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25편 17절-20절: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25편 17절-20절: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곤난에서 끌어내소서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내 원수를 보소서 저희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함이니이다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치 말게 하소서.
17절: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곤난에서 끌어내소서.’ 곤란하다는 것은 인간 자기가 일을 처리하기에 매우 어려운 것을 말한다. 세상에는 이런 일이 많다. 진리성도 다윗에게도 곤란한 일들이 많아서 근심 걱정이 많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근심과 걱정은 자기의 육신의 생명과 의식주에 관한 것이다. 자기 일에 대한 근심 걱정, 자기의 앞날에 대한 근심 걱정 등 세상 사람들은 다 근심 걱정이 많다. 그리고 미래적으로 이 세상에서 곤란을 당하지 않으려고 보험을 많이 들기도 한다. 이 세상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거고, 세상에서는 그래야 되는 거다. 세상에서 그런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영원 궁극적인 면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에게 보험을 들어놓는 게 이치다. 그러면 다윗도 세상 사람들처럼 그런 종류의 근심 걱정인가? 20절에 보니 영혼에 대한 근심 걱정이다.
세상 일반사람들은 의식주에 관한 근심 걱정밖에 없다. 자기 영혼에 대한 근심 걱정은 몰라서 못한다. 말세 때에 거짓 종들이 많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영혼에 대한 근심 걱정을 많이 하게 한다는 의미인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무슨 근심과 걱정을 할까? 세상과 세상 것에 대한 것을 소원 목적적으로 근심을 하고 있더라. 이건 마음 기울어짐이 다른 거다.
이것은 마귀의 첫째, 둘째, 셋째 시험에 다 넘어간 거다. 성도의 마음상태가 세상에 대한 걱정 근심을 한다면 이는 마귀의 세 가지 시험에 다 넘어가 버린 건데, 마귀의 시험에 넘어간 상태에서 마음에 고통이 올 때는 그걸 자기 스스로 이길 힘이 없다. 헤어 나오지 못한다. 헤어 나왔다고 할지라도 자기 보기에 그런 거지 알고 보면 헤어 나온 상태가 아니다. 물질적으로 헤어 나온 것과, 정신 사상이 헤어 나온 것과는 다른 거다.
환난 핍박이 왜 오느냐? 죄를 지으면 그것이 미끼가 되어서 환난과 핍박이 올 수도 있고, 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지키려니, 옳은 것을 지키고 붙들고 살려고 하니 옳은 것 때문에 환난 핍박이 올 수도 있다. 이때에 그 환난 핍박에 의해서 성도의 마음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진리를 버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 이미 지은 죄도 마음이 아픈데 또 다시 죄를 짓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본문의 다윗의 기도는 이와 같은 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이 되지 않도록 자기를 하나님의 생명권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나님의 애정권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끌어내 달라는 거다. 다윗의 근심 걱정은 세상에 대한 것이 아닌 하나님 쪽으로 가 있는 거다. 안 믿는 사람과는 다르다.
믿는 우리가 ‘이래야 되나, 저래야 되나?’ 하는 곤란한 일을 겪기도 하는데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그런 상태에서도 자기는 결정을 못 내릴지라도 그러나 마음의 소원성은 이룰구원 차원에서 자기를 하나님 쪽으로 끌어내 달라고 하는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기도 하고, 또 구원해 주시기도 한다. 그런데 그러지를 않고 세상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진다면 이건 벌써 자기가 넘어간 거다.
