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침례교회사? (허 긴 저)
이 땅에 처음으로 침례교의 역사를 펼친 펜윅 선교사는 일제(日帝) 시대를 거치면서 신사참배 반대 및 세상 학문에 대한 교육금지 등 반문화적(反文化的)인 선교정책을 추구해 왔다. 이에 따라 대한기독교회와 초창기의 교단 지도자들은 지성적 소양이 부족하였으며, 문서 기록이나 역사 기록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던 교단 전통을 지녀왔다. 그러므로 한국 침례교는 원천적으로 사료(史料) 채집에는 빈곤과 한계성을 면할 수 없는 제한성을 지녀왔으며 또한 1941년의 이른바 “원산사건”으로 교단총부의 보관 문서 일체가 일본 관헌에 압수되어 소진(燒盡)되는 비운을 간직하고 있다. 또 8․15 해방과 함께 남북 분단의 결과는 북한․만주․간도․시베리아 등지의 교회의 상실과 단절(斷絶)을 초래했고, 곧이어 발발한 6․25 동란은 그나마 남한의 교회와 신도들의 누옥(陋屋)들에 잔존하였던 사료들을 거의 회진(灰塵)시켜 버렸다. 그러므로 “지난 70여 년 간 이 교단은 살아온 세월은 있으나 살아온 역사는 없는 교단 현실을 이어왔다.”
제1장 펜윅 선교사와 초기 선교활동(1889~1895)
펜윅의 선조는 스코틀랜드 사람이며 일찍이 캐나다로 이민하여 토론토에 정착하였으며, 1863년에 아키발드 펜윅의 열한 자녀 가운데 열째로 태어났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대한제국(大韓帝國)에 펜윅(Malcolm C. Fenwick․片爲益, 1863~1935) 선교사가 선교의 첫발을 들여놓은 것은 1889년 12월 8일이다. 이것은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한국에 도착한 1885년보다 4년이 늦은 해였다. 펜윅은 캐나다의 독립선교사로 토론토의 몇몇 실업인들이 1888년 10월에 조직한 한국연합선교회(Corean Union Mission)의 도움으로 1889년 12월에 홀로 한국선교 길에 올랐다(당시 나이 26세, 독신). 펜윅과 함께 소래로 떠났던 한국인은 본래 소래 사람으로서 그의 어학 선생이 된 서경조와 또 한 사람은 바로 안대벽의 집이었다. 펜윅은 그 곳에서 한국어를 공부할 때 자신은 영어 성경으로, 한국인에게는 중국어 성경을 주어 성경공부를 하는 방법으로 우리말을 익혀 나갔다. 펜윅은 1891년 가을에 소래를 떠나 함경도의 원산으로 자리를 옮겨 정착함으로써 한국 개신교 역사상 최초로 원산에서 선교사업에 착수한 인물이 되었다.
펜윅은 1892년에 원산에서 요한복음을 한국어와 한문으로 병행하여 발행했다. 펜윅의 제2차 귀국(1893년) 이전의 원산 사역은 앞으로 자신이 수행할 선교사역의 자립적이며 토착적인 토대를 모색하고 구축하는 일에 전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펜윅의 한국순회선교회:1893년에 귀국한 펜윅은 1896년 봄에 다시 한국에 돌아오기까지 3년간 캐나다와 미국에 머물렀다. 펜윅이 귀국한 이후 1894년부터 고든 목사가 운영하는 보스톤 선교사 훈련학교에 참석하면서 고든 목사 그리고 그 학교에서 선교 훈련을 받고 있던 여러 동료와 맺었던 인간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짐작된다.
1894년에 펜윅은 엘라 씽 기념선교회의 최초 선교사로서 1895년에 한국에 파송되었던 파울링(E. C. Pauling)과 함께 당시 유명한 침례교의 목사인 고든 목사와 한국에 피어선 기념성경학원(1912)을 세운 피어선(Arthur T. Pearson) 목사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았다. 1896년 봄에 펜윅은 한국순회선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의 자격으로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엘라 씽 기념선교회:엘라 씽 기념선교회(The Ella Thing Memorial Mission)의 설립은 한국침례교회의 초기 선교에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선교회의 설립은 미국의 보스턴에 있는 클라렌돈 스트리트 침례교회(The Clarendon Street Baptist Church)의 고든(A. J. Gordon, 1836~1895) 목사의 선교에 대한 열정과 이 교회의 헌신적인 집사이면서 성공적인 사업가였던 씽(S. B. Thing)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고든 목사와 씽 집사는 1895년에 엘라 씽 기념선교회를 조직했다. 선교위원회는 보스톤 선교사 훈련학교 출신인 파울링(E. C. Pauling) 목사 부부와 가데린(Amanda Gardeline) 양을 제1진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하기로 결정하고 1895년 초에 먼저 파울링 목사를 파송하였다.
엘라 씽 기념선교회의 의의:엘라 씽 기념선교회는 한국의 침례교 역사에서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는, 이 선교회는 명실공히 한국 땅에서 시작된 침례교회 선교사역의 효시였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최초의 침례교회의 선교사업은 바로 이 엘라 씽 기념선교회의 사역에서 시작된 것이다. 둘째로, 이 엘라 씽 기념선교회의 선교사업은 처음부터 자급 자족적이며 토착적이고 자립적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선교회의 한국 사역은 한국침례교회 역사의 근원지가 충청남도의 공주․강경․칠산 지역이었다는 사실을 실증해 주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한국침례교회 역사에서 엘라 씽 기념선교회의 의의는 새롭게 조명되고 평가되어져야 할 것이다.
제2장 개척선교 시대(1896~1905)
펜윅은 1896년 4월에 캐나다에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스테드맨 선교사는 1901년 4월에 한국을 떠나면서 엘라 씽 기념선교회의 충청도 공주․강경․칠산 지역의 선교사업을 원산에 있는 펜윅에게 물려주고 돌아갔다. 따라서 펜윅이 돌아온 1896년 4월부터 그가 엘라 씽 기념선교회의 사업을 인수한 1901년 4월 전까지는 그가 조직한 한국순회선교회의 사역을 5년 동안 한국에서 시험적으로 운영했던 기간이었다. 펜윅이 한국 사람과 직접 상종하면서 본격적인 한국선교사역에 들어간 것은 이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펜윅과 1897년의 소래부흥회:한국 개신교 역사상 그 유명한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서 일어났던 1907년의 대부흥운동의 양상은 사실상 이보다 10년 전에 황해도의 소래교회에서 먼저 일어났었다. 이때 최초의 토착인 사역자는 신명균(申明均)이었다.
펜윅은 엘라 씽 기념선교회의 재산과 함께 공주와 강경 지방에 있는 많은 신자들을 관리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공주 욱정(旭町)과 강경읍 북정(北町)에 있는 많은 대지와 교회당 그리고 여러 채의 민간 가옥을 얻게 되었다. 이후 두 지방은 대한기독교회(The Church of Christ in Korea)가 조직되는 모태가 되었다.
펜윅의 원산성경학원:1903년과 1906년 즈음에 펜윅은 그의 부인과 보조교사 한 명으로 원산에 있는 그의 집에서 장차 복음사역에 종사할 일꾼을 양성하기 위하여 젊은이 네 명을 택하여 성경학원을 개원했다. 이 성경학원은 그의 한국순회선교회의 토착적 선교사업의 이상을 실현하는 최초의 시도이며 그 실험장이었다.
펜윅이 엘라 씽 기념선교회의 사업을 인수하고 신명균을 이 사업의 책임자로 공주로 파송한 일은 펜윅의 한국선교사업에 있어 하나의 중요한 전기를 이루는 역사적 의미가 담겨 있다. 첫째로, 펜윅은 신명균을 공주로 파송함으로써 원산에 있는 자신의 한국순회선교회와 공주의 엘라 씽 기념선교회의 사업을 실질적으로 하나로 통합하고 일원화한 것이다. 둘째로, 신명균의 충청도 사역은 펜윅의 한국선교사업을 침례교의 선교사업으로 자리잡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 이미 침례교의 선교사역으로 뿌리가 내려진 공주․강경․칠산의 엘라 씽 기념선교회의 사업을 물려받은 신명균이 충청도의 사역을 조직화하고 확장하므로 펜윅의 한국선교사업은 본격적인 기틀과 방향을 잡기 시작한 것이다.
