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셋 족속(the Philistines)
< 역사 배경 >
1. 명칭(名稱)
"블레셋"(tv,l,P:펠레쉣) 또는 "블레셋 사람"(~yTiv.liP.:펠리쉐티)이란
명칭(名稱)은 그 어원(語原)을 셈어(Semitic)에서 찾을 수 없다.
대신 라암셋 3세(歲) 당시(當時)의 이집트 기록에서
그 어원(語原)을 찾을 수 있는데 "프로스트"(Prst)이다
그것은 곧 라암셋 3세 통치(統治) 8년(年)째 이집트를
침공했던 "바다 백성"(sea Peoples)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앗시리아의 문헌에서도 유사한 어원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해양(海洋) 민족(民族)"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필리스티"(Pilisti)와 "팔라스투"(Pala-stu)이다.
아무튼 히브리어 "펠레쉣"은 블레셋인들이 차지했던 가나안
서남부의 평야 지대 곧 블레셋족의 영토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오늘날 팔레스틴(Palestine)이란 지명(地名)도
바로 이 명칭(名稱)에서 유래(由來)한 것이다.
2. 기원(起源)
블레셋 족속(族屬)의 기원(起源)은 아직까지도
정확(正確)하게 규명(糾明)되어 있는 바가 없다.
다만 성경이 블레셋(Philistines) 족속을 갑돌(Caphtor)
출신(出身)으로 언급(言及)하고 있을 뿐이다(렘47:4, 암9:7).
갑돌은 에게해에 위치한 오늘날의 크레테(Crete) 섬이다.
이러한 성경(聖經) 기록은 블레셋 연안(沿岸)의 일부 지역을
"그렛 사람의 남방"(삼상30:14)으로 부른 것과 조화를 이룬다.
한편 이집트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후기 청동기 시대(B.C. 1550~1200년)
말엽(B.C. 12, 13세기 경)에 헷 족속(The Hittites)을 멸망시켰으며 시리아
북부 연안 지방(地方)을 휩쓸어 버린 데 이어 라암셋 3세 통치(統治) 기간
중에 이집트를 공격(攻擊)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에 대하여 오늘날 사가(史家)들은 이러한 블레셋 족속의
원정(遠征)을 B.C. 2000년대(年代) 후반기부터 시작(始作)된
지중해 동부 연안(沿岸)과 유럽 남동부 지역(地域)의 민족(民族)
대이동(大移動)에 따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하여 이집트에서 저지를(沮止) 당하자 대규모(大規模)로 팔레스틴
해안 지역으로 건너와 그 곳에 정착하여 살기 시작한 것으로 단정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미 아브라함 당시(B.C. 2166~1991년)부터
블레셋 족속(族屬)이 팔레스틴(Palestine)에 거주(居住)한 것으로
언급(言及)되어 있다(창21:32, 34).
이는 저들이 이스라엘 족장 시대(B.C. 2166~1085년)때부터 조금씩
팔레스(Palestine)틴으로 이주(移住)해와 그랄 지역(地域)을 중심으로
정착(定着)하기 시작하다가 B.C. 12, 13세기 경(更) 본격적인 이주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3. 영토(領土)
블레셋인들의 영토는 남쪽 가사에서부터 북쪽 욥바까지 이르는
팔레스틴 남서부의 좁다란 해안(海岸) 평야(平野) 지대(地帶)였다.
이 곳은 일부 모래 언덕 지대를 제외하고는 토질이 비옥하였으며
내륙(內陸) 지방과 달리 높은 산(山)도 형성(形成)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자연히 도로망(道路網)과 도시(都市)가 발달(發達)하게 되었다.
이집트에서 지중해변을 따라 계속 북쪽으로 올라가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당시의 국제(國際) 도로(道路)인 "해안 도로"(Coast Road)가
바로 이 지역(地域)을 통과(通過)하였음은 그 좋은 일례(一例)이다.
한편 블레셋에는 다섯(五) 개(個)의 주요(主要) 성읍(城邑)이 있었다.
그것들은 곧 가드, 가사, 아스글론, 아스다롯, 에그론이다(수13:3).
이 중 가드와 에그론은 비교적 내륙 쪽에 위치하였으며
아스글론은 직접 지중해안에 맞닿은 항구(港口) 도시였다.
그리고 아사와 아스돗은 각기 항구(港口)를 갖고
있었긴 하나 지중해서 약간(若干) 떨어져 있었다.
4. 문화(文化)
① 정치 조직 : 블레셋은 5대(五大) 성읍(城邑)의
수장(首長)인 다섯 방백(方佰)들에 의해 다스려졌다.
이들 각(各) 방백은 민사권 뿐 아니라 군(軍) 통수권까지
갖고서 자신의 성읍(城邑)은 물론 인근 마을들도 다스렸다.
그리고 블레셋 전체의 공동 이익을 위하여 서로 협의하였다.
