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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제시된 '비유'의 의미

열려라 에바다 2021. 5. 8. 08:41

성경에 제시된 '비유'의 의미

 

성경에 기록된 내용들은 어느 것 하나 소홀하게 취급할 수 없이 모두 다 중요한 계시적 의미를 갖고 있다. 그 가운데 예수님의 교훈은 더욱더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교훈가운데서 비유가 차지하는 비율은 매우 크다. 계시록에서는 삽경이 차지하는 위치가 중요하듯 주님의 교훈에서는 비유가 담고 있는 교훈적 의미가 심히 중요하다.
비유란 헬라어는 parabolh(파라볼레)다. ‘곁에’, 또는 ‘옆에’라는 뜻의 전치사 para(파라)와 ‘던지다’, ‘두다’라는 뜻의 동사ballw(발로)가 합성된 단어로서 문자적으로는 ‘옆에 나란히 두다’라는 뜻이 된다. 이로 볼 때 ‘비유’란 두 개의 유사성을 가진 사물 또는 사건을 병렬시켜 대조함으로써 거기에 담긴 원리 또는 교훈을 은연중에 쉽고도 정확히 설명하기위한 수사(修辭)의 기법중의 하나라고 정의할 수 있다.
본래 비유란 매우 넓은 수사학적 개념으로서 은유(隱喩), 직유(直喩), 제유, 풍유(Allegory), 의인법 등 제반 수사학적 기법들을 포괄하는 개념으로서, 인간들의 대화나 의견 교환에 있어서도 매우 세련되고 풍성한 소통의 역할을 제공해 준다. 한컴사전에서는 ‘사물을 직접 설명하지 않고 그와 비슷한 다른 사물을 빌려 표현하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즉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사람이 자신이 나타내고자 하는 실체나 원리를 일상생활의 낮 익은 어떤 상황이나 사물, 혹은 자연 현상들을 들어 이야기함으로써 그 뜻을 좀 더 쉽고도 인상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요약한다면 자신이 나타내고자 하는 사상과 정보 또는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이와 유사성이 있는 상황이나 사물을 빗대어 표현하는 수사학적(修辭學的) 기법(技法)이다.
풀어서 말한다면 일상경험에 기초하여 잘 알려져 있는 것을 통하여 전혀 알려져 있지 않는 다른 것을 설명하는 수사법, 예컨대 ‘하나님 나라’라는 전혀 생소한 문제에 대하여 어떤 식물의 ‘종자’를 통해서, 즉 씨가 심겨지고 자라가는 과정을 통해서 설명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개 비유를 택하여 이야기하게 되는 경우는 주로 추상적인 원리나 교훈에 대하여 말하고자 할 때 사용된다. 직설적 표현보다는 친근한 구상적 사물이나 이야기에 빗대어 전달하므로 좀 더 명료하고도 쉽게 올바른 뜻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비유의 목적

주님께서 하신 교훈 가운데 비유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그리고 많은 교훈들을 그렇게 비유로 말씀하신 것에는 목적이 있었음을 아울러 밝혀 주셨다. 그 목적은 크게 구분하면 두 가지다.

1) 알아서는 안 될 자들에게 실체를 감추기 위한 목적

즉 어떤 대상들에게는 교훈의 실체를 알아듣지 못하게 하기위한 목적에서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 13:10-13)

제자들이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가에 대해 묻는 물음과 그에 대해 답변하신 말씀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 어떤 자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한다. 주님의 이러한 말씀은 구약성경의 예언 성취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사야가 그렇게 예언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 6:9-10)
이러한 말씀들에 담긴 의미에서 보면 천국의 비밀은 깨달아야 할 자들이 있는가 하면 깨달아선 안 될 자들이 있음이 시사된다. 무엇 때문일까? 그 궁극적 원인을 전체 성경적 원리에서 조명해 보면 인류에는 택한 백성이 아닌 자들이 있음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이들에 대하여 계시록에서는 성전 밖마당에 들어온 이방인들이라고 지적하며 어린양의 생명록에 기록되지 않은 이 땅에 속한 자들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주님은 이런 자들에게 진리를 감추시기 위하여 비유를 사용하신 것이다. 때문에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성전으로 비유하여 성전을 헐면 삼일 만에 다시 일으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고(막 14:58), 그러자 유대인들은 오히려 말이 안 된다며 예수님을 모욕하고 비웃었던 것일 것이다. 즉 직설적으로 말씀하지 않고 비유를 통해서 교훈하시는 것은 택한 백성이 아닌 자들에게는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는 뜻이다.

