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식으로 살아가는 성도들
마태복음 13:24-30
지난 26일에 한참 철수가 진행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카불공항에서
자살 폭탄테러가 발생해서 현재까지 무려 170여명이 죽고
1,300여명이 부상을 당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인 아이에스가 저지른 테러로 알려졌습니다.
어떻게 자기 몸에 폭탄을 장착하고 수많은 생명을 빼앗는 자폭테러를 자행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다음세상에서 축복이 있다고 가르치는 종교와 사상도 정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비단 카불공항의 테러 뿐 아니라 오늘날 얼마나 많은 악들이 날뛰며 사회를 어지럽히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럴 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며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악을 징벌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는 것입니까?’
때로 그런 문제 때문에 많은 고민도 하고 실망도 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회의를 가질 때가 있습니다.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가 그 중에 하나였습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1:13)
당시 바벨론은 막강한 군사력을 동원하여 유다를 침공하고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선지자는 하나님이 왜 악인을 처벌하지 않으시고 악행을 참고 계시냐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처럼 많은 사람들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며 왜 하나님은 이런 악을 방관하고 계시냐고 따지지만 현실은 악한 일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이 세상의 일에 별 관심이 없는 것입니까?
그냥 되는대로 내버려두시는 것입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모든 것이 함께 자라고 함께 공존하는 세상입니다.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고,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공존하고, 진리와 이단이 공존하고,
사랑과 배신, 교만과 겸손, 참음과 참지 못함, 슬픔과 기쁨,
건강과 질병이 함께 자라고 함께 공존하는 세상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니라.”는 유명한 고백을 하였습니다.
세상 뿐 아니라 우리 마음에도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기 원하고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내가 있는 반면에
원하지 않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는 또 다른 나를 보면서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밭이나 살아가는 세상은 이처럼 악과 선이 공존하고 있고 가라지와 곡식이 함께 자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고 역사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데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라지와 곡식의 비유는 그 이유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좋은 씨를 뿌리는 자가 있는 반면에 가라지를 뿌리는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라지의 비유를 보면, 주님은 좋은 씨를 뿌리는 주인입니다.
그런데 밤새 원수가 즉 마귀가 와서 가라지를 몰래 뿌리고 갔습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를 뿌리는 자가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은 선과 악이 공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악을 뽑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가라지가 생긴 것을 보고 종들이 주인에게 ‘이 가라지를 뽑아 버릴까요?’ 말을 하자
주인은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가 되니 그냥 내버려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내버려두라.’
하나님이 악을 엄격하게 심판하시면 악이 없는 세상이 될 텐데 그런데 하나님은 그냥 내버려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악과 선이 공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이요 이 세상에서 악과 선이 함께 공존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삶인가?
이것을 생각해야 하고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삶의 자세입니다.
‘왜 하나님이 세상을 이렇게 통치하십니까?’ ‘하나님 올바르게 통치하십시오.’
‘권선징악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분명하게 증거 하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따지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의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고 하는데 우리가 따져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이런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거기에만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삶이고 험한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의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눅7:23)
하나님의 일을 내 생각대로 재단하고 내 마음대로 해석해서 불신앙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라지와 곡식의 비유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데요,
여기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바로 주님의 관심사입니다.
주님이 누구에게 관심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가라지에 관심을 갖지 않고 곡식에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종들이 가라지가 자라난 것을 보고 가라지를 뽑을까요? 합니다.
당연히 종들의 입장에서는 곡식사이에 난 가라지를 뽑아버리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러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 이유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한다.’고 대답합니다.
주님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가라지를 뽑는 일이 아니라 곡식을 보호하는 일이었습니다.
가라지를 뽑고 악을 심판한다고 하다가 행여 곡식까지 다치면 안 되기에 가라지를 뽑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가라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곡식을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이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방식이 곡식위주임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가라지를 뽑는 일에 신경을 쓰기 보다는 곡식을 보호하는 일에 신경을 쓰고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가라지를 뽑고 악을 심판하시는데 주님이 관심을 갖고 그것을 실행하는 일에 집중하고 계신다면 이 세상이 과연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관심은 가라지가 아니라 곡식이었습니다.
가라지를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곡식을 보호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가라지와 곡식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곡식이 된 우리를 향해 하나님은 어떻게 살라고 말씀하실까요?
먼저는, 가라지의 형통에 관심을 갖지 말고 부러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잠언 24장 19절에 보면, ‘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가라지와 악이 함께 공존하는 세상을 살다보면 행악자들로 인하여 분을 품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별히 말씀으로 정직하게 올바르게 살려고 하는데 일이 잘 되지 않을 때,
여기에 반해 악을 행하면서 각종 불법을 저지르는 사람이 잘 사는 것을 볼 때 화가 나기도 합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면서 나도 대충 살아갈까? 하는 마음이 들어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노하지 말라.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참으시고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형통하게 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삶의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30절 말씀에 보면,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했습니다.
