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시69:1)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열려라 에바다 2025. 7. 2. 10:45

69편 1절.

 

69편. 다윗의 시. 영장으로 소산님에 맞춘 노래.

 

1절: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다윗의 시. 영장으로 소산님에 맞춘 노래.

 

‘소산님’이란 ‘백합화’ 라는 뜻이다. 본 편은 성가대장의 지휘를 따라, 즉 성령님의 감화 강동을 따라 백합화 곡에 맞춰 부른 노래다. 악기들이 백합화처럼 생겼는지는 모르겠으나 광야에서 모진 비바람을 견딘 백합화일수록 더 진한 향기를 풍기듯이 진리의 성도가 거친 광야를 거치면서 자라나온 신앙의 향기를 노래하고 있다.

 

1절: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물들이 어떻게 영혼까지 들어오느냐? 물은 물질이고 영은 물질이 아닌데, 영혼까지 물이 들어왔다고 하는 이게 무슨 뜻이냐? 뭘 의미하는 거냐? 무엇이 자기 속에 흘러 들어오는 건지? 자기의 정신과 마음과 생각 속에 흘러 들어오는 것이 진리의 성도에게 위협이 된다는 것을 말하는 거다.

 

사람들이 ‘너 거기에 가서 놀지 말아라. 물든다’ 이런 말을 하는데, 무슨 물을 말하는 거냐? 상대의 정신이 자기의 정신과 마음에 감염이 된다는 말이다. 술 먹는 사람을 따라다니면 무슨 물이 흘러 들어오느냐? 먼저 술이라고 하는 정신이 들어오고, 그 다음에는 술을 먹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데, 먹고 싶다는 것은 벌써 자기 마음에 술이 흘러 들어온 거고, 이렇게 되면 그 다음에는 자기도 술을 마시게 된다. 사람은 항상 자기가 뭘 하고자 하면 먼저 자기 속에서 하고자 하는 정신이 움직이고, 그 다음에 몸이 뒤따라간다. 이걸 늘 생각을 하라. 그래야 자기를 다스려 나갈 게 아니겠느냐?

 

성도에게 있어서 육적인 고난과 영적인 고난이 있는데, 영육의 고난이 같이 들어오기도 하고 따로 들어오기도 한다. 신앙위주로 살려다 보니 육적인 고난이 따라오기도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려니 인정정실이나 여러 조건들로 인한 압박 같은 게 올 때 진리성도는 오직 영을 위한 목적으로 기도를 하고, 영인성장, 영의 사람, 속사람의 성품이 다치지 않는 쪽으로 나간다.

 

사람이 다치는 것이 몸을 다치는 게 있는가 하면 마음을 다치는 것도 있다. 자기의 정신이 살아있어서 뭔가 하고자 하는 의욕성이나 희망이 있을 때는 몸을 다쳐도 신체의 고난을 이길 수 있다. 그러나 사대육신은 멍청한데 마음에 상처를 입으면 시금치를 끓는 물에 데친 것처럼 기가 팍 죽어있기 때문에 그대로 꼬꾸라져 버린다. 그래서 사람에게 있어서 중요하고 심각한 것은 정신과 마음이다.

 

성경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힘 있게 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덧입으며 성장하게 한다. 이 성장을 능력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실력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진리성도는 영인성장을 위해 모든 사건을 헤쳐 나간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정신이나, 눈에 보이는 소원 목적, 즉 물질성적인 것을 목적으로 살게 되면 이게 없다. 인간이 사는 목적에 있어서 이런 물질성적인 것을 목적으로 하고, 없어질 것을 목적으로 하고 이를 위해 정신을 쓴다면 이 정신은 물질성적 성질이다. 이걸 본 절에서 ‘물’이라고 표현을 하는 거다.

 

물은 물질성에 속하는 거고 영혼은 신령성에 속하는 것인데, 즉 영은 영이고 혼은 혼인데, 여기서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믿는 사람이 이룰구원의 정신을 가지고 자기의 몸을 이를 위해 의의 병기로 써 나가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이 영혼은 신령성에 속한다. 질적으로만 보면 영과 영혼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혼합이 안 되는 거지만 신앙적으로 보면 얼마든지 이해가 되는 거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어야 되겠다.