공주침례교회의 시작:공주(公州)․강경(江景)․칠산(七山)은 한국침례교회의 발상지일 뿐만 아니라 교단 역사의 요람지이다. 공주교회의 시작은 1896년 초반에 서울에서 공주읍 반죽동으로 선교지를 옮겨 정착한 엘라 씽 기념선교회의 스테드맨 선교사와 엑클즈 및 엘머 여선교사의 사역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공주 지역의 선교사역은 1896년 초반에 서울에서 이 곳으로 온 스테드맨 선교사의 사역과 더불어 시작되었지만, 공주교회의 실제적인 연혁은 1901년 9월에 신명균과 1902년 연말에 황상필이 공주에 주재하면서 본격적인 전도사역을 시작한 때부터 잡아야 할 것이다.
강경침례교회의 시작:이미 언급한 대로 강경에서 최초의 침례교회의 사역은 1896년 초엽에 파울링 선교사와 가데린 선교사가 강경읍 북옥동에 자리잡고 전도사역에 들어가므로 시작되었다. 파울링 선교사는 이때 서울에서 이미 믿고 침례를 받은 지병석(池炳錫)을 보조자로 데리고 왔다. 이들이 처음 강경에 왔을 때 지병석의 집에서 가정 예배를 보며 사역을 시작했다고 한다. 강경교회는 1896년 초반에 파울링 선교사의 개척과 더불어 시작되었으나 본격적인 교회 성장은 1899년에 스테드맨 선교사가 강경으로 옮겨가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공주성경학원:1903년 2월 10일에 펜윅은 공주에 성경학원을 세우고 신명균을 원장으로 임명했다. 공주성경학원은 초창기 대한기독교회의 사역자들을 배출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을 뿐만 아니라 장차 대한기독교회의 교단 조직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펜윅과 권서순회전도자:펜윅의 “권서순회전도자”는 그의 신앙과 신앙선교 철학이 한국이라는 선교지에서 “오지선교”(奧地宣敎)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생각해낸 그의 토착적 선교 모델인 동시에 토착선교사들이다. 이 당시의 최초의 “권서순회전도자”들은 신명균․황상필 그리고 펜윅과 신명균이 양성한 최초의 성경학원 출신들인 장석천․황태봉․고문중․손필환․박노기․이영구․지병석 그리고 1900년~1903년 기간에 공주․강경․칠산 등지에서 침례를 받았던 신자들이었을 것이다.
이른바 펜윅의 토착적 한국선교사역의 요체(要諦)인 그의 “권서순회전도자”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펜윅의 권서순회전도자는 펜윅의 신앙, 그의 인격, 그의 한국인관 내지는 동양 문화에 대한 이해와 연관된 그의 용인(用人) 철학에 의하여 다듬어지고 순육된 사역자들이었다.
펜윅은 사람을 키우기를 원치 않았으며 결코 인재를 육성하지도 않았다. 그는 한국의 사역자들을 오직 성령의 준비된 도구로만 쓰임 받도록 순육(馴育)하고 연단시킬 뿐이었다. 펜윅은 사람을 쓰고 같이 일함에 있어서 오직 자신의 도그마적 신앙과 성서 일변도의 펜윅적 완벽주의만을 고집하였다. 펜윅이 초인적인 헌신과 신앙으로 무장된 대한기독교회의 “권서순회전도자”를 배출하므로 한국의 교회 역사상 특유의 토착적 선교방법을 창출한 사실은 분명히 기억되어야 할 업적이다. 하지만 펜윅의 권서순회전도자는 이후에 대한기독교회의 교단 조직의 근간을 이루었으나 시대 상황에 대처할 교단의 지도자나 인재로 육성되지 못하고 오직 하나의 “선교 요원”(mission agent)이나 “도구”로 시종일관한 사실은 교단의 부정적 역사를 배태하는 씨앗이 되기도 하였다.
제3장 대한기독교회 시대(1906~1920)
1905년 11월 15일 대한제국(大韓帝國)은 日帝와의 굴욕적인 을사보호조약 체결로 日帝의 한국 통치는 사실상 시작되었고, 마침내 1910년 8월 22일에는 한일합방(韓日合邦)의 국치일(國恥日)을 맞았다. 바로 이 무렵 교단을 조직한 펜윅과 대한기독교회(大韓基督敎會)는 교단의 기초를 다지기도 전에 일제통치(日帝統治) 40년의 험난한 형극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암울했던 40년의 일제식민통치 아래서 대한기독교회는 오직 ‘복음 선교’ 일념으로 북방선교의 황금 시대를 열어갔다. 그 형극의 노정(路程)에서 대한기독교회는 日帝와 공산주의의 흉폭한 마수에 무수한 순교의 피를 이름없이 뿌렸으며 신사참배의 모진 신국(訊鞠)에는 투옥과 죽음으로 항거하다 종국에 가서는 교단 해체의 비운을 맞기도 했다. 이 형극의 세월 속에서 대한기독교회는 ‘권서순회전도자’의 영웅적 신앙과 헌신으로 역사의 명맥을 이어가며 ‘남은 자’(the remnant)의 뿌리를 보전해 왔다
대한기독교회(Church of Christ in Korea)가 조직되기 이전의 공주․강경․칠산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의 사역은 원래 엘라 씽 기념선교회가 선교사역을 펼쳤던 터전으로 기름지고 부유한 농촌 지역이었으나, 펜윅은 1906년부터 산간 벽지 오지(奧地)의 “산골과 빈들”로 가서 복음을 전하도록 전도의 방향을 바꾸었다.
대한기독교회(大韓基督敎會)의 조직:대한기독교회(The Church of Christ in Korea)는 펜윅의 한국순회선교회의 선교철학과 신앙원리가 한국에서 실천적으로 적용되어 이룩된 펜윅의 “신앙선교”의 묘상이며 그 열매이다. 교단의 기본적인 공적 임원(직분)은 감목(監牧)․목사(牧師)․감로(監老)․당원(堂員)이다. 감로와 당원 사이에는 교사(敎師)․총찰(總察)․전도(傳道)․예비전도(豫備傳道)라는 4개의 위계직급(位階職級)이 있었다. 또 당원에도 통장(統長)․총장(總長)․반장(班長)의 3개 위계 직급이 있었다. 또 목사의 반열에 속한 위계에도 원로교우(元老敎友)와 안사(按師)의 방계직분(傍系職分)이 있었다.
대한기독교회의 교직 체제는 감로 이하의 모든 임직(직분)은 각 구역의 당회에 소속되어 있으며 목사 이상의 직분은 교단총부의 본 교회에 속하여 있었다. 교단 사업의 최우선 순위를 복음전도에 두었던 선교 지향적 정책에 따라 전도직인 교사․총찰․전도․예비전도의 직분은 여자 신도들에게도 허락하였다. 대한기독교회에는 대화회(大和會)와 당회(堂會)라는 두 개의 정규적인 공식대회와 임원회(任員會)와 원로교우회(元老敎友會)라는 두 종류의 비정규적인 회의가 있었다.
대화회는 매년 1회씩 9월경에 지정된 장소에서 감목이 소집하는 교단의 정기 총회이다. 이 대화회는 사도행전 2장의 신약성서적인 이상과 신앙정신을 계승하도록 모든 성도의 회중적 모임과 그리스도와 화목(고후 5:19~21)하는 잔치를 펼친다는 뜻을 새겨 “크게 화목을 이룬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대개 회기는 1주일간 계속되며 주의 만찬 예식과 더불어 개회했으며 폐회 때는 언제나 침례식과 결혼 예식 등으로 끝을 맺었다.
교단의 특성과 신앙행습:대한기독교회의 교단 조직의 특성을 살펴보면 오지(奧地) 선교를 목적한 선교 지향적인 교단 조직이었지만 개교회 목회를 중심으로 한 목회 지향적인 교단 조직은 아니었다. 우선 교단 체제가 개교회(Local Church)를 전담하는 유급 목사나 전도자 제도가 없었다. 목사나 전도자는 “순회사역자”로서 특정 교회에 소속하지 않고 전국을 망라하여 한 구역(지방)을 일시적으로 담당하는 무급의 순회목사였다.
제4장 부흥과 교세확장
한일합방(韓日合邦)과 대한기독교회: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은 드디어 이 땅에서 그 이름이 사라지는 망국의 비운을 맞이하였다. 이때 대한기독교회를 철저히 비정치화(非政治化)의 교회와 신앙으로 무장시켰다. 그리고 이 망국의 격변기와 1910년의 한일합방으로 인해 생성된 민족교회와 애국 신앙의 정서를 대한기독교회로부터 완전히 차단시켰다. 그는 한일합방의 민족적 비극을 외면했고 사역자와 신자들에게는 임박한 주님의 재림과 개인 구원을 강조하는 직접전도에만 매진하도록 독려했다.
