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시67:3-68:7)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
열려라 에바다
2025. 5. 17. 11:09
(시67:3-68:7)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
67편 3절-68편 2절.
67편 3절-7절: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열방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찌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판단하시며 땅 위에 열방을 치리하실 것임이니이다(셀라)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땅이 그 소산을 내었도다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68편.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1절-2절: 하나님은 일어나사 원수를 흩으시며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연기가 몰려감 같이 저희를 몰아내소서 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
67편.
3절: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누가 주를 찬송하느냐? 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찬송을 하고, 사망과 죄에서 구원을 얻은 자가 찬송을 하고, 모든 환난과 박해와 시험을 통과하고 성화구원을 이룬 자가 찬송을 한다. 승리한 자가 찬송을 한다.
누가 성도를 사망과 죄에서 구원을 했느냐?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하셨다. 주님의 도로 되는 주의 구원은 세상의 모든 민족을 초월한 구원이다. 그래서 구원 얻은 자의 찬송은 오직 주만을 위한 찬송이다. 성도의 모든 시험 연단에서 누가 힘을 주셨느냐? 보혜사 성령님이, 주님이 힘을 주셨다. 그래서 성도들은 주님을 찬송한다.
천국에 들어가면 모든 민족성이 초월이 된다. 주의 도로 되는 주의 구원은 세상 그 어느 법에도 매이지 않는다. ‘나는 장로교인으로서 장로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으니 장로교회만 찾아간다. 나는 감리교회의 인도를 받았으니 감리교회에만 나간다. 나는 성결교회의 인도를 받았으니 성결교회로만 나간다. 나는 어느 목사님에게 안수를 받아서 병이 나았으니 그 목사님이 가는 데로만 따라간다’ 라고 하는 것은 신앙사상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거다. 진정으로 주의 도로 주의 구원을 받았다면 이런 소리가 나올 리가 없다. 또한 교회에서 목사님이 주의 도로 바로만 가르쳤다면 교인들이 이런 신앙이 될 수가 없다.
만일 그렇게 가르쳤고, 그렇게 믿는다면 이 사람이 주의 도로 구원이 입어진 것인지 의심스럽다. 그렇게 가르치고, 그렇게 된 책임도 크고 심판도 크다. 하나님의 온전한 진리인격의 사람으로 속 성품이 만들어지는 것이 곧 주의 복음인데, 이 복음의 질을 세상으로 떨어뜨려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게 하면 안 된다.
교회의 인도자라면 자기 교회 교인이 천국에서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느냐? 자기 교인을 천국에서 만났을 때 이 교인이 진리로 실력자가 되고 모든 면에 부족함이 없이 실력 것 원 것 마음 것 그 천국을 누리는 것을 본다면 마음이 즐거울 텐데 쪼그랑 망태기로 있다면 그게 보기 좋겠느냐? 그러니 교회 인도자라면 성도들을 주의 도로 영능의 실력자, 진리 실력자로 만들어서 세상 거짓 것, 비진리에 속지 않게 하고 오직 주만 찬양토록 해야 할 게 아니겠느냐?
우리교회 교인들은 어디에 가서 전도를 하더라도 진리의 말씀을 전해야지 어느 교회 교인들처럼 ‘우리교회 목사님이 참 훌륭합니다’ 라고 말을 한다면 이건 인간자랑이지 복음자랑이 아니다. 아주 잘못된 거다. 목사 자랑을 하면 안 되고 주님을 자랑해야 한다.
4절: ‘열방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찌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판단하시며 땅 위에 열방을 치리하실 것임이니이다(셀라).’ 열방이 왜 기뻐 즐거이 노래를 하느냐? 주의 공평한 판단을 받고 주의 치리를 받기 때문이다. 주의 공평한 치리를 받고 있는 이들은 모두 주의 구원을 얻은 주의 백성들이다. 주의 치리를 받기 전 선악과 따먹은 세상치리를 받을 때는 얼마나 불의하고 공평치 못했는지? 이로 인해 늘 눈물과 고통이요, 근심이요, 노예요, 종이요,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주의 도의 치리를 받고서 생명과 참 자유를 얻었으니 어찌 찬송이 안 나오겠느냐?
5절: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이 5절은 3절과 같은 내용인데, 그러나 3절은 주의 치리를 받는 면에서의 찬송이고, 5절은 주의 치리를 받고 성령의 열매가 맺혔다는 의미에서의 찬송이다.
어느 민족이던 주의 구원의 도의 치리를 받으면 이 땅 위에서 우수한 민족이 된다. 가정적으로 말하면 우수한 가정이 된다. 이방을 섬기는 가정보다 우수한 가정이 되고, 이방신을 섬기는 나라보다 우수한 민족이 된다. 이걸 분명히 알아라.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이 이걸 안다면 ‘이 복음을 하루 속히 받아야 하겠구나’ 하는 결심이 생긴다. 그런데 성경을 보지 않으니 이 사실을 모른다.
하나님께서 솔로몬 왕에게 지혜를 주셨다. 그래서 솔로몬은 구별 분별을 잘 했다 사망과 생명을 분별을 잘 했다. 이게 말씀의 재판이요 판단이다. 어느 나라에서 이 소문을 듣고 솔로몬을 찾아왔느냐? 남방여왕도 왔고, 각국에서 많이 왔다. 이게 뭘 말하는 거냐? 복음을 받은 민족은 그만큼 수준이 높다는 거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도 자기 안에 복음을 채워 넣고 복음을 가까이 하면 이 사람은 그만큼 수준이 높아진다. 안 높아지려야 안 높아질 수가 없는 거다.
