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자료

기독교 교파의 차이

열려라 에바다 2023. 8. 17. 10:49

기독교에는 많은 교파가 있습니다.

 

감리교, 장로교, 성결교, 침례교, 순복음 등등 듣다 보면 머리가 아득할 지경이죠. 

 

게다가 같은 장로교 안에서도 통합, 합동, 고신, 기장 등이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같은 기독교 신자라 해도 그만 귀를 닫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기독교 신자가 아니시라면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래서 티스토리 블로그 개설 기념으로 기독교 교파의 차이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1. 기독교라는 명칭에 대하여

 

먼저 기독교라는 이름부터 살펴봅시다. 기독교(基督敎)는 Christianity의 음역입니다. 그리스도를 한자로 옮길 때 '기독'이 된 것이고, '기독교'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종교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천주교는 무엇인가? 흔히 천주교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로 인식되지만 사실 기독교 안에 천주교가 포함됩니다. 천주교는 로마 가톨릭의 한 수도회인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갔을 때 스스로를 일컬었던 명칭입니다. 즉 천주교는 기독교의 한 분파인 셈이죠.

 

2. 칼케돈파와 비칼케돈파

 

(논란은 좀 있지만) 이단이 아닌 정통 교회 안에서 분파가 이루어진 것은 칼케돈 공의회가 첫 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의회'란 교회의 우두머리인 주교(bishop, 감독)들이 모두 모여 교회의 현안을 다루고 문제를 해결한 회의를 말합니다.

 

고대 교회(70~476) 시기에는 총 7차례 공의회가 열렸고, 이 중 처음 열린 4차례의 공의회가 중요합니다. 이 공의회에서 기독교 신학의 기본적인 틀이 결정되었거든요.

 

최초의 공의회는 제 1차 니케아 공의회(325), 그 다음은 제 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

 

그 다음은 에베소(에페소) 공의회(431), 마지막이 칼케돈 공의회(451)입니다.

 

여기서 저는 네 공의회를 의도적으로 다른 줄에 배치했습니다. 제 1차 니케아 공의회와 제 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가 서로 관련이 있고, 나머지 둘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공의회인 1차 니케아 공의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논쟁을 다루었습니다. 쉽게 말해, 예수가 신이냐 아니면 신이 창조한 첫번째 피조물이냐에 대해 답을 준 것입니다. 당연히 답은 예수는 신이다, 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한 분 뿐인데 그럼 어떻게 되느냐? 물음이 남았고 논쟁이 다시 치열해졌기 때문에 381년 제 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다시 정교한 대답을 내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삼위일체'입니다.

 

다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과의 관계에 대한 물음이 제기됩니다. 쉽게 말해, 예수가 신이면, 예수는 신이냐 사람이냐 하는 문제가 생긴 것이죠. 예수님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인간의 몸을 입었는데, 예수님 안에 인간의 비율과 신의 비율이 각각 어떻게 되느냐(...) 하는 일로 논쟁이 발생했습니다. 여기서도 1차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일이 반복되는데, 에베소 공의회에서 1차적으로 내렸던 답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자 다시 칼케돈에서 모여 더 정교한 답을 내린 것입니다. 칼케돈 공의회에서의 결정 사항은, "예수는 100% 신이며, 100% 사람이다!"였습니다.

 

하지만,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 사항은 대부분 교회가 받아들였으나 이를 수용하지 못하는 교회가 소수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알렉산드리아와 시리아 지역의 일부 교회들이며, 에베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받은 네스토리우스파도 포함됩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각각 구분해서 파악하는 것 자체를 거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완벽히 하나가 되었다, 라고 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들의 논리는 '합성론'이라고 일컬어집니다.

 

그런데 비칼케돈파는 20억 기독교 인구 중에서 극소수이기 때문에 기독교 교파를 논할 때 제외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삼위일체를 부정한 다른 이단 종파와 달리 비칼케돈파는 삼위일체를 수용하기 때문에 이단으로 보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성육신(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된 사건)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들 또한 엄연히 기독교의 한 소속임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3. 로마 가톨릭과 정교회

 

이제 기독교의 주류인 칼케돈파 안에서 일어난 분파를 살펴봅니다.

 

바로 유명한 로마 가톨릭과 정교회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한자 문화권에서 '천주교'라는 이름으로 흔히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은 20억 기독교 인구 중 약 11억을 차지해 교세가 가장 큽니다.

 

반면 정교회는 교세 2위를 기록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에서는 교세가 매우 미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정교회는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회와 더불어 기독교의 3대 교파 중 하나입니다.

