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춤을 추는가?
춤(dance)이란 말을 들을 때 저마다 많은 개념들이 머리에 떠오를 것이다. 어쩌면 기독교 예배와 관련있는 개념들은 거의 없을 수도 있다. ‘춤’하면 우리는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가수와 그 뒤에서 신나게 춤을 추는 젊음이들을 떠올릴 수 도 있고, 순수예술로써 관심있는 전공자들의 무용공연이나 아님 바람에 흔들리는 꽃과 나무들의 흉내를 냈던 자신의 학창시절을 떠올리기도 한다. 하여튼 우리는 자기의 경험과 기호에 따라 나름대로 춤을 이해할 것이다. 어쩌면 춤은 기독교 예배에서 아주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다. 그렇지만 지난 몇 년간 기독교인들 안에서 춤에 대한 관심이 크게 일어나고 있다. 아마도 요즘과 같이 이미지의 시대에는 언어 외에 시각적인 전달방법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성적인(sexual)가치기준이 변화하고 여가가 증가하면서 신체에 대한 관심이 한층 증가되었기 때문 일수도 있다. 이러한 시대와 경향에 맞추어 우리는 춤을 통해 신체표현에 대한 기독교의 긍정적인 모범을 보여줄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춤을 추는 이유에 대해 무엇보다 춤에 관한 성경적인 이해가 필수적이라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성경속에서의 춤과 예배안에서의 단순한 움직임을 통해 춤에 대한 의미와 중요성을 살펴보고, 교회에서의 춤과 움직임의 효과를 통해 왜 춤을 사용하는지의 이유를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1. 성경속의 춤
성경에서는 주로 기쁨과 찬양을 표현할 때 춤추는 사람들을 묘사하면서 춤의 예들이 많이 나온다.
1) 하나님이 그들을 승리로 인도하신 것에 대해:
홍해를 건넌 후(출애굽기 15:19-21)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승리했을 때(사사기 11:34)
다윗과 사울의 승리를 축하하며(사무엘상 18:6, 29:5, 30:16)
2) 예언자의 무아의 경지에서(사무엘상 10:5, 19:20-24)
3) 중대한 국가적 행사를 위해 - 여호와의 궤를 가지고 예루살렘에 행렬하여 돌아올 때 백 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기쁨으로 춤추었던 경우(사무엘하 6:4-5, 14-15)
4) 성전에서 예배의 일부로서, 그리고 순례자의 축제, 특히 수확을 감사하는 초막절(feast of Tabernacles)의 일부로서:
하나님이여 저희가 주의 행차하심을 보았으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 성소에 행차하시는 것이라, 소고치고 동녀중에 가객은 앞서고 악사는 뒤따르나이다(시편 68: 24-25)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자로 인하여 즐거워하며...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시편 149:2-4)
추수를 위한 연례 축제에서 실로(Shiloh)소녀들의 춤(사사기 21:21)
5)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 춤출 미래의 무용을 예시하며
네가 다시 소고로 너를 장식하고 즐거운 무리처럼 춤추며 나올 것이며(예레미야 31:4)
그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이 함께 즐거워하리니(예레미야 31:31)
신약에서는 예배 때 무용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볼 수 없으나 예수님은 춤에 대해 두 번 언급하신다.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마태복음 11:16-17)
예수님은 방탕한 아들이 돌아 왔을 때 그의 아버지가 향연과 춤을 베풀어 맞아 들였다고 말씀하신다(누가복음 15:25). 만약 예수님이 무용을 인정하지 않으셨다면 이러한 식으로 춤을 언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경에서는 춤은 전형적인 기쁨의 표현으로서 슬픔과는 대조된다.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전도서 3:4)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편 30:11)
예수님이 사용하셨던 아람어로는 한 단어가 ‘춤’과 ‘기쁨’의 두 가지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다. 이것은 또한 뛰어다니고 즐거워하는 것을 의미하는, 기쁠 때 사용하는 히브리어, “gil” 또는 “gul”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며, 그 예는 시편 118편 24절에서 볼 수 있다.
이 날은 여호와가 정하신 것이라
이 날은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 춤이 삶의 구성요소로서 수용되었고, 삶의 기쁨, 그리고 인간의 조물주며 구세주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축하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2. 예배안의 움직임
예배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가 이룬 모든 것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경외심을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에 대한 사랑과 경외심을 우리의 마음과 생각, 말, 행동으로 개인적인 기도 시간이나 공적인 기도 시간, 그리고 우리의 예배 안에서 표현할 수 있다.