6절: ‘땅이 그 소산을 내었도다.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땅이 소산을 많이 낸다면 이 땅은 기름진 축복의 땅이다. 반면에 소산을 내지 않는다면 저주를 받은 땅이 아니겠느냐? 소산은 내지 않고 밭에 잡초만 무성히 자랐다면 보기가 흉하다. 그 속에는 온갖 더러운 벌레들과 들쥐들과 뱀이 기어 다닐 것이니 결국은 불사름이 된다. 신앙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주의 도로 구원을 얻은 사람은 그 마음 밭이 기름진 옥토와 같아서 성령의 열매의 소출이 많이 나게 된다. 이런 사람은 생명과를 먹고 지키고 다스리고 충만한 자임이 틀림이 없다. 이런 사람은 복을 많이 받은 것인데 어찌 기쁘지 않겠느냐? 성령의 열매의 소출이 없다면 베임을 당하여 불속에 들어가게 된다.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은 마음 속에 열매가 많아진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일반적인 도덕성도 못 가졌다면 캄캄한 거다. 이런 경우는 되게 얻어맞아야 한다. 정신이 바싹 차려지도록 얻어맞아야 한다. 일반수준도 못 올라간다면 얻어맞아야 한다. 어쩔 도리가 없다.
7절: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라고 말한 것을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을 일을 많이 한 사람들임이 틀림없다. 이런 사람은 주의 도를 받으니, 즉 주의 말씀을 받으니 주의 구원을 얻게 되고, 즉 하나님의 성품을 닮게 되고, 또한 주의 구원을 얻게 되니 온 세계 방방곡곡에 주의 도를 전하게 된다. 그러니까 주의 도를 전하는 일은 사람을 하나의 종교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의 구원을 입은 자로, 즉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입은 자로 만들어 놓는 거다. 여기서 말하는 ‘주의 도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예수 믿어 천국’ 이 말이 아니라 기본구원 얻은 자를 말씀의 이치로 잘 가르쳐서 하나님의 성품을 입은 자로 만들어 놓는 것을 말한다.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땅의 모든 끝’이란 위치적으로 땅 구석구석도 되지만 교훈적인 면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남김없이 다’ 이런 뜻이다. 인간으로 말하면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어른에서부터 어린아이까지 모든 사람을 말한다. 사람이 없이 땅만 있다면 무슨 필요가 있느냐? 그러니까 ‘땅의 모든 끝’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이걸 시간적인 면으로 말을 하면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부터 세상 시작과 끝, 그리고 영원세계까지 전체적으로 하나도 빠짐없이 힘과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했다는 거다. 땅의 지면 모든 구석구석에 있는 사람에게까지, 한 사람에게도 구석구석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을 알게 해서 구원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했다는 말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잘 알고 깨달아서 인격적 속성적으로 하나님의 본질적 성품으로, 하나님을 닮는 자로 만들어져야 한다. 하나님을 바로 경외하는 자가 이런 일을 한다.
68편.
1절: ‘하나님은 일어나사 원수를 흩으시며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본문을 보니 하나님이 일어나시면 원수는 흩어진다. 열 명이던, 만 명이던, 수 백, 수 천만 명이던 원수는 흩어진다. 주를 미워하던 자들은 다 도망을 가 버린다. 그러니 우리는 주의 원수가 되지 말아야 하고, 주를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악한 자들 틈에 있으면 결국 자기는 하나님 앞에서 흩어지는, 도망을 가는 우스운 꼴이 되고 만다는 거다.
자기가 이런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인간의 지혜지식성과, 도덕성과, 옳다고 하는 것을 바로 정평 정가를 해야 하는데, 이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옳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옳음을 모르면 하나님 앞에서 옳은 기도를 할 수 없고, 하나님 앞에 원수로 살다가 결국은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니 하나님을 알되 바로 알아야 한다.
본 절의 기도의 내용을 볼 때 원수가 누구 앞에 있다는 거냐? 원수가 다윗 앞에 있고, 또 주 앞에 있다는 거다. 그러니까 ‘원수’라 할 때 주 앞에 원수도 있고, 다윗 앞의 원수도 있다는 것인데, 다윗은 주님의 원수는 곧 자기의 원수로 삼고 있다는 거다. 그러니까 다윗은 주님의 원수가 다윗 자신과 함께 주의 앞에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원수를 다윗 자기와 같다고 보지 않는다는 거다.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이 다른 교인들과 같이 있을 때 다른 교회 교인들과 같다고 보느냐? 다르다. 뭐가 다르냐? 같다면 여기 있을 필요 없이 가까운 교회로 나가면 된다. 뭐가 다르냐? 구원을 이뤄가는 이치가 다르다. 주님의 원수가 주님과 같이 있다고 해서 같은 것으로 보는 거냐? 아니다. 종교인들은 같이 보겠지만 영의 눈이 밝은 다윗의 입장에서는 자기와 같이 보이지를 않는다.
우리 인간은 생각을 하는 존재다. ‘나는 저 사람을 이렇게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저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을 할까?’ 이런 생각을 한 번씩은 한다. 신앙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저 분의 신앙은 저렇고 내 신앙은 이런데 하나님께서 모두를 어떻게 보실까? 어느 쪽을 더 옳게 보실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똑같이 보시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는 눈과,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주님의 제자들을 보는 눈이 같으냐? 다르다.
본문에서 말하듯이 신앙 사상적인 원수는 결코 멀리 있지 않다. 한 사람이던, 열 사람이던, 천 사람 만 사람이던 원수는 언제나 가까이에 있다. 우리 기독자들은 자기의 원수를 볼 때 자기 주관성에서 원수를 보지 말고 객관의 입장, 즉 하나님의 입장에서 원수를 봐야 한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봐야 한다. 자기의 육적인 감정으로 원수를 보면 안 된다.
나는 하나님의 원수인가, 아니면 인간들의 원수인가? 아니면 나는 하나님에게도 원수이고 인간에게도 원수인가? 하나님에게도 원수이고 인간에게도 원수인 경우에는 어떻게 되느냐? 인간 앞에 바로 못 사니 하나님 앞에서도 원수가 된 것인지, 하나님 앞에 원수가 되니 인간 앞에도 원수가 된 건지? 후자다.
