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나의 죄악이 중대 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 하소서.

열려라 에바다 2021. 6. 30. 13:53

[시25:9-11]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25편 9절-11절: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9절: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지고 가르치신다고 했다. 온유가 무엇이냐? 일반적으로는 고분고분한 사람을 말한다. 누가 말을 해도 말을 잘 듣는 고분고분한 사람이다. 성경이 말하는 온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고분고분할 줄 아는 성품이 하나님께서 알아주는 온유다. 세상소원 목적적인 명령에는 고분고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고분고분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자로 보신다.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공의란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편견을 가지지 않는, 좌우로 치우침이 없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옳음을 말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자에게 말씀을 가지고 가르치는데 봐주는 게 없다 그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편견성이 있다. 봐준다거나 적당히 하는 게 있다.

온유한 자란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받는 자인데, 온유한 자가 하나님의 도의 말씀을 받으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도의 사람이 된다. 하나님의 도의 사람이 되면 죄인을 교훈할 수 있다. 가르칠 수 있다. 이게 얼마나 좋으냐? 이걸 교훈적 측면으로 보면 죄인을 교훈해서 의인으로 만들 수 있다 그 말이다. 깨닫게 해서 바른 신앙양심을 갖게 해서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게 할 수 있다.

진리를 따라는 양심은 하나님 앞에서 옳은 양심이다. 이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다. 그러나 세상소원 목적적으로 따르는 고분고분성의 사람은 하나님의 도의 사람이 되지를 못한다. 이런 사람은 자칫 잘못하면 거짓 종들에게 속는다. 평생 남의 이용물밖에 안 된다. 이런 사람은 자기 속에 들어있는 소원 목적이 물질성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항상 물질을 따라 움직인다. 상황을 따라 세상을 따라 막 움직인다. 항상 움직이는 세상 것에 목표를 두고 사니까 자기도 흔들리는 사람이 돼버린다.

일반인간들이 제각기 양심대로 산다고 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양심은 전부가 하나님 앞에서 선악과 따먹고 나온 양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알아주지 않는 비뚤어진 양심이다. 이방 불신세상 사람들의 양심의 수준은 하나님의 수준이 아닌 세상수준의 양심이다. 그래서 자기가 아무리 양심대로 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네 양심도 틀렸다’ 라고 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성도들이 진리를 따르는 양심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

세상 사람들은 양심을 따른다고 하지만 사실은 양심보다는 겉으로 나타난 증거, 혹은 물증을 가지고 판단을 한다. 그런데 이 물증은 없을 수도 있고, 바꿔칠 수도 있고, 못 보았다고 잡아뗄 수도 있기 때문에 정확하지 못한 판단이 허다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는 추호도 속일 수가 없다. 그래서 인간이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설 때 세상 사람들은 두렵고 떨리는 거다. 마지막 그 날에는 세상에 살면서 남을 판단을 받은 자나, 또는 죄인을 판단한 자나, 또는 죄 없이 살았다고 한 자나 모두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대 앞에 서는 거다.

그 때는 누구나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당연한 거지만 그러나 이 땅에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었으니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말씀을 잘 깨달아서 말하자면 그 날에 열 대 맞을 것을 한 대만 맞을 수도 있지 않느냐? 말씀을 주셨지만 전혀 못 깨달으면 맞을 걸 다 맞는 거지만 말씀을 주신 것은 맞지 않을 수도 있고 심판을 피할 수도 있는 거라 그 말이다. 심판을 피하게 하려고 말씀을 주셨는데도 말씀을 가지고도 얻어맞을 짓을 해서 얻어맞는다면 이게 뭐냐? 이런 식의 예수를 믿지 말아라.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려는 자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옳은 순종인지를 말씀을 가지고 공의롭게 지도를 한다 그 말이다. 방편적으로도 지도하고, 목적적으로도 ‘이게 옳다’ 하고 지도를 하고, ‘그 길로 가지 말고 이 길로 가라’ 하는 것도 성경에 제시가 되어있는 거다.

