주변으론 온통 포도밭과 목초지였다. 종종 해바라기밭이 나타났을 뿐이었다. 클뤼니가 다가오자 그곳 지형이 무척 궁금했다. 한 때 유럽에서 가장 큰 수도원은 과연 어떤 곳에 자리하고 있을까? 우리의 목적지는 클뤼니 수도원이었지만 자동차는 중세를 고스란히 담은 클뤼니 타운을 관통하고 있었다. 클뤼니 타운은 작은 마을이지만 길 양옆엔 가게들이 수백 미터나 늘어서 있었다. 클뤼니 수도원이 세워지자 그 주위에 생겨난 마을이 클뤼니가 아닌가. 그런데 지금은 클뤼니 타운 동쪽 한 모퉁이에 중세의 수도원 하나가 서 있는 것 같았다.
클뤼니 수도원은 910년 경 아키텐 공작이자 마콩(Macon) 백작 기욤(Guillaume)이 클뤼니 지역에 땅을 기증함으로써 건립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도원의 진정한 창시자는 초대원장인 베르노(Berno)라 할 수 있다. 그는 기니의 수도원을 설립하고 봄 수도원을 개건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도원장을 역임한 경험도 있었다. 한 때 그는 로마로 달려가 교황을 알현하고, 수도원 개혁을 위한 청사진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의 수도원 개혁을 향한 이러한 열정과 더불어 클뤼니는 시작부터 수도원 개혁에 주력했다.
클뤼니 수도원.
당시 수도원 개혁의 화두는 세속 권력으로부터의 자유였다. 귀족과 국왕, 그리고 황제의 권력으로부터 벗어나 수도원의 독립을 획득하고, 베네딕트 규칙에 따른 수도생활을 준수하는 것이 바로 수도원 개혁이었다. 기욤은 클뤼니 수도원에 땅을 기증하면서 다음과 같이 문서로 서약했다. "이곳에 모인 수도사들은 어떠한 세속 권세의 멍에에도 매이지 않을 것이니, 심지어 나라 권세에도, 내 친족의 권세에도, 국왕 폐하의 권세에도 매이지 않을 것이다." 클뤼니 수도원의 재산은 오직 "성 베드르와 성 바오로에게 " 즉 로마교회에 속한다는 것을 명시했다.
주차장에 차를 댄 우리는 수도원 입구로 향했다. 마치 거인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느낌이었다. 거대한 건물이 동서로 뻗어 있었다. 건물의 엄청난 규모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수도원 안으로 들어선 우리는 옛 교회당을 찾았다. 동쪽 입구로 들어서서 서쪽으로 걸었다. 오른쪽으로 회랑이 있었고, 왼쪽으로는 다양한 강당이 서 있었다. 웅장한 건축물과 그 속에 수놓듯 자리한 아름다운 조각들이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로마네스크 건축의 정수를 보는 듯했다. 한 장면이라도 더 카메라에 담고 싶어 분주히 움직였다. 우리는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수도원 교회당을 찾았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에서 12세기 말 전성기 때의 클뤼니 수도원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클뤼니의 수도원 교회당은 일반적으로 클뤼니 I와 II, 그리고 III로 불린다. 클뤼니 II는 953년 헝가리의 침입으로 파괴된 후 다시 건축된 것이고, 마지막으로 지어진 교회당이 클뤼니 III이다. 1088년 수도원장 후고가 시작한 클뤼니 III는 1130년에 완공되었다. 이 거대한 로마네스크 건물은 1200개의 기둥과 조각으로 이루어졌고, 무려 1만 명의 수도사들이 함께 모일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다.
클뤼니 수도원은 거대한 건물이 동서로 뻗어있다.
평수사들과 수도사들은 채석장에서 바위를 캐고 다듬어 거대한 수도원 교회당을 건축했다. 그들이 건축재료로 바위를 고집했던 것은 오로지 튼튼한 교회당을 짓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바위를 통해 하나님과 신앙의 본질을 표현하고자 했을 것이다. 하느님의 속성은 '반석'처럼 강할 뿐만 아니라 변함이 없으시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의 이름에 담긴 뜻이 바로 반석이 아닌가!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마태복음 16:18)고 하지 않으셨던가. 이뿐이 아니다. 교회당은 떠오르는 태양을 향하도록 동서로 길게 세워져 있다. 빛이 동쪽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둠의 세력을 이기는 상징이요,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나타낸다. 수도원의 건축과 수도사들의 삶에는 어디에나 영적인 지표가 있다.