 

로마 가톨릭과 정교회가 갈라진 건 1054년입니다. 그러나 모든 결과엔 과정이 있듯이 이들의 분파는 오래 누적된 갈등이 원인이 된 것입니다.

 

흔히 정교회는 '동방 정교회', '그리스 정교'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이유는 말 그대로 뿌리를 그리스 지역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로마 제국 안에서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주요 종교로, 더 나아가 국교로 발전했지요. 그런데 로마 제국은 전통적으로 서부와 동부가 언어, 문화, 관습 등에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로마 제국의 시원지인 서부는 라틴어를 사용했고, 사변적인 철학보다는 실용적인 법과 토목 등이 발전했습니다. 반면 로마 제국 이전부터 훌륭한 문명을 만들어냈던 동방 지역은 그리스어를 사용했고, 철학이 발달했죠. 로마 가톨릭과 정교회의 분열은 바로 이와 같은 지역적 차이가 주된 원인이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를 합니다. 정교회는 바로 그리스 지역 중에서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지로 삼고 있었고 로마 가톨릭은 말 그대로 로마를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구 수도와 신 수도는 필연적으로 경쟁하게 됩니다. 고구려에서도 국내성과 평양성이 갈등했고, 일본은 지금도 도쿄와 교토가 많은 부분 경쟁합니다. 로마 가톨릭과 정교회의 분열엔 바로 이와 같은 정치적인 이유도 원인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로마 제국은 476년 큰 변화를 맞이하는데, 게르만 족의 침입으로 서부 영토를 상실하게 됩니다. 이를 흔히 서로마 제국의 멸망이라고 하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로마 제국은 결코 공식적으로 분단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디오클레티니아누스 이래로 로마는 두 명의 정제와 두 명의 부제를 두어 동부와 서부를 통치해온 것이 전통이었기 때문입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은 그러므로 로마 제국의 서방 정제가 게르만 족에 의해 폐위되고, 영토를 상실한 것을 뜻합니다.

 

로마 가톨릭은 로마에 자리하고 있었기에, 로마의 멸망은 로마 가톨릭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동부는 로마 제국 정부가 건재한 데 비해, 서부는 그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 교회는 무정부 상황에서 어떻게든 생존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주교(교황)가 아틸라와 협상하는 일도 발생하죠.

 

그래서 로마 주교는 로마 제국 서부가 무너진 이후 이 지역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이릅니다. 로마 주교가 베드로의 후예라는 논리는 이때부터 등장해서 로마 주교가 서유럽의 다른 주교들 위에 군림해도 마땅하다고 주장합니다.

 

이 논리는 당연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비롯한 동방 지역의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기독교는 예루살렘, 즉 제국의 동쪽에서부터 시작되었기에 교세는 동쪽이 더 우세했습니다. 초창기 교회사를 보면 로마 교구는 마이너러티였죠. 그런데 그런 데서 갑자기 저런 논리를 들고 나오니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 주교의 어그로는 800년 샤를마뉴를 서로마 황제로 대관시키면서 문제가 더욱 커졌습니다. 전례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제국 전통에서 일개 주교가 황제를 세우는 건 꿈에도 꾸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엄연히 존속해 있던 동로마 황제는 당연히 난리가 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표면적인 갈등은 봉합되었지만 이것이 두고두고 화근이 됩니다.

 

이런 갈등이 하나하나 쌓여 1054년 로마 주교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가 서로를 파문함으로써 두 교회는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습니다. 이때부터 주류 기독교는 크게 서방 교회, 동방 교회 두 축으로 갈리게 된 것입니다.

 

4.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1054년 동서 교회 분열 이후, 교황(로마 주교)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지리멸렬한 권력 다툼을 벌였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카노사의 굴욕인데, 많이들 교황에게 무릎을 꿇은 하인리히 4세의 패배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굴욕은 잠시뿐, 하인리히 4세는 치욕을 만회하고 그레고리우스 7세를 교황위에서 내쫓습니다.

 