이처럼 다섯 방백들이 연합(聯合)하여 블레셋을 다스렸던 것은
상당(相當)한 효율성(效率性)과 단합(談合)된 힘을 가져다 주었다.
때문에 강력한 중앙 통치(統治) 기구를 갖지
못한 때의 이스라엘에 큰 위협(威脅)이 되었다
② 언어(言語) : 블레셋인들이 사용하였던 언어(言語)나
문자(文字)에 대하여서는 정확(正確)히 알려진 바가 없다.
대신 저들의 이름이 주로 셈어였던 것으로 보아(예를 들면 "하눈")
팔레스틴에 이주한 뒤 곧 셈어를 차용해 썼다고 추정할 수가 있다.
그러나 블레셋 왕(王)의 호칭(呼稱)인 아기스(Achish)는 비셈어이다.
그리고 방백(方佰)을 의미(意味)하는 "세라님"(~ynEr,s,) 역시 비샘어이다.
그러므로 블레셋인들의 본래 언어는 인도-유럽 계통의 말이었던 것 같다.
③ 종교(宗敎) = 블레셋인들의 종교(宗敎)에 대해서는
성경(聖經)을 통해 단편적(斷片的)인 사실만 알 수 있다.
그들은 가사와 아스돗에 다곤(Dagon) 신전을 두고 있었으며(삿16:21,
23, 삼상5:1~7) 아스글론과 벧산에 아스다롯(Ashtaroth) 신전(神殿)을
두고 있었다(삼상31:10).
그리고 에글론에는 바알세붑(Baal-Ze-bub) 산전이 있었다(황하1:2, 3).
그런데 다곤, 아스다롯, 바알세붑은 모두
고대 셈족이 처음으로 섬기던 신(神)이다.
따라서 블레셋인들은 팔레스틴에 정착(定着)한
후(後) 이 신(神)들을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④ 문명(文明) = 블레셋에 관한 고고학적(考古學的)
연구(硏究)는 지금까지 그다지 활발(活潑)하지 못했다.
그러나 블레셋인들에 관(關)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이집트의 메디넷 하부(Medinet Habu) 그림을 보면 저들이
일찍부터 마차(馬車)와 병거(兵車), 선박을 사용(使用)했음을
알 수 있다.
저들의 선박은 구조가 특이하여 이물과
고물은 높으며 용골판(龍骨板)은 굽어 있다.
그리고 전사들은 갓털 장식이 달린 모자를 쓰고
짧은 스커트를 입은 모습으로 묘사(描寫)되고 있다.
한편 블레셋인들은 금속 세공술(細工術)이 뛰었다.
오늘날 저들의 유적(遺蹟)에서는 매우 정교(精巧)한
금은 세공품(細工品)들이 종종 발굴(發掘)되고 있다.
그리고 저들이 팔레스틴에서 오랫동안 철기(鐵器) 문화를
독점(獨占)하고 있었음은 의심(疑心)할 여지(餘地)가 없다.
이와 관련 성경(聖經)은 사울 당시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인들이
블레셋인들에 의(依)해 철기(鐵器) 산업을 통제당하고 있었다고
증거(證據)하고 있다(삼상13:19~22).
또한 고고학적으로 쇠(鐵)를 녹이는 용광로가 블레셋인들이 거주했던
팔레스틴 서남부(西南剖) 해안(海岸) 지방(아스돗, 아인 셈스, 텔예메,
텔 카실레)에서만 주(主)로 발견(發見)된 점에 의해 충분히 뒷받침된다.
이외에 오늘날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블레셋인들의 도기(陶器)이다.
저들의 유적지에서 발견(發見)된 도기들은 팔레스틴 후기 청동기 시대
지층(地層)에서 발견된 미케네 및 키프러스 양식의 도기류와는 다르다.
대신 저들은 에게해를 떠나 남하(南下)하던 중 오랫동안
영향(影響)을 받은 여러 문화적 양식들이 반영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것들로는 꼭지와 여과기가 달린 담황색 주전자,
손잡이가 달린 술잔, 기하학적(幾何學的) 무늬나 새들을 그려
넣은 항아리 등이 있다.
결국 이상과 같은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블레셋 족속의 문명 수준은
그 당시의 이스라엘의 수준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저들의 뛰어난 문명(文明) 과 정치(政治) 조직등은 오랫동안
팔레스틴에 대한 지배를 가능(可能)하게 해주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5. 역사(歷史)
① 족장 시대로부터 다윗 통치까지(B.C. 2166~970년) :
블레셋인들은 이스라엘 족장 시대(B.C. 2166~1805)부터
이미 팔레스틴(Palestine)에 이주(移住)해 와 그랄 지역에
정착(定着)하였다(창21:32, 34).
그러다가 B.C. 12, 13세기 경에 대규모로 팔레스틴에
이주해 와 서남부 해안(海岸) 지방(地方)에 정착하였다.