클뤼니 수도원 교회당은 떠오르는 태양을 향하도록 동서로 길게 세워져 있다.그것은 어둠의 세력을 이기는 상징이요,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나타낸다.
우리는 몇 시간이나 수도원 내부를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창문과 기둥에 새긴 문양이든 수도원에 세워진 어떤 조각이든 예술품이 아닌 것이 없었다. 방대한 수도원 건물 전체를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공간을 찾을 수 없었다. 내부를 빠져나와 입구 반대쪽을 향하니 수도원 뜰이 나왔다. 수도원 앞쪽엔 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 작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었다. 뒤쪽으로는 낮은 언덕이 수도원을 감싸고 있었다. 어머니의 품처럼 편안한 곳에 수도원이 앉아 있었다. 남쪽으로 수백 미터를 걸어가자 수도원 전체가 한 눈에 들어왔다. 프랑스 변방에 위치한 클뤼니 수도원이 이탈리아와 영국, 스페인으로까지 확장되고, 교황을 배출한 것은 물론 십자군을 조직할 정도로 찬란했던 역사와 위용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12세기 전성기 때에는 2000여 개의 수도원이 클뤼니에 소속될 정도였다. 클뤼니에 주어진 '수도원 개혁'이라는 영광스런 이름과, 최초로 수도회(Ordo or Congretatio)라는 조직을 가능하게 했던 힘은 과연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클뤼니 수도원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은 정치적 개혁과 불입권(immunity)과 면제권(exemption) 같은 특권에 의해 성공한 것이 아니었다. 베네딕트 규칙에 대한 그들만의 독특한 해석과 그에 따른 개혁이 클뤼니를 만들었다. 베네딕트 수도생활의 3대 요소는 기도(oratio)와 노동(labor), 독서(lection divina)이다. 그런데 클뤼니 수도원은 노동에 대한 해석을 달리했다. 베네딕트가 '영혼의 적을 쫓아내던 노동', '신성한 일'로 숭고하게 여겼던 노동이 독서로 편입되고 말았다. 클뤼니 수도사들은 전례 예배에 수도생활의 모든 것을 바쳤다. 따라서 예배 의식은 당연히 복잡해지고, 수도원 음악이 꽃을 피울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일'인 전례 기도가 수도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수도사들은 매일 138편의 시편을 낭송했고, 성무일도를 엄숙하게 지켰으며, 때에 따라서는 하루에 두 번 공식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수도사가 사망하면 그날 밤에 시편 전체가 낭송될 정도로 장례 예식이 발전하기도 했다. 클뤼니 수도사에게 독서는 노동이었다. 그들은 하루에 몇 시간씩 성경과 신학 서적을 읽었다. 부활주일부터 10월까지는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독서에 집중했고, 사순절 기간에도 매일 1시간씩 독서를 할 정도였다.
클뤼니에서의 예배의 발전과 신학의 장려는 예술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11-12세기에 발전한 로마네스크 건축과 조각, 음악 등은 모두 클뤼니가 중심이었다. 클뤼니 수도사들과 장인들의 영성이 예술로 표현된 것인가? 깊은 내면에서 흘러 나온 언어가 시가 되고, 아름다운 심상이 그림과 조각이 되었다. 수행자에게 예술은 자기 영성의 표현이고 하느님께로 향하는 길이다.
수도원을 돌아 나오는 길은 왠지 씁쓸했다. 클뤼니는 한때 유럽 역사를 움직인 곳이다. 수많은 영웅호걸이 찾던 곳이다. 수도사만 400명씩 거주하던 공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영광은 어디로 가고, 한 명의 수도사도 없이 반쯤 허물어진 건물만 외로이 서 있는가? 세속사에서의 성공과 번영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시편 103편)
영남신학대학교 기독교 영성학 유재경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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