하나님을 모르면 결코 인간을 사랑할 수 없다. 오히려 인간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고 다른 길로 가게 한다. 그래서 사람을 인도하려면 자신부터 먼저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한다. 모든 면에서 이치가 그렇다. 이 사실을 깨달은 후에 원수관을 바로 가져야 옳은 기도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영원 자존 불변한 분이니 우리에게 향하신 당신의 소원 목적도 영원불변이시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도 질적 사건적으로 영원불변한 것을 주고자 하신다. 이는 진리성도 다윗의 주장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방세상은 자기 마음에, 자기 눈으로 보기에 안 좋으면 싫어하고 원수처럼 여긴다.
악한 자들이 왜 다윗 앞에, 하나님 앞에 무리로 형성이 되어 있느냐? 그것은 자기들의 육적인 주장을 이스라엘에게 펼치기 위해서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하나님 앞에 원수요 자기 앞에 원수라는 거다. 오늘날 믿는 우리들도 이것이 자기의 원수다. 선악과 따먹은 사고방식은 창세 이후로 마지막까지 모든 믿는 사람의 원수가 되는 거다.
오늘날 우리교회에서 가르치고 듣는 것이 창세 때의 교인이나 마지막 시대의 교인이 들을 때도 ‘아멘’이 되어야 한다. 달라지면 참 복음이 아니다. 하나님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것은 어느 시대에 언제 누구에게 외치든지 영원히 옳음이다. 그래서 우리 궁극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도 구약시대의 성도가 와서 볼 때도 ‘아 옳다. 하나님의 것을 가졌구나’ 라고 해야 하고, 마지막 시대의 교인이 와서 볼 때도 ‘옳다’ 이렇게 되어야 한다. 만일 구약시대의 성도는 틀렸다고 하고 신약시대의 성도는 옳다고 한다면 이것은 구약시대의 성도가 잘못됐거나, 아니면 신약시대의 성도가 잘못됐거나, 아니면 궁극교회의 교훈이 잘못됐거나, 아니면 셋 다 잘못된 거다.
하나님 앞에서의 원수는 다윗의 입장에서 볼 때도 원수인데, 그렇다면 하나님의 원수들의 입장에서 다윗을 볼 때 다윗이 자기들의 원수냐, 친구냐? 원수다. 다윗은 하나님이 보시는 것과 같은 눈으로 원수를 보는데, 원수의 입장에서 이런 다윗을 볼 때는 다윗이 자기들의 원수로 보이는 거다.
자신을 하나님의 본질로 기준을 세운 자는 누가 하나님의 원수인지를 알게 된다. 다윗의 원수들은 세상과 함께 불타지고 썩어질 것을 주장하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외친다. 이는 오늘날 거짓된 교회의 주장과 똑같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원수요, 다윗의 원수요, 지금으로 보면 우리 궁극교회의 원수가 되는 거다. 오늘날 유형교회 안을 보면 이런 원수들이 하나님 앞에 무리로 되어있다. 악한 사상을 가진 이런 자들도 다 성경을 들고 있다. 이처럼 세상 속화된 거짓 교회들은 세상에 속한 것만 달라고 하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영원한 것은 받지 않고 부정을 한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것을 받는 건데, 하나님의 영원한 것을 받으면 어떻게 되느냐? 사람이 지식적인 면에서, 지혜적인 면에서, 신적 도덕성적인 면에서, 능력성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덧입게 된다. 자기가 영원한 하나님의 것을 받으면 이해타산 평가성을 따지는 면에서 영원한 것을 놓고 따지게 된다. 이해타산 평가가 이렇게 나간다. 반대로 세상 것을 받으면 매사에 임시성적인 판단이 되고, 물질성적인 것을 취하게 되고, 눈에 보이는 것, 큰 것을 찾게 된다.
오늘날 교회 안을 보면 하나님과 성도들의 원수가 많은데, 첫째는 세상에 속한 것을 믿음으로 이뤄야 만이 신앙이 좋은 것이라고 하며 물질적 신앙으로 떼를 지어 나가고 있는데, 이것은 영적 이스라엘로 자라야 할 교회들을 완전히 세상 쪽으로 무너뜨리는 거다. 이건 하나님 앞과 성도들 앞에 원수 짓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교회를 위한다고 그러는 거겠지만 진리 이치적으로 보면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 원수 짓이다. 왜냐? 사람이 망가지고 있으니까. 이런 세속화된 신앙사상들이 마지막 시대의 교회 안에서 주체가 되어 자타의 구원을 죽이고 있다. 누가 이런 짓을 하느냐? 유형교회가 세상성을 자랑하면서 이런 짓을 하는 거다.
두 번째는 우리가 역사계시로 보면 구약시대 때에 이스라엘 안팎에 원수들이 많았는데, 애굽군대가 출애굽 한 이스라엘을 죽이려고 뒤로 따라붙었다. 또한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선동하고 주장을 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이 다 이스라엘의 원수인데, 애굽인인 원수가 있고, 광야에 나와 있을 때 이스라엘 안에서도 원수가 있었다. 이게 뭘 말하는 거냐? 오늘날도 같은 기독교인이면서 십자가 달아놓고 교회간판 걸어놓고 교회 안에서 세상을 외치는 것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 중에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한 것과 같은 짓들이다. 이건 하나님 앞에 원수다.
세 번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한 땅으로 열심히 올라가고 있는데 앞으로 가지 못하게 하느라고 중간에서 가는 길을 가로막은 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전혀 이방인들이었느냐? 야곱의 형 에서의 후손인 에돔족이 가로막았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런 일이 많다. 이것은 영적 이스라엘의 원수다.
네 번째는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든 것이나,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나, 모세의 말을 믿지 않은 것이나, 이방인의 말을 쉽게 믿어준 것이나, 열두 정탐꾼 중에 믿음 없는 열 정탐꾼의 말을 믿은 것이나, 우상을 믿는 여자들을 아내로 데려온 것 등등 이 외에도 수없이 많지만 이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원수가 된 성질들이다. 영의 눈으로 보면 자신이 알던 모르던 원수 짓을 하는 자들이 기독교 안에, 교회 안에, 가정 안에, 더 좁히면 모두 각자 자기 안에도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은 일어나사 원수를 흩으시며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원수를 흩어지게 하고 도망가게 하려면 누가 일어나셔야 하느냐? 하나님이 일어나셔야 한다. 하나님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셔야 된다는 거다. 이런 역사가 구약 때 보면 하나님께서 적들이 이스라엘을 두렵게 만든 것,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게 한 것, 서로 싸워서 둘 다 망하게 만든 것, 하나님의 이적과 기사로 적들이 도망가게 한 것, 이스라엘을 치러 왔다가 개인적인 자기 일로 물러가게 만든 것 등등 많다.