 

예수 믿는 한 사람이 ‘내가 세상 것을 많이 가져서 부자가 되겠다’ 라고 하거나,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가져야 되겠다’ 라고 한다면 누가 이 말을 하는 거냐? 자기의 이성이 이 말을 하는 거다. 그러면 같은 사람이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가져야 되겠다’ 라고 하는 것은 어디에 속하는 거냐? 땅에 속한 거냐, 신령한 하늘나라에 속한 거냐? 신령성, 하늘나라에 속하는 거다. 따라서 이런 말을 하는 정신 사상 마음은 신령성에 속하는 거다. 반면에 ‘나는 세상 것을 더 많이 가져야 살 수 있고, 내 목적은 세상 것을 많이 가지는 거다. 세상의 명예 영광성을 가지는 거다’ 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을 하는 이성적 정신 사상이 물질성이냐, 신령성이냐? 물질성이다. 하나는 땅에 있는 것으로 들어가 있고, 하나는 하늘에 있는 것으로 들어가 있다. 하나는 물질성적 사상이고, 하나는 신령성적 사상이다.

 

믿는 사람은 그 사고방식이 땅에 속한 질과 하늘에 속한 질 중에 하나를 택하며 살아가는 건데, 눈에 보이는 사고방식, 눈에 보이는 이해타산으로 사는 것은 세상을 목적하며 사는 것이니, 이런 사람은 자기의 정신 사상이 물질성을 따라가는 거다. 그런가 하면 눈에 안 보이는 하늘나라의 신령한 것을 소원 목적하며 산다면 이 사람은 신령의 사람을 성장시키고 실력을 키우기 위해 물질의 것을 이용하고 응용하고 활용하게 된다. 이렇게 사는 것은 그 마음이 물질성에 빠지지 않고 자타의 구원에 이용 활용이다. 하나는 임시성을 위해 사는 거고, 하나는 신령성 영원성을 위해 사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이 땅의 정신, 물질적 사상을 가지고 예수를 믿으면 아무리 열심을 내고 충성봉사를 할지라도 천국성으로 자랄 수 있는 성질은 전혀 못 자란다. 우리의 중생된 영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성장이 되고 영능의 실력이 되는 건데 물질적 사고방식을 먹으니 자라지 못한다. 자라지 못한다는 것은 깨달음이 없고, 영특하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하고, 미련퉁이라는 거다. 이런 사람은 자동적으로 ‘예수 잘 믿으면 세상에서 부자가 된다’ 라는 말을 하게 된다.

 

물질부자는 땅의 부자이기 때문에 이 물질은 결국은 불에 타지는 거고, 없어지는 거고, 빼앗기는 거고, 도둑맞는 거다. 미련한 사람이 물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결국은 남에게 빼앗게 된다. 그러나 신령한 사람, 영특한 사람, 지혜로운 사람, 총명한 사람으로 되어있으면 자기가 물질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다른 사람의 물질을 자타의 구원에 지혜롭게 사용하게 된다. 이게 물질을 다스리는 거다. 이게 왕이다. 이게 왕의 실력이다. 왕은 사람과 물질을 다스리지만 미련한 사람은 자기 미련에 자기가 죽는다. 이런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의 다스림을 받아야 그나마도 자기가 살 수 있다.

 

본 절에서 땅에 속한 것이 사람의 정신과 마음과 사상을 지배하는 것을 ‘물’이라고 표현을 하는데, 믿는 사람이 자기 속에 이런 게 들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아, 몹쓸 물이 나에게 흘러 들어왔구나’ 라고 하면서 깜짝 놀라야 한다. 그러나 안 믿는 사람들은 그 정신 사고방식, 소원 목적이 세상이라고 하는 물질성에 푹 빠져 있기 때문에, 세상이라고 하는 물질적 홍수에 다 죽어버렸기 때문에 자기가 이런 재앙 가운데 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살고 있다.

 

물의 특성을 보면 잘 스며든다. 아래로 잘 흐른다. 그리고 사람이나 모든 동식물이 물을 먹는다. 물의 이런 특성처럼 세상의 정신 사상 소원 목적은 사람에게 쉽게 감염이 된다. 그러면 짐승에게도 땅의 사상이 감염이 되느냐? 안 된다. 왜 안 되느냐? 인격이 없으니 본능적으로 땅의 것을 먹고 사는 것뿐이다. 사람은 본래 지음을 받을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정상적인 사상이요 정신인데 선악과를 따먹은 후부터 마치 세상을 소원 목적하며 사는 정신 사상이 정상인 것처럼 돼버렸다. 우리는 이걸 알도록 해야 하고, 밝혀내야 한다.

