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시68:8-11)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

열려라 에바다 2025. 5. 28. 08:49

68편 8절-11절: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며 저 시내산도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진동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산업이 곤핍할 때에 견고케 하셨고 주의 회중으로 그 가운데 거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 주께서 말씀을 주시니 소식을 공포하는 여자가 큰 무리라.


8절: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며 저 시내산도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진동하였나이다.’ 시내산에서 되어진 일을 말하는 것인데, 이 일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려고 임하시는 모습이다. 하늘이 떨고 땅이 진동하는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의 깊이와 무게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당신의 전 인격을 기울여서 말씀을 주심이 느껴진다. 참으로 엄하신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 이후로 마지막 날까지 영적인 참 이스라엘이 듣기 싫고 받기 싫다고 해서 대적하며 받을 말씀이 아니다. 농담으로 여기고 장난을 치면서 받을 말씀이 아니다. 그냥 목적 없이, 각오 없이, 결심 없이 받을 말씀이 아니다.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 들어있던 우리의 구원성취를 위해 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생사를 걸고 전 인격을 기울여서 받을 말씀이다.


하나님 당신의 전 인격을 기울여서 당신을 두고 맹세하며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이 어찌 받을 마음도 없이 받겠느냐? 창세 이후로 마지막 그 날까지의 영적 이스라엘이 받기 싫은 데도 할 수 없이 받는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면 주님께서 이 사람의 마음을 모르시겠느냐? 성도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심판이 뒤따르는 거다.


선민 이스라엘이 광야를 거쳐서 약속의 땅으로 갈 때 이 발걸음을 막으려고 무엇이 나타날 런지 모른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순종하여 가는 그들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이스라엘 앞서 나가면서 하늘과 땅을 진동시켜서 모든 악한 자들을 물리치셨다. 또한 이스라엘이 전쟁을 할 때 원수들이 두려워서 벌벌 떨게도 하셨고 간담이 서늘하게도 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이스라엘을 지키고 보호하고 도우셨던 그 분께서 오늘날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들을 위해 같은 일을 하신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가는 길을 방해하는 악인들로 하여금 왜 그런 마음을 갖게 하셨을까?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도 만드셨고 오장육보 사지육체를 다 만드셨다. 그리고 이해타산 평가를 할 수 있는 지식도 넣어주셨고 희로애락도 넣어주셨는데, 이런 존재로 만들어진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 이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해 주시고, 이런 성도를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그 마음을 두렵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다.


인간이 죄를 지으면 그 마음이 어떻게 되느냐? 평소처럼 기분이 좋으냐? 두려워 떨기 시작한다. 인간의 본성이 이렇게 되어있다. 그런데 세상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죄를 짓지 않고 평범하게 사는 것이 인간이 바로 사는 것으로 알기 때문에 자기가 일반적인 죄를 안 지으면서 일반적인 사고방식으로 살면서 자기의 생각과 마음이 하나님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인지 알지 못하고 덤덤하게 산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일반적으로 아무리 양심적으로 바로 살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고 정신과 사상이 세상 쪽에 붙어있으면 이 자체가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자기의 마음이 세상의 풍파와 함께 놀고 있으면 이 자기는 세상과 가까워진 증거가 된다. 자기 마음이 하나님께로 들어가 있으면 많이 들어가 있을수록 세상에서 아무리 물결이 요동을 칠지라도 무슨 상관이냐? 하나님께서 나의 이룰구원을 위해 그런 것을 동원하시는 것인데 내가 왜 그런 것에 겁을 내겠느냐? 말씀에 굳게 서 있는 사람일수록 세상의 풍파가 심할수록 말씀을 더욱 더 강하게 붙잡게 되고, 그런 것에 요동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말씀을 붙잡지 않는 신앙은 세상바람에 요동되게 되어있다. 생계문제의 걱정 근심으로 마음이 요동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사건 환경을 몰아붙여서 성도의 마음이 어떻다고 하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신다.