교훈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런 역사들은 지도자가, 성도가 진리의 횃불을 높이 들 때 일어나는 거다. 진리이치, 생명이치, 도덕이치, 이게 진리생명의 말씀인데, 이 진리이치의 말씀만이 사람의 정신과 사상과 목적과 방향과 성질과 성격이 구별이 되고 분별이 됨으로써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은 물러가게 하고, 고치게 하고, 바로 잡게 한다.
성도가 진리이치의 기치를 높이 드는 게 하나님을 높이 드는 거다. 하나님이 일어나시게 하는 거다. 하나님의 역사가 주권적으로 일어나게 하는 거다. 하나님의 본질의 것이 나오지 않으면 이질은 도망가지 않는다. 그러면 이질이 뭐냐? 세상운동을 함으로써 하나님과 성도 앞에 원수 짓을 하는 게 기독교의 이질운동이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어떤 이적과 기사로써 원수를 흩으신 일이 있는데, 이것을 교훈적은 측면으로 보면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과 성도들의 원수가 물러가게 하려면 말씀을 선포할 때 뚜렷한 진리이치, 생명이치, 신적인 도덕이치가 나와야 한다. 그래야 빛이 비취면 흑암이 물러가듯이 그런 성격 성질이 물러가는 거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목사님들이 바로 하자고 금식기도도 하고 철야기도도 하는데, 사람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게 하려면 교인들이 바른 것을 잡도록 해야 한다. 바른 것을 잡지 못하면 바로 나갈 수 없는 거다. 성경을 통해 옳고 그름을 볼 수 있는 진리의 빛을 받아야지 금식기도를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2절: ‘연기가 몰려감 같이 저희를 몰아내소서. 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 사람이 정체되어 있는 연기 가운데 서 있으면 눈이 따갑고 눈물 콧물을 흘리게 된다. 유독한 연기가 공기에 섞여서 사람의 폐 속으로 들어가면 사람이 죽는다. 연기 가운데서 고통 중에 있을 때 이 연기 속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없다.
연기는 손에 잡히지도 않고 야단을 친다고 해도 달아나지도 않는다. 연기는 맑은 공기에 의해서 도망을 간다. 그런 것처럼 하나님 앞에 거짓되고 악한 성질이 정화가 되는 것은 오직 진리생명의 말씀의 바람밖에 없다. 교회 안의 비진리적 종교적 사상, 물질성적 세상주의, 인본주의 신앙사상들이 물러가게 하는 것은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신조척도, 신본주의, 신정통치라야 한다. 교회에서 인본주의 사고방식으로 가르치면 성도들은 영적인 면에서 자라지 못하고 그 머리는 썩는다. 그러면 이 교회는 마귀의 놀이터가 되고 만다. 교회는 진리의 신선하고 맑은 바람이 불어야 한다.
‘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 ‘밀’이 뭐냐? 불 켜는 초를 말한다. ‘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라고 하는 것은 양초가 불에 녹아서 형체가 없어지는 것처럼 악인은 하나님 앞에서 형체도 없이 사라진다는 거다. 여호와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한 분인 고로 죄인은 절대로 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거다. 즉 하나님 앞에 인간 자기의 존재성은 없다. 인간은 자기의 존재성이 하나님 앞에 나타나도록 지음을 받았음에도 악인이 됨으로써 자기의 존재성이 없다는 거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존재성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이냐? 진리와 생명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본질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의 온전한 사람으로 된 것이 없다는 걸 말한다. 즉 사람이 망했다는 거다. 우리는 사업이 망한 것만 보지 말고 사람 자체가 망한 것을 유심히 볼 줄 알아라.
다니엘의 세 친구는 칠 배나 뜨거운 풀무불 속에 들어가서도 그들의 신앙인격과 성품의 형체는 불에 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하나님의 원하심대로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의 사람으로 그대로 나타났지 사람이 망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 보면 세상에서 잘 살고 못 살고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사람 자체가 망한 사람이 많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 사람 망한 게 너무나도 많다.
예수 믿는 사람이 자기의 시간성, 자기의 정력성, 재산성, 투자성, 자기의 일생을 어디에 다 낭비를 했느냐? 사람이 인격 면에서 사람 자체가 망한 것을 모른다면 짐승과 다를 게 없다. 이러면 참 인간을 어떻게 알겠느냐?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되면 하나님의 원수가 누구인지 알게 되고, 또 자기의 원수가 누구인지 알게 되고, 사람이 망한 사람인지 성공한 사람인지 알게 된다.
예수 믿는 우리는 진리를 기준으로 하나님의 온전의 성품을 세워놓고 사람이 성공하고 망한 것을 봐야 한다. 세상만사 모든 일은 사람이 만들어지는 면으로 들어가 있다. 매사가 하나님의 성품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면으로 들어가 있다. 세상사람들은 이것을 모른 채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것으로 뭘 자꾸 만들려고 한다. 그래서 교회의 거짓된 인도자들이 자꾸 변질될 것에 신경을 쓰게 하고 그걸 이루라고 한다. 이건 못 쓴다.
우리가 매사를 사람이 만들어지는 면으로 들어가면 다른 것은 따라오는 거다. 장사를 할 때 사람에게 신경을 쓰고 서비스를 잘 해 주면 많은 사람들이 이 가게를 찾게 되는데, 그러면 돈은 사람의 주머니에 들어있기 때문에 돈도 같이 따라 오게 된다. 이게 장사를 잘 하는 거다. 따라오도록 만들어야 사람이 힘이 덜 드는 거지 자기가 따라다니게 되면 그 인생은 힘든 삶이 된다. 이치를 볼 줄 알아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67편 3절-7절: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열방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찌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판단하시며 땅 위에 열방을 치리하실 것임이니이다(셀라)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땅이 그 소산을 내었도다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68편.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1절-2절: 하나님은 일어나사 원수를 흩으시며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연기가 몰려감 같이 저희를 몰아내소서 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
67편.