18절: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곤고’의 일반적인 뜻은 곤란한 일들이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다. 환난과 재난이 닥쳐서 영과 육이 고통을 당하는 것. 그런데 육은 고통을 당할지라도 영적 차원에서는 편안한 상태도 있을 수 있고, 또는 육신은 아무런 고통을 당할만한 것이 없는데, 즉 의식주에 대한 아무런 불편이 없는데 자기 마음이 시험에 들어서 마음이 고통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또 육신도 고통을 당하고 마음도 고통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죄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인데 하라고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안 하는 것도 죄다. 이런 경우는 이룰구원 성화구원에 관계가 된다. 또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하는 것도 죄인데 이런 경우는 육 목적으로 나가는 거다. 또 말씀대로 한다고 했지만 자기 주관대로 한 죄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먼저 알 필요가 있다. 뭔가 하니 예수를 안 믿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죄인이냐, 죄인이 아닌데 죄를 지으면 죄인이 되는 거냐? 죄를 짓던 안 짓던 모두가 죄인이다. 왜 그런가? 이방 불신세상은 모두가 선악과 따먹은 정신으로 세상을 소원 목적하며 살고 있다. 생명과를 따먹어야 하나님 앞에 옳고 선한 건데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모두가 죄인이다. 우리는 이런 눈으로 봐야 한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다면 생명과를 따먹어야 하는 건데 예수 믿는 사람이 생명과 영생과를 안 따먹는다면 이것도 죄다. 예수 믿는 사람이 생명과를 안 먹으면 자동적으로 선악과를 따먹는 차원이 되니 이것이 죄가 되는 거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선악과를 먹고 그 죄로 인해 영이 죽은 거고, 이건 모든 인류에게 해당이 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 선악과를 먹으면 이 사람은 그 죄로 인해 신앙생명이 자라지를 않는다. 성화구원에 관한 말이다.
아담 하와 때의 영은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는 가범성적 가사성적인 영이었는데 이 영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그 영은 죽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영이 중생을 하게 되면 영이 중생한 사람이 혹 육신적으로 죄를 짓는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효력을 입었기 때문에 그 영은 영원히 안 죽는다. 하나님이 영원히 안 죽는 영으로 만들어 놨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의 효력으로 그 질을 하나님의 본질과 똑같게 만들어 놨다. 다만 죄를 지으면 중생된 영이 죽지는 않지만 신앙생명이 자라지를 않게 되고 그로 인한 곤고와 환난이 있게 되는 거다.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다윗의 이 기도를 보면 다윗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환난이 온 것으로 보인다. 죄 때문에 환난이 왔다고 느껴지면 회개를 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다. 회개를 하고 진리를 붙잡아야 한다. 진리를 붙잡지 않는 회개는 있을 수 없다. 회개가 됐다고 하는 것은 진리를 붙잡은 상태를 말하는 거다. 만일 회개를 했다고 하면서도 진리를 붙잡지 않거나 또는 붙잡은 진리를 버리게 되면 또 죄를 짓게 된다.
성도로서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영생과 생명과를 먹어야 하는 건데 진리를 붙들지 않으면 이걸 못 먹는다. 못 먹으니 이룰구원이 안 된다. 안 되니 이것이 하나님 앞에 죄가 돼 나가는 거다. 이렇게 되면 그 다음의 언행심사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 다 죄로 들어가 버린다. 일반사람들은 이걸 전혀 모르고 행동 죄를 지어야만이 죄를 짓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우리는 행동 죄 이전에 정신 사상적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 행동 죄는 안 짓는다고 해도 진리에서 이탈된 상태라면 이미 죄에 들어가 있는 거다. 이렇게 되면 육신적으로 여러 가지 환난이 온다거나 정신 사상적으로 환난이 온다거나 하면 행동 죄는 자동화가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음으로만 죄를 가지고 있어도 이미 죄를 지은 것이라고 말씀하신 거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지만 사람들은 겉만 보고 말을 한다. 그 활동을 하는 사람의 속중심이 어떻게 비뚤어졌는지는 전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걸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자기 속이 뭐가 비뚤어졌는지를 아는 거다.
곤고와 환난을 당하는 이유가 사람의 마음중심이 하나님의 뜻에서 비뚤어져 있기 때문이고, 또 이런 경우도 있다. 무슨 말인가 하니 엉거주춤하는 일도 있다. 엉거주춤하며 빨리 결론을 못 내리고 있다가 곤고와 환난을 당할 수도 있다. 우리는 절대로 엉거주춤하면 안 된다. 그러려면 자기가 분명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분명한 판단을 내리려면 뭔가 알아야 한다. 알면 판단을 내리는 게 빠르다.
목사님들 세계에서도 그런 걸 많이 보는데, 사정이 생겨서 살던 집을 팔려고 얼마에 내놨는데 그 값에 사려는 사람이 없어서 계속 그 집을 붙들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그러지 말고 네가 진짜 목회를 할 것 같으면 다소 손해를 볼지라도 빨리 팔아서 복음에 투자하라’고 하니까 하는 말이 들리는 소문이 그곳이 개발이 될 계획이라서 더 붙들고 있으면 땅값이 더 올라갈 것 같아서 싸게는 팔지 못하겠다고 한다.
