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이라는 말이 나온 최초의 고대 기록, 메르넵타 비문
람세스 2세(1279–1213 BCE)의 열세번째 아들이 메르넵타가 파라오가 되었습니다 (1213-1203 BCE). 람세스 2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 큰 아들을 잃었던 바로 그 파라오입니다. 강력한 군주였던 파라오 람세스 2세가 죽고, 메르넵타가 파라오가 된지 5년째 되던 해(1209 BCE)에 북아프리카의 리비아 사람들이 이주해 들어온 해양 민족들과 동맹을 맺고 이집트를 무력으로 침공했습니다. 이집트를 가운데 두고, 동쪽과 서쪽에서 동시에 쳐들어왔던 이 전쟁이 이집트에게는 나라의 국운이 달린 아주 중요한 전쟁이었을 겁니다.
이 전쟁은 메르넵타의 승리로 끝납니다. 이렇게 큰 전쟁에서 이기고 나면, 왕들은 의례 자기의 승리의 기록을 약간의 과장을 곁들여 남겨 놓는 것이 고대 국가의 풍습이었습니다. 메르넵타도 이 승전 기록을 시의 형태와 이야기의 형태로 각각 카르낙 신전에 기록해 놓았는데요. 이야기 형태로 기록된 승전 기록에 의하면, 여섯시간 동안 리비아-해양 민족 동맹군과 싸워서, 9,000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하니, 전쟁이 얼마나 일방적이었는지 알만 합니다.
석비에는 리비아와 해양 민족들의 땅들로 진군한 파라오가 점령한 도시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석비에 기록된 가나안의 도시와 민족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지중해변, 해양 민족을 대표하는 도시인 아스겔론(수 13:3), (2) 지중해와 산지를 연결하는 지역(쉐펠라)을 대표하는 게셀(삿 1:29), (3) 갈릴리 지역을 대표하는 도시인 야노아(수 16:6), (4) 유대 산지를 가리키는 이스라엘. 1896년에 이 석비를 발견한 영국 고고학자 페트리(Flinders Petrie)는 너무나 흥분했습니다.
성경 이외에 이집트의 문헌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말이 나온 최초의 고대 기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또는 나라를 가리키는 유일한 이집트의 문헌이 바로 이 메르넵타의 석비입니다.
아버지의 때에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르넵타에게 손톱의 가시 같은 존재였을 겁니다. 이집트의 국력에 비하면, 그 힘은 미미하지만, 제국의 노예들이 탈출해서 만든 나라라는 것 만으로도 이집트의 파라오는 매우 자존심이 상했을 겁니다. 게다가 그 지역에는 이미 예전부터 이집트와 불편하게 국경을 맞대고 전략적으로 동거하고 있는 해양 민족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집트와 마주하고 있었기에 국경이라는 개념이 분명하지 않은 채로 사람들이 오가기도 했고, 때로는 그들 가운데 다툼이 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다툼이 감정적인 대립을 넘어서 한번 쯤 전쟁으로 이집트의 힘을 보여주어야만하는 상황이 메르넵타의 때에 있었습니다. 파라오가 바뀌었으니, 아버지 람세스 2세처럼 자기도 강력한 군주라는 것을 보여줄 필요도 있었을 거구요. 메르넵타는 이집트와 국경을 공유하고 있는 서쪽의 리비아, 그리고 동쪽의 해양 민족과 유대 산지의 이스라엘을 거쳐 갈릴리 지역까지 원정을 했습니다.
메르넵타가 남긴 석비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증명할 만한 직접적인 증거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석비 때문에 분명해 진 것이 하나 있습니다. 메르넵타의 때에 이미 이스라엘이라는 민족과 그들의 공동체가 유대 산지에서 주도적인 세력 또는 국가(12지파의 연합체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석비에 기록된 도시와 지역들은 그곳을 대표하는 이름들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던 아브라함-이삭-야곱의 시대에는 이집트의 파라오의 눈에 이 세명으로 대표되는 공동체가 가나안 땅을 대표하는 민족이었기 보다는 그저 메소포타미아 땅에서 이주해온 가문, 또는 그 식솔이 꽤나 많았기에 좀 알려진 가문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적어도 이집트를 위협할만한 정치적인 체제를 가진 공동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 공동체가 이집트가 괄목할만한 집단으로 성장하게 된 때는 출애굽 이후, 이집트에서 탈출한 히브리인 노예들이 가나안을 정복한 후였습니다.
요새이자 국고성이었던 람세스와 비돔을 건설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탈출하였다면(출 1:11), 그 시기는 람세스 2세의 때일 겁니다. 그 때 탈출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정복 전쟁을 마친 후, 유대 산지 지역을 대표하는 민족과 나라가 되었고, 이집트의 파라오 메르넵타가 그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였으니, 메르넵타 석비에 등장하는 이름 “이스라엘” 이야기는 성경의 내용과 너무나 잘 조화를 이룹니다. 과거의 학자들은, 심지어는 현재의 학자들 중에서도 이스라엘의 역사를 말하면서, 분열왕국 시대 (유다 왕국의 르호보암과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의 시대) 이전에는 이스라엘이 유대 산지를 대표하는 하나의 국가, 또는 국가적인 체계를 갖춘 공동체가 아니라, 그저 몇몇 집안을 중심으로 뭉쳐진 촌락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성경에 나오는 출애굽 이후 솔로몬의 시대까지의 역사 기록은 역사적인 사실에 기초했기 보다는, 그랬으면 좋겠다는 꿈과 희망이 담긴 과장이라고 하는데요. 메르넵타의 석비는 그들의 바램과는 달리 이미 이집트의 파라오 메르넵타의 시대에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공동체가 유대 산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국가적인 체계를 갖춘 공동체로 알려졌음이 확실해 졌으니, 이 또한 이방인의 손으로 성경을 증명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아니라 말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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