2) 알아야 할 자들에게 좀 더 그 실체를 바르게 깨닫게 하기 위한 목적

이와 관련해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마 13:34, 35)

창세부터 감추인 것, 곧 천국의 비밀을 드러내고자 비유로 말씀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비유는 두 가지 목적이 상존한다. 하나는 알아듣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바르게 깨닫게 하여주기 위함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상호 모순이 되는 것 같으나 대상적 의미에서 보면 틀림없이 이와 같은 이중적 속성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주님의 도래와 대속의 성취로 인하여 이제 구속사는 구약에서 신약으로 옮겨져야만 하였고, 그것은 대 다수 유대인들이 영적 이방인들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때문에 그 시대 다수의 유대인들은 성경을 자신들의 민족적 관점에서만 이해함으로 인하여 시대는 물론이고 구속사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로인하여 그들은 메시야의 도래는 물론이고 주님께서 전하시는 진리에 대하여 처음부터 받아드릴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못하였다. 그러하였기에 그들은 주님께서 전하시는 교훈에 대하여 언제나 악의적으로 해석하고 비방하기를 일삼았다. 그러기에 주님은 진리를 선포하시면서도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반발이나 말꼬리를 잡지 못하도록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기도 하셨음을 찾아볼 수 있다.
또 반대로 사랑하는 당신의 제자들과 백성들을 위해서는 진리에 대하여 쉽게 이해하고 오래도록 기억케 하기 위한 방법으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던 것이다. 특히 예수님의 말씀을 트집 잡기 위해 모여든 유대주의자들과 제자들이 함께 섞여 있는 자리에서도 예수님은 비유를 사용하시어 대적 자들에게는 혼란을, 제자들에게는 더 깊고 심오한 진리를 깨닫게 해 주셨던 것이다.

2. 비유의 유형(類型)

큰 틀에서 보면 모든 비유를 하나로 묶을 수 있으나 유형적으로 구분하면 3가지 형식으로 분리된다.

1) 설화(說話) 형식의 비유

이는 어떤 뚜렷한 테마(Thema)를 중심으로 한 한 토막의 이야기 형식의 비유를 말한다. 즉 교훈의 핵심을 어떤 테마를 선택하여 담화 형식으로 풀어 이야기하는 것을 뜻한다. 주님의 비유에서는 선한 사마리아인(눅 10:30-37)이나 어리석은 부자(눅 12:6-12), 거지 나사로와 부자(눅 16:19-31)와 같은 비유형식으로서 사복음서에서는 대략 14개 정도가 발견된다.

2) 경구(警句) 형식의 비유

심오한 영적 교훈, 즉 추상적 진리들을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보편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친근한 사물에 빗대어 일러줌으로써 듣는 사람이 쉽고도 친근하게 그 의미를 파악하고 또 이를 인상 깊게 기억하도록 돕는 짧은 격언 또는 속담 형식의 비유를 말한다. 예를 들면 ‘빛과 소금의 비유’(마 5:13), ‘생베조각과 낡은 옷’(막 2:21), ‘돼지에게 던진 진주’(마 7:6) 비유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경구 형식의 비유는 구약의 잠언이나 전도서 등의 지혜서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3) 단순 직유 및 은유 형식의 비유

이는 상호 유추적(類推的) 관계에 있는 두 사물을 일대 일로 단순 비교하는 형식의 비유를 말한다. 즉 A는 B와 같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형식을 가리킨다. 그 가운데 A와 B의 비유 관계를 직접 나타낸 것을 직유라 하고, 서로 비유 관계에 있는 A와 B를 다만 문맥에 비추어 알도록 암시하는 것으로 그친 것을 은유라 말한다. 직유 형식의 예를 들면 ‘외식하는 자는 회칠한 무덤 같다’(마 23:27)는 등의 형식을 가리키고, 은유 형식의 예를 말한다면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구나’(마 23:24)라는 말씀이나 ‘심은 것 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마 15:13),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라고 말씀한 내용들을 들 수 있다.