이때 블레셋인들은 팔레스틴(Palestine)을 지배(支配)하던
이집트의 승인(承認)을 얻어 속국(屬國)으로 지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블레셋인들이 이스라엘인과 충돌하게 된 것은
이미 이스라엘(Israel)이 가나안 정복(征服), 정착(定着)해 있던
데 따른 영토(領土) 문제(問題) 때문이었다.
이같은 충돌에 대(對)한 최초의 언급은 사사 삼갈(삿3:31) 및
입다(삿10:7~9), 삼손과 관련해서 나타나고 있다(삿13~16장).
그러나 이 무렵 블레셋인들은 단과 유다 지파를
억압(抑壓)하는 위치(位置)에 있었다(삿14:4, 15:11).
그리하여 블레셋인들을 물리치지 못한 단 지파(枝波)는
북(北)쪽으로 이주하기까지에 이르렀다(삿18:11, 27~29).
당시 철제(鐵製) 무기를 지니고 있던 블레셋 족속들은
팔레스틴(Palestine)에서 점점 더 위세(威勢)를 떨치었다.
때문에 엘리 시대의 이스라엘은 블레셋 족속의 침공(侵攻)을
저지(沮止)하려고 했지만 실패(失敗)하고 말았다(삼상4:1~10).
그러다가 사무엘 시대에 이르러 이스라엘은 처음으로 블레셋
족을 물리치고 실지(失地)를 회복(回復)하게 된다(삼상7:7~14).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블레셋 족속은 여전히 이스라엘
곳곳에 수비대를 설치(設置)할 만큼 계속적으로 세력(勢力)을
만회(挽回)해 나갔다(삼상10:5, 13:3).
이에 사울 당시 이스라엘은 반격을 시도,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르는 상당(相當)한 성과(成果)를 거두었다(삼상17:41~54).
그러나 이 일로 인해 사울의 시기를 사게된 다윗은 결국 블레셋
족속,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망명(亡命)하게 되었으며(삼상27장),
그 와중에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대규모 침공(侵攻)을 당해 사울이
전사(戰士)하는 등 대패(大敗)를 당하고 말았다(삼상31:1~6).
한편 사울의 죽음 이후 블레셋 땅에서 이스라엘로 되돌아온
다윗은 유다 지파(枝波)의 왕(王, 삼하2:1~4)에 이어 마침내
온 이스라엘의 왕위(王位)에 올랐다(삼하5:1~5).
그러자 블레셋 족속은 이스라엘에 대한 계속적인 지배권을 늘려
이스라엘을 침공(侵攻)하였는데 도리어 다윗에게 결정적(決定的)인
패배(敗北)를 당하고 만다(삼하5:17~25).
그리하여 블레셋은 이스라엘에 대(對)해 종속적인 위치(位置)로
내려앉고 말았는데 그같은 상황(狀況)은 솔로몬때까지 이어졌다.
② 솔로몬 시대 이후(B.C. 970~560년) :
솔로몬 당시 이스라엘의 영토는 유프라테스 강(江)으로부터
블레셋 족속의 땅과 애굽 국경(國境)까지 이르렀다(왕상4:21).
비록 남서부 해안(海岸) 지방은 계속 블레셋의 통치하에 있었으나
다윗이 빼앗았던 가드(대상18:1)는 솔로몬 시대(時代)에도 여전히
이스라엘의 관할하(管轄下)에 있었다(왕상2:39, 40).
그런데 이스라엘 분열 왕국 시대에 이르러 블레셋 족속은 기회를 봐,
때로 조공을 바치는가 하면 때로 이스라엘에 대적(對敵)하기도 하였다.
유다 왕 여호사밧이 블레셋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는가 하면(대하17:11)
그의 아들 여호람이 블레셋족의 침공(侵攻)을 받은 것(대하21:16, 17)은
그 대표적(代表的) 일례(一例)이다.
한편 이러한 와중에 세계적인 제국으로 부상한 앗수르는
마침내 팔레스틴 전역(全域)에 영향력(影響力)을 행사하였다.
그리하여 아하스 치하의 남유다 왕국을 속국으로 삼았으며
B.C. 722년에는 북이스라엘 왕국(王國)을 멸망(滅亡)시켰다.
그러나 이후(以後) 앗수르가 쇠퇴(衰退)하자 블레셋이
여러 성읍들은 일시적(一時的)으로 이집트하에 놓였다.
그러다가 바벨론 제국이 등장하자 최후의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는데
느부갓네살 왕이 블레셋 성읍(城邑)을 빼앗고 그 통치자들과 백성들을
국외(局外)로 추방(追放)하였기 때문이다(B.C. 560년).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블레셋인들과 관련(關聯)하여
단지 "팔레스틴"이란 이름만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 그랜드 종합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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