대한기독교회의 전 역사에 있어서 가장 활발한 교세 확장과 부흥을 가져왔던 전성기는 바로 교단이 조직된 1906년 무렵부터 펜윅이 감독직을 사임한 1914년까지의 약 10여 년 간 이었다. 원산의 총부에서는 1906년에 북간도를 해외선교지로 결정하였으므로 1907년부터는 간도와 시베리아 선교의 관문인 함경도의 나진․경흥․종성․회령 등지를 전도사역의 발판과 교두보로 삼으면서 간도․북만주․시베리아의 연안 지역으로 확장해 갔다. 교단의 제2차 대화회는 1907년 충남 공주구역의 공주교회에서 개최되었다. 구역과 교회개척이 날로 증가되자 사역자의 필요에 직면한 펜윅은 힘을 얻어 원산총부에 성경학원을 개설하고 사역자 양성에 힘썼다.
1908년 2월에 제1차 북간도 순방 전도를 마치고 돌아온 펜윅은 간도(만주)와 시베리아 선교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1909년 제4차 대화회에서 펜윅은 간도를 새로운 구역으로 설정하고 그의 1차 전도여행 때 주님을 영접하고 복음사역에 헌신한 최성업을 중심으로 전도사역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1909년 제4차 대화회는 강경구역 용안교회에서 개최되었다. 본 대화회에서는 그 동안 전국적인 부흥집회와 전도사역에서 놀라운 성과를 거둔 장석천 교사와 손필환 교사를 목사로 세우므로 이제 교단 안에는 한국인 목사가 모두 3명이 되었다.
울릉도의 교회개척:울릉도의 교회개척은 대한기독교회의 오지선교(奧地宣敎)의 진수(眞髓)를 보여 준다. 1910년에 대한기독교회의 전도인들이 울릉도에 선교의 첫발을 들여놓았을 때 한국인은 거의가 산간 벽지로 밀려나 화전(火田)을 일구며 생활 터전을 새로 개척하고 있었다. 대한기독교회의 울릉도 교회개척은 1892년 8월 17일에 울릉도에 입도(入島)한 경북 영천 출신인 김창규(金彰奎)가 대한기독교회의 전도인 김종희를 만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울릉도의 교회개척은 저동교회․석포교회․홍문동교회․평리교회․서달교회 순으로 개척되었다. 1915년의 조사리 대화회에서는 울도(울릉도) 구역을 설정하였다.
전도인과 전도사역:대한기독교회의 전도인(권서순회전도사)은 펜윅 감목에 의하여 준비된 “하나님의 도구”인 동시에 교단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핵심 요원이며 정예 부대였다. 대한기독교회가 대화회나 당회를 개최하면 제일 중요하게 다루는 과업이 “전도인”을 택하여 세우는 일이었다. 대한기독교회의 교단 사업의 요체(要諦)는 바로 복음전도와 그 전도자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또 전도자에게는 성서 보급과 구령 전도가 복음사역의 알파이며 오메가였다.
펜윅은 전국의 주요 도시의 요충지에 성경책사를 설치하고 원산총부의 지시에 따라 서울에 있는 미국성서협회의 한국 지사가 각 성경책사에 성경과 전도지 ?만민됴흔긔별? 그리고 전도인의 노비(路費)를 지급하는 체제로 선교사업을 추진하였다.
제5장 교권파동과 이종덕 감목
1914년 12월 원산의 총부교회에서 개최된 제9차 대화회는 대한기독교회의 역사에 있어 교권파동이라는 하나의 중대한 사건을 야기시켰다. 1914년의 원산 대화회에서 교단의 모든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펜윅이 제2대 감목의 자리를 이종덕(李鍾德) 목사에게 물려주자 이 일은 지금까지 순탄하게 성장과 확장세로 일관해 오던 대한기독교회에 교권파동이라는 예상 밖의 파란을 몰고 왔었다. 이종덕을 제2대 감목으로 선임한 펜윅의 처사에 정면으로 반발하여 교단을 탈퇴한 신명균과 또한 펜윅의 처사에 크게 거부 반응을 일으켰던 손필환과 김규면 등은 모두가 펜윅의 충실한 제자들이었다.
신약전서 번역과 원로교우회(元老敎友會) 설치:펜윅은 1915년 10월에 원산에서 대한기독교회의 ?원산 번역 신약젼셔?를 완역함으로써 한국 개신교의 성경 번역 사상 개인이 한글로 신약전서를 완역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포교계 제출 사건:대한기독교회가 조직된 이후 교단이 日帝의 관헌(官憲)과 부딪친 최초의 사건이었다. 이 포교규칙은 포교계․포교원․포교자 명단․포교관리자․설치계․포교소 설치원․신도교계 등 여러 양식을 제정하여 교회와 신자들의 생활을 조직적으로 규제하고 감시하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되었다.
제6장 북방선교와 교단의 재흥
제12차 종성동 대화회는 대한기독교회가 한반도를 벗어나 국외(國外)에서 대화회를 개최한 최초의 대화회였다. 이 대화회는 대한기독교회의 북방선교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역사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대한기독교회는 1918년에 처음으로 순직자를 배출했다. 교단은 1918년의 원산 대화회에서 복음사역이 활발하게 확장되어 가던 간도․시베리아 지역의 전도사역을 지원하기 위하여 박노기(朴魯琦) 목사․김희서(金希西) 교사․최응선(崔應善) 감로․김영태(金永泰) 총찰을 그 지역에 선교사로 파송했다.
3인 전도기(傳導記):3인 전도기의 주인공들인 신성균 목사․박기양 목사․노재천 목사는 모두가 경상북도의 점촌과 예천에서 출생하여 대한기독교회의 순회전도 사역으로 일생을 마쳤던 동향인이었다.
3․1 독립운동과 교회:1918년 후반에 日帝는 포교계 제출을 거부한 대한기독교회에 대하여 교회 폐쇄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한반도 안에 있는 대한기독교회는 모두 폐쇄되고 말았다. 대한기독교회는 3․1운동의 민족적 의거에는 머리를 돌린 채 펜윅의 세속 기피의 신앙에 순치(馴致)되어 오직 임박한 재림의 복음만을 들고 북녘 이역(異域)의 “빈들과 산골”을 헤매기에 여념이 없었다.
제7장 신약성서 출판과 문서 사역
펜윅과 원산 번역 ?신약젼셔?:1919년 10월 18일에 발간된 대한기독교회의 원산 번역 ?신약젼셔?는 한국 개신교의 성서 번역사에 하나의 독보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원산 번역 ?신약젼셔?는 한국에서 개인이 신약성서 전서를 한글로 완역한 최초의 성서였다. 최초의 성서 번역 작업에서 펜윅은 성서 원어의 뜻과 정신을 살려 “세례”를 “침례”의 원어 발음인 “밥테례”(bapti,sw)로 바로잡고 있으며, 또 신(上帝)의 명칭을 순수한 한국어의 토착성을 살려 “하님”으로 번역 표기함으로써 철저한 성서주의 신앙과 토착 정신의 일면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1893년에 펜윅은 앞서 1891년에 간행했던 ?요한복음전?을 수정하여 ?약한의 긔록로 복음?으로 원산에서 출간했다. 이 새로운 수정본에 보면 “하님”이 다시 “샹데”(上帝)로 번역되었고 또 “처음”을 “원”로 “”는 “ㅊ”로, 또 “니”는 “게시니” 등으로 낱말을 바꾸므로 로쓰역보다 한문 방식의 낱말 표현이 많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특기할 것은 1891년에 “밥테례”로 번역하였던 “침례”를 다시 “세례”로 번역하고 있는 사실이다. 펜윅은 1899년에 ?요한복음?과 ?빌립보서?를 번역하여 합본으로 발간했다.
펜윅은 1915년에 신약성서 27권 가운데 나머지 책들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완료하여 드디어 한국어 신약성경 번역 작업을 완성했다. 그러나 경비가 마련되지 못하여 곧 출간하지 못하고 있다가 1919년 10월 18일에 일본의 요코하마 인쇄소에서 ?신약젼셔?라는 표제로 발간했다. 이 성서가 바로 대한기독교회의 원산 번역이라는 교단 최초의 한국어 신약전서이다. 원산 번역은 한국에서 개인이 최초로 번역한 한국어 신약전서라는 면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찬송가에 대한 펜윅의 이러한 집념으로 1899년에 드디어 14곡으로 된 ?복음찬미?를 처음으로 발간하게 되었다. 펜윅은 ?복음찬미?를 처음 발간하던 1899년에 ?만민됴흔긔별?이라는 전도용 소책자를 동시에 발간했다.