 

3. 비유의 의미

 

제1비유 소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이는 경구형식의 비유로서 산상수훈 가운데서 주신 말씀이다. 산상수훈이란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보도된 예수님의 교훈 또는 설교를 가리킨다. 이를 산상 수훈이라 하는 이유는 본 설교가 산에서 하신 교훈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제1차 갈릴리 사역기간(A.D. 27-28년경) 중에 갈릴리 지역의 한 야산(野山)에서 선포하셨던 설교를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산상수훈이라 명명한 것이다. 또한 이 교훈이 너무나도 가치 있는 가르침이란 의미에서 ‘산상 보훈’(山上寶訓)이라고도 불리운다.
본문의 소금 비유는 산상수훈가운데 팔복에 대한 교훈을 주신 직후에 주신 비유로서 오직 마태복음에서만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다. 진정으로 복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한 교훈을 주신 직후 인류사회에서 성도들이 가지게 되는 위치와 함께 그들의 삶의 원리를 가르쳐주는 말씀이다.
성도들의 위치와 그들의 삶의 원리를 말하고자 하면서 특별히 소금을 비유로 삼으신 이유에는 소금이 갖고 있는 독특한 두 가지 특성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짠 맛을 내는 것이며 다른 하나가 부패를 방지케 하는 속성이다. 이러한 원리에서 보면 이를 통해 주시고자 하는 구속사적 교훈은 모두 4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1) 성도란 신분의 중요성과 관련한 의미

본문의 소금 비유는 세상에서의 성도의 위치, 즉 성도의 신분과 관련한 교훈적 의미가 크다. 성도가 세상에서 어떤 위치이며 어떤 신분인가를 설명하고자 하면서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에서의 성도의 위치를 말하고자 하면서 소금을 비유로 드신 이유는 무엇인가? 문맥의 흐름을 보면 소금에서 짠 맛을 내는 기능을 교훈의 핵심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라고 말씀을 이어가신다.
소금의 일반적 기능가운데 가장 우선되는 것이 조미제로서의 기능이다. 모든 음식에는 소금의 짠 맛이 첨부되어야만 음식의 맛을 낼 수 있게 되어있다. 약방의 감초라는 말이 있듯이 소금은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서 그보다도 더 필수적이며 중요한 요소라고 말할 수 있다.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인가?
세상에 대한 성도의 의미가 그러하다는 뜻이다. 즉 세상에 성도가 없다면 세상은 그만큼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기에 그만큼 세상에서의 성도의 신분은 절대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세상, 가시적인 측면만을 보면 세상은 공중권세를 잡고 있는 사단이 주인인 것 같다. 그러기에 악한 사람들이 오히려 득세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 큰소리치는 세상으로서 세상의 의미가 그들을 위한 것 같기도 하다.
원시구속사에서도 보면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 백성들이 아니었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로 아내를 삼았다고 지적하신 그 한마디 말씀 속에 모든 의미가 다 함축되어 있다. 그만큼 세상 사람들이 우월했고 아름다웠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그들이 세상의 주인처럼 행세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제2기 구속사 역시 그러하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와 살았을 때 그는 이방인에 불과했다. 이삭이나 야곱도 그러했고, 그 이후 400년 애굽에서의 삶 역시도 보면 하나님 백성들이 세상의 주인은 결코 아니었다.
여호수아시대 비로소 가나안을 정복하게 되었지만 그렇다하여 이스라엘이 세상의 주인노릇을 한 경우는 별로 없다. 언제나 이방의 침략에 수많은 어려움을 겪어야만 하였다. 민족의 수효(數爻)도 주변국들에 비해 보잘 것이 없었고, 그들이 차지한 땅도 이방에 비하면 지극히 자그마한 나라에 불과했다.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 백성들이 세상의 소금이라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그 의미가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신약의 성도들은 더욱더 그러하다. 이방에 세워진 교회이기에 교회의 역할은 언제나 세상 사람들의 한 모퉁이 역사에 불과했고 그러기에 성도들 역시 언제나 세상의 눈치를 보고 살아야만 하는 약자의 편에 있었다. 때문에 산상보훈의 앞의 교훈에서도 보면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의 주인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능욕을 당하고 핍박을 받아야 한다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절에서는 성도들이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과는 어울리지 않는 동떨어진 이야기 같지만 실제 세상에서의 가장 중요한 존재는 성도들임을 성경은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와 목적이 바로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즉 창세전 선택한 자기백성에게 하늘의 신령한 복을 주시기 위한 과정으로서 세상이 필요했고 세상을 창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의 가장 중요한 신분, 세상의 주인공은 바로 성도들인 것이다. 주님은 이러한 사실을 강조하고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소금이 없다면 음식의 맛을 낼 수 없듯이 성도들은 그만큼 세상에 대하여 핵심 존재요 주역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2) 인류 보전의 의미