가령 예를 들자면 애굽을 출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가는 것만 생각하고 블레셋 길로 곧바로 간다면 한 달이면 가나안까지 갈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서려고 한다면 하나님이 얼른 들어가라고 하겠느냐, 딱 막아버리겠느냐? 막아버린다. 막아버리면서 ‘광야로 다시 나가서 40년 동안 뺑뺑이를 돌다 오너라’ 라고 하신다. 그것도 그냥 도는 게 아니라 성경을 보면서 돌고 오라고 하신다. 그러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고치게 하려는 게 들어있기 때문이다.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성도가 순종을 할 때 하나님의 공의에서 보면 육에 기준을 둔 육적 순종이 있을 수도 있고, 영에 기준을 둔 영적 순종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공의로운 말씀을 하셨는데 이걸 듣는 자 입장에서는 육으로 듣고 육의 생각을 가지고 순종을 하는 사람이 있고, 영적으로 듣고 영적인 생각을 가지고 몸으로 순종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육으로 듣고 몸으로 순종을 한 자나, 영적 측면으로 듣고 몸으로 순종을 한 자나 겉으로 볼 때는 어느 사람이 하나님의 공의 앞에 바로 순종을 한 것인지 판단을 할 수가 없다. 똑같이 보인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그 순종을 했느냐?’ 하는 순종의 동기를 알면 누가 하나님 앞에서 옳은 순종인지를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렇게 기도하라고 했는데, 일용할 양식이란 매일 매일 먹는 양식을 말함인데, 이 말을 듣고 어떤 교인은 매일 세 끼 먹는 육신의 음식을 굶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고, 어떤 교인은 영의 양식,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쪽으로 하루 세 끼를 먹는 것을 굶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다고 하면 어느 기도가 하나님의 공의에 맞는 기도겠느냐?

기도는 둘 다 똑같이 했는데 기도를 한 자에게 ‘무슨 목적으로 기도를 했느냐?’ 하고 묻는다면 그 기도의 성질이 육의 목적인지, 영의 목적인지가 드러난다. 하나님 앞에 어떤 것이 옳은 순종적 기도인지 드러나 버린다. 그래서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안 하겠다고 한다면 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안 하는 것인지 금방 알 수 있겠지만 제각기 순종을 한다고 하기 때문에 정확한 하나님의 공의가 적용이 되지 않는다면 누가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순종을 하는 것인지를 알 수 없다. 단순히 겉으로 나타난 것만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잘했다고 보면 안 된다.

성도들의 믿음이라는 게 하나님의 것이 자기 것으로 된 믿음이 있고, 또 하나님의 것이 자기 것으로 되지 않고 자기의 기존적인 것을 여전히 가진 신앙 믿음이 있다. 그러면 어느 것이 온유한 믿음이냐? 예수 믿기 전에 가지고 있던 세상 욕심적인 것을 이루려고 예수를 믿는 것이 온유한 마음인지, 아니면 내 것은 다 버리고 하나님의 것으로 바꾸어서 가지겠다고 하는 것이 온유한 마음인지?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온유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도의 말씀의 가르침을 받게 되면 말씀의 도의 사람이 된다. 말씀을 그대로 받아서 말씀이 자기 속에 그대로 차여지는 도의 사람이 된다.

육적인 것으로 소원 목적이 되어있는 마음바탕에서는 아무리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겠습니다’ 라고 해도 여기는 하나님의 도의 말씀을 받지 못하니 하나님의 공의에 맞는 신앙을 가질 수가 없다. 그걸 알아야 한다. 그래서 장차 예수님 앞에 가면 무조건 ‘땅 땅’ 두드리며 심판을 하는 게 아니라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그 나라에서 받을 심판이 이미 판단이 나버리는 거다.