40절에서는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하나님이 곡식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말은 가라지는 그냥 내버려두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가라지는 그냥 가라지로 자라게 두고 그렇게 자라면 주님이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 관심한다는 것같이 무서운 말은 없습니다.
무관심하다는 것은 모든 기대를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그냥 제 마음대로 살도록 방치하고 내버려둔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포기했을 때 그 삶이 어떻게 될 수 있겠습니까? 제대로 이어질 수 있겠습니까?
지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구원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 끝 날의 심판이 가라지에게 있습니다.
그러기에 가라지의 일시적인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악인이 잘 되는 것으로 화를 낼 필요가 없고 그런 가라지와 같은 삶을 살아가서도 안 됩니다.
두 번째는, 가라지의 유혹과 시험을 이기는 삶을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이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해 주시면서 가라지를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41절)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라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좋은 곡식인 성도들을 넘어지게 하는 자들입니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악이 있고 가라지가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그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고,
우리를 넘어지게 하고 불법을 행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은 일찍이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여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것을 구했을 때 하나님은 구하지 않은 것까지도 다 주셨습니다.
놀라운 축복을 받은 솔로몬을 넘어지게 만든 것이 바로 이방의 여인들이었습니다.
이방의 여인들을 데려와서 아내로 삼은 솔로몬은 그들이 갖고 온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떠나는 잘못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가라지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결국 그 잘못으로 인하여 나라가 남북으로 나누어지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롯이 소돔과 고모라 성으로 그의 거처를 옮겼을 때 롯은 필연적으로 그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이 멸망당할 때 그들은 모든 것을 다 잃고 말았습니다.
그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천사의 말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그의 두 딸은 아버지에게 술을 먹이고 잠자리를 같이해서 아들을 얻었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이런 불신앙적인 생각을 했겠습니까?
소돔과 고모라에 살면서 그들이 살아갔던 악한 모습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들은 그들이 악한 소돔과 고모라의 영향을 얼마나 크게 받았는가를 잘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악이 공존하고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세상입니다.
그곳에서 살아가다보면 우리도 악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이것들을 피하라고 말씀합니다.
가라지의 유혹을 피하여 넘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을 피하고, 돈을 사랑하는 것을 피할 뿐 아니라 그 외 수많은 가라지의 유혹을 피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나는 괜찮겠지’ 절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피할 것을 피해야 그것에 물들지 않고 시험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떻게든지 따를 것을 열심히 따르고 추구하는 경건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주님께 나와 예배하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늘 깨어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잘못된 영향을 받지 않도록 믿음으로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이 악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성도들의 지혜요 올바른 자세입니다.
세 번째는, 좋은 곡식으로 자라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40절부터 43절에서는 마지막 심판 때의 모습을 잘 묘사해 주고 있는데요,
하나님은 지금까지 곡식과 함께 자라게 했던 가라지를 뽑아서 풀무 불에 던져 넣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게 하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의 때, 추수의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가라지와 함께 자라야 하는 이 불편한 현실 속에서도 우리가 인생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줄 믿습니다.
되는대로 적당하게 가라지인지 곡식인지 잘 구별되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가서는 안 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곡식이고 하나님의 백성이고 천국의 영광을 누려야 할 성도들입니다.
그러기에 어렵고 힘들고 괴로워도 끝까지 좋은 곡식으로 열매를 맺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의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다윗이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사울왕은 다윗을 엄청나게 괴롭혔습니다.
전국에 수배령을 내리고 사울 왕이 직접 최정예군대를 이끌고 다윗을 잡으러 전국을 누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두려움은 물론이고 생활이 제대로 되었겠습니까?
다윗의 입장에서 얼마든지 하나님을 원망하고 삶을 다 포기하고 되는대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끝까지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마지막 하나님이 나를 왕으로 세운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라지와 함께 살면서 힘들고 어렵지만 끝까지 좋은 곡식으로 살아야 할 이유는 마지막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는 삶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왜 가라지를 뽑지 않으십니까? 왜 악을 심판하지 않으십니까?’
하소연하며 안타까워하고 고통 속에서 울부짖으며 심지어는 가라지를 뽑는 삶을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만 그러나 여러분,
가라지를 뽑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지 결코 우리의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가라지를 잘 알 수도 없고 분별할 수도 없습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까지 뽑는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뽑는 역할이 아니라 가라지 속에서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가는 곡식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가라지가 일시적으로 형통하다고 그것을 부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가라지가 그럴듯한 모습으로 유혹한다고 넘어가서도 안 됩니다.
가라지의 유혹을 뿌리치면서 끝까지 곡식으로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믿음으로 말씀으로 살아가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마지막 때에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게 하실 줄 믿습니다.
(2021.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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