소금이 갖는 일반적 기능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바로 부패를 방지하는 방부제로서의 기능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세상에 소금이라는 말씀은 인류의 보전은 오직 성도들 때문이라는 의미를 시사한다.
대부분이 주석서들의 경우 이와 관련한 해석에서 성도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물론 성도들은 누구나 소금이 그 맛으로 음식의 맛을 내듯이 그 역할을 바르게 이행해야할 이유와 의무가 있다. 그러나 그 보다 먼저 여기서 주고자 하는 교훈은 인류의 보전과 관련한 것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소금이 바로 부패를 방지하는 성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소금이 부패를 방지하는 방부제의 기능을 갖고 있듯이 실제 세상은 성도들 때문에 보전된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미 성도가 세상의 주인공이라는 의미에서도 드러난다. 주인공이 없다면 그 외의 모든 것들은 역시 그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계시록에서도 명료하게 밝혀주고 있다. 신약의 구속사에 대하여 3대 7중 역사를 통해 밝혀주시는 과정에서 첫 번째 삽경에 해당하는 7장에 보면 이런 말씀을 하신바 있다.
(계 7:2, 3)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세상을 멸할 책임을 맡은 네 천사에게 잠시만 기다릴 것을 말씀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 기다리는 기간과 관련하여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라고 말씀했다. 다시 말하면 택한 백성들의 구원이 완전히 완료 될 때까지는 세상을 멸하지 말라는 그런 뜻이다. 말씀과 같이 기록된 계시록의 보도를 보면 신약 구속사에서 구원받기로 예정된 14만 4천인이 모두 구원을 받은 이후(14:1) 세상에 종말과 관련한 대 재앙이 오는 것으로 기록해 주고 있다. 이러한 보도에서 보면 세상의 존재 이유는 택한 백성들의 구원 때문임을 알 수 있고, 그러므로 세상이 보전되고 또 정상적인 운행이 가능한 원인 역시 성도들 때문으로 정의할 수 있다.
때문에 신약의 구속사를 통해 구원받을 택한 백성들이 구원이 모두 완료된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는 화화화로 표현하여 종말을 향한 대재앙의 역사가 있을 것으로 예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세상은 성도들이 있으므로 보전되어 간다고 말할 수 있고 그러기에 성도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소금의 기능이 결코 자체적으로도 썩지 않지만 다른 음식들에 대해서도 부패를 방지하고 보전을 가능케 하듯 성도는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다는 것이다. 세상은 타락한 천사가 하늘에서 쫓겨나 이 세상의 공중 권세를 잡고 있기에 부패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급기야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 세상으로 타락해 갈 것으로 예언되고 있다.
결과가 그러할 것이 틀림없는 세상이지만 그나마 세상은 성도들로 인하여 정의가 지켜지며 아울러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하는 동기요 원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만약 세상에 택한 백성이 없다면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한 성도가 없는 세상은 더 이상 보전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만큼 성도는 세상의 존재 이유이며 보전의 근본적인 동기부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김빠진 맥주라는 말이 있다. 앙꼬 없는 찐빵이란 속어도 있다. 모두가 그것의 핵심이 되는 것을 말함과 동시에 그 핵심이 빠진다면 그 자체의 가치나 존재 이유가 사라진다는 의미의 속어(俗語)들이다.
성도는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다는 측면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들 자신의 존재 가치를 깨닫고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교훈의 절정이다. 때문에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겠느냐고 묻고 계신 것이다.
성도가 성도다운 삶을 살지 않는다면 세상의 존재 이유도 사라지고 세상을 보전할 가치도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때문에 원시 구속사에서 택한 백성들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자 하나님은 이 세상을 물로 심판하셨음을 말씀하고 있다. 그만큼 성도는 세상의 존재 이유이며 아울러 그들이 성도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은 역시 세상의 보전의 절대적인 동기가 되는 것이다.