3절: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누가 주를 찬송하느냐? 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찬송을 하고, 사망과 죄에서 구원을 얻은 자가 찬송을 하고, 모든 환난과 박해와 시험을 통과하고 성화구원을 이룬 자가 찬송을 한다. 승리한 자가 찬송을 한다.
누가 성도를 사망과 죄에서 구원을 했느냐?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하셨다. 주님의 도로 되는 주의 구원은 세상의 모든 민족을 초월한 구원이다. 그래서 구원 얻은 자의 찬송은 오직 주만을 위한 찬송이다. 성도의 모든 시험 연단에서 누가 힘을 주셨느냐? 보혜사 성령님이, 주님이 힘을 주셨다. 그래서 성도들은 주님을 찬송한다.
천국에 들어가면 모든 민족성이 초월이 된다. 주의 도로 되는 주의 구원은 세상 그 어느 법에도 매이지 않는다. ‘나는 장로교인으로서 장로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으니 장로교회만 찾아간다. 나는 감리교회의 인도를 받았으니 감리교회에만 나간다. 나는 성결교회의 인도를 받았으니 성결교회로만 나간다. 나는 어느 목사님에게 안수를 받아서 병이 나았으니 그 목사님이 가는 데로만 따라간다’ 라고 하는 것은 신앙사상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거다. 진정으로 주의 도로 주의 구원을 받았다면 이런 소리가 나올 리가 없다. 또한 교회에서 목사님이 주의 도로 바로만 가르쳤다면 교인들이 이런 신앙이 될 수가 없다.
만일 그렇게 가르쳤고, 그렇게 믿는다면 이 사람이 주의 도로 구원이 입어진 것인지 의심스럽다. 그렇게 가르치고, 그렇게 된 책임도 크고 심판도 크다. 하나님의 온전한 진리인격의 사람으로 속 성품이 만들어지는 것이 곧 주의 복음인데, 이 복음의 질을 세상으로 떨어뜨려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게 하면 안 된다.
교회의 인도자라면 자기 교회 교인이 천국에서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느냐? 자기 교인을 천국에서 만났을 때 이 교인이 진리로 실력자가 되고 모든 면에 부족함이 없이 실력 것 원 것 마음 것 그 천국을 누리는 것을 본다면 마음이 즐거울 텐데 쪼그랑 망태기로 있다면 그게 보기 좋겠느냐? 그러니 교회 인도자라면 성도들을 주의 도로 영능의 실력자, 진리 실력자로 만들어서 세상 거짓 것, 비진리에 속지 않게 하고 오직 주만 찬양토록 해야 할 게 아니겠느냐?
우리교회 교인들은 어디에 가서 전도를 하더라도 진리의 말씀을 전해야지 어느 교회 교인들처럼 ‘우리교회 목사님이 참 훌륭합니다’ 라고 말을 한다면 이건 인간자랑이지 복음자랑이 아니다. 아주 잘못된 거다. 목사 자랑을 하면 안 되고 주님을 자랑해야 한다.
4절: ‘열방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찌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판단하시며 땅 위에 열방을 치리하실 것임이니이다(셀라).’ 열방이 왜 기뻐 즐거이 노래를 하느냐? 주의 공평한 판단을 받고 주의 치리를 받기 때문이다. 주의 공평한 치리를 받고 있는 이들은 모두 주의 구원을 얻은 주의 백성들이다. 주의 치리를 받기 전 선악과 따먹은 세상치리를 받을 때는 얼마나 불의하고 공평치 못했는지? 이로 인해 늘 눈물과 고통이요, 근심이요, 노예요, 종이요,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주의 도의 치리를 받고서 생명과 참 자유를 얻었으니 어찌 찬송이 안 나오겠느냐?
5절: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이 5절은 3절과 같은 내용인데, 그러나 3절은 주의 치리를 받는 면에서의 찬송이고, 5절은 주의 치리를 받고 성령의 열매가 맺혔다는 의미에서의 찬송이다.
어느 민족이던 주의 구원의 도의 치리를 받으면 이 땅 위에서 우수한 민족이 된다. 가정적으로 말하면 우수한 가정이 된다. 이방을 섬기는 가정보다 우수한 가정이 되고, 이방신을 섬기는 나라보다 우수한 민족이 된다. 이걸 분명히 알아라.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이 이걸 안다면 ‘이 복음을 하루 속히 받아야 하겠구나’ 하는 결심이 생긴다. 그런데 성경을 보지 않으니 이 사실을 모른다.
하나님께서 솔로몬 왕에게 지혜를 주셨다. 그래서 솔로몬은 구별 분별을 잘 했다 사망과 생명을 분별을 잘 했다. 이게 말씀의 재판이요 판단이다. 어느 나라에서 이 소문을 듣고 솔로몬을 찾아왔느냐? 남방여왕도 왔고, 각국에서 많이 왔다. 이게 뭘 말하는 거냐? 복음을 받은 민족은 그만큼 수준이 높다는 거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도 자기 안에 복음을 채워 넣고 복음을 가까이 하면 이 사람은 그만큼 수준이 높아진다. 안 높아지려야 안 높아질 수가 없는 거다.