 

세상사람들은 아무리 떠들어도 전부는 하늘 아래의 것으로 떠들며 자기가 뭘 하겠다는 거다. 그러니까 선악과 따먹은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이 된 거다. 정치인들이 백성들을 잘 먹고 잘 살게 하겠다고 외치는데, 이러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도 없는 거다. 세상을 보면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일들이 엄청나게 많다. 세상은 원래가 그런 곳이다. 설령 나라의 지도자가 백성들을 잘 먹고 잘 살게 해 준다고 해도 이런 것으로 사람의 속이 하나님의 것으로 바꿔지지 않는다.

 

사람의 속을 하나님을 향해 바꾸는 게 기독교이고 주님의 일이요, 사람을 천국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게 하나님의 일인데 교회 안에서 자유주의적인 신앙을 가진 자들은 성경을 가지고 세상의 환경적 조건을 개발해서 사람들을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것이 주님의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건 땅의 사상이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 이런 물이 보통 많이 들어와 있는 게 아니다. 세상의 조건을 아무리 좋게 만들어 놓더라도 사람이 정신 소원 목적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한 하나님의 성품의 사람으로 개조되지 않는다.

 

세상사람들은 아예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서 벗어난 삶이고, 세상 속화된 비진리적인 교회의 가르침도 그 정신과 사상이 하나님의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거다. 이들은 세상성적, 인간 주관성적, 기독교 종교적인 사상으로 들어있기 때문에 이런 사람을 진리본질의 신앙을 가지게 하는 일은 이중 삼중으로 어려운 거다. 큰 문제다.

 

일반사람들이 그 어떤 것을 아무리 주장을 해도 순 세상 것밖에 없다. 그런데 세상적인 기독교는 세상 것 위에 성경을 둘러 씌워놨기 때문에 어느 누가 성경으로 덮어놓은 인간성이나 물질성을 드러내려고 하면 그걸 안 벗으려고 한다. 이게 마귀의 수법이다. 기독교 안에서 그릇된 신앙정신 사상을 가지게 되면 사람이 못 써져 버린다.

 

‘물들이 내 영혼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사람의 영혼까지 파고 들 수 있는 물이란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비진리적인 것을 가르치는 것을 말하는데, 이건 영 운동이 아니고, 천국복음 운동이 아니고 기독교를 빙자한, 예수이름을 빙자한 하나의 종교인일 뿐이다. 이건 타 종교인과 똑같은 차원의 하나의 기독교 종교인일 뿐이다. 이방인들이 종교를 가지는 것은 자신들이 믿는 신의 힘을 빌려서 세상을 가지려는 거다. 비진리적인 기독교는 예수이름을 불러서 세상 것을 가지려고 한다. 예수이름을 부르는 것만 다르지 이방종교인과 그 속셈이 똑같다.

 

진리성도들에게는 기독교 복음을 빙자해서 세상을 가르치는 교회들이 위협적인 존재들이다. 멀리 있는 사람이 자기를 찌르기 쉽겠느냐, 가까이 있는 사람이 자기를 찌르기 쉽겠느냐? 가까이 있는 사람이다. 아주 가까이 있는 사람이 품속에 있는 칼로 옆에 있는 사람을 푹 쑤셔도 다른 사람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멀리 있는 사람이 활로 다른 사람을 쏘면 금방 표시가 난다. 이게 뭘 말하는 거냐?

 

기독교 복음의 진수가 무엇이냐? 하나님의 본질이 무엇이냐? 성경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것이 발견이 되지 않으면 이 사람은 그만 세상 넓은 길로 가버리게 된다. 이걸 아는 자는 생명 길 좁은 길로 가게 해 달라는 기도가 나온다. 여기에서 구원을 받으려면 말씀이 와야 한다. 전도자가 오든지, 하나님의 사자가 오든지 해야 한다. 아니면 자기 속에 넓은 길로 가고 있는 요소를 싹 없애버리든지 해야 한다.