아니, 그러면 세상만사는 이리 돌고 저리 돌고 하는 건데 앞으로 틀림없이 더 많이 받고 팔 수 있는 거냐? 자기가 앞날을 어떻게 알고 더 받고 팔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 거냐? 이건 그렇게 해서 나중에 돈을 더 받고 판다고 할지라도 벌써 복음의 정신에서 빗나간 거다. 영적인 면에 유익이 된다면 물질에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영적인 유익 쪽으로 나가는 게 옳은 신앙정신이다. 매사를 영원 궁극적인 이룰구원을 염두에 두고 해 나가는 것이 돈으로 환산이 되는 거냐? 그런데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하는 목사님이 참 많다.
19절: ‘내 원수를 보소서. 저희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함이니이다.’ 성도의 원수는 사람을 영원히 넘어뜨리는 자다. 임시적인 원수는 사람을 세상에서 못 쓰게 만든다. 이 임시적인 원수는 영원한 원수를 모른다. 왜냐? 사람이 넘어지는 걸 모르기 때문이다. 모르니까 그런 짓을 하는 거다.
우리 기독자들은 영적인 면에서 신앙정신 사상적으로 영원 궁극에 해당이 되는 원수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사람을 영원히 넘어뜨리는 이 원수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이 면에 전문가가 돼야 한다. 이런 사람은 진리지식의 지혜로 자체화로 잘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임시적인 원수에게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교인 자기가 육 주격으로 되어있다면 임시적인 원수만 아니라 영적인 원수에게도 그만 넘어가 버린다.
기독자의 원수는 예수 믿는 나를 천국에 못 들어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능력도 없고, 성도로 하여금 이룰구원을 못 이루게 하여 하나님의 진노로 얻어맞게 하는 것인데, 예수 믿는 사람이 이 원수에게 먹히면 이 원수가 부려먹고 이용을 하게 된다. 우리는 원수에게 당해서 하나님을 떠나고 진리를 놓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
하나님의 원수이면 예수 믿는 자기의 원수인데도 예수 믿는 사람이 이것을 모르면 자기의 죄가 뭔지도 모르고, 자기의 허물이 뭔지도 몰라서 원수 쪽으로 가서 붙는 일이 생긴다. 이렇게 되면 결국은 자기의 허물이 노출이 되고, 그 원수들에게 책잡히고, 그럴수록 자기 속의 고통은 자꾸 커지고, 그러면서도 그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곳에서 빠져나오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 이런 상태로 계속 있다가는 곤란한 일들이 자꾸 일어나서 고통을 받고 재앙도 자꾸 받아서 그야말로 영과 육의 고통이 오는 거다.
이럴 때 무엇부터 기도를 하겠느냐? 자기가 기도할 때는 ‘어느 쪽의 고통을 더 강하게 느끼느냐’에 따라 그것을 위해 기도를 하게 된다. 육 쪽으로 많이 고통을 느끼면 그 육을 위해서 기도를 하게 되고, 영인성장 면으로 고통을 많이 느끼게 되면 그 쪽으로 기도를 하게 된다. 그러니 우리가 어느 쪽으로 기도를 하는 것이 옳은 기도이겠느냐? 무엇을 위해 기도를 하는 것이 옳은 기도이겠느냐?
자기에게 재난과 근심과 걱정과 고통이 생긴 것은 무엇이 원인이 되어서 왔느냐를 분별하고 자꾸 파고 들어가고 또 파고 들어가면 죄가 나타난다. 행동한 죄 그 이전에 마음 죄, 마음 죄 그 이전에 세상지식을 기준적 지식으로 판단을 해서 죄를 지은 것이다. 진리본질에서 어긋나고 빗나간 세상지식을 자기의 주격적 지식으로 가졌다면 이미 죄가 되는 거다. 그 다음은 말할 게 없다.
예를 들자면 종기에서 고름이 나오고 진물이 자꾸 흐르는데 그 진물을 닦고만 있으면 그게 낫겠느냐? 그 진물이 왜 자꾸 나오는 거냐? 종기 안에 노란 균 덩어리가 있어서 그것 때문에 진물이 나오는 거다. 원인을 파고 들어가서 종기 속에 노랗게 자리 잡은 그 균 덩어리를 아프더라도 빼버리면 고통이 멈춘다.