6절: ‘땅이 그 소산을 내었도다.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땅이 소산을 많이 낸다면 이 땅은 기름진 축복의 땅이다. 반면에 소산을 내지 않는다면 저주를 받은 땅이 아니겠느냐? 소산은 내지 않고 밭에 잡초만 무성히 자랐다면 보기가 흉하다. 그 속에는 온갖 더러운 벌레들과 들쥐들과 뱀이 기어 다닐 것이니 결국은 불사름이 된다. 신앙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주의 도로 구원을 얻은 사람은 그 마음 밭이 기름진 옥토와 같아서 성령의 열매의 소출이 많이 나게 된다. 이런 사람은 생명과를 먹고 지키고 다스리고 충만한 자임이 틀림이 없다. 이런 사람은 복을 많이 받은 것인데 어찌 기쁘지 않겠느냐? 성령의 열매의 소출이 없다면 베임을 당하여 불속에 들어가게 된다.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은 마음 속에 열매가 많아진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일반적인 도덕성도 못 가졌다면 캄캄한 거다. 이런 경우는 되게 얻어맞아야 한다. 정신이 바싹 차려지도록 얻어맞아야 한다. 일반수준도 못 올라간다면 얻어맞아야 한다. 어쩔 도리가 없다.
7절: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라고 말한 것을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을 일을 많이 한 사람들임이 틀림없다. 이런 사람은 주의 도를 받으니, 즉 주의 말씀을 받으니 주의 구원을 얻게 되고, 즉 하나님의 성품을 닮게 되고, 또한 주의 구원을 얻게 되니 온 세계 방방곡곡에 주의 도를 전하게 된다. 그러니까 주의 도를 전하는 일은 사람을 하나의 종교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의 구원을 입은 자로, 즉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입은 자로 만들어 놓는 거다. 여기서 말하는 ‘주의 도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예수 믿어 천국’ 이 말이 아니라 기본구원 얻은 자를 말씀의 이치로 잘 가르쳐서 하나님의 성품을 입은 자로 만들어 놓는 것을 말한다.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땅의 모든 끝’이란 위치적으로 땅 구석구석도 되지만 교훈적인 면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남김없이 다’ 이런 뜻이다. 인간으로 말하면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어른에서부터 어린아이까지 모든 사람을 말한다. 사람이 없이 땅만 있다면 무슨 필요가 있느냐? 그러니까 ‘땅의 모든 끝’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이걸 시간적인 면으로 말을 하면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부터 세상 시작과 끝, 그리고 영원세계까지 전체적으로 하나도 빠짐없이 힘과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했다는 거다. 땅의 지면 모든 구석구석에 있는 사람에게까지, 한 사람에게도 구석구석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을 알게 해서 구원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했다는 말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잘 알고 깨달아서 인격적 속성적으로 하나님의 본질적 성품으로, 하나님을 닮는 자로 만들어져야 한다. 하나님을 바로 경외하는 자가 이런 일을 한다.
68편.
1절: ‘하나님은 일어나사 원수를 흩으시며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본문을 보니 하나님이 일어나시면 원수는 흩어진다. 열 명이던, 만 명이던, 수 백, 수 천만 명이던 원수는 흩어진다. 주를 미워하던 자들은 다 도망을 가 버린다. 그러니 우리는 주의 원수가 되지 말아야 하고, 주를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악한 자들 틈에 있으면 결국 자기는 하나님 앞에서 흩어지는, 도망을 가는 우스운 꼴이 되고 만다는 거다.
자기가 이런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인간의 지혜지식성과, 도덕성과, 옳다고 하는 것을 바로 정평 정가를 해야 하는데, 이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옳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옳음을 모르면 하나님 앞에서 옳은 기도를 할 수 없고, 하나님 앞에 원수로 살다가 결국은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니 하나님을 알되 바로 알아야 한다.
본 절의 기도의 내용을 볼 때 원수가 누구 앞에 있다는 거냐? 원수가 다윗 앞에 있고, 또 주 앞에 있다는 거다. 그러니까 ‘원수’라 할 때 주 앞에 원수도 있고, 다윗 앞의 원수도 있다는 것인데, 다윗은 주님의 원수는 곧 자기의 원수로 삼고 있다는 거다. 그러니까 다윗은 주님의 원수가 다윗 자신과 함께 주의 앞에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원수를 다윗 자기와 같다고 보지 않는다는 거다.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이 다른 교인들과 같이 있을 때 다른 교회 교인들과 같다고 보느냐? 다르다. 뭐가 다르냐? 같다면 여기 있을 필요 없이 가까운 교회로 나가면 된다. 뭐가 다르냐? 구원을 이뤄가는 이치가 다르다. 주님의 원수가 주님과 같이 있다고 해서 같은 것으로 보는 거냐? 아니다. 종교인들은 같이 보겠지만 영의 눈이 밝은 다윗의 입장에서는 자기와 같이 보이지를 않는다.
우리 인간은 생각을 하는 존재다. ‘나는 저 사람을 이렇게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저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을 할까?’ 이런 생각을 한 번씩은 한다. 신앙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저 분의 신앙은 저렇고 내 신앙은 이런데 하나님께서 모두를 어떻게 보실까? 어느 쪽을 더 옳게 보실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똑같이 보시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는 눈과,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주님의 제자들을 보는 눈이 같으냐? 다르다.
본문에서 말하듯이 신앙 사상적인 원수는 결코 멀리 있지 않다. 한 사람이던, 열 사람이던, 천 사람 만 사람이던 원수는 언제나 가까이에 있다. 우리 기독자들은 자기의 원수를 볼 때 자기 주관성에서 원수를 보지 말고 객관의 입장, 즉 하나님의 입장에서 원수를 봐야 한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봐야 한다. 자기의 육적인 감정으로 원수를 보면 안 된다.
나는 하나님의 원수인가, 아니면 인간들의 원수인가? 아니면 나는 하나님에게도 원수이고 인간에게도 원수인가? 하나님에게도 원수이고 인간에게도 원수인 경우에는 어떻게 되느냐? 인간 앞에 바로 못 사니 하나님 앞에서도 원수가 된 것인지, 하나님 앞에 원수가 되니 인간 앞에도 원수가 된 건지? 후자다.
하나님을 모르면 결코 인간을 사랑할 수 없다. 오히려 인간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고 다른 길로 가게 한다. 그래서 사람을 인도하려면 자신부터 먼저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한다. 모든 면에서 이치가 그렇다. 이 사실을 깨달은 후에 원수관을 바로 가져야 옳은 기도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영원 자존 불변한 분이니 우리에게 향하신 당신의 소원 목적도 영원불변이시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도 질적 사건적으로 영원불변한 것을 주고자 하신다. 이는 진리성도 다윗의 주장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방세상은 자기 마음에, 자기 눈으로 보기에 안 좋으면 싫어하고 원수처럼 여긴다.
