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시68:29-35)그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 능력이 하늘에 있도다.

열려라 에바다 2025. 6. 23. 13:02
(시68:29-35)그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 능력이 하늘에 있도다.
 
궁극이추천 1조회 3725.06.22 09:06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68편 29절-35절: 예루살렘에 있는 주의 전을 위하여 왕들이 주께 예물을 드리리이다 갈밭의 들짐승과 수소의 무리와 만민의 송아지를 꾸짖으시고 은 조각을 발아래 밟으소서 저가 전쟁을 즐기는 백성을 흩으셨도다 방백들은 애굽에서 나오고 구스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히 들리로다 땅의 열방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할찌어다(셀라)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발하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너희는 하나님께 능력을 돌릴찌어다 그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 능력이 하늘에 있도다 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힘과 능을 주시나니 하나님을 찬송할찌어다.


24절 이후의 사건은 법궤를 메어 올리는 사건인데, 이 사건 속에는 우리의 이룰구원의 이치가 구석구석마다 구구절절이 박혀있다. 우리는 영의 눈을 가지고 이것을 발견해서 자기 신앙의 성격 성질을 깨달아 현실에서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본질적 신앙의 대열 속에서 걸어가야 한다.


29절: ‘예루살렘에 있는 주의 전을 위하여 왕들이 주께 예물을 드리리이다.’ 여기에 있는 왕들은 영능의 실력적 왕들이다. 이 왕들의 실력은 그 인격과 그 성품이 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된 거다. 진리로 말미암아 된 거다. 이 왕들은 주로부터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기에 감사한 마음에서 자원적 자유적으로 주께 예물을 드리는 거다.


귀한 은혜를 받았는데도 예물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도 있을까? 예물은 최고의 가치 있는 것을 발견했기에, 영원한 것을 발견했기에 좋고 좋아서 드리는 거다. 동방박사들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만났고 보았기에 마음이 열려서 예물이 나왔다. 이 이치를 알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이런 예물을 받으신다. 그러니까 예물에 중점적 강조가 아니라 예물을 드릴 수밖에 없는 신앙의 마음상태가 중요한 거다.


동방박사들이 아기예수께 드린 예물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인데, 황금은 영원히 변질이 없는 것을 상징한다. 그러니까 이들은 변치 않는 것을 발견했다는 감사함에 황금을 드린 거다. 이들이 드린 예물이 그들의 신앙의 질을 말하는 거다. 그래서 우리는 박사들이 주님을 만난 감화 감동으로 드린 예물을 통해서 주님 속에 들어있는 신앙의 질도 보는 거다. 그러니까 동방박사들이 주님께 세 가지 예물을 드린 것은 세 사람의 감사의 표시이면서 또한 주님에게 들어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니, 알고 보면 이들은 주님의 것을 받아서 주님에게 예물로 드린 거다.


우리는 동방박사가 드린 세 가지의 예물을 보면서 이 세 가지 예물의 의미의 신앙을 한꺼번에 가져야 한다. 주님을 발견한 자는 이 세 가지 예물이 의미하는 신앙성질을 가지는 건데, 한 마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정신과 사상을 가지게 된다. 인간 자기가 이 주님으로부터 귀한 은혜를 받았다면 예물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 없을까?


하나님께서 세상 물질계를 만드심이 나의 구원을 위해 만드심이었고, 이 땅에 많은 사람들이 살게 하심이 나의 구원을 위함이었고, 세상만사가 돌아가는 모든 것이 나의 구원을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리생명의 말씀을 주심이 나의 구원을 위함이었고, 모든 사건과 환경과 존재를 교체시키심도 나의 구원을 위함이었고, 어찌 이것뿐이겠느냐? 하나님의 이 모든 은혜를 아는 자는 자기 욕심만 부리는 이기주의로 살지 않는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주님을 사랑해야 마땅한 거고, 또한 이 주님을 전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주님의 진리사상을 사람에게 써먹어야 하는데, 이러려니 사람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거다. 이렇게 사는 삶이 곧 주님께 드리는 예물이기도 한데, 주님께 드리는 예물은 하나님의 은혜를 연속적으로 받을 수 있는 마음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좋은 진리를 사람에게 안 써먹고 땅에 묻어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진리를 땅에 묻어버린다는 것은 자기가 깨달은 진리를 전하지 않는 것도 진리를 묻어버리는 거고, 세상소원 목적으로 예수를 믿는 것도 진리를 묻어버리는 거고, 예수이름으로 종교적 세상을 만들자고 하는 것도 진리를 땅에 묻는 거다.