제8장 동아기독교회 시대(1921~1932)
대한기독교회(大韓基督敎會)가 日帝의 강요에 못이겨 교단의 명칭을 동아기독교회(東亞基督敎會)로 바꿀 무렵 동북아시아의 국제적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주변 열강들의 묵계에 의하여 1905년 7월에 미국과 일본간에 체결한 이른바 ‘가츠라-테프트 밀약’(桂-Taft 密約)과 1907년의 ‘러일협상’(Russo-Japanese Entente, 1907~1917)은 마침내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운명을 日帝의 손아귀에 넘기는 한일합방(1910)을 합법화시켰으며, 그후 日帝로 하여금 동북아시아의 대륙 정책을 구체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日帝는 “대한”이라는 교단의 명칭이 국권의식(國權意識)을 상기시키는 인상을 준다고 트집잡아 교단의 명칭 변경을 요구했다. 15년 동안 사용해 오던 교단의 명칭을 “동아기독교회”로 변경했다. 이종덕 감목은 1921년에 간도의 종성동(鐘城洞)교회 안에 성경학원을 설립했다. 이종덕 감목은 종성동교회를 주축으로 만주․간도․시베리아 지역의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사역하고 있던 교단의 목사와 전도자를 총괄 지휘하고 있었다.
순회전도자와 그의 사역:한국교회 역사상 적어도 250개 이상의 교회와 150여 명이 넘는 전도사역자를 거느린 하나의 교단 조직이 재정적 뒷받침이나 수입원을 전혀 마련하지 않은 채 교단을 영위해 온 단체는 일찍이 동아기독교회 외에는 없었을 것이다. 펜윅은 처음부터 동아기독교회를 이러한 교단(조직)으로 정착시켜 왔으며 교단의 사역자들을 무보수의 불고가사(不顧家事) 불고처자(不顧妻子)의 “권서순회전도자”로 순육(馴育)시켜 왔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동아기독교회와 펜윅의 토착선교정책 원리는 한국 개신교의 선교 역사상 독보적인 특성을 지닌 것이었다.
제9장 교회의 수난과 순교자들
1920년 이후 동북아시아의 이러한 정세(政勢) 변화는 이 지역에서 순전히 복음사역에만 몰두하여 오던 동아기독교회의 전도자들과 교회들을 졸지에 혹심한 수난과 순교의 피를 요구하는 박해의 현장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당시의 동아기독교회의 전도자들의 순교는 모두 이 지역에 몰아친 日帝의 관헌과 러시아의 공산당 그리고 한국의 독립군 사이에서 야기된 정치적 삼각 관계의 변수가 빚어 낸 비극의 산물이었다.
당시 손상열 목사는 구역의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재정적으로 몹시 어려움에 처하였던 원산총부에 보낼 돈을 모으러 다녔다. 이것을 日帝 수비대는 손 목사가 조선독립당의 자금책으로 활약하는 것으로 오인한 것이었다. 손상열 목사에 대한 日帝 수비대의 오판(誤判)은 마침내 그에게 순교의 피를 요구했다.
6인 전도인의 순교:동아기독교회는 1925년에 개최된 제20차 대화회에서 북만주의 길림성(吉林省)․목단강(牧丹江)․화전현(化田縣) 방면과 남만주의 봉천(奉天) 지역을 개척할 전도 계획을 세웠다. 이때 목숨을 건 모험적인 전도사역에 자원하고 나선 전도인은 바로 김상준(金相俊) 교사․안성찬(安成贊) 전도․이창희(李昌熙)․박문기(朴文基)․김이주(金二柱)․윤학영(尹學榮) 등 여섯 명이었다. 이들은 1925년 초봄에 日帝의 만주수비대, 한국의 독립군, 공산당의 파르티잔이 수시로 출몰하는 이 험난한 선교지를 향하여 목숨을 건 사역의 장도에 올랐다. 이들이 출발한 이후부터 원산총부는 여러 경로를 통하여 이들의 활동 상황과 안부를 타진하였으나 이 지역은 당시에 언제나 전쟁의 위험과 파르티잔의 출몰로 민간인의 발길이 소원하여 소식을 알 길이 없었다. 총부에서는 1925년 9월 하순에 다시 제2진으로 주병권․박청숙․증용운을 북만주의 길림성에 파송하면서 6인 전도인들의 소식을 탐문하도록 당부했다. 이들의 귀국 보고에 따르면 1925년 4월경에 김상춘 교사와 안성찬 전도는 북만주의 화전현(化田縣)에서 조선독립당의 파르티잔에게 일본군의 밀정이라는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갖은 악행과 고문 끝에 순교한 것이었다(그외 이창희․박문기․김이주․윤학영 전도는 북만주의 길림성에서 사역하던 중 역시 공산당 파르티잔에게 체포 순교 당함). 만주의 임강 지역 교회와 자성의 중강진(中江鎭) 지역 교회들은 손 목사를 비롯한 6인 전도의 순교사건 이후부터 모이기를 더욱 힘쓰고 형제들간에 유무상통(有無相通)하여 마치 초대 교회 시대의 예루살렘 교회를 방불케 하는 뜨거운 부흥이 일어났다.
김영진 목사 형제와 정춘보의 순교:김영진 목사와 그의 형 김영국 감로와 정춘보도 후에 순교를 당하였다. 그리고 이현태 교사 몽고(만주)에서 복음전도 사역을 하다가 순교했다.
제10장 일제 군국주의 치하의 교단 생활
펜윅은 ‘기독교의 3대 볼일’로 첫째로 성서 많이 볼 것, 둘째로 성숨님께 복종할 것, 셋째로 마귀를 대적할 것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동아기독교회의 사역자들과 성도들은 무엇보다 우선 성서 읽기로 그들의 신앙이 다져진 사람들이었다. 독경운동은 사경회로 연결되었고 사경회는 다시 부흥회의 계기가 되면서 바로 구령운동과 전도운동을 일으키는 신앙과 열정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달편지?: 대한기독교회가 매월 한 차례씩 월보(月報) 형식으로 교단의 사업 수행에 관한 통보와 신앙생활을 위한 성경공부 자료를 수록하여 발행했던 기관지이다.
국권(國權, 1910년 庚戌國恥)을 상실한 이후에 가장 두드러지게 높아진 것은 교육열이었다. 그래서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는 말은 이 당시에 지식을 갈망하는 민중들의 각성된 의식이었다. 그 결과 정치 운동에 한계를 느낀 애국지사들과 교회들은 저마다 교육 입국에 열을 올려 사립학교 설립에 앞장섰다. 이런 판국에 펜윅은 세속 교육의 일체를 거부하고 학교에 다니고 있던 교단의 자녀들마저 퇴학시키도록 조처했다. 철저한 근본주의자였던 펜윅은 이때 미국에 체류하면서 마치 신앙에 아편과 같은 역할을 하는 ?진화론?을 가르치는 학교의 세속 교육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궁리에 골몰하면서 한국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시대를 망각한 펜윅의 학교 교육 폐지 조치는 동아기독교회를 인재부재(人材不在)의 불모지로 전락시킴으로써 교단의 앞날에 씻을 수 없는 회한(悔恨)과 비극을 초래했다.
제11장 동아기독대 시대(1933~1939)
제28차 대화회는 1933년에 원산에서 개최되었고 펜윅은 이때 자의(自意)로 교단의 명칭을 “동아기독대”(東亞基督隊)로 변경했다. 동아기독대 시대는 불과 6년에 지나지 않은 짧은 기간이었다. 펜윅이 교단의 명칭을 “교회”에서 양(羊)무리를 뜻하는 “대”(隊)로 바꾼 것은 당시의 시대 상황에 대한 펜윅의 부정적 시각 때문이었다.
날로 세속화되어 가는 “교회”라는 명칭을 버리고 하나님의 “성별된 양무리”를 뜻하는 “대”(隊)가 참 목자 되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양떼의 진정한 명칭이라 하여 교단의 명칭을 “동아기독대”로 바꾸었다. 日帝는 동북아시아 대륙으로 진출하여 한국뿐만 아니라 만주마저 강점했고 한편으로 러시아의 공산 정권은 시베리아를 장악함으로써 동아기독대의 교세가 날로 위축되어 가는 시기였다.