3) 성도들의 삶과 관련한 교훈적 의미

주님은 성도들의 역할과 관련하여 소금을 비유로 드시면서 그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겠느냐고 물으셨다. 소금은 존재 가치와 관련하여 필히 짠 맛을 내야 한다는 원칙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에는 두 가지 의미의 교훈이 시사 된다.

(1) 본분과 관련한 의미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독특한 신분이며 역시 그들에게 주어진 역할이 있음을 뜻한다. 소금이 짠 맛을 가지고 모든 음식의 간을 맞추듯이 성도는 세상에 대하여 성도로서의 본분이 있음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본분은 역시 하나님을 순종하며 그 나라와 의를 위해 살아야 하는 삶과 관련된 것임이 분명하다.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모두 여기에 집약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을 위해 살아가기 마련이다. 그들의 인생에 있어서 세상은 그 들의 가장 큰 가치요 그들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 백성들은 그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이며 그것이 곧 하나님 뜻을 받들고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하는 삶의 원리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바울은 그런 권면을 한 바 있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 백성들은 이 세상 사람들의 삶을 모방하거나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만은 세상이 다가 아니요 사후의 영원한 삶이 있고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하늘의 신령한 복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2) 희생과 관련한 의미

성도들의 본분을 말씀하고자 하면서 특별히 소금의 짠 맛을 비유로 선택하신 것에는 각별한 이유가 있다. 그것이 바로 소금이 짠 맛을 내기 위해 겪어야 하는 희생적 과정이다. 소금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짠맛을 내기 위해서는 그 결정체(結晶體)가 녹아지고 사라져야만 한다. 결정체가 녹아 없어지는 죽음과도 같은 희생의 과정이 없다면 소금은 결코 짠 맛을 낼 수 없는 것이다.
주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처럼 짠 맛을 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즉 성도들이 진정한 성도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본분을 지켜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희생함으로만 가능한 것이라는 교훈을 주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다.
왜 성도가 하나님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는 희생이 전제 되어야 하는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근본적 이유로서 인간의 전적 타락이다.
즉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죄인으로의 추락이 그 첫 번째 원인임을 알 수 있다. 아담의 선악과 언약 실패 이후 인간의 본질은 처음 창조된 본성과는 전혀 다른 성질로의 변질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와 관련한 근거로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기 이전과 이후의 심적 상태를 표현한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창 2: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이는 선악과 언약 실패 이전으로서 그들의 심령 상태가 어떠하였는가를 말해주는 매우 중요한 말씀이다. 그들의 육신적인 상태는 그 시대로서는 매우 젊은 청년의 시기였음이 명백하다. 그럼에도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 심령이 전혀 육에 속한 소욕이 없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은 직후 이런 말씀이 첨부되고 있다.
(창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벗은 줄을 알고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는 것이다. 그 같은 결과는 그들이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것을 전제하고, 그렇다는 것은 그들의 심령에 큰 변화와 변질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간단하고 짤막한 표현이지만 인간의 심령은 처음 창조된 상태와는 완전히 다른 형질로서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서 표현한다면 전적 타락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아담과 하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구속사를 대표언약으로 제정하셨기에 아담의 언약 실패는 모든 택한 백성들의 언약실패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그의 혈통을 통해 출생해야 했던 모든 하나님 백성들도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 2:3)들과 다를 바 없이 전적 타락한 상태로 출생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바울은 이렇게 진술한바 있다.