세상소원 목적적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아무리 기도를 해봐야 이 사람에게는 말씀이 들어가지를 않고 말씀을 못 받는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 말씀의 도의 사람이 되어지지를 못한다. 결국은 심판을 받는 거다. 집에서 성경을 보려고 성경은 펴놨는데 마음속에서 무슨 생각이 자꾸 나올 때는 성경구절을 눈으로만 읽어나갔지 마음에 느껴지는 게 있느냐? 없다. 그런 상태로 한 장을 다 읽고도 머릿속에는 영 다른 것만 뱅뱅 돈다. 그러면 신앙양심에서 ‘내가 이래서야 되겠느냐?’ 하고 또 다시 성경을 봐도 여전히 그렇다. 이렇게 되면 시간낭비요, 먹은 거 낭비요, 힘 낭비요, 결국은 다 공쳐버린다. 학생이 몸은 교실에 앉아있는데 마음은 오락실에 가 있다면 선생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겠느냐? 그런 것과 같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일반적인 온유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의 도를 잘 받고 깨달을 것 같으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 일반적인 온유성 속에는 인간의 주관성으로 들어있다. 일반적으로 온유한 성격 속에는 타락된 기존지식이 바탕이 되어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전도할 때도 이런 면을 볼 수 있는 거다. ‘이 사람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좋기 때문에 말씀을 잘 받겠다’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를 않다.

사람이 일반적으로 고분고분 해서 ‘어디로 놀러 가자’ 하면 금방 따라 나서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가자. 깨달으러 가자. 성경을 보자’ 하는 면에는 마음이 전혀 동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 속에 뭐가 들어서 그렇게 받지를 않는 거냐?

우리는 일반적인 고분고분성 겸손성과, 하나님 앞에 겸손성을 잘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성질이 고약하다고 해서 ‘이 사람은 마음이 고약해서, 성질이 고약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안 받겠구나’ 이렇게 보면 안 된다. 성격 성질이 고약해서 말씀을 안 받는 것으로만 생각하면 안 된다. 그 사람 속에 들어있는 그 지식으로 인해서 안 받는 거다. 우리가 그걸 알아야 한다. 그런가 하면 ‘예수 믿으세요’ 하니까 즉시로 교회에 따라 나오면 ‘아, 이 사람 참 고분고분하다’ 라고 볼 수도 있는데 그렇지만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면에서는 전혀 안 받아들이는 것이 있을 수 있다. 사람 속에 나름대로 자기의 주관성이 있기 때문에 못 받는 거다.

하나님께서는 말씀 손종자를 온유한 자로 보신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죽을 십자가를 자기가 짊어지고 하나님의 성품인 주님의 온전을 향해서 가는 자가 온유한 자다. 이런 온유한 자에게 하나님의 공의로 도를 가르치시는 거다. 여호와 하나님의 도의 가르침을 받고 싶으냐? 그러면 어떤 자가 돼야 하겠느냐? 온유한 자가 돼야 한다. 온유한 자가 되지 못하면, 즉 하나님의 말씀 거역자가 되면 너에게는 주님의 가르침은 없다 그 말이다.

10절: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여호와의 모든 길은 곧 우리를 위하여 우리에게 주신 계명이요, 율법이요, 율례요, 규례요, 법도다. 이 모든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우리가 시편을 보면 깨닫기가 참 어렵다. 복음서의 ‘바다로 갔다. 동네로 갔다. 누굴 고쳤다’ 하는 것은 그나마 알기가 쉬운데 이 시편은 시로써 돼 있기 때문에 해석하기가 참 어렵다.