제12장 펜윅 선교사의 별세와 교단의 시련
한국교회는 1930년대 중반부터 1945년에 해방될 때까지 日帝의 전시 체제와 한민족 말살정책 아래서 극심한 박해와 탄압을 받아 왔다. 동아기독대는 이미 1916년에 포교계 제출 요구를 거부하여 日帝로부터 요주의(要注意) 교단으로 지목되어 왔다. 이 일로 전국의 침례교회는 폐쇄되어 예배가 금지되었던 전력(前歷)을 가진 교단이었다.
동아기독대가 포교계 제출을 거부하고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교단적으로 전개한 사실은 이들이 침례교인(the baptists)임을 만방에 입증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포교계” 제출 요구는 침례교인들이 주장하는 “정교분리”(政敎分離) 원리에 위배되며, 신사참배 요구는 침례교가 주장하는 “신앙 양심의 자유” 원리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1910년의 한일합방과 1919년의 3․1운동과 같은 거국적인 항일운동에는 오직 침묵으로 일관했던 동아기독대가 정교분리(政敎分離) 원리와 신앙 양심의 자유 원리를 유린하는 日帝의 포교계 제출과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서는 분연히 일어나 행동으로 항거하고 거부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신앙과 순교의 피로 日帝에 맞섰던 것이다.
1935년 12월 6일 금요일 저녁에 펜윅 선교사는 마침내 원산 동산의 자택에서 고요히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영면(永眠)함으로써 이 땅에서의 생애를 마쳤다. 1889년 12월 8일에 약관 26세의 독립선교사 신분으로 홀로 한국에 온 펜윅은 45년 동안 한국에서 모든 생애를 바쳐 오직 대한기독교회를 위해 헌신하다가 급보를 받고 달려온 교단의 지도자들, 함께 살아온 시봉인(侍奉人)들 그리고 원산 주재의 친지 선교사들의 조용한 애도 속에 향년 72세를 일기로 소천(召天)했다.
펜윅의 업적:동아기독교의 “순복음 신앙”과 펜윅 특유의 한국 토착선교 사역이 형상화(形象化)해낸 “권서순회전도자”의 배출이라 할 수 있다. 펜윅의 투철한 근본주의 신앙은 말씀과 복음 외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신앙을 한국 사람들에게 심어 주기 위하여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혼자서 집요하게 ?신약젼서?와 ?복음찬미?를 번역 출판하였고, 그 성서와 찬송가로 동아기독교의 “순복음의 신앙인”들을 순육(馴育)해냈다. 펜윅은 하나님의 말씀과 숨님(성령)만으로 그들의 믿음을 낳았고 양육시켰을 뿐만 아니라 동아기독교의 “토착적 자생신앙인”(自生信仰人)을 길러 낸 놀라운 토착 교인의 도출자(導出者)였다. 이것은 펜윅이 45년 동안 한국선교사역을 통하여 이 땅에 남겨 놓은 것 가운데 가장 토착적인 것으로 평가되어야 할 그의 독보적 선교 업적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오늘날 동아기독교의 후진들인 우리의 신앙․전통․역사 속에 남아 있고 숨쉬고 있는 바로 그 토착적 신앙의 유산이다. 그것은 바로 지극히 복음적이었으나 몰역사적이고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없는 즉, 우리의 믿음의 위대함과 동시에 무력함이 아닌가 싶다.
제13장 동아기독교 시대(1940~1944)
제35차 대화회는 1940년에 원산에서 개최되었다. 본 대화회에서 교단은 명칭을 동아기독대에서 “동아기독교”(東亞基督敎)로 변경했다. 동아기독교 시대는 5년에 불과한 짧은 기간이었지만 본 교단은 이 기간에 동북아시아의 정치적 소용돌이와 함께 격변의 세월을 살아왔다. 이 시기에 동아기독교는 태평양전쟁을 겪었으며 또한 원산 사건과 더불어 교단의 지도자 32명이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는 교단적 위기 국면을 맞기도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1944년 5월에는 日帝에 의하여 교단이 해체되는 비운을 맞이했다. 교단 해체 사건은 1906년에 펜윅과 더불어 조직된 대한기독교회의 선교역사(宣敎歷史)가 38년만에 동아기독교 시대(1940~1944)로 막을 내린 것을 의미한다. 한편 이 시기에 동아기독교는 민족 해방과 조국 광복(1945)의 자유를 향유하였으나 조국이 남북으로 갈라서는 민족분단의 비극으로 종국에는 남한(南韓)에 있는 교회만으로 한국침례교회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는 역사의 전환기를 맞이해야 했다.
1940년은 일본제국이 중일전쟁(中日戰爭)을 치르는 한편 태평양전쟁을 준비하는 전시 동원 체제를 더욱 강화하던 시기였다. 한반도 전역에는 선전포고 없는 전쟁을 치르는 긴장감이 팽배하였다. 태평양전쟁 준비에 광분하고 있던 日帝는 한반도 전역을 군대 일색의 시국으로 만들어 가면서 신사 참배․황궁요배․창씨 개명․일본어 사용을 한층 강화하고 시국 좌담회 개최․일장기 게양 실시 등을 촉구하면서 교회와 신자들의 신앙과 삶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국 정서에 日帝의 비위에 거슬리는 것이 바로 “동아기독대”라는 교단 명칭이었다. 유일하게 신사 참배를 끝까지 거부한 동아기독대(東亞基督隊)가 교단 명칭마저 군대 조직을 느끼게 하는 “대”(隊)라는 군사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일본의 황군(皇軍) 대한 저항감을 불러일으키는 불순한 느낌을 준다고 日帝는 트집잡아 교단 명칭 변경을 강요했다. 본래 교단의 지도자들은 교단의 명칭을 대(隊)로 바꾸는 것을 별반 좋게 여기지 않았다. 펜윅이 주장하는 일이라 교단 명칭을 “동아기독대”로 변경했던 교단의 지도자들은 日帝가 다시 교단 명칭인 “대”(隊)를 가지고 트집잡자, 본 대화회에서 동북아시아에 널리 복음을 전도하는 교단이란 뜻에서 “동아기독교”로 바꾸었다.
1940년 중엽에 일본 관헌은 불시에 동아기독교의 교규(敎規)와 신조(信條)를 일본어로 작성하여 제출하도록 원산총부에 통보했다. 교규서 제출 사건은 사실상 日帝가 동아기독교를 제거하기 위하여 착수한 제1단계 조치였다. 일본 관헌은 제출한 교규서를 근거로 하여 이종근 감목을 비롯한 32명의 교단 지도자를 구속한, 이른바 “원산 사건”을 일으켜 동아기독교 제재작업(制裁作業)에 들어갔던 것이다. 교규서 제출 사건은 바로 日帝의 동아기독교 해체 공작을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
제14장 8․15 해방과 교단 재건
1944년에 日帝에 의하여 교단 해체의 비운을 겪었던 동아기독교는 8․15 해방 이후에 남․북 분단의 비극의 역사를 딛고 다시 일어섰다. 이들의 몰골은 만신창이의 형해(形骸)였으나 그들의 숭고한 정신은 교단 재건과 더불어 미국 남침례교와 교단 제휴를 맺음으로써 한국침례교회의 새 시대를 다시 열어갔다.
8․15 해방과 더불어 남한에는 日帝 치하에서 본국으로 철수했던 주요 교단들의 선교사들이 다시 한국으로 복귀했다. 이들은 미국 군정 치하의 호조건 아래서 그들의 선교사업을 다시 활발하게 재개했다. 그러나 동아기독교는 맞이할 선교회나 선교사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만주․간도․시베리아․북한 지역에 산재한 동아기독교의 교회들이 중국과 소련의 공산 정권과 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귀속됨으로써 이 지역에 있던 교회와 교인들은 조국 해방과 더불어 일시에 관계가 단절되고 말았다.
日帝의 혹독한 박해로 교단의 지도력이 거의 와해되어 유명무실한 상태에 빠졌던 동아기독교는 8․15 해방 이후에는 다시 남북으로 이산(離散)되어 서로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다. 이런 와중에 강경에 있던 김용해 목사가 경북 점촌에 있는 노재천 목사와 연락하여 교단 재건 문제를 의논했고, 이후에 칠산에 있는 장석천 목사를 찾아가 교단 재건을 위하여 교단 재건회의를 개최하자는 중론을 모았다. 마침내 1946년 2월 9일에 충남 부여군 칠산교회(七山敎會)에서 교단 재건을 위한 회의가 소집되었다.
