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역경의 열매] 김선도 <2> “주님처럼 병든 자 치유” 의학전문학교 입학

열려라 에바다 2018. 8. 7. 09:34

[역경의 열매] 김선도 <2> “주님처럼 병든 자 치유” 의학전문학교 입학

북녘은 공산주의 물들며 교회 수난… 외투에 숨긴 성경 들켜 밀고당해

 

[역경의 열매] 김선도 <2> “주님처럼 병든 자 치유” 의학전문학교 입학 기사의 사진
김선도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준 부친 김상혁씨와 모친 이숙녀씨.

중학교 시절은 자연과학적 사고방식과 신앙 열정이 충돌하던 시기였다. 나는 문학보다 생물학과 같은 과학에 마음이 끌렸다. 당시 평안북도 선천 동교회에 출석하며 학생회에서 전도하거나 주일학교 어린이를 가르쳤다.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자연과학적 사고와 기독교 신앙은 아무래도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고민 끝에 의사가 되기로 진로를 결정했다. 의학이라는 체계적 과학, 의술을 통해 예수님처럼 병든 사람을 고치고 소외된 사람을 돌보는 일이 내게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과학적 사고방식과 예수님처럼 살고 싶은 신앙 감수성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1945년 해방을 맞고 2년 뒤 신의주의과대학의 전신인 신의주의학전문학교에 지원서를 냈다. 경쟁률은 5대 1이었다. 합격할 수 있을까 걱정됐다. 간절히 기도했다.

‘주님, 저는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저는 자를 걷게 하고 눈먼 자를 보도록 치유하신 주님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세요. 고통받는 이 시대의 병든 자를 주님처럼 치유하는 훌륭한 의사가 되게 해주세요.’

1948년 신의주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당시는 남과 북이 이미 갈린 상황이었다. 북한은 공산주의 당파성을 갖고 계급을 구분하며 차별했다. 신의주 일대를 비롯해 북한 전체가 공산주의 사상으로 도배되고 있었다.

교회 십자가가 서서히 뽑혀 나갔다. 일부 교회에선 강대상이 치워졌다. 건물마다 온통 붉은 글씨의 선전문구가 붙기 시작했다. 낯선 공산체제를 3년간 경험해 보니 하나님을 향한 예배 열망이 더욱 거세졌다.

‘이 낯선 체제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교회와 신앙을 핍박하고 인간의 생명과 자유를 물질적 이념과 사상으로 억압하는 공산주의는 하나님나라와 거리가 멀다. 주님, 어찌 일제 치하 36년의 억압을 갓 뚫고 온 우리 민족에게 공산주의라는 더욱 어두운 터널을 지나게 하신 것입니까.’

부르짖어 간구하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비통함이 컸다. 찬양을 마음껏 부르지 못하고 숨죽이듯 토해내야 하는 답답함이 컸다. 공산주의 체제에 숨이 막혀 질식할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나는 동일한 기도문을 일기장에 반복해서 썼다. “하나님, 모세와 같은 지도자를 이 땅에 보내주시옵소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입니다. 하나님을 자유롭게 섬길 수 있는 자유를 주십시오. 이 땅에 모세와 같은 신앙의 지도자를 주셔서 거짓 이념과 생명을 억압하는 이 공산주의의 사슬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옵소서.”

일기장은 자물쇠가 있는 서랍 깊은 곳에 숨겨 놨다. 하루는 수요예배에 몰래 참석하려고 두꺼운 외투 속에 작은 성경을 숨겨 놓았다. 당시 신의주는 영하 30도 이하로 내려가는 날이 많았다. 같은 반 친구가 코트를 빌려 달라 했는데 그 속에서 성경을 발견하고 말았다. 그 친구는 가차 없이 나를 학교에 고발했다. “어이, 김선도. 의학도가 교회를 다닌다는 게 말이 되나. 과학을 한다는 사람이 기독교를 믿는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그 친구는 내 책상을 뒤져 일기장까지 찾아냈다. 반동분자라며 나를 공개적으로 몰아갔다. 학교에선 자아비판을 강요했다. 갖은 말로 모멸감을 줘 정신적 고통이 심했다. 그 여파로 등록금의 50%나 되는 장학금이 없어졌다. 그 일을 겪고 난 뒤 모세 같은 지도자를 갈망할 게 아니라 월남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