첫째로 ‘계명’은 기독교도로서 종교의 도덕상 마땅히 지켜야 할 조건이다. 마땅히 지켜야 할 명령이다. 즉 십계명이다. ‘내 사정이 어쩌고 저쩌고 하니 좀 봐주세요’ 이게 아니라 이건 변개할 수 없는 절대적인 명령이다. 그 다음에 ‘율법’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사회적 도적적으로 지켜야 할 규범이다. 인간세상에는 이 율법이 없다. 일반세상은 선악과 따먹은 면에서의 얘기다. 그리고 ‘율례’는 일상생활에서의 도덕적 의무다. 그러니까 형벌이 들어있고 약속도 들어있다.

그 다음에 ‘규례’는 다 같이 지키기로 작정한 생활의식의 규칙이다. 법 외에 지켜야 하는 질서다. 일반세상에도 차를 타려고 할 때 줄을 서지 않아도 잡아가지 않을지라도 줄을 서야 하는 지켜야 할 규범이 있는 거다. ‘법도’는 한 집안에서 내려오는 가풍이나 풍습이나 가정생활이 예의범절이나 생활상의 예법과 제도다. 가족이 저녁마다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과 같은 걸 말한다.

이런 여호와 하나님의 모든 가르침 속에는 길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약속이 있다. ‘여호와의 말씀대로 사니까 어떻게 되고, 여호와의 말씀대로 안 사니까 어떻게 되고’ 하는 증거들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들이 걸어간 증거들이 그 안에 있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도를 지키며 살면 인자스러운 사람이 되고 진리이치의 사람이 되는 거다. 한 마디로 말하면 성경 구구절절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이 뜻을 자기 자체화 시키면 이치의 사람이 되어서 신앙 면에서나 도덕적 수준면에서나 굉장한 고차원적인 사람이 된다 그 말이다. 비범한 사람이 된다. 하나님과 같은 사람이 된다.

기독자로서 자기의 일생생활 면을 보면서 ‘아, 이거 내가 고쳐야 되겠다’ 하는 게 있으면 빨리 빨리 고쳐라. 죄는 아닌 것 같은데 생활의 패턴이 잘못되면 자기에게 반드시 병이 오게 되어있다. 미리 알고 고치는 게 지혜로운 거다.

11절: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여호와의 모든 법도로 가르침을 받고 보니 여호와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도 많고 죄 된 것도 많다. 믿기 전에는 죄인 줄을 몰랐는데, 그리고 믿은 후에도 깨닫지 못했을 때는 죄인 줄을 몰랐는데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도를 받고 깨달으니 자기의 죄악상이 명백하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첫째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양심을 속이는 일들이 많이 있을 수 있다. ‘말씀이 이랬는데 내가 왜 이러지?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당장 나를 죽이는 것도 아니니까 슬며시 자기 용서를 하고 죄 된 쪽으로 나가는 경우가 있다. 이처럼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바로 모르면 모르느니만큼 죄가 많다. 일반 도덕성적으로는 죄를 안 지었다고 해도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바르지 못하면 간단히 말해서 십계명부터 어그러뜨리는 큰일 날 짓들을 한다.

그 다음에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성에서 내가 다른 사람을 속일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을 한 번도 안 속인 사람이 있느냐? 다른 사람을 속이려면 먼저 자기 양심에서 부끄러움이 올라온다. 자기의 양심을 속여 놓고 다른 사람을 속이게 되는 거다. 그런가 하면 나는 다른 사람을 속인다고 한 것은 아닌데 궁극적 결과를 이치적으로 알았을 때 그 이치를 놓고 보니 ‘나는 저 사람을 속이지는 않았지만 이치로 보니 결과적으로 속인 게 되었구나’ 하는 것도 있다. 자기는 옳다고 했는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 트러블이 일어나는데 ‘아이구, 이거 내가 속았구나’ 하는 것도 있다.