강경대화회(江景大和會):노재천 대리 감목이 1946년 9월에 역사적인 제36차 대화회를 강경교회에서 소집했다. 본 대화회는 1940년에 이종근 감목이 소집한 제35차 대화회를 마지막으로 중단되었으나 6년 만에 남한에 산재한 교회만 참석하는 가운데 소집되었다. 노재천 대리 감목은 교단의 공식 명칭을 1921년에 통칭되던 동아기독교회로 다시 환원시켰다. 하지만 제36차 대화회는 기존의 교단 체제인 동아기독교로서는 마지막 대화회가 되었다. 강경교회에서 소집되었던 제36차 대화회는 몇 가지 측면에서 매우 중대한 변화와 개혁을 가져 온 역사적인 총회라 할 수 있다. 본 대화회는 40여 년 동안 지속되어 온 대한기독교회의 교단의 기틀을 해체시켜 펜윅의 옛 체제에 종지부를 찍고 역사적인 대혁신의 전환을 가져왔다. 대화회를 민주주의적인 총회 체제로 바꾸고 목회자도 파송제에서 청빈제로 바꾼 것은 펜윅의 선교 지향적인 순회선교회의 단체에서 목회 지향적인 개교회 중심의 교단 조직으로 개편한 것으로서 교단 체제의 일대 혁신이라 할 수 있다.
제15장 대한기독교침례회 시대(1949~1951)
제39차 총회는 1949년에 이종덕 총회장이 시무하는 충남의 강경교회에서 개최되었다. 본 총회에서는 교단을 “침례교”로 변경하기로 결의하고 교단의 명칭을 대한기독교침례회로 바꾸었다. 제38차 총회에서 미국의 남침례교단과 연합하여 선교사업을 추진하도록 결의하였고 양 교단의 신앙과 교리가 별로 다른 것이 없으며 다른 교단들도 동아기독교회를 “침례교”로 이미 인지(認知)하기 때문에 교단적인 이의(異議)는 없었다.
미국 남침례교와의 교단 제휴(提携):한국 침례교 지도자들과 미국 남침례교 선교사들의 접촉은 그 시발점부터 불행한 역사를 점철(點綴)하게 될 요인을 안고 있었다. 1949년 9월초에 충남 강경교회에서 개최된 총회에 우태호와 함께 참석한 코든 총무는 자신이 미국 남침례교가 한국에 선교사업을 착수하도록 요청하기에 앞서 동아기독교회의 실상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 파악이 필요하다고 했다. 홍콩으로 돌아가 한국 침례교 총회로부터 선교사 파송 요청을 받은 코든 총무는 1950년 2월 27일에 오랫동안 중국의 선교사로 일하여 왔으며 극동 지역에 대해 많은 경험을 지닌 나요한(那要翰) 선교사 내외를 최초의 미국 남침례교 한국 선교사로 파송했다.
미국 남침례교의 구호선교사업:1951년 3월에 다시 귀환한 나요한 선교사는 4월부터 남침례교의 한국선교사업에 착수했다. 부산에 도착한 나요한 선교사는 부산의 충무로에 교회를 개척하고 그곳에 잠정적으로 선교회 사무실을 개설하여 구호선교사업을 시작했다. 미국 남침례교의 한국선교사업은 6․25 동란의 다급한 현실에 대처하여 제일 먼저 1만 불을 투입하여 구호사업을 전개하므로 시작되었다. 구호사업은 침례교인들에게 우선적으로 실시했으나 자금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침례교인에게만 국한하지 않고 다른 교단의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주었다.
제16장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총회 시대(1952~1958)
펜윅과 더불어 시작된 대한기독교회(동아기독교)는 한국의 개신교에서는 그 존재가 별반 알려지지 않았던 모호한 작은 단체였다. 하지만 1951년에 6․25 동란과 더불어 피난지 부산에서 미국 남침례교가 대대적인 구호선교사업을 펼치므로 그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한 대한기독교 침례교회연맹총회는 그 모호한 정체를 벗고 한국 개신교의 무대에 침례교의 정체성(正体性)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6․25 동란 기간에 미국의 저명한 침례교 인사들의 활발한 방한 활동은 한국사회와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생소한 침례교에 대한 지식과 인식을 새롭게 갖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전쟁의 악몽과 시련의 늪에 빠져있던 부산 피난민의 곤고한 영혼들을 위해 1952년에 남침례교의 부흥사 빌리 그레엠(Billy Graham)이 인도한 대전도집회, 1953년의 부활절에 한국을 방문한 남침례교신학교 학장인 맥콜(Dr. Duke K. McCall) 박사의 방문 그리고 전쟁중 종군 미군들의 영적 무장을 고무하기 위한 저명한 미국남침례교 인사들의 방한 활동 등이 바로 그런 경우들이다.
전입(轉入) 교역자의 대거유입(大擧流入):미국의 거대한 남침례교 선교회의 지원을 통하여 발전과 생기를 날로 더하여 가는 한국의 침례교단은 타교파의 교역자와 교인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며 넘보기 시작했다. 막대한 미국 남침례교의 구호선교자금 지원과 함께 개척교회의 숫자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었다. 제43차(제8회) 총회가 1953년 5월 1일에 경북 점촌침례교회에서 개최되었는데, 1953년 6월에 이사회는 한기춘의 주선으로 대전 중동에 일본 음식점을 하던 적산가옥을 마련하여 성경학원을 개설했다.
제17장 한국총회와 한국선교회
1953년~1958년에 이르는 기간은 인적 자원과 지도력을 지니지 못했던 총회는 교단이 당면한 구호선교․전입교역자․경제적 의존성․신앙혼합주의 같은 부정적인 현실을 과감히 삼제(芟除)하고 난제를 타개해 나가는 데 실패했다.
미국의 남침례교는 역사적으로 “협동사업 프로그램”(Cooperative Program)을 통하여 크게 성장하고 발전해 온 교단이다. 개교회주의(個敎會主義)와 자원주의(自願主義) 원리에 입각한 침례교의 협동사업 프로그램은 개교회․지방회․주총회 및 전국연맹총회간에 합의(合意)에 의하여 협동사업비의 지원으로 추진되고 있다.
한국 침례교단은 역사적으로 “협동사업 프로그램”과는 관계없이 조직되어 왔으며 협동사업이라는 개념도 모르고 지내왔다. 1949년 이후 명목상으로 이들은 “침례교인”이 되었으나 신앙 행습이나 신앙정신은 아직 침례교인이라 할 수 없었다. 이들의 사고 방식으로는 교회를 세우고 목사를 길러내는 것은 개교회의 일이 아니라 교단(총회)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총회는 “개교회들이 돕고 지원해야 하는 기관”이 아니라 오히려 “개교회들을 지원해주고 지배하는 상부 기관”이었다. 이것은 개교회와 총회가 대등한 수평관계에서 교단사업을 추진하는 미국 남침례교의 개교회나 총회의 개념과는 상반되는 사고 방식과 원리였다. 선교회의 주도적 역할과 지원으로 설립된 교단의 신학교․출판사․침례병원․전국여전도회․침례회보사 등의 기관을 중심으로 한국선교회는 침례교의 신앙원리와 교회생활을 교단 안에 정착시키는 교육출판, 훈련 프로그램들을 발전시켜 나갔다.
총회와 선교회가 대립 반목하게 된 직접적인 발단은 1957년 7월에 홍콩에서 개최되는 아시아 침례회 선교대회(The Asia Baptist Mission Conference)의 한국 대표 선정 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났다. 1957년 8월 8일에 안대벽 총회장이 동양총무 클로리 박사에게 1955년 9월 12일에 천명한 한국선교정책에 따라 한미간의 원활한 협동사업이 이루어지도록 조정을 요청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클로리 총무의 노력으로 그후 총회와 선교회간에는 수차의 한미합동실행위원회가 개최되었으며 협동사업을 위한 노력과 방안이 강구되었으나 쌍방간에 불신과 대립의 간격은 좁혀지지 않았다.