 

자기가 물에 빠져서 떠내려간다면 무엇이 와야 자기가 구원이 되는 거냐? 지금으로 말하면 119가 와야 한다. 마찬가지로 자기가 넓은 길로 가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이 자기를 좁은 길 생명 길로 구원해 달라고 해야 하는데, 이 때 무엇이 와야 구원이 되겠느냐? 자기가 넓은 길로 갈 때 좁은 길로 가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전도를 하는 것은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을 좁은 길로 가게 하는 것인데, 그러려면 뭐라고 전도를 해야 되겠느냐? ‘예수 잘 믿으면 부자 됩니다’ 라고 하면 좁은 길로 가게 되느냐, 더 넓은 길로 가게 되느냐?

 

믿는 사람이던 안 믿는 사람이던 자기의 생각이 넓으면 이건 벽이 없어서 그냥 헤매는 거다. 마음에 정착지가 없는 거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정착된 삶을 살게 하는 거냐? 물질부자로 사는 게 마음의 정착지냐? 아니다. 이건 정착지가 아니다. 사람의 마음이 물질부자에 정착이 되면 어떻게 되느냐? 부자가 되기 위해 믿다가 부자가 되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다.

 

세상사람들은 다 부자로 살기를 원한다. 그러면 부자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다 부자가 되느냐? 부자가 되기도 하고, 부자가 안 되고 죽는 사람도 있다. 또는 부자가 되었지만 그걸 하나도 못 누리고 죽는 사람도 있다. 또는 부자가 되었지만 남에게 다 빼앗긴 사람도 있다. 이런 걸 생각해 봐라. 얼마나 어리석으냐?

 

우리의 영혼이 비진리에 잠식이 되면 안 된다. 자기의 정신 사상이 세상 물질성적 사고방식에 젖어있으면 안 된다. 진리의 성도들에게 위협적인 것은 이방인들에게도 좋게 보이고 세상적으로 흐르는 기독교인들에게도 좋게 보이는 거다. 진리의 성도가 양쪽의 사람들에게 다 좋게 보이는 것에 속기 쉽다.

 

계:에 용이 바닷가 모래 위에 선 것이 나오는데, 이곳은 육지도 아니고 바다도 아닌 지점이다. 신앙 면에서도 물질계도 아니고 신령계도 아닌, 그러니까 이쪽저쪽도 아니면서도 이쪽저쪽을 다 포섭할 수 있는 중간지대가 있다. 이곳이 용이 선 모래 위다. 사단 마귀가 성도들에게 이런 묘한 수법을 쓴다. ‘예수 잘 믿으면 부자가 된다. 뭐가 된다. 성공한다’ 하는 것은 전부가 사단 마귀가 모래 위에서 쓰는 수법이다. 아무나 구별할 수 없고 분별할 수 없는 혼합된 자리에 서 있는 이것이 용이 바닷가 모래 위에 선 사상이다.

 

믿는 사람이 물질적인 이치를 알면 성경을 보면서 어느 정도 계시적으로 근접을 할 수 있을 텐데 신앙사상 면에서 영의 눈이 어두우면 계시를 전혀 못 본다. 아무리 훌륭하다고 하는 목사라도 이치를 못 보면 소경이다.

 

성도들은 자기의 소속과 입장을 질적 성분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구별하고 분별하며 살아야 하는데, 진리성도 다윗 왕처럼 분별이 있고 구별이 있고 명확하게 살고 있는 건지? 구별 분별을 못한 채 세상적인 신앙으로 합리화 되어있다면 이 사람은 모래 위에 서 있는 용의 사상과 같음을 알아야 한다. 진리성도 다윗은 세상화 된 거짓된 기독교 종교인들의 정신 사상이 교회 안으로 물밀듯이 밀려들어오는 것을 보고 성령에 감동이 되어서 본 절의 말씀을 하는 거다.

 

우리는 세속화 된 사상에 빠지면 안 된다. 세속화 된 사상에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 세상화 된 사상에 떠내려가지 않는 게 구원을 받는 거다. 그러려니 자기의 정신 사상 소원 목적을, 신앙의 질을 성령의 눈으로 구별해야 한다. 구별 분별을 못하면 빠져 들어간다. 감염이 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