아닌 말로 예수님과 석가가 만난다면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도를 전할 거고, 석가는 자기가 설산에서 12년 동안 도를 닦고 깨달았다고 하는 것을 전할 텐데 서로가 맞을까? 이 때 어느 쪽이 먼저 성질을 낼 것 같으냐? 어느 쪽이 유도를 잘 할 것 같으냐? 아마 모르긴 해도 석가 쪽이 성질을 내지 않을까? 예수님은 석가 쪽이 어떻게 나오든지 유도를 잘 하실 것 같다. 이런 이치를 가지고 우리가 인간 대 인간을 한 번 생각을 해 봐라. 자기가 어느 쪽으로 서야 될 런지?

그 다음에 나와 사건과의 관계성에서 사건과 마찰을 일으키는 게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 다음에 내가 물질과의 관계성에서도 그런 게 있을 수 있고, 또 내가 나와의 관계성에서도 그런 게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이런 면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이 무수히 많을 것이다. 손찌검 발찌검을 한다거나 뭘 가지고 두들겨 패고 하는 것은 너무나 빤한 거고, 신앙양심을 보는 눈을 가지고 관계성으로 봤을 때 정말 잘못된 게 많이 있을 것 같다.

오늘날 기독자들이 인간 자기를 지으신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면 신앙 양심적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살려는 것이 나오게 되고, 그 다음에 모든 관계성에서 바로 돼 나가는 거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자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말은 하고 있지만 자꾸 행동 활동적인 면에 치우쳐서 생각을 한다. 아무리 하나님이 말씀대로 살고 싶다고 해도 성격과 성질적인 면에서 하나님 앞에 옳은 것으로 되어있지 못하면 평생을 바로 한다고 해도 잘못될 가능성이 많다.

진리대로 살지 못한 것, 진리대로 하지 못한 것, 안 한 것, 알지 못하고 살아온 것들이 낱낱이 다 죄가 되는 거다.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에 삼킨바 되어야 할 것이 있다고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죽어나가고, 죽어나가게 내버려둔 것, 사망계로 흘러가버린 것 등의 죄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모두 나타나는 거다. 양심의 가책이 되고 부끄러운 것이 많다 그 말이다.

그런가 하면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내려가는 것을 방해한 일이 얼마나 많이 있을까? 그러니 어떻게 그 죄를 다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라고 가슴을 치면서 기도를 할 수밖에 없구나.

나의 죄를 누가 사해주겠느냐? 성도 다윗의 죄를 누가 사해주겠느냐? 다윗 당시로 보면 앞으로 오실 주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 것이다. 인간 자기의 죄는 어디서 발견이 되느냐?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에서 자기의 죄가 드러나는 거고, 그러면 인간의 그 죄를 누가 용서해 주겠느냐?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그 죄의 용서가 오는 거다. 그러니까 자기의 죄는 하나님 앞에서 명백하게 드러나야 한다. 인간 앞에서 죄가 드러나는 것은 희미하고 바르지 못하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가 드러나야 하고, 또 그 죄를 하나님으로부터 용서가 돼야 한다.

인간을 기준해서 인간 앞에서 아무리 죄를 생각해봐야 하나님 앞에서의 죄는 그대로 있을 수 있다. 인간끼리는 죄를 용서해 주었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그대로 있을 수 있다 그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니 인간이 인간의 죄를 용서해 줄지라도 선악과 따먹은 생각을 가지고 용서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의 죄는 그대로 있는 거다. 생명과를 따먹은 후에라야 ‘아, 이것이 죄였구나’ 하고 하나님 앞에서의 근본적인 죄를 깨닫는 것이기 때문에 회개가 바로 들어가고 고칠 수 있는 거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발견하고 그 죄를 사함 받는다는 게 얼마나 고차원적이냐? 이건 인간이 감히 상상도 못하는 거다. 인간 앞에서의 죄를 아무리 회개해도 부끄러운 짓을 또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죄를 발견하게 되면 양심적으로 깨끗해진다. 그래서 죄를 안 짓는 방법은 먼저 교리적으로 말해서 기본구원을 얻는 거고,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이다. 그 다음에 우리가 할 일은 말씀을 바로 깨닫는 것. 그래야 죄를 안 짓게 된다.