젊은 선교사들이 등장하면서 총회의 업무 수행 관행을 비침례교적이라고 비판하고, 총회와 선교회가 협정한 업무 협동 정책을 일방적으로 파기할 뿐만 아니라 비공식적으로 지방회나 개교회를 접촉하면서 자금을 앞세워 총회를 무시하는 태도에 이들은 적지 않은 우려와 불만을 품어 왔었다. 그러던 차에 1957년 아세아 침례회선교대회에 파송할 한국대표 선정문제에 있어서 선교회가 총회가 선출한 대표를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선교회가 선출한 장일수를 파송하자 총회와 선교회는 감정적으로 대립하면서 파국의 길로 치닫기 시작했다.
제18장 총회 분열 시대(1959~1968)
1960년대의 한국의 개신교단들은 日帝 36년 동안 식민통치와 6․25 동란이라는 국가적, 민족적 격변기를 살아오면서 응어리진 뼈아픈 상처들을 치유하고 수습하는 데 지혜를 모으지 못하였고 믿음의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분열의 발단:교단 분열의 발단은 전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선교회가 안대벽을 불신하는 데서 시작되었으나 그 근원적 소지(素地)는 한국인과 미국인간의 문화양식의 차이에서 빚어지고 있었다.
대전총회:대전총회의 분립은 총회수습대책위원 총회와 제49차 연차총회의 두 단계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총회와 선교회가 성명전을 펼치고 많은 목회자와 교회, 지방회도 성명서를 차례로 발송하여 교단이 성명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을 때 총회의 분규를 더욱 악화시킨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바로 신혁균 총회장의 “총회 개최 무기연기”의 공한 발송건이었다.
포항총회:이른바 기존 총회의 주류측 중심으로 규합된 포항총회는 예정대로 1959년 5월 26일 오후 9시에 포항침례교회에서 개최되었다. 총회회의록에 참석 대의원 명단이 기재되지 않았으므로 공식집계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대전총회 참석자 226명보다 많은 267명의 등록에 264명의 대의원 출석으로 총회가 개회되었다.
통합의 모색:1961년 4월 18일에 개최된 포항측 제51차 총회에서 안대벽 목사가 총회장으로 선임되자 통합운동은 무산되고 말았다. 교단 통합을 위한 준비위원회는 1961년 11월 28일에 천안침례교회에서 개최되었다. 많은 방청객들과 3명의 선교사들이 입회한 가운데 진행된 회의는 아무런 조건 없이 총회를 통합하기로 만장일치로 가결하고 1962년 1월 15일에 서울 충무로침례교회에서 합동총회를 개최하도록 합의했다.
제19장 한국선교회와 선교정책의 변화
총회 분열에 대한 선교회의 입장은 확고하고 단호했다. 이들은 한국의 침례교단이 그들이 기대하는 신약성서의 신앙원리와 교회 행습에 합당한 교회와 교단으로 변혁되지 않는 한, 한국교회와는 협동하여 선교사업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이들의 판단으로는 현재의 한국 침례교단은 본질적으로 침례교회가 아니며 현재 자행되고 있는 몇몇 교단지도자들의 중앙집권적 교권체제를 깨뜨리지 않고는 진정한 침례교단을 만들기란 요원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선교회는 그 동안의 경험과 인식에서 교단의 제반 사항을 볼 때 비침례교적 교단운영 관행과 문제의 핵심인물이 바로 안대벽과 이순도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그러므로 선교회의 입장에서는 안대벽 목사 부부에 대한 불신임은 번복할 수 없는 확고한 입장이었다.
총회 분열시기(1959~1968)의 대전총회의 모든 교단사업과 교회생활은 선교회가 전적으로 주도했다. 교단이 분열되자 그 동안 교단의 전통과 교권을 가지고 선교회와 맞섰던 교단의 주류파 지도자들은 포항총회로 갈라져 나갔으며 전입목회자들을 주축으로 구성된 대전총회는 선교회와 맞서 견제할 수 있는 지도력과 통솔력은 애초부터 지니고 있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선교회는 1960년부터 몇몇 젊은 선교사들의 주도와 막강한 달러($)의 위력을 바탕으로 한국선교의 황금시대를 구가하면서 견제와 반대가 전혀 없는 선교의 독주(獨走)시대를 맞이했다. 총회나 목회자들은 선교회의 정책을 수동적으로 따를 뿐 총회의 독자적인 사업정책이나 프로그램 수행은 전무했다. 경제력이 없고 자립정신이나 영력마저 최저 상태로 침체되었던 교회와 목회자들은 지역의 전도선교사들이 수행하는 직접전도사업 프로그램을 타성적으로 따르면서 선교회의 새로운 선교정책에 순육되어 갔다. 이때부터 선교회 주도로 시작된 선교정책과 사업 프로그램은 총회가 통합된 1968년 이후에도 그대로 계속되어 1980년대 초반까지 지속되었다.
제20장 분열의 파란과 교회의 부침(浮沈)
1963년 제53차 연차총회는 서울 종로침례교회에서 안대벽 총회장이 개최했다. 총회 분열 이후 현안문제로 계속되어 온 양측 총회간의 재산처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양측 총회 대표는 9월 23일에 문교부의 중재로 재산분할에 합의하여 처리했다.
965년 4월 20일에 대구의 대명동침례교회에서 개최된 제55차 총회는 한국 침례교단의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뜻깊은 총회였다. 기독교대한침례회의 제55차 총회는 6․25 동란 이후 시작된 전입교역자의 시대를 마감하고 대전 침례회신학교에서 배출된 젊은 세대를 교단의 무대에 주역으로 등장시켜 한국 침례교단의 역사에 새로운 서막을 열기 시작했다.
제21장 한국침례회연맹총회 시대(1968~1975)
1959년의 교단 분열은 그 이후 대전측이나 포항측을 막론하고 교단이나 선교회를 위해서 문제해결을 가져다 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교단이 분열되었던 10년 동안 한국의 침례교단은 분열에 대한 뚜렷한 이유나 명분을 찾지 못한 채 무력함․문제들․혼란과 좌절 속에서 살아왔다. 이것은 바로 지난 20여 년 동안 교단 안에 잠복된 채 자라오던 여러 가지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과 요인들이 나름대로 숙성되어 그 결과로 불거져 나왔을 때 교단이 겪어야만 했던 또 하나의 비극적 시련(試鍊)이었으며 교단 분열은 그 부정적 시련들을 한층 더 가중시켰을 따름이다.
개교회나 교단 안에 아무런 이해 득실이 없는 재산분규와 분할문제는 교단 안에 불필요한 마찰과 시간 낭비와 막대한 재정 손실만을 초래했다. 교단 분열은 분명한 명분과 이유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분열 이후 바로 깨달았으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수차의 통합노력은 내용이 없는 시기상조의 명분 아래 10년 동안 묻혀 오고 말았다.
역사적인 총회통합:한국 침례교는 1968년 4월 16일에 다시 하나로 통합되었다. 10년간의 교단 분열과 대립을 말끔히 청산하고 역사적인 합동총회가 모였다. 1968년의 협동 총회의 결의에 따라 대전의 침례회신학교와 인천의 대한침례회신학교도 1968년 9월 7일자로 통합되었다. 대한침례회신학교의 재학생은 학력자격에 따라 대전침례신학교에 편입하고 동문회도 대전의 침례회신학교의 동문회로 통합되었다. 1969년의 서울총회는 이 땅에 80년대의 “침례교의 계절”을 꽃피게 한 그 역사의 서막을 예고하는 뜻깊은 총회였다.
총회비상대권 파동(1973년):1973년에 유신헌법과 더불어 출범한 박정희 대통령의 제4공화국은 한국 사회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파급은 이 교단에도 미쳤으니 그것은 1973년 4월 19일의 제63차 연차총회 회의장에서 일어난 교단 비상대권의 발동이었다. 이것은 교단 역사에 일찍이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유신총회”(維新總會) 파동이었다. 조효훈 총회장이 시무하는 서울 충무로의 서울침례교회에서 개최된 제63차 총회는 조효훈 총회장의 긴급동의로 발의된 교단 비상대권을 대의원들이 만장일치의 박수로 결의하므로 조효훈은 교단발전위원회를 조직하고 6월 25일에 임시총회가 소집될 때까지 교단 업무수행의 대권을 위임받은 것이다.