(롬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아담 한사람의 범죄가 모든 사람들에게 죄를 지은 것이 되어 모든 사람들이 사망이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성경은 인류가운데 의인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타락한 죄인들로서 더 이상 자력으로의 구원은 불가능하게 되었고 그러했기에 그리스도의 대속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구원을 받아야 하는 하나님 백성들에게는 필연적으로 거듭남의 역사가 필요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성령을 택한 백성들의 심령에 보내주시고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거듭나게 하시고 그 거듭난 심령을 통하여 주님의 백성으로서의 새로운 인생의 삶을 살도록 도우신다. 그러나 성도들의 본성은 이미 죄의 속성으로 변질 추락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본분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본성이 원하는 것과 역행을 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때문에 그 과정은 자신을 포기하고 쳐서 복종시켜야 하는 희생이 필연적인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기에 성도가 자신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서는 필히 자신의 희생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며 그러기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두 번째는 영광과 관련된 약속 때문이다.
구원은 택한 백성들에게 불가항적 은혜로 거저주시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 나라에서 받게 되는 영광은 성도들의 행위에 따라 주시는 것으로 구속사의 언약을 제정하셨다. 이러한 원리와 관련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고후 9: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이는 성도들의 개인적 구원과 관련한 교훈으로서 그 결과가 행위에 따라 각자 다른 열매, 다른 보상이 주어질 것임을 말씀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심는다고 하는 원리는 버려지는 것이며 희생하는 원리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5:36에서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라고 말한다. 썩어지고 죽어져야 거기서 새 생명이 살아나고 더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믿음의 원리는 세상과 관련하여 정의해 보면 희생의 원리라고 말할 수 있다.
자기를 희생하고 세상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 하늘의 영광인 것이다. 특히 천상의 영광과 관련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을 위하고 복음을 위한 희생을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기에 성도가 성도로서의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희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신바 있다.
(마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자기를 위해서 살면 결코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란 뜻이다. 오히려 자기를 희생하는 자만이 그것이 결국은 자기에게 복이요 유익이란 말씀이다. 또 그런 말씀도 하셨다.
(마 6:1, 2)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비록 의를 행하고 다른 사람을 구제하는 자비를 베풀었다 하더라도 세상에서 영광을 받으면 하늘에서는 상이 없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에서 영광을 받고자 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말씀의 원리에서 보면 성도가 추구하고 목적해야하는 것은 하늘의 영광이고 세상에서의 삶의 과정은 오직 희생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결코 세상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이 아닌 것이다. 그와는 정 반대로 희생을 위해 사는 삶이라고 말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부요와 영광을 자랑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가르치지만 이러한 양태는 성도가 배척 배타해야할 성경의 원리와는 정 반대 현상인 것이다. 때문에 주님은 그런 것은 이방인들이 행하는 행태라고 지적하신바 있다. 계시록(11:2)의 표현을 빌리면 그들은 성전 밖 마당에 들어온 이방인들이 행하는 행태인 것이다.
주님께서 성도들의 본분과 관련한 교훈을 주시고자 하면서 소금의 짠 맛을 비유로 삼고 있는 이유에는 바로 희생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즉 진정한 믿음의 길은 희생이 없이는 한 걸음도 걸을 수 없는 길이라는 것이다. 자신을 희생하고자 하는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길이 바로 믿음의 길이라 것으로서 그러기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4) 성도들의 삶과 관련한 하나님의 언약적 교훈