부모들은 자식을 우상으로 삼지 말아라. 자식을 믿지 말아라. 자식에게 기대지 말아라. 오직 신앙 믿음으로만 나가라. 그러다 보니 자식도 이렇게 나가는 부모를 따라간다면 이 가정에서는 부모와 자식 간에 문제가 별로 없다. 그러나 부모가 자식에게 등 기대고, 돈에 등 기대고, 직장에 등 기대며 살다가 사건의 바람이 불어와서 등 기대고 있던 것들이 다 무너지면 어떻게 되느냐? 같이 넘어진다.


우리 기독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앞서시고 뒷서시고 하면서 인도와 보호로 이끌고 계시는데 무엇을 보고 무서워하느냐? 육에 속한 것이냐, 영에 속한 것이냐? 무엇을 보고 염려하느냐? 아내가 무서운가? 남편이 무서운가? 자식이 무서운가? 자기가 진리신앙을 가졌다면 왜 사람을 보고 무서워하느냐? 홀아비가 될까봐 무서우냐? 과부가 될까봐 무서우냐? 밥을 못 먹을까봐 무서우냐? 사람 사는 세계에서 ‘뭘 먹고 마실까?’ 하는 면에 겁내지 말아라. 왜냐? 사람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일거리도 많다는 증거다. 우리는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무서워해야 한다.


9절: ‘하나님이여,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산업이 곤핍할 때에 견고케 하셨고.’ 일반 상식적으로 보면 하늘로부터 비가 오지 않으면 땅은 황폐해지고 사람들은 고통을 겪다가 굶어죽고 말라죽게 된다. 사람들은 평소에는 비가 오면 이 비를 맞지 않으려고 우산을 들고 다니지만 극심한 가뭄 중에 비가 오면 좋아서 일부러 비를 맞으며 춤을 춘다.
비가 흡족히 내리면 땅은 식물이 잘 자라게 되고 사람들의 생활이 풍부해진다. 그러나 하늘에서 비가 오지 않으면 땅은 메마르고 그 지역 사람들은 그만큼 고통이다. 하늘로부터 비가 내려야 사람들의 생활과 마음이 풍요로워지듯이 신앙 면에서도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내려와야 인간의 마음이 풍부해진다. 자기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성품적으로 풍부해지지를 않는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사람들이 박사가 되면 마음이 풍부하냐? 돈을 잘 벌고 많이 벌면 마음이 풍부하냐?


간혹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로 사는 사람이 자기가 가진 많은 돈을 사회에 환원하는 일이 있는데, 그러면 사람들이 이 사람을 칭찬을 한다. 그런가 하면 새벽 같이 시장에 나가 노점을 해서 힘들게 번 돈을 세상에 내어놓는 일도 있는데, 이럴 때는 사람들이 더 큰 칭찬을 한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넓으냐?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받아야 마음이 풍부해지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증거가 뭐냐? 자기의 깨달음의 풍부성은 생활로 나타나게 되어있다. 즉 사건에서, 살아가는 생활에서 언행심사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서서히 달라지게 되는데, 이것이 은혜를 받은 증거다. 이런 면에서 우리 믿는 사람은 모든 지식적인 면에서 개발을 하고 풍부해져야 한다. 어머니 태속에서 나올 때 가지고 있던 정신 사상을 하나님의 정신으로 다 바꿔나가야 한다.


‘주의 산업이 곤핍할 때에 견고케 하셨고.’ ‘주의 산업’이란 무엇이냐? 영적 이스라엘로서 영인성장이 잘 되어가는 것을 말한다. 이 주의 산업은 곧 신실한 종들의 산업이기도 하면서 성도 개개인의 자기 산업이기도 하다. 이것이 풍부하게 되어나가야 한다. 그러면 이 산업을 누가 신경을 쓰느냐? 본문에 뭐라고 하느냐? 하나님께서 흡족한 비를 주셨다고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신경을 쓰시고, 주의 신실한 종들이 염려 걱정을 하며 신경을 쓰는 거다.


‘주의 산업이 곤핍할 때에’ 라는 것은 영적인 진리이치 면에서 깨달음이 없고, 가난하고, 메마르고, 힘이 없어서 비실거리는 것을 말한다. 신앙 면에 풍부한지 메마른지 하는 것은 자기의 사고방식에서 나타나게 되어있다. 이건 못 속인다. 예수 믿는 사람은 웬만하면 생활 면에서는 아주 부지런한데 신앙 면에서는 풍부한 건지 메마른 건지를 자기 스스로 안다.