안 믿는 사람들 중에는 자기 위주로 살다가 어떤 계기로 자기의 물질도, 노력도, 시간도 들여가며 어려운 사람들에게 봉사를 하니 마음이 기쁘다고 한다. 이건 일반적인 은혜다. 기쁘고 즐거운 게 은혜다. 아닌 말로 이런 사람이 마음에 병이 있겠느냐? 이러지 않고 자기 혼자 ‘꽁’ 하고 있으면 머릿속에 오만 잡병이 생긴다. 이러면 사람이 자꾸 쪼그라진다. 귀신들리기 알맞다. 사람이 귀신이 들리면 사람을 자꾸 멀리 한다. 만일 귀신들린 사람이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면 이건 돈을 뺏어가려는 수작일 수도 있다. 무당이 이런 짓을 한다.


사람의 병 중에 정신적인 병이 제일 큰 문제다. 그러니 믿는 우리는 항상 정신 면에 자기를 쳐다보며 자기 마음이 말씀에서 빗나가지 않게 해야 하고, 자기 스스로 못 고치는 것은 주님께 고쳐달라고 기도를 하라.


30절: ‘수소의 무리와 만민의 송아지를 꾸짖으시고 은 조각을 발아래 밟으소서. 저가 전쟁을 즐기는 백성을 흩으셨도다.’ ‘갈밭의 들짐승’이란 어떤 짐승일까? 악어가 이런 곳에 산다. 본 절의 배경을 보면 당시에 애굽의 나일강에 악어가 살았다. 이 악어는 난폭한 야생동물이다. 즉 사람의 난폭한 성격과 성질을 말한다. ‘수소의 무리’란 뿔을 가진 짐승들이다. 즉 세상의 권세와 권력을 가진 단체를 말한다. ‘만민의 송아지’란 어느 짐승에 잡아먹힐 런지도 모른 채 들판에서 제 멋대로 뛰어다니는 송아지를 말한다. 즉 말씀의 견제가 없으면 함정에 빠지기 쉬운 세상인데, 이런 세상에 사는 성도가 겁도 없이 자유분방하게 사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보면 들판의 짐승들이 무리를 지어 모여 있으면 사자나 호랑이가 함부로 근접하지 하지 못한다. 그러나 제 잘났다고 외톨이로 떨어져 있거나 병이 들면 천적에게 금방 잡아먹힌다. 이는 천적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의 표적이다. 신앙사상 면에서도 마귀의 표적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다. 예수 믿는 것을 우습게 생각하다가는 자기의 정신 사상의 사고방식이나 일상생활의 태도에서 자기의 언행심사대로 자기가 되돌려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진리신앙 사상으로 정신이 깨어있는 사람은 자기를 단속한다.


‘수소의 무리와 만민의 송아지를 꾸짖으시고.’ 하나님께서는 진리신앙에서 벗어나 제 마음대로 사는 자들을 꾸짖는다는 것인데, 이는 바로 살라는 책망의 말씀이다. 성도들에게 책망의 말씀은 교회에서 진리의 교훈으로도 나오지만 때때로 고통스런 사건으로도 온다.


‘은 조각을 발아래 밟으소서.’ 돈으로만 소원 목적하고 사람보다 돈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 자들을 밟으라는 것인데,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런 사람들은 가치 없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사람의 가치는 인격에 있는 것인데 사람이면서도, 예수를 믿으면서도 인격의 성장이 없다면 무슨 가치가 있을까? 결국은 짐승과 같아진다. 짐승보다 못해진다.


‘저가 전쟁을 즐기는 백성을 흩으셨도다.’ 전쟁을 즐기는 사람도 있느냐? 말하자면 사람 죽이기를 즐기는 자들이 있느냐? 이유를 만들어서 싸움을 걸고 싸우고 죽이고 하는 백성은 하나님께서 흩어버리신다. 이런 자들은 늘 자기들끼리도 싸우고, 반대편의 사람도 죽이고, 결국은 자기들의 나라도 서지 못하고 멸망을 받는다.


일반적으로 사람마다 일반 도덕성이 좋아지면 그 사회는 풍요로워지고, 교회들이 영적 도덕성이 성장이 되면 영육 간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 그러니 믿는 우리는 결국은 밟히고 멸망을 받아 흩어질 자들을 돋보거나 부러워하지 말고, 따라가지도 말고, 합류하지도 말고, 손을 잡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세상 육적으로 보면 그들이 무척 매력 있게 보이니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으냐?


31절: ‘방백들은 애굽에서 나오고 구스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히 들리로다.’ 애굽의 방백이라면 애굽에 그대로 있을 것이고, 이스라엘 방백이라면 애굽의 성질에서 나와야 하는데, 그럼에도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안 나오고 있으면 애굽인들이 애굽으로 끌고 가게 되고 하나님의 재앙을 받게 된다. 애굽으로 끌고 가면 몇 가지 재앙을 받느냐? 열 가지 재앙을 받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은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소원 목적적인 면에서 애굽의 운동을 할 수 없는 거다. 교회라고 하면 이스라엘의 교회라야지 애굽정신의 교회가 된다면 이걸 교회라고 할 수 있느냐?


