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하지 말라, 비판의 함정에 빠지지 말라.
마태복음 7:1-6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인데요,
나의 잘못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그럴듯하게 미화하고 포장하지만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아주 단호하게 비판하고 꾸짖는 태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정치권에서 상대방을 비판할 때 자주 사용하는 말입니다.
정치권에서 흔히 사용하기는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갖고 있는 사고의 주요 패턴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위가 설거지를 하면 좋은 사위라고 말하지만 아들이 설거지를 하면 ‘왜 네가 하느냐?’ 화가 나고 며느리를 나무라는 시어머니의 태도도 여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사회가 좀 더 아름다운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내로남불이 아니라 내불남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되어집니다.
내가 하면 불륜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강하게 비판해야 하고
남이 하면 그럴 수 있다는 생각으로 너그럽게 이해할 때
이 사회는 좀 더 밝고 건강한 사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산상수훈의 일부로서 비판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인데요,
잭 푸닌 목사는 이 말씀을 따라 일상생활에서 비판하지 말아야 할 10가지 예를 구체적으로 들고 있습니다.
다른 성도가 타는 자동차에 대해서, 그가 사는 집에 대해서, 자녀 교육에 대해서, 노래방에 가는 것에 대해서, 다른 가정이 저축하는 것에 대해서 등 여러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요,
그 중에 두 가지 예를 소개해보겠습니다.
먼저, 남이 TV보는 것을 너무 비판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물론 음란한 영상물을 보거나 폐인이 될 정도로 봐서는 안 되겠지만,
남이 tv로 스포츠를 보든 말든, 드라마를 보든 말든 그것까지 알아내서 비판꺼리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제일 사랑해야 하지만 그 외 영역에 있어서 신앙의 기본적 원칙은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자유롭게 주님을 섬기는 것인데, 그런데 tv를 보는 것을 가지고 남을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tv를 거의 안 보는데 권사님은 왜 그렇게 자주 보느냐고 비판하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tv의 크기나 이런 것에 민감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기는 tv를 안 보지만 다른 영역에 빠져있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자기는 영상물에 시험이 많이 드는 스타일이지만 어떤 사람은 영상물에 시험이 거의 안 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예는, 사는 집에 대해서 판단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이슈 중에 하나가 집, 주택에 관한 것인데요,
집에 대해서 판단을 하고 비판을 하는 사람은 집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 아니면 집이 작은 사람에 대해서 왜 그러냐고 판단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집이 크거나 두 채 이상이면 또 그것을 가지고 판단을 합니다.
그 집에 있는 가구나, 공구, 가전제품, 자전거, 희한한 물건에 대해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런 비판은 종종 질투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값비싼 목걸이를 가지고 있지만, 자기는 값비싼 자전거를 갖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값비싼 냉장고를 가지고 있지만, 자기는 값비싼 화초를 많이 수집할 수도 있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일수록, 가급적 비판이나 판단을 줄여나가야 하고 오히려 그의 연약한 점이 보이면, 불쌍히 여겨서 기도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먼저,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하여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는 비판받을 일들이 많다는 의미입니다.
주님께서 지적하신 말씀대로 보면, 형제의 눈 속에 티가 있는 것을 보고 비판하는 사람의 눈 속에는 티가 아니라 들보가 있다는 것입니다.
남을 비판하는 내가 더 큰 비판거리를 갖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더 큰 비판거리가 있는데 그럼에도 남을 비판하면 더 크고 무거운 비판이 닥치게 될 텐데 어떻게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완벽한 결혼 상대를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났습니다.
20살 때 시작한 여행은 40년 동안 이어졌지만 그 남자는 결혼을 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40년 동안 자네가 원하는 완벽한 여인을 못 만났느냐?’ 는 친구의 질문에 그가 이렇게 답을 합니다.
‘딱 한 번 만났는데 그 여자도 완벽한 남자를 만나기를 원해서 결혼이 이루어지지 않았어.’
세상에 완벽한 여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설령 그런 여인을 만난다고 내가 거기에 적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루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와서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떡을 먹을 때에 장로의 전통을 지키지 않고 손을 씻지 않느냐?’ 예수님을 비난합니다.(마15장)
그때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하는 것을 심하게 꾸짖으십니다.
너희는 장로의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자들이라고 책망 받고,
또한 너희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에 신경을 쓰지만 실상 너희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더 큰 책망을 받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생각하지 않고 제자들을 비판하다가 이렇게 큰 책망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결코 누구를 비판할 정도로 깨끗하거나 청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 부족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장로는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말씀합니다.(4:11)
우리는 율법의 준행자이지 율법의 판단자나 재판관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남을 비판하고 판단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 능력도 없습니다. 그렇게 깨끗하지도 않습니다.
그러기에 남을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비판하면 주님의 더 큰 비판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겠습니까?
두 번째로, 우리는 남을 형편을 잘 알 수 없기에 비판을 하면 안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큰 들보를 갖고 있으면서 남을 비판하는 자들을 향해서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말씀합니다.
남을 비판하는 자는 자기의 들보 때문에 다른 사람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알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된 생각, 잘못된 가치관, 비뚤어진 사고방식 때문에 남을 잘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그래서 남을 비판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대학의 졸업식장에서 학생들이 차례로 졸업장을 받고 있었습니다.
순서가 진행되는 것을 바라보는 한 축하객에게 눈에 띄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어느 학생이 한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한 손으로 졸업장을 받고 총장에게 악수도 받지 않고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축하객은 '세상도 많이 변했군, 저렇게 건방진 학생도 있으니. 한 손으로 졸업장을 받다니 이 학교는 4년 동안 무얼 가르쳤단 말인가?'