‘주의 산업이 곤핍할 때에’ 라는 것은 영적인 진리이치의 깨달음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데, 그 심령상태는 메마르고 힘이 없다. 신앙생활에 힘이 없다. 정신 면에 힘이 없다. 영적인 면에 파워가 없다. 이렇게 되면 표면적으로 오만 불평불만이 나온다. 성도가 이 비실거림을 깨닫고 생명과 진리의 말씀을 갈망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깨달음의 단비를 흡족하게 내려주신다. 이것은 영이 바로 서는 은혜요, 강건해지는 은혜요, 어떤 상황에서도 성장하는 은혜요, 속 성품이 주님을 닮아지는 은혜다.


공부하는 곳(주-김경형 목사님이 신학생 및 교역자를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에 와서 이 교훈을 받은 목사님 중에는 은혜를 받고서 마음이 뭉클해졌다고 하는 분도 있고, 어떤 분은 은혜를 받고 밤새도록 울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여기서 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별로 느낌이 없을 거다. 그러나 우리는 성화구원 이룰구원 차원에서 자기의 성격이나 성질이나 신앙 면의 색깔이나 냄새까지 알고 고치는 데까지 들어가야 한다.


사람이 진리의 말씀의 깨달음을 받으면 먼저 자기 안에서부터 믿음이 견고히 서게 된다. 이건 옳은 거다. 자기의 속사람이 바로 서야 사람이 지탱이 되는 거지 속사람이 바로 서지 못하면 허우대가 좋을지라도 힘이 없다. 사람은 정신 면에 힘이 있어야 한다. 이 면이 바로 서는 게 하나님의 원하심인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 산업에 신경을 쓰신다. 따라서 믿는 우리는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해서 자타 속에 주의 산업을 견고케 해야 한다.


10절: ‘주의 회중으로 그 가운데 거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 ‘주의 회중’이란 교회를 말한다. 교회는 영적 이스라엘이라도 한다. 왜 이스라엘이냐? ‘이스라엘’이란 ‘하나님이 너희들을 다스릴 것이다’ 라는 뜻인데, 이 교회는 주님이 만드셨고 하나님의 인도가 들어있다. 그래서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거다.


‘주의 회중으로 그 가운데 거하게 하셨나이다.’ 주의 회중으로 그 가운데 거하게 하셨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가 어디냐? 하나님의 특수한 은혜를 받고서 신앙 믿음이 견고히 선 그들 가운데 같이 거하게 한다는 말이다. 9절의 ‘하나님이여,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산업이 곤핍할 때에 견고케 하셨고’ 라는 말씀의 연속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특수한 은혜를 받고 신앙 믿음이 견고히 선 자들 가운데 거하게 하신다고 하셨으니 자기가 견고한 신앙 믿음을 가지길 원한다면 하나님의 진리이치, 생명이치, 도덕이치를 무시하지 말고 하나님의 특수한 은혜를 받는 가운데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기가 강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를 분별하고 목사님의 교훈을 분별해야 한다.


‘하나님이여,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다고 하는데, 육신생활이 가난한 것은 안 믿는 사람도 다 알기 때문에 구태여 말할 필요가 없는 거고 우리가 영적인 진리이치 면에서 깨닫지 못함을 가난으로 여기는 자가 되어야 주의 은택을 받을 수 있는 거다. 자기가 육적인 면에 가난함을 느끼는 자는 육적인 것을 가지길 원하는 거고, 영적인 면에 가난을 느끼는 자는 영적인 것을 가지길 원한다. 주님께서 가난한 자에게 은택을 준비했다는 것은 영적인 면에 갈급성을 느끼는 자를 말한다.