자기에게 죄 때문에 근심 걱정이 오고, 이로 인해서 자기가 고통을 당하고 환난을 당한다는 것을 안다면 아는 입장에서 무엇이라고 기도를 할까? 자기의 영혼을 바로 세워달라는 기도를 하게 된다. 그러나 보통은 그렇게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자기가 넘어진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는 게 아니라 자꾸 딴 데서 찾는다. 물질에서 찾고, 물질로 자기의 고통을 풀려고 한다. 이런 자는 자기 스스로 또 다른 고통을 끌고 와서 다른 각도로 자기가 또 고통을 당한다.
다윗이 기도하기를 다윗 자기의 원수가 많고 심히 자기를 미워한다고 했는데 믿는 우리가 원수를 대할 때 자칫 잘못하면 이방 불신자들의 사고방식으로 기울어지기 쉽다.
어떤 때 나의 원수가 되느냐? 1. 자기편이 많고 상대편의 숫자가 적으면 원수가 아니고 자기편은 적고 상대편은 숫자가 많기 때문에 원수가 되는 것이다? 2. 내 편이 많던 적던, 저쪽이 많던 적던 하나님의 원수이면 자기의 원수다? 어느 것이 맞는 거냐?
다윗은 어떤 것을 원수라고 하느냐? 1. 사람이 많던 적던 다윗 자기를 사랑만 하면 다윗 자기의 원수가 아니다? 2. 사람이 많던 적던 이룰구원 성화구원을 잘 이루어 나간다면 성도 다윗의 원수는 아니다? 어느 게 맞는 거냐?
다윗은 누구를 원수라고 하느냐? 1. 다윗이라는 인간을 미워하면 다윗은 자기의 원수로 삼는다? 2. 다윗의 입장에서 봤을 때 하나님의 진리본질을 미워하면 다윗은 그 사람을 자기의 원수로 삼는다? 어느 게 맞느냐?
주님의 원수는 누구냐? 열 교회든 백 교회든 모든 교회들이 진리본질을 버리면, 하나님의 말씀 진리본질을 버리면 주님의 원수다? 2. 교회들이 덩치만 키우면 주님의 원수가 아니고 주님의 사랑을 받는다?
이 묻는 물음에서 허점을 찾아서 자기를 보는 신앙의 눈이 밝아져야 한다.
20절: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치 말게 하소서.’ 생각이 나면 마음이 가는 거고, 마음이 가기 시작하면 몸도 따라가기 시작한다. 사람마다 시간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마음을 따라 행동을 하게 된다.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을 때 어떻게 하느냐? 성도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은 환난이 계속 겹쳐져 오고 근심 걱정으로 고통 중에 있게 되면 그 순서가 영혼부터 구원해 내야 한다. 영혼구원은커녕 상대방이 요구하는 대로 다 해준다면 고난 중에 있는 그 사람은 바로 서지를 못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안 도와줘서 사람을 망치는 것도 있지만 안 도와줘야 할 사람을 도와줘서 그 사람을 망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점을 늘 신경을 써야 한다. 사람을 망치면 영원히 심판이고, 영원히 구원을 이루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멸망을 받는다.
일반세상에서는 이런 걸 전혀 모르고 표면적인 것,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만 잡고 왈가왈부한다. 그러는 통에 의인까지 잡아 당겨서 잡아 뜯고 긁고 한다. 그러나 기독자의 경우는 상대방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사람이 바로 서는 것을 염려 걱정하면서 돕기도 하고 안 돕기도 하는 거다. 하나님도 그러시는 거다.
우리는 순서가 영혼부터 구원해 내야 한다. 물론 활동으로 본다면 동시성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영혼부터 먼저 생각을 해야 한다. 영혼구원을 목적하여 그걸 염려 걱정하면서 방편상 육을 구원해 내야 할 때도 있는 거다. 이런 경우는 육신의 목숨이 위급할 때다. 육신 목숨마저 죽어버리면 죽은 송장에게 ‘예수 믿으시오’ 할 수 있느냐? 육이 살아야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거다. 이런 때는 육을 먼저 구원해 내야 한다. 하나님도 이 방편을 쓰시기도 한다.