말씀을 바로 깨닫는 것, 그리고 말씀을 깨달았으면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말씀을 따라 결사적으로 뛰는 수밖에 없다. 이것이 아니라면 죄를 안 짓는 다른 수가 있느냐? 자기의 목숨이 달아나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그대로 뛰는 이것 말고 죄를 안 짓는 방법이 또 있느냐? 없다. 그러니 우리가 적극적으로 믿고 사는 수밖에 없다.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주의 이름을 인하여’ 라고 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에게 신령한 천국을 상속으로 주어서 그 천국을 하나님 당신처럼 누리게 하시려는 그 목적을 생각해서 나의 죄를 사해주옵소서’ 이 말이다. ‘영원 궁극적인 세계에서 하나님 당신과 같이 그 세계를 누릴 것을 염두에 두시고 내 죄를 사해주옵소서’ 하는 이 기도가 얼마나 깊으냐?

이것을 다른 각도로 말을 하면 ‘하나님께서 만일 형벌을 해서 나를 없애버리면 나를 위해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신령세계에서의 누릴 구원이 없지 않겠습니까?’ 하는 의미도 들어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버지, 그 신령천국을 누구 주려고 만들어 놨습니까? 나 주려고 만들어 놓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내가 하나님 앞에 여러 가지 죄가 많이 있지만 그걸 사해주십시오. 그래야 내가 그곳에 가서 하나님과 함께 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까 하나님이 이 말을 들어보니 ‘그래, 네 말이 옳다. 네가 죄를 지었지만 내가 용서를 안 해주면 내가 세상을 만들어 놓은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러니 네 죄를 용서해 주마’ 이렇게 되는 거다. 말하자면 성도가 알고도 지은 죄, 모르고서 지은 죄, 약해서 지은 죄 등 많은 죄를 짓고서 ‘하나님 아버지,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니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안 해 주시겠습니까?’ 하고 하나님 앞에서 담판을 짓는 거다.

우리가 하나님께 ‘천국을 누구 주려고 만들었습니까?’ 하고 물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너 주려고 만들었다’ 하는 말이 나오게 되어있는 거냐, 안 되는 거냐? 이 말이 필연적으로 나오게 되어있는 거다. ‘너 주려고 만들었다’ 하게 돼 있는 거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 그 세계를 나를 주려고 만들었으니 내가 그곳에 가야 되니까 내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겠느냐? 하나님께서 그러는 자기를 죽이겠느냐, 살리겠느냐? 죽여서 지옥에 보낸다면 하나님의 얼굴이 뭐가 되겠느냐?

그러니까 내가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우리가 많은 죄를 지었지만 영원 궁극적인 천국의 누림성 언약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용서를 해 주신다는 걸 말하려는 거다. 그런데 이렇게 해 놓고서 또 죄를 지으면 자꾸 얻어맞는 거다. 자꾸 죄를 지으면 자꾸 얻어맞는 거다. 이거는 약속이 또 이렇게 되어있다. 그래서 얻어맞으면 누구만 서럽고 아픈 거냐?

기도를 할 때는 궁극적인 그 세계의 누림성, 그 세계의 실력성 그 면을 붙잡고 기도를 하라. 이런 기도를 하면 자기를 깨닫게 해 주시고 그 면에 대한 기도는 들어주시기로 되어있다. 문제는 자기가 먼저 바로 만들어져야 한다.

그리고 목사님들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상달이 될 수 있는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유도를 해야 한다. 기도의 질이 세상 판으로 된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이런 기도는 영적인 차원에서 아무런 응답도 없는 거다. ‘세상에서 부자 되게 해 주십시오’ 하는 여기에는 자기의 실력이 50%는 들어있다. 그러니까 나머지 50%가 상달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거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기도는 영적인 차원에서는 전혀 깨달음도 없고, 상달되지도 못하고, 응답을 받지도 못하는 거다.