세상인간들이 원하는 은택이 아니라 주께서 주시기를 원하는 은택을 받고 싶으냐?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을 받고 싶다는 면에서 가난한 거냐? 그렇다면 영적인 면에 가난성을 느껴야 할 게 아니겠느냐? 믿는 사람이 주께서 주시기로 준비된 모든 축복을 받지 못하면 어떻게 할 거냐? 아닌 말로 주님께서 ‘너 배가 고프냐?’ 라고 할 때 ‘아니요’ 라고 대답을 한다면 주님께서 먹을 것을 주시겠느냐? 영적인 면에 갈망자라야 성경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마음 속으로 주의 은택을 원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예수 믿는 나는 육적인 가난성과 영적인 가난성 중에 어느 것을 자기의 참 가난성으로 여기느냐? 주님께서 주시려고 늘 준비되어 있는 것에 가난성을 느끼고 있느냐?


11절: ‘주께서 말씀을 주시니 소식을 공포하는 여자가 큰 무리라.’ 어떤 자에게 말씀을 주시겠느냐? 영적인 면에 가난성을 느끼는 자에게 말씀을 주신다. 깨달음의 말씀을 주신다. 이 말씀은 천국복음의 소식이요, 영적 이룰구원의 소식이요, 인간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에 관한 소식이다. 이 소식은 주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받지 못하고 전하지 못한다.


세상에는 여러 종교가 있지만 인간 자기를 만드신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가르치는 종교는 기독교 외에는, 성경 외에는 없다. 그럼에도 기독교인이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를 만드신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모른다면 어떻게 바로 믿을 것이며 어떻게 전할 거냐?


우리가 ‘예수 믿으십시오’ 하며 복음을 전할 때는 인간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이 들어있는 말이라야 한다. 이게 아닌 ‘예수 믿으십시오. 예수 믿으면 병 낫습니다. 부자 됩니다’ 라고 하는 것은 인간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이 없는 말이니,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마귀소리가 되는 거다. 마귀가 이런 말을 한다. 이치적으로 가르면 금방 드러나는 건데 구별할 줄을 모르니까 예수 믿으면 부자가 된다고 하는 말에 ‘아멘 아멘’ 하는 거다.


주님께서 주신 말씀은 불에 타질 죄악 된 세상의 것을 구하고 건설하라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전하는 자가 이런 것을 전한다면 이 말은 주께서 주신 말씀이 아님을 단정을 내려야 한다. 성경을 들고 ‘세상에 관한 것이 어떻고 저떻고’ 한다면 이건 주님의 종이 아니라 마귀가 보낸 종이다.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당신의 종으로 세우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했으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역사가 사람을 세우는 거다. 이 사람이 주님의 종이다. 성경구절을 육신생활의 조건, 물질의 조건, 세상성공에 이용하는 종들은 거짓 종이요, 교회로 하여금 심판거리를 장만케 하는 악령의 운동으로 단정을 지어야 한다.


‘소식을 공포하는 여자가 큰 무리라.’ 앞 절의 ‘주의 회중으로 그 가운데 거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 라고 한 말씀이 연속되는 되는 것인데, 많은 여자들이 크고 강한 말씀을 받았다는 거다. 즉 가난한 자가 주의 은택을 충분히 받았다는 거다.


우리가 남자와 여자의 성격을 일반적으로 고찰해 보면 남자의 성격은 돌격성, 정복성, 교만성, 포악성, 자존심 등이 상당히 강하고, 여자들은 순종성, 겸손성, 연약성, 감정과 흥분에 예민하다. 그런데 본 절에서 큰 무리의 많은 여자들이 주의 말씀을 받았고 전했다고 하는데, 글자 그대로 보면 남자들은 왜 말씀을 못 받았을까? 전하는 무리가 여자의 큰 무리들인데 남자들은 왜 말씀을 안 받았을까?


많은 무리가 말씀을 받은 것을 보면 주님께서 주실 은혜의 분량이 무한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두 번째는 영적인 면에서 가난성을 느낄 줄 아는 자가 받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남자들 속에 무엇이 들었기에 주의 말씀을 받지 못했을까? 자기가 잘 만 하면 받을 수 있는 말씀을 못 받았다면 자기에게 무슨 힘이 있을까? 구약의 여선지 드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니 군대를 만들어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해 냈다. 아무리 연약한 자라도 주의 말씀을 바로만 받으면 이처럼 강해지는 건데, 악의 지배로부터 사람을 구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진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