‘구스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히 들리로다.’ 구스는 애굽의 남쪽지방이고, 보석이 많이 나오고, 무역국이며, 강대국이다. 그러나 아무리 부요국이라 할지라도 애굽의 정신으로 살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즉 애굽이나 구스나 할 것 없이 이스라엘의 도움을 받고 하나님 앞으로 나오라는 말이다. 하나님을 향하여 신속히 손을 들라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곧 있을 것이니 이 심판을 받기 전에 신속히 하나님께로 나오라는 거다.


32절: ‘땅의 열방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할찌어다(셀라).’ 하나님께 찬송을 하는 열방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은 자들로 보여진다. 구원을 얻지 못했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향하여 찬송이 나오겠느냐? 영적이던 육적이던 구원을 얻는 것은 모두가 주님께로 말미암아 된다는 것을 안다면 주께 찬송을 할 수밖에 없는 거다.


33절: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발하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하늘들의 하늘’이란, 첫째는 물질계의 높은 하늘을 말하고, 두 번째는 신령계의 높은 차원을 말함인데,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란 수면에 운행하시면서 천지의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통치, 섭리, 진행을 하시는 만능의 능력의 주 하나님을 말한다.


이 하나님께 ‘왜 이런 역사를 하십니까?’ 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을 하실까? 1. 내가 심심해서 세상을 지었다? 2. 나는 만능의 능력자다. 그러니 하나님인 나에게만 경배하고 영광을 올려라. 안 돌리면 죽여버리겠다? 3. 너희들을 나처럼 닮게 해서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인격적 온전자로 만들어서 천국에서 실력대로 누리게 해 주겠다? 어느 거냐?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인간들이 죄를 지었다고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고 겁만 준다면 어떻게 이 분께 찬송이 나오겠느냐? 우리 인간에게 유익이 있어야 기쁘고 즐거워서 찬송이 나오게 된다. ‘주께서 그 소리를 발하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소낙비가 오려고 뇌성 벼락을 치면 그 소리가 웅장하다. 주님의 소리가 이처럼 웅장하다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시는 광경을 말하는 거다.


무슨 소리가 가장 크냐?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를 지으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의 소리가 얼마나 웅장한 소리인지? 이 소리를 인격적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인간 자기의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가르쳐 주는 소리가 벼락 치는 소리보다 더 웅장한 하나님의 나타나심의 말씀의 소리이다.


34절: ‘너희는 하나님께 능력을 돌릴찌어다. 그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 능력이 하늘에 있도다.’ 우리 인간은 받은 것이 있어야 돌릴 수 있다. 아무 것도 받은 것이 없으면 못 돌린다. 인간끼리도 그 누구로부터 혜택을 입어야 만이 하다못해 고맙다는 말을 하게 된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일반은총과 특수은총을 내리시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일반은총을 내리시고, 하나님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일반은총과 특수은총을 내리신다. 그런데 믿지 않는 자들이 특수은총을 받지 못하는 것을 인간 편에서 보면 이들도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특수은총을 받을 수 있는 건데 자기가 받기 싫어서 안 받는 거다. 사람이 하나님의 특수은총을 받으면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입게 된다. 이것은 신령계에 속하는 거고 영에 속한 것들이다.


하나님을 믿고 말씀에 순종을 하면 특수은총인 하나님의 지혜지식성이나, 하나님의 도덕성이나, 하나님의 능력성을 받게 되고, 이렇게 되면 영적인 면에서 기능과 지능 면이 영특해지고, 민감해지고, 민첩해지고, 민활해진다.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연마되어 있으면 사람이 굉장히 민첩해진다. 정신이 살았다 그 말이다. 미련하지 않다 그 말이다. 이렇게 되면 이성과 몸도 성화를 입게 된다. 정신이 거룩해지니 몸도 거룩해지는 거다. 이러면 사람이 고상해진다.


이것이 누구로 말미암아 되는 거냐? 주로 말미암아 되는 거다. 그러니 누구께로 영광을 돌려야 하겠느냐? 자기가 주님처럼 만들어진 것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니 이 자기를 놓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내가 당신 때문에 이렇게 잘 만들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내가 어떻게 이렇게 만들어졌겠나이까?’ 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 찬송이 되는 거다. 안 만들어지고 없으면 이런 게 나오지 않는다. 받은 게 있으니 찬송을 하든지 감사를 하든지 하는 거다.