“예배”라는 단어는, 가장 넓은 위미로 사용될 때, 우리가 하는 모든 것 안에서 신에게 드리는 우리의 봉사, 존경, 사랑의 태도를 포함한다. 그것은 우리의 기도 시간에 경외심, 경건함, 숭배의 표현을 의미할 때도 사용할 수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대중적인 예배를 부르는데 사용하고 있다.
움직임은 성서시대에 예배를 구성하는 요소였는데, 그 때에는 예배의 표현으로 여러 가지 다양한 움직임들이 장려되었다. 그러한 예들은 성경의 시편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47:1)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95:6)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경배할지어다(96:9)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134:2)
나의 손드는 것이 저녁 제사같이 되게 하소서(141:2)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143:6)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2:11)
구약성경에 나오는 경배의 예로는: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열왕기상 18:39).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열왕기상 18:42)
솔로몬이 여호와의 단 앞에서 이스라엘의 온 회중을 마주 서서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열왕기상 8:22)
여호사밧이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도 여호와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역대하 20:18-9)
누가복음에서는: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6:23)
예수께서...손을 들어 축복하시더니(24:50)
바울에 의하면: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에베소서 2:14-5)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디모데전서2:8)
요한은 계시록에서: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7:9, 11)
영어로 “예배(worship)”라고 번역된 유대나 그리스 말의 의미를 보면 대부분 동작을 나타내는 단어들이다. 구약성서에서 사용된 유대의 용어는 굽혀 절한다는 의미의 샤하아(sahah)이며, 신약성서에서 사용된 그리스 용어도 대개 굽혀 절하거나 엎드리는 것, 그리고 입맞추는 것을 의미하는 프로스퀴네오(proskyneo)이다.
물론, 우리의 마음이 들어 있지 않는 움직임은 예배가 되지 못한다. 그 때의 움직임을 습관적이고 공허한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바울은 우리의 몸을 예배안에서 거룩하게,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드리라고 권한다. 이것은 마음과 뜻, 목숨(영혼)과 힘이 다 포함되는 것을 의미하며 바울이 “영적예배”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전체적인 것을 온전히 드리는 것을 말한다.
3. 교회에서의 춤과 움직임을 사용하는 이유
1) 우리의 모든 존재로 예배
춤은 우리의 모든 것, 즉 우리의 말과 침묵, 힘과 행동, 그리고 우리의 몸을 산제사로 드리며(로마서 12:1) 우리의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으로(마가복음 12:30) 예배를 표현하는 의미깊고 상징적인 방법이 된다.
성경속에서 우리는 그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대하여, 우리 중 한사람으로서 육체를 입고 태어나 우리를 육적, 영적으로 구속하시고(십자가 위에서) 부활의 몸으로 일어나신 것을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는 육체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키워왔다. 이것은 육체와 영혼을 구분시켜 육체는 열등한 것이며 방해물이라고 간주한 플라톤의 철학으로부터 초대교회가 영향을 받게 되면서부터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에서 사람을 만드시고(창세기 1:27) 하나님은 당신이 만드신 모든 창조물을 보시고 심히 좋다고 말씀하셨다(창세기 1:31).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이 선한것이며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진다면 거절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몸을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선하고 성스러운 것이 될 수도 있고 악하고 불결한 것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성서는 육체가 부정적인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매우 특별한 장소라고 언급한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다(고린도후서 6: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안에 거하시는 것을 할지 못하느냐...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린도전서 4:16)
그러므로 성경은 육체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살아있고 거룩한 찬미의 제사로써 우리의 몸을 드릴 것을 이야기한다.
그런즉 너희는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린도전서 6:20)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로마서 12:1-2)
춤에 있어서 표현 수단은 몸이다. 성경은 이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고 권면한다. 춤은 신체 안에 영적 신앙심을 행동화시키고 영적, 신체적 행동을 유효화시키는 수단이기 때문에 인간의 영적 잠재력을 신체적인 면에 나타내는 예배의 수단으로 효과적일 수 있다.그래서 예배 가운데 춤추며 찬양할 때 춤은 하나님과 우리를 더 가까이 연결시켜 준다. 무엇이든지 하나님과 친교를 느끼게 하는 것은 신성한 것이 될 수 있다.