악한 자들이 왜 다윗 앞에, 하나님 앞에 무리로 형성이 되어 있느냐? 그것은 자기들의 육적인 주장을 이스라엘에게 펼치기 위해서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하나님 앞에 원수요 자기 앞에 원수라는 거다. 오늘날 믿는 우리들도 이것이 자기의 원수다. 선악과 따먹은 사고방식은 창세 이후로 마지막까지 모든 믿는 사람의 원수가 되는 거다.
오늘날 우리교회에서 가르치고 듣는 것이 창세 때의 교인이나 마지막 시대의 교인이 들을 때도 ‘아멘’이 되어야 한다. 달라지면 참 복음이 아니다. 하나님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것은 어느 시대에 언제 누구에게 외치든지 영원히 옳음이다. 그래서 우리 궁극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도 구약시대의 성도가 와서 볼 때도 ‘아 옳다. 하나님의 것을 가졌구나’ 라고 해야 하고, 마지막 시대의 교인이 와서 볼 때도 ‘옳다’ 이렇게 되어야 한다. 만일 구약시대의 성도는 틀렸다고 하고 신약시대의 성도는 옳다고 한다면 이것은 구약시대의 성도가 잘못됐거나, 아니면 신약시대의 성도가 잘못됐거나, 아니면 궁극교회의 교훈이 잘못됐거나, 아니면 셋 다 잘못된 거다.
하나님 앞에서의 원수는 다윗의 입장에서 볼 때도 원수인데, 그렇다면 하나님의 원수들의 입장에서 다윗을 볼 때 다윗이 자기들의 원수냐, 친구냐? 원수다. 다윗은 하나님이 보시는 것과 같은 눈으로 원수를 보는데, 원수의 입장에서 이런 다윗을 볼 때는 다윗이 자기들의 원수로 보이는 거다.
자신을 하나님의 본질로 기준을 세운 자는 누가 하나님의 원수인지를 알게 된다. 다윗의 원수들은 세상과 함께 불타지고 썩어질 것을 주장하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외친다. 이는 오늘날 거짓된 교회의 주장과 똑같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원수요, 다윗의 원수요, 지금으로 보면 우리 궁극교회의 원수가 되는 거다. 오늘날 유형교회 안을 보면 이런 원수들이 하나님 앞에 무리로 되어있다. 악한 사상을 가진 이런 자들도 다 성경을 들고 있다. 이처럼 세상 속화된 거짓 교회들은 세상에 속한 것만 달라고 하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영원한 것은 받지 않고 부정을 한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것을 받는 건데, 하나님의 영원한 것을 받으면 어떻게 되느냐? 사람이 지식적인 면에서, 지혜적인 면에서, 신적 도덕성적인 면에서, 능력성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덧입게 된다. 자기가 영원한 하나님의 것을 받으면 이해타산 평가성을 따지는 면에서 영원한 것을 놓고 따지게 된다. 이해타산 평가가 이렇게 나간다. 반대로 세상 것을 받으면 매사에 임시성적인 판단이 되고, 물질성적인 것을 취하게 되고, 눈에 보이는 것, 큰 것을 찾게 된다.
오늘날 교회 안을 보면 하나님과 성도들의 원수가 많은데, 첫째는 세상에 속한 것을 믿음으로 이뤄야 만이 신앙이 좋은 것이라고 하며 물질적 신앙으로 떼를 지어 나가고 있는데, 이것은 영적 이스라엘로 자라야 할 교회들을 완전히 세상 쪽으로 무너뜨리는 거다. 이건 하나님 앞과 성도들 앞에 원수 짓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교회를 위한다고 그러는 거겠지만 진리 이치적으로 보면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 원수 짓이다. 왜냐? 사람이 망가지고 있으니까. 이런 세속화된 신앙사상들이 마지막 시대의 교회 안에서 주체가 되어 자타의 구원을 죽이고 있다. 누가 이런 짓을 하느냐? 유형교회가 세상성을 자랑하면서 이런 짓을 하는 거다.
두 번째는 우리가 역사계시로 보면 구약시대 때에 이스라엘 안팎에 원수들이 많았는데, 애굽군대가 출애굽 한 이스라엘을 죽이려고 뒤로 따라붙었다. 또한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선동하고 주장을 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이 다 이스라엘의 원수인데, 애굽인인 원수가 있고, 광야에 나와 있을 때 이스라엘 안에서도 원수가 있었다. 이게 뭘 말하는 거냐? 오늘날도 같은 기독교인이면서 십자가 달아놓고 교회간판 걸어놓고 교회 안에서 세상을 외치는 것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 중에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한 것과 같은 짓들이다. 이건 하나님 앞에 원수다.
세 번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한 땅으로 열심히 올라가고 있는데 앞으로 가지 못하게 하느라고 중간에서 가는 길을 가로막은 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전혀 이방인들이었느냐? 야곱의 형 에서의 후손인 에돔족이 가로막았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런 일이 많다. 이것은 영적 이스라엘의 원수다.
네 번째는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든 것이나,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나, 모세의 말을 믿지 않은 것이나, 이방인의 말을 쉽게 믿어준 것이나, 열두 정탐꾼 중에 믿음 없는 열 정탐꾼의 말을 믿은 것이나, 우상을 믿는 여자들을 아내로 데려온 것 등등 이 외에도 수없이 많지만 이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원수가 된 성질들이다. 영의 눈으로 보면 자신이 알던 모르던 원수 짓을 하는 자들이 기독교 안에, 교회 안에, 가정 안에, 더 좁히면 모두 각자 자기 안에도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은 일어나사 원수를 흩으시며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원수를 흩어지게 하고 도망가게 하려면 누가 일어나셔야 하느냐? 하나님이 일어나셔야 한다. 하나님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셔야 된다는 거다. 이런 역사가 구약 때 보면 하나님께서 적들이 이스라엘을 두렵게 만든 것,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게 한 것, 서로 싸워서 둘 다 망하게 만든 것, 하나님의 이적과 기사로 적들이 도망가게 한 것, 이스라엘을 치러 왔다가 개인적인 자기 일로 물러가게 만든 것 등등 많다.