‘그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 능력이 하늘에 있도다.’ 인간이 신령계와 물질계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고, 구원역사를 진행하시고, 세상인류를 심판하시는 전지전능하신 그 분의 위엄을 최대 최고 최상으로 표현을 한다고 해도 도리어 그 분의 위엄을 쭈그러뜨리고 만다. 하나님의 영광의 위엄을 인간이 뭘로 다 표현하겠느냐? 감히 할 수가 없다.


사람이 엄청나게 좋은 것을 볼 때 ‘좋다’ 라는 말을 해야 그 좋은 것이 제대로 표현이 되는 건지, 아니면 ‘와∼’ 라고 탄성만을 내품는 게 제대로 표현이 되는 건지? 굳이 어떤 말로 표현을 하는 대신 그냥 ‘와∼’ 라고 탄성을 지를 때 이 소리를 듣는 사람은 ‘얼마나 좋으면 저런 소리를 할까?’ 라고 하며 더 실감 있게 느끼게 된다.


구약성경에 보면 ‘셀라’ 라는 말이 있는데, 이건 매우 좋은 뜻인데도 교인들 중에 자녀의 이름을 ‘셀라’로 지은 것을 못 본 것 같다. ‘셀라’란 감탄사인데, 우리나라의 판소리를 듣는 사람이 어떤 말끝에 ‘좋다’ 라고 외치는 것처럼 앞에서 어떤 나쁜 것을 잔뜩 써 놓고 난 끝에 ‘셀라’ 라고 할 때는 한탄스럽거나 걱정스런 감탄사가 되는 거고, 앞에서 좋은 것을 써 놓고 끝에 가서 ‘셀라’ 라고 할 때는 기쁘고 감사함의 감탄사가 되는 거다.


‘그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 능력이 하늘에 있도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위엄을 이스라엘에게 많이 나타낼수록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위엄이 더 많이 감염이 되고 감화가 된다. 즉 이스라엘이 위엄이 있는 백성이 된다. 진리이치, 생명이치, 도덕이치를 가진 최고의 고상한 인격의 사람이 된다. 이 위엄은 하나님께서 알아주시는 위엄이다. 이것이 신의 성품을 덧입은 것인데, 신의 성품을 입은 자가 그 영광과 감사 찬송을 누구에게로 돌리겠느냐?


35절: ‘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힘과 능을 주시나니 하나님을 찬송할찌어다.’ ‘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성소가 있고, 이 성소에서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내신다. 선악과 따먹은 이방세계에서는 하나님의 위엄이 없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자기가 위엄이 있는 자가 되고 싶으냐, 천덕꾸러기가 되고 싶으냐?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성소가 있는 곳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위엄 있는 사람이 된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이 들어있다.


세상에는 천덕꾸러기 교회도 있다. 이게 무슨 말이냐? 세상소원 목적을 가르치고, 눈이나 뒤집고, ‘굴러 굴러’ 하며 자빠지고 넘어지고 하는 교회를 말한다. 이게 뭐하는 짓들이냐? 이런 데서는 사람이 위엄 있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교회라고 하는 건 그런 게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성소가 있는 데로 가야 한다. 그러면 어디에 성소가 있느냐? 역사적 위치적으로 보면 예루살렘에 있다.


구약에 보면 안식일 날 어디로 가서 예배를 했느냐? 예루살렘의 성소로 가서 예배를 했다. 이 말의 의미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있는 곳이라야 된다는 거다. 그러니까 성소란 어떤 곳이냐? 진리이치, 도덕이치, 생명이치가 있는 곳이요, 영과 육, 옛사람과 새사람, 영의 생각과 육의 생각이 분리가 되고 구별이 되는 곳이 성소다. 간판만 보고 교회라고 하는 게 아니다. 내용적인 면에서 신앙의 질을 봐야 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힘과 능을 주시나니 하나님을 찬송할찌어다.’ 성소로 통해 힘과 능을 받은 자는 자연히 찬송이 나오게 된다. ‘힘’이란 소유적으로 자기 사상화 되는 것이고, ‘능’이란 사람이 강해지는 거다. 그렇다면 사람이 무엇을 많이 가져야 강해지겠느냐? 세상에 속한 것이냐, 신령계에 속한 것이냐? 사람이 강해지려면, 능력자가 되려면 하나님의 성품, 즉 신적 지혜지식성과 도덕성과 능력성을 덧입고 진리이치 생명이치 도덕이치를 많이 가져야 한다. 이래야 힘이 있는 사람이 된다. 모르면 힘이 없다. 알아야 힘이 생긴다. 알아야 죄를 이길 수 있고, 세상을 이길 수 있고, 모든 악한 것을 정복할 수 있다. 옳은 것을 가져야 만이 정복을 할 수 있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