2) 창조적 인간
하나님 우리의 창조주는 그의 형상으로 우리를 만드셨고(창세기 1:27) 그와 함께 창조적인 특성을 우리에게 주셨다. 무용은 신체를 사용하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보편적이고 비용이 들지 않는, 언제나 즉시 유용한 ‘움직임’이라는 표현매체를 통하여 창조성을 발휘하도록 허락받은 수단이다. 강습회에서 춤을 전혀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움직임을 연결해 찬양하며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것들을 표현하며, 그들 자신이 너무나 즐거워하고 그 과정속에서 성취감을 느끼는 것을 볼 때 대단히 큰 감동을 받는다.
하나님의 창조는 아름다움과 상상력이 풍부한 다양성, 색채, 그리고 움직임으로 가득차 있다. 우리는 그러한 창조의 일부이며 우리의 춤은 그러한 하나님의 창조적인 특성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은혜와 활력을 줄 수 있다.
3) 인간의 감정과 시각적 요소
교육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은 듣기만 하는 것보다 직접 참여하여 행동으로 할 때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우며 또한 많은 말을 필요로 하는 것도 시각적인 그림을 사용할 때 보다 빨리 내용 전달이 된다고 한다. 직접 움직이거나 강습회에 참여하는 것은 그 사람 전체를 포함시켜 변화시키고 치유시키며, 가르치는 방법으로도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 된다. 우리는 신체표현에 있어 자주 억압당하는 경우가 있지만 때때로 움직임을 통해 깊은 치유와 통찰력, 굉장한 해방을 발견하게 된다.
오늘날과 같이 이렇게 텔레비전과 마케팅 기술이 세련된 시대에는 사람들이 강한 시각적 효과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과거에 했던 것처럼 언어 하나만으로는 사람들의 주의를 끌며 효과를 얻는데 다소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춤은 보고 느끼는 감정이나 상태를 그 자리에서 즉시 표현할 수 있다. 춤은 그 자체로 언어이며 말로 적절히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하고, 그 밖에 어떤 것으로도 하기 어려운 인간의 영혼의 접촉까지도 가능하게 해준다. 더욱이 움직임은 어린이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가르치는데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된다. 어린이들은 움직임을 통해 성경의 이야기나 진리를 배울 때 훨씬 더 이해를 쉽게 하며 기억도 잘 하게 되기 때문이다.
4) 축제의 신앙
춤과 움직임은 우리에게 새로운 표현의 자유를 가져다주고, 거기에는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축하하는 축제의 기쁨과 일상생활에 활기를 가져다주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에 적극 활용되어져야 한다.
5) 공동체 의식
신구약에 걸쳐 하나님의 백성들은 언제나 집단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애굽으로부터 구출받은 이후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시내산에서, 가나안에서, 그리고 호렙산에서 함께 모였으며(역대하 30:13),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며 기념하는 여러 가지 절기들은 민족적 단위로 함께 모여 함께 참여하는 공동의 행사들이었고, 신약에서도 예수님이 사역하고 가르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 때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고, 사도행전을 통해 보면 초대교회도 흩어진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모이기 힘든 상황을 고려하여 당시 상황에서 서로 모일 수 있게 하기 위해 각 지역의 회당에서 공동예배를 드렸다.
기독교는 대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음을 강조하고 이를 특별한 은혜로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함께 하는 공동체적인 의식과 예배를 더욱 강조하면서 공동예배의 전통을 이어온다. 기독교 예배는 본질적으로 공동체적인 행위이다.
그런데 춤은 그 공동체 의식을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 또한 그 자체가 공동체적인 성격을 띠고 또한 결합을 표현하고 촉진하는 사회적 활동이다. 함께 추어지는 공동수행에 있어 무용은 행복의 느낌을 유발하고 기쁨을 자극하며 친목과 공동의식을 유발한다. 사람들이 서로 보며 함께 춤을 출 때는 공동으로 수행되는 춤을 통하여 그 단체의 일원임을 인식하며 소외감에서 탈피하고 소속감을 갖게 해준다. 그러므로 춤은 교회에서 공동체적인 예배를 위해 한 몫을 담당할 수 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춤을 통해 우리의 모든 존재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고, 우리의 내면에 있는 하나님이 주신 창조성이 개발되어질 수 있으며, 가르치는 방법으로도 춤은 시각적 효과와 체험에 의해 학습자에게 가장 효과적인 전달 방법이 될 수 있다. 또한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활력소가 되며 친목도모와 공동체 의식을 유발하여 조화로운 공동체를 창조할 수 있다.
우리는 춤이라는 도구를 통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과 경배를 표현하며 주님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마치 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와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식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춘다면 춤출 수 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영역에 대한 최상의 척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한 다음과 같은 바울의 권고인 것 같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린도전서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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