주님은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라고 반문하신다음 만약 소금이 맛을 잃는다면 밖에 버려져 사람들의 발에 밟힐 것이라고 교훈을 이어가셨다. 이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했던 소금을 먼저 알아야만 한다.
그 당시는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는 바닷물을 말려 정제된 순도 높은 소금과는 질이 다른 소금이었다. 산에서도 캐고 땅에서도 채취할 수 있는 암염(岩塩)이란 소금이다. 이는 땅에서 깨는 소금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다른 불순물들이 섞여 있을 수 있고 순도도 낮은 소금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암염가운데는 순도가 낮다거나 다른 이물질이 너무나 많이 섞여 있으면 소금으로서의 사용가치가 없게 되고, 또한 좋은 소금이라 하더라도 보관을 잘못하게 되면 염분이 사라져 버려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암염이 아무리 순도가 낮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짠맛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데나 버릴 수가 없었다. 소금의 그 짠맛은 토양을 망쳐 버리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쓸모없는 소금은 언제나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다 버리는 것이 보편적인 예였다. 길에다 버리면 오히려 염분의 성질은 땅을 단단하게 하여 비가 오더라도 질퍽이지 않고 사람들이 다니기에 질 좋은 도로를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버려진 소금은 사람들의 발에 밟힐 수밖에 없는 것도 필연적인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주님은 바로 이러한 버려진 소금을 통해서 본분을 망각한 성도들의 삶의 과정을 비유로 삼고 계신 것이다. 즉 성도가 성도로서의 합당한 삶을 살지 않으면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까지 짓밟힘을 당하는 필연적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언약적 교훈인 것이다.
이와 같은 교훈은 비록 본문의 소금의 비유가 아니라 하더라도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도 그 실체가 어떠함을 실감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그러했다.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사사시대의 한 토막을 추억해 보면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하나님께로부터 그들의 땅으로 허락을 받았지만 그러나 나라의 주인으로서 주권을 갖고 평안한 삶을 살기 보다는 오히려 이방의 속국으로서 억압을 당하며 살았던 비극적인 역사가 수도 없이 더 많았다. 한마디로 세상 사람들의 발에 짓밟힘을 당한 세월이 더 많았다고 하리만치 험악한 세월들이었다.
그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삿 2:11-15)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 곧 그 사방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아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여 그들로 노략을 당케 하시며 또 사방 모든 대적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치 못하였으며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하나님 백성들이 본분을 망각한 삶을 살아가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적자의 손에 부쳐 노략질을 당하게 하였다는 말씀이다. 본문의 말씀으로 답한다면 소금이 그 맛을 잃었기에 길에 버려져 사람들의 발에 짓밟힘을 당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원리는 신약의 성도들에게도 똑 같이 적용되는 원리인 것이다. 성도가 세상과 짝하고 세상을 따라가다 보면 세상을 얻는 것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세상을 다 잃고 세상 사람들에게 짓밟힘을 당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러한 원리는 탕자의 비유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탕자가 아버지께로부터 분깃을 받아 허랑방탕한 삶을 살았을 때 그에게 돌아온 결과는 세상의 풍요와 인생의 즐김이 아니었다. 도리어 돼지 취급도 못 받는 극한 짓밟힘의 삶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원리는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되어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언약과 관련된 말씀은 필연적으로 그리 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즉 성도가 성도의 본분을 다하지 않고서 세상을 성공하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악한 삶을 살아가도 세상에서 부요를 얻기도 하고 세상의 주인 노릇을 하며 살아갈 수도 있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최후 종말론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가라지의 비유에서도 가라지를 뽑기를 원하느냐는 물음에 주인은 내버려 주실 것을 말씀한다. 자칫 곡식까지 상할 염려 때문이었다. 그렇다하여 언제까지 내버려 두시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 추수 때에 거두에 불에 사를 것을 말씀하셨다. 즉 불신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최후 종말론적이기에 오늘은 세상을 얻고 세상의 부요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백성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이 하나님 백성 됨의 본분을 잃게 되면 하나님은 필히 이 세상에서 그에 대한 책임을 묻고 징계를 하실 것임을 말씀한다. 이와 관련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진술한바 있다.
(히 12:6-8)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오히려 징계가 없는 것은 참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원리에서 보면 하나님 백성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고 세상을 추구하며 살아간다고 하였을 때 세상을 얻는 경우는 결코 있을 수가 없다는 답이 나온다. 만약 그런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실제 하나님 백성이 아니기 때문이지 하나님 백성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간섭하시는 섭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본분을 잃는 것은 두 가지를 잃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세상을 잃는 것이다. 좀 더 하늘나라에 투자할 수 있는 조건을 잃어버리는 경우이다. 심는 자에게 씨와 양식을 주실 것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심을 씨는 고사하고 양식조차도 풍족하지 못할 것이란 의미가 유추된다. 이와 관련하여 주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그렇게 결론을 말씀 하셨다.
(눅 12:20, 21)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하나님 백성이 자신의 본분을 망각한 채 세상을 누리고자 하면 세상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세상을 빼앗길 것임을 말씀한다.
다른 하나는 천상의 영광, 하늘나라의 기업을 잃는 것이 된다. 심는 대로 거둘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성도가 하늘의 영광을 잃는 것은 그야말로 실패가운데 가장 큰 실패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영원한 삶과 관계된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소금을 비유로 한 교훈의 결론이 바로 그것이다.
성도가 어떤 경우에서라도 자신의 본문을 잃어서는 안 되는 이유, 성도가 어떤 형편에 처한다 하더라도 세상과 짝하고 세상 사람과 같이 세상을 추구하며 살아가려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세상을 얻는 것이 아니라 세상도 잃고 천국의 영광도 잃고 모든 것을 잃는 가장 어리석은 삶이라는 것이 소금의 비유를 통해서 주시는 교훈의 결론이다.
성도는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양태와는 본질적으로 달라야 한다. 성도는 세상의 영광이나 자신의 영화를 위해 살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을 위한 희생을 삶의 본분으로 알고 살아야 한다. 성도는 짠맛을 내야하는 소금과 같은 존재임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영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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