그러자 옆에 있던 한 재학생이 말했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저 분은 한 팔을 잃고 대신 의족을 하고 4년 동안 훌륭하게 학교를 다닌 학생입니다."
그러자 보이는 대로 비난했던 축하객은 얼굴을 붉히며 함부로 말 한 것을 부끄러워했다고 합니다.
이 분은 자기의 사고방식으로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비판을 하다가 결국 가장 훌륭한 사람을 비판하는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맥스 루케이도의 ‘주와 같이 길 가는 것’이란 책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우리는 오늘 아침 비틀거리는 남자를 비난하지만 그가 어제 구타당한 모습은 보지 못했다. 절뚝거리며 걷는 여자를 판단하지만 그 여자의 신발에 박힌 압정은 보지 못한다.’
이런 예를 들자면 끝이 없을 줄 압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보는 모습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팩트라고 하면서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자신 있게 말하지만
그 사람의 속사정은 당사자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누구도 쉽게 정죄해서는 안 되고 보이는 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서 타인의 행동과 말을 순간적으로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의 사정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별로 하지 않습니다. 관심이 없습니다.
속사람을 알 수 없는 것이 유한한 인간의 모습이라면 이제 비판하는 것을 멈추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 번째로, 우리는 남의 티를 비판하는 자세가 아니라 나의 들보를 보는 일에 더 신경을 써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서, 그리고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면서 여러분들 가운데 한 가지 궁금증이 들어갈 것 같습니다.
‘주님은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래도 건전한 비판은 필요하지 않느냐?’
예를 들어, ‘정부 여당이 잘못된 정치를 하는데 야당의 입장에서는 심하게 비판을 해야 정부 여당이 잘못을 깨닫고 고치지 않겠느냐?’
‘야당이 돼서 비판을 하지 않으면 존재의미가 없지 않느냐?’
그런 점에서 적절한 비판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비판을 할 때 바른 자세로 비판을 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어느 신학대학원 교수가 오늘 본문의 말씀을 가르치면서 이 말씀 안에, 비판할 때 주의해야 할 몇 가지 수칙이 있다며 비판 십계명을 쓰셨습니다.
-미움으로 비판하지 말고, 사랑으로 하라.
-원수로 여기지 말고, 형제로 여기라.
-파괴적으로 비판하지 말고, 건설적으로 하라.
-비판해서 죽이지 말고, 비판해서 살리라.
-남만 겨냥하지 말고, 자기를 살피라.
-흥분해서 비판하지 말고, 차분하게 하라.
-사람을 비판하지 말고, 문제를 비판하라.
-뒤에서 비판하지 말고, 앞에서 하라.
-공적으로 비판하지 말고, 사적으로 하라.
-사납게 비판하지 말고, 부드럽게 하라.
제가 이 말씀을 여러 번 읽어보지만 정말 이 구절들은 옳은 말씀으로 생각되어집니다.
이렇게만 한다면 비판이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문제는 비판하는 일이 생길 때 과연 이런 생각을 하면서 건전하게 올바르게 비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비판에는 아무리 그럴듯하게 변명을 해도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암시가 들어 있다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잘못된 것을 지적함으로서 상대적으로 내가 더 잘하고 더 깨끗하고 더 올바르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심리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비판은 아무리 잘해도 상대방에게 거부감을 일으키게 됩니다.
따라서 올바른 비판보다는 비판은 하지 않는 것이 최선입니다.
비판을 하지 않는 대신 내가 비판받을 일이 없는가를 생각하며 자신을 바르게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의미도 바로 그것입니다.
비판을 통하여 사회를 바르게 하겠다는 생각보다는 내가 먼저 바르게 서는 노력을 통하여 사회를 바르게 하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남을 비판하는 일에 너무 신경을 쓰지 말고 내 자신을 바르게 하는 일에 신경을 쓰고 관심을 기울여야 할 줄 믿습니다.
이것은 우리 가정에서 가장 뚜렷하게 보여 지는 일입니다만, 자녀들을 비판하고 야단쳐서 올바르게 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가장 효과적인 자녀 교육은 자녀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들이 먼저 바르게 서는 것입니다.
내가 바로 설 때 남도 바로 설 수 있고 내가 바로 설 때 이 사회도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한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면서 율법에 이런 여자는 돌로 치라고 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하면서 예수님의 대답을 요구합니다.
이때 주님이 몸을 굽히시고 땅에 글을 쓰신 후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말씀하십니다.
그 말을 듣고 하나씩 둘씩 그 자리를 빠져나갔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하여 비판하지 말고 먼저 너희 자신을 살펴보라는 주님의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를 살펴보면, 우리는 세리와 같은 기도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전에 올라가 기도할 때 바리새인은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세리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합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판했던 바리새인들은 얼마나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까?
그러나 자기는 감히 기도할 수 없는 자라고 생각하며 겸손히 자신의 죄를 회개한 세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됩니다.
남을 비판하는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자신을 비판하는 세리가 많아져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sns의 발달로 남을 비판하는 일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모릅니다.
어떤 일이 생기면 댓글을 달아 비판을 하게 되는데 그 폐해가 얼마나 심한지 조롱과 협박과 인격모독을 이기지 못하여 목숨을 끊는 일까지 자주 벌어지고 있습니다.
남을 비판하는 것은 비판으로 끝나지 않고 살인으로까지 이어집니다.
이러한 시대에 비판을 삼가고 내 자신을 먼저 살피면서 남을 이해하고 위로하고 격려한다면 이 사회는 얼마나 더 아름다워지겠습니까?
(2021.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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