제22장 기독교한국침례회 시대(1976~1989)
1976년의 제66차 총회는 그 동안 거론되어 오던 교단의 명칭을 기독교한국침례회로 변경했다. 제65차 총회가 중도적 인물인 지덕(池德) 목사를 총회장에 선임하자 교단 안에는 서서히 화합적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이 땅의 개신교는 그 신앙의 뿌리를 부흥 사경회와 더불어 내리기 시작했다. 민족의 이러한 신앙전통은 1907년의 부흥운동이 그 효시(嚆矢)를 이룬다. 우리의 믿음은 새벽기도․확신에 찬 체험․회개를 동반한 사경회․부흥집회로 이어졌던 ‘부흥신앙’에서 생겨났으며 이 신앙은 한국인의 심령에 변화와 구원의 은혜를 뜨겁게 지펴 왔다. 이 ‘부흥회 신앙’의 불길은 길선주 목사와 이용도 목사 같은 부흥사들의 영력과 은혜가 충만한 메시지를 통하여 방방곡곡에 있는 성도들과 교회 속에 깊이 파고들어 뿌리를 내리며 자리를 잡아왔다. 그래서 한국인의 신앙과 한국교회의 성장을 말할 때, 우리는 한국교회의 부흥운동과 부흥사를 떠나서는 말할 수 없다. 이것은 이 땅의 100년의 한국 개신교 역사와 교회생활이 보여주고 있는 실제적 모습이요 현상이다. 그리고 이 현상은 한국 침례교의 역사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실증되고 있다. 한국의 침례교는 처음 대한기독교회 시대부터 교단생활이나 교회생활에서 물질이나 경제적 문제는 늘 도외시하는 신앙전통을 지녀 왔다.
1969년 9월에 발족된 선교회의 한미대여보조정책위원회는 때늦은 감은 있으나 특히 도시지역의 교회개척을 위해서는 시의 적절한 가장 실제적인 지원정책이었다.
대전도집회와 “침례교의 계절”:한국침례교회는 70년대의 후반에서 80년대의 중반기에 이르는 10여 년 동안에 그 이전의 역사에서는 유래를 찾아 볼 수 없었던 활기찬 교회성장과 교단발전의 부흥을 가져왔다.
제23장 선교 100주년을 맞는 한국 침례교
교단은 1984년에 처음으로 일천 교회를 넘어섰으며 1984년에서 1990년에 이르는 6년 동안에는 연평균 100개 교회가 해마다 증가하는 성장세를 보였고 교역자의 수(신규 목사 및 전도사 인준)도 연평균 200명이 넘는 증가세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교단의 성장세는 개교회들이 총회 사업을 지원하는 총회 협동사업비의 지원이 1990년에는 1989년도에 비하여 무려 20%나 증가한 사실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 동안 교회들은 성령운동을 통한 자급․자립의 기틀을 공고히 다져 왔으며 목회자들은 성령의 능력과 영력을 힘입어 오직 교회성장과 영성개발에 전력투구해 왔다. 총회와 선교회는 이러한 교회성장을 측면지원하기 위하여 한미연합 전도집회와 훈련강습회를 연례행사로 추진해 왔다. 이렇게 하여 1980년대에 이 땅에 “침례교의 계절”을 꽃피운 침례교단은 노창우 총무의 등장과 함께 다가 올 1989년의 선교 100주년의 기념행사와 1990년에 한국에서 개최될 제16차 침례교세계대회(BWA)를 준비하면서 성장과 발전을 향한 비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미국 남침례교 한국선교회의 공헌:미국 남침례교의 한국선교는 1950년 6․25 동란의 포성(砲聲)이 한반도에 울려퍼지는 와중(渦中)에서 시작되었다. 한국 침례교가 오늘과 같은 교단 성장과 발전 기틀을 잡는데 결정적 공헌을 해 온 것은 미국 남침례교의 물심양면의 선교 지원이었음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미국 남침례교 한국선교회가 한국 침례교단에 끼친 참된 공헌은 지난 40년의 선교사역 속에서 침례교의 신앙원리와 교회생활을 한국교회와 교인들 속에 정착시키기 위하여 시종 일관 가르쳐 온 그들의 신앙정신과 사역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① 미국 남침례교 한국선교회의 공헌은 신약성서적인 복음신앙을 한국 침례교인들에게 전수(傳授)한 데 있다. ② 미국 남침례교 한국선교회의 공헌은 실천적(Practical) 신앙의 체질을 한국 침례교인들에게 심어 준 것이다. ③ 미국 남침례교 한국선교회의 선교적 공헌은 한국 교단에 심어준 그들의 교회 지향적 교단체제와 부흥전도적 교회생활의 보급과 정착이다. ④ 미국 남침례교 한국선교회는 교단 안에 교회지향적 기관들을 육성함으로써 한국 침례교단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한국침례교회와 선교의 비전:신앙정신이나 신앙원리상 본질적으로 조직과 체제를 강화할 수 없는 침례교회는 역사적으로 국교회(state church)의 강력한 교권조직과 체제를 행사하던 영국의 성공회나 유럽의 개신교단들의 박해와 기득권행사에 몹시 시달리며 살아왔다. 이러한 각박한 현실 속에서 침례교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십시일반(十匙一飯)의 협동정신과 사업 프로그램만이 생존과 자립을 위한 유일한 길이요 방편이었다. 그래서 침례교는 역사적으로 협동사업으로 교회생활과 교단생활의 진로를 구축하여 왔으며 오직 성서와 성령의 체험에서 얻은 신앙의 실천적 생활로 그들의 정체성을 다져왔다.
1949년에 동아기독교(대한기독교회)와 미국 남침례교의 교단제휴는 8․15 광복과 함께 이 땅에 새롭게 전개된 새 시대와 새 역사에 부응하기 위한 한국 침례교의 교단적 자구책이요 시대의 요청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감목체제와 토착적 자생신앙으로 체질화되어 온 동아기독교의 교권적 교단생활과 미국 남침례교의 개교회주의 원리에 기초한 민주주의적 신앙원리는 이 땅에 한국침례교회를 정착시켜 가는 과정에 교단 분열이라는 역사적 교훈을 남기기도 했다.
1960년대의 성령부흥운동으로 기사회생(起死回生)한 한국침례교회는 1970년대 후반부터 범교단적인 한미 합동복음전도운동을 전개하면서 한미 협동사업 체제를 다시 구축해 갔다. 매년 연례행사로 추진되었던 이 전도집회는 1980년대에 침례교의 계절을 이 땅에 꽃피우는 원동력이 되었고 실천적 신앙생활로 그들의 정체를 표명하는 침례교회의 인상을 한국 교계에 깊게 심어 놓았다.
맺는 말
이제 선교 100주년을 넘긴 한국침례교회는 이 땅에 대한기독교회의 토착적 자생신앙과 신앙공동체가 만들어 온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고 있다. 이것은 서구의 선교사들에 의하여 이 나라에 소개된 서구적 기독교의 신앙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님’의 능력이 순박한 순우무구한 한국인의 심령에 심어져 생겨난 한국 토산(韓國土産)의 자생신앙과 신앙인들이다.
이제 21세기를 맞으며 한국의 침례교는 우리의 신앙정신과 원리의 귀결인 세계선교에 대한 비전과 함께 역사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신앙과 신학을 심어가야 한다. 지난 날 우리의 반문화적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을 반성하면서 에큐메니칼의 역사와 신앙 속에도 우리의 소리와 자리를 넓혀가야 한다. 또한 우리는 한국 침례교의 신앙과 신학을 이 땅에 정립해야 한다. 한국 기독교는 1960년대 이후 토착화 신학과 세속화론을 비롯한 신앙과 신학의 한국화를 위해 많은 신학적 탐구와 시험을 시도해 왔다. 아직도 한국의 신앙은 실험과 정립의 과정에 있다. 한국의 침례교는 처음부터 토착적인 한국의 자생신앙(自生信仰)을 길러왔으며 지녀왔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땅, 우리의 체질, 우리의 생리에 맞는 한국 침례교의 신앙으로 발전시켜야 하며 한국 침례교의 신학을 정립시켜야 한다. 진정한 한국 침례교의 계절은 한국 침례교의 신앙과 신학의 정립과 더불어 시작될 것이다.
평양은 한국의 예루살렘이었으며 원산은 대한기독교회의 모판이요 한반도 전역과 만주․간도․시베리아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던 우리의 복음선교의 본영이었다. 북한의 동토에 아직도 대한기독교회의 믿음의 그루터기는 건재하며 그들의 지하교회는 간도의 연변에서 언젠가 다시 꽃피울 봄을 기다리는 싹을 움티우고 있다. 21세기는 세계선교의 비전과 함께 한국의 침례교회를 향해 많은 도전과 기회로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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