교훈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런 역사들은 지도자가, 성도가 진리의 횃불을 높이 들 때 일어나는 거다. 진리이치, 생명이치, 도덕이치, 이게 진리생명의 말씀인데, 이 진리이치의 말씀만이 사람의 정신과 사상과 목적과 방향과 성질과 성격이 구별이 되고 분별이 됨으로써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은 물러가게 하고, 고치게 하고, 바로 잡게 한다.
성도가 진리이치의 기치를 높이 드는 게 하나님을 높이 드는 거다. 하나님이 일어나시게 하는 거다. 하나님의 역사가 주권적으로 일어나게 하는 거다. 하나님의 본질의 것이 나오지 않으면 이질은 도망가지 않는다. 그러면 이질이 뭐냐? 세상운동을 함으로써 하나님과 성도 앞에 원수 짓을 하는 게 기독교의 이질운동이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어떤 이적과 기사로써 원수를 흩으신 일이 있는데, 이것을 교훈적은 측면으로 보면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과 성도들의 원수가 물러가게 하려면 말씀을 선포할 때 뚜렷한 진리이치, 생명이치, 신적인 도덕이치가 나와야 한다. 그래야 빛이 비취면 흑암이 물러가듯이 그런 성격 성질이 물러가는 거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목사님들이 바로 하자고 금식기도도 하고 철야기도도 하는데, 사람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게 하려면 교인들이 바른 것을 잡도록 해야 한다. 바른 것을 잡지 못하면 바로 나갈 수 없는 거다. 성경을 통해 옳고 그름을 볼 수 있는 진리의 빛을 받아야지 금식기도를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2절: ‘연기가 몰려감 같이 저희를 몰아내소서. 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 사람이 정체되어 있는 연기 가운데 서 있으면 눈이 따갑고 눈물 콧물을 흘리게 된다. 유독한 연기가 공기에 섞여서 사람의 폐 속으로 들어가면 사람이 죽는다. 연기 가운데서 고통 중에 있을 때 이 연기 속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없다.
연기는 손에 잡히지도 않고 야단을 친다고 해도 달아나지도 않는다. 연기는 맑은 공기에 의해서 도망을 간다. 그런 것처럼 하나님 앞에 거짓되고 악한 성질이 정화가 되는 것은 오직 진리생명의 말씀의 바람밖에 없다. 교회 안의 비진리적 종교적 사상, 물질성적 세상주의, 인본주의 신앙사상들이 물러가게 하는 것은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신조척도, 신본주의, 신정통치라야 한다. 교회에서 인본주의 사고방식으로 가르치면 성도들은 영적인 면에서 자라지 못하고 그 머리는 썩는다. 그러면 이 교회는 마귀의 놀이터가 되고 만다. 교회는 진리의 신선하고 맑은 바람이 불어야 한다.
‘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 ‘밀’이 뭐냐? 불 켜는 초를 말한다. ‘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라고 하는 것은 양초가 불에 녹아서 형체가 없어지는 것처럼 악인은 하나님 앞에서 형체도 없이 사라진다는 거다. 여호와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한 분인 고로 죄인은 절대로 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거다. 즉 하나님 앞에 인간 자기의 존재성은 없다. 인간은 자기의 존재성이 하나님 앞에 나타나도록 지음을 받았음에도 악인이 됨으로써 자기의 존재성이 없다는 거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존재성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이냐? 진리와 생명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본질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의 온전한 사람으로 된 것이 없다는 걸 말한다. 즉 사람이 망했다는 거다. 우리는 사업이 망한 것만 보지 말고 사람 자체가 망한 것을 유심히 볼 줄 알아라.
다니엘의 세 친구는 칠 배나 뜨거운 풀무불 속에 들어가서도 그들의 신앙인격과 성품의 형체는 불에 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하나님의 원하심대로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의 사람으로 그대로 나타났지 사람이 망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 보면 세상에서 잘 살고 못 살고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사람 자체가 망한 사람이 많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 사람 망한 게 너무나도 많다.
예수 믿는 사람이 자기의 시간성, 자기의 정력성, 재산성, 투자성, 자기의 일생을 어디에 다 낭비를 했느냐? 사람이 인격 면에서 사람 자체가 망한 것을 모른다면 짐승과 다를 게 없다. 이러면 참 인간을 어떻게 알겠느냐?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되면 하나님의 원수가 누구인지 알게 되고, 또 자기의 원수가 누구인지 알게 되고, 사람이 망한 사람인지 성공한 사람인지 알게 된다.
예수 믿는 우리는 진리를 기준으로 하나님의 온전의 성품을 세워놓고 사람이 성공하고 망한 것을 봐야 한다. 세상만사 모든 일은 사람이 만들어지는 면으로 들어가 있다. 매사가 하나님의 성품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면으로 들어가 있다. 세상사람들은 이것을 모른 채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것으로 뭘 자꾸 만들려고 한다. 그래서 교회의 거짓된 인도자들이 자꾸 변질될 것에 신경을 쓰게 하고 그걸 이루라고 한다. 이건 못 쓴다.
우리가 매사를 사람이 만들어지는 면으로 들어가면 다른 것은 따라오는 거다. 장사를 할 때 사람에게 신경을 쓰고 서비스를 잘 해 주면 많은 사람들이 이 가게를 찾게 되는데, 그러면 돈은 사람의 주머니에 들어있기 때문에 돈도 같이 따라 오게 된다. 이게 장사를 잘 하는 거다. 따라오도록 만들어야 사람이 힘이 덜 드는 거지 자기가 따라다니게 되면 그 인생은 힘든 삶이 된다. 이치를 볼 줄 알아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