성도의 경우 신앙사상 면에서 영혼을 구하려니 주께로 가야 하고, 주께로 간다고 하는 것은 옳은 진리를 찾는 것이고, 옳은 진리를 찾아서 진리실력을 자체화 시키는 것이 주께 피하는 것이고 동시에 수치를 당치 않는 거다.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치 말게 하소서.’ 진리 안으로 들어가야 수치를 당치 않는 거다. 수치를 당치 않는다고 하는 것은 그 속에 교훈도 들어있다. 주께 피하면 주님이 어떻게 하겠느냐? 주님이 그 사람을 꼭 숨기고만 계실까? ‘이리 오너라. 네가 왜 도망을 다니느냐? 네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 하며 교훈으로 가르친다. 그러면 인격의 수준이 도망 다닐 때의 수준이 아니라 저질이 되지 않고 주님 차원으로 올라간다. 이러면 죄 짓는 일이 없어진다. 그러니 수치를 당치 않게 되는 거다. 깨닫는 수준이 올라가야 자기가 수치를 당치 않게 된다. 자기의 인격의 수준이 낮으면 이단을 만나도 수치를 당하고, 거짓을 만나도 수치를 당한다.
우리는 당대방과 싸워서 수치스러운 것보다 하나님 앞에 잘못된 자기를 발견했을 때는 남이 이걸 모른다고 해도 인격적인 면에서 수치가 되는 거다. 이런 사람은 그 인격이 얼마나 고단수냐? 자기가 자기를 살피지 않으면 이런 장면을 자기가 어떻게 느끼겠느냐? 예수 잘 믿어 들어가면 이런 마음이 속에서 상당히 민감해지는 거다.
하나님 앞에 수치감을 느낄 때 ‘아무리 생각을 해도 하나님 앞에 양심이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못 살겠다’ 하며 죽어버린다면 이런 경우는 뭐냐? 잘 한 거냐, 잘못한 거냐? 수치스럽다고 해서 자살해서 죽어버리면 자기의 이룰구원을 죽여 버린 것이니 자기 속의 그 고집이 뭐냐? 순 자기만 생각하는 고집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는 걸 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진리를 붙잡고 수치감을 메워야 한다. 이룰구원으로 나가면서 자꾸 메워야 한다. 이게 시원시원한 사람이다. 우리교인들은 아무리 잘못했어도 가룟유다처럼 목 매달아 죽지 말아라. 이건 정말 수치다. 죽어서도 수치다. 수치를 더 드러내 버리는 거다.
우리 성도는 죽음 저 너머 영원 궁극적인 세계의 수치를 먼저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러면 이게 뭐냐? 이룰구원 차원이다. 영적인 실력이 없다는 것은 기독자의 수치이고, 교회의 수치이고, 성도 자기의 수치다.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이단자들이나 거짓 교인들과 대화를 할 때 절대로 큰소리로 이기려고 하지 말아라. 이치로 갖다 대야지 괜히 큰소리 하고 쓸데없는 말을 해서 상대방이 도망갔다고 해도 이건 이긴 게 아니다. 이치가 분명해야 한다. 상대가 자기를 이치적 교훈에 대보니 자기 인격이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더 있지를 못하고 도망가게 해야 한다.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이 우리교회에 수 년 동안 다녔으면서도 거짓교인들과 붙어서 말 한 마디도 못하고 당하고만 있다면 이건 궁극교회 전체의 수치요 목사의 수치가 되는 거다.
우리 기독자는 자타의 이룰구원 성화구원이 없는 곳에는 있을 수 없다. 그런 교회에 나가면 절대로 안 된다. 자기가 죽는다. 자기가 망한다. 그런 곳에 계속 있게 되면 자기의 수치만 자꾸 누적이 된다. 자타의 이룰구원의 진리본질의 이치를 싫어하는 자들은 진리의 성도들을 미워하고, 주님의 의사와 단일성을 이루지 못하고, 주님의 의사를 대적하는 자들인고로 그런 곳에 있다가는 수치를 당하게 된다.
자기가 비진리의 곳에 있다면 자기에게 환난이 오는 줄 알아야 하다. 개인적인 환난이나 시대적으로 오는 환난이나 교회적인 환난이 올 때는 먼저 자기의 영혼구원 면에 기도를 해야 한다. 그리고 진리이치를 잡아야 한다. 그래야 자기의 영혼구원이 이루어지는 거다.
20절: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치 말게 하소서.’ (계속)
김경형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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