‘주의 이름’으로, 즉 ‘예수이름으로’ 라고 하는 것은 말로만이 아니라 정신적 사상적 질이 예수님의 성품으로 되는 것이 예수이름으로 하는 거다. 여기에는 죄의 용서도 들어있는 건데, 용서라는 게 무슨 뜻이냐? ‘지은 죄는 다 용서받는다’ 이 의미가 아니라 이미 지은 죄는 다 흘러가 버린 거고 지금까지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회개하지 않은 그 사상을 가지고 앞으로도 계속 죄를 짓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달으면 앞으로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거다. 그러니 죄를 짓지 않으니 이 면에서 면에 용서가 된다는 거다.

그리고 내가 현재 잘하고 있다면 과거적으로 지은 죄를 가지고 와서 ‘과거에 네가 이런 죄를 지었지. 이 놈 저 놈’ 하며 때리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1, 2학년 때 공부를 못했지만 3학년이 되어서 공부를 잘한다면 선생님이 그 학생을 잡아다가 ‘너 왜 1, 2학년 때 공부를 못했느냐?’ 하며 두들겨 패는 선생님이 있느냐? 없다. 이런 의미다. 그런데 죄 용서라는 것을 자꾸 이미 지나간 죄를 용서해 주는 것으로만 생각을 하고 있다.

우리가 이미 지은 죄는 흘러가 버렸다. 그런데 왜 두들겨 패느냐? 앞으로 또 그런 죄를 짓지 말라고 두들겨 패는 거다. 그런데 회개가 돼서 바로 나가면 하나님은 나의 과거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내가 지금 죄를 지은 것이 과거적으로 10년 전에 지은 것과 똑같이 죄를 지은 거라면 ‘네가 옛날에도 그러더니 지금 또 그러는구나’ 하고 두들겨 패는 것도 있는 거다. 이제 죄 용서라는 말을 알 수 있겠느냐?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말씀을 계속 깨닫고 이때까지 몰랐던 것, 알면서도 그래왔던 것을 자꾸 하나님의 옳은 것으로 바꿔 넣는 거다. 이렇게 되면 과거적으로부터 오늘까지 죄를 지어오던 것이 오늘 이후로 미래적으로는 다시 안 짓게 되는 거다. 그래서 알고 보면 우리가 말씀으로 이치를 깨닫지 못하면 결국은 회개를 해놓고 또 죄를 짓게 되는 거다. 그래서 오늘 회개가 됐느냐 하면 회개가 안 된 상태로 또 죄를 짓는 거고, 회개를 했다고 하면서 또 죄를 짓고 하는 거다.

이게 무슨 말이냐? 자기의 가치판단이나 평가성이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에 맞지 않으면, 즉 영원 궁극적 그 세계의 기준으로 되어있지 않으면 현실세계에서 인간 앞에 죄를 짓고서 ‘내가 저 사람에게 잘못한 죄를 회개했습니다’ 라고 하며 백날 회개를 한다고 해도 자기 속에 그 죄는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에 못 고치는 거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바로 고친 것은 이 사람에게나, 저 사람에게나,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옳음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의행이 된다.

인간들을 보면 잘못했다고 하며 서로 악수를 해놓고서 또 싸운다. 왜 그럴까? 상대가 자꾸 긁어서 그런 거냐? 그게 아니라 자기 속에서 죄를 보는 지식이 비뚤어져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옳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죄를 짓고 또 죄를 짓고 하는 거다.

우리는 말씀을 사모하면서 말씀의 공의로운 판단의 지식을 자기 속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판단, 주님의 판단, 말씀의 판단, 영원히 가는 판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먼저 자기 속부터 보고, 그 다음에 단순히 눈으로 보여지는 것만 보지 말고 그 속의 질이 누구에게로 향해져 있는가를 봐야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