황제와 교황이 맞붙은 이유는 주교 서임권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이름에서 볼 수 있듯 주교(主敎)는 교회의 우두머리인데, 교회의 행정구역 중 하나인 교구를 이끄는 직책입니다. 사실 초대 교회 때는 주교직이 없었고 예수님의 열두 사도, 예수님의 형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 은사를 가진 이들을 중심으로 유동적인 체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다가 1세대 지도자들이 차츰 사망하면서 이들을 대신하여 교회를 이끌 지도자들로 등장한 직책이 바로 '주교'입니다. 성경에는 '감독'이란 이름으로 나오는데, 말 그대로 주교는 자기가 관할한 교구의 사제들이 어떻게 목회하는지를 감독하는 역할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교만 사제를 임명, 즉 사제의 인사권을 갖고 있었죠. 그런데 고대 교회 때는 주교들은 서로 독립적이고 대등했습니다. 주교를 선출하는 데는 성직자와 평신도(일반 교인들)가 함께 의견을 모았습니다. 더 나아가 군주들이 주교를 임명하기도 했습니다. 이때는 교회 밖이나 안이나 모두 기독교인인 때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서 교회 분열 이후, 로마 주교인 교황은 주교의 임명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앞서도 언급하였듯, 로마 제국 서부가 무너진 후 로마 주교가 자신의 권위 고양을 위해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임을 자처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의 제자 중에서 대표 제자였기 때문에 첫번째 제자의 후예인 자신이 다른 주교들의 우위에 있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논리에는 동방 교회도, 심지어 같은 서방 안에서도 황제가 반대했던 것입니다.

 

카노사의 굴욕 사건 이후, 하인리히 4세가 그레고리우스 7세를 내쫓으면서 사태가 일단락 되는가 싶었는데, 그레고리우스 7세의 후임의 후임인 우르바노 2세가 황제 반대파를 규합하여 하인리히 4세에게 공격을 가했고, 우여곡절 끝에 하인리히 4세는 아들 하인리히 5세 황위를 물려주게 됩니다(자세히 말하자면 아들에게 쫓겨난 것이지만, 복잡해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하인리히 5세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주교 서임권을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황위 계승에 따른 혼란으로 권위가 다소 내려앉은 터라 사수가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인리히 5세는 1122년 보름스 협약을 통해 서임권을 교황에게 넘기게 됩니다(이 역시 단순한 설명으론 비약이 심하지만 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이 과정을 거쳐 교황권은 13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한 목자 아래의 한 양떼"라는 말로 이 시기를 표현할 수 있는데 교황권에 위협이 되었던 황제들이 알아서 망해주면서 교황권이 고양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1254~1273에는 황제의 자리가 비는 이른바 '대공위 시대'가 오면서 더욱 그런 추세를 부추기게 되었습니다. 십자군 전쟁도 한몫했죠.

 

교황은 이때 서방 교회만의 공의회를 잇따라 개최하면서 주교 서임권을 교황에게만 두는 것을 교회법으로 못 박았고, 더 나아가 교황 선출을 추기경단으로만 제한시켰습니다.

 

그러나 14세기에는 교황권이 약화되기 시작하는데, 독일 황제의 대항마로 떠오른 프랑스 왕의 견제 때문입니다. 이때 유명한 아비뇽 유수 사건이 발생하는데, 교황청이 로마를 떠나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겨진 사건을 말합니다. 교황은 상당 기간 동안 프랑스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됩니다. 교황이 아비뇽에서 복귀한 다음에는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데,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각각 다른 교황을 세운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교황이 복수가 된 적이 있었지만 이때처럼 약 40년 간이나 장기화 된 건 유례 없는 일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교회 분열을 수습하고자 모인 피사 공의회(1404)에서 기존의 두 교황을 폐위시키고 새 교황을 세웠지만 두 교황은 이에 불복하여 교황이 세 명이 되는 초유의 사태도 발생했습니다. 

 

사태는 1414년에 열린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일단락 되었습니다. 이 공의회는 황제의 지원을 받아 공신력과 강제력이 있었습니다. 이 공의회에서는 기존 세 교황을 모두 폐위하고 새 교황을 세웁니다.

 

이렇게 교황위를 두고 교회가 분열해 있는 동안 교회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이때는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던 때였으며,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에 백년전쟁이 벌어지던 때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당연히 타락합니다. 더욱이 교황은 반성은 커녕 분열을 수습하느라 권한이 비대해진 공의회를 누르고 교황의 권력을 더욱 키웠습니다. 십자군 전쟁으로 면벌부라는 것이 발행되기 시작했고 이것이 돈으로 사고 파는 것이 되었습니다. 흑사병으로 사제들도 죽어나가자, 속성으로 사제들을 뽑는 바람에 사제의 질이 낮아졌고, 질 낮은 사제들은 목회보다는 돈벌이에 관심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습니다. 때마침 도래한 르네상스 시기에 교황들은 교회를 위해 일하기 보단 예술 부흥에 목을 매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황에 대한 반발이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폭발한 것이 1517년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입니다. 종교개혁으로 이미 동서로 분열되었던 주류(칼케돈파) 기독교는 서방 교회에서 또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대해서 역사를 일일이 쓰기에는 지면이 모자라므로 각 교파의 특성과 간략한 배경을 싣습니다.

 

1) 루터교회

 

1517년 종교개혁의 첫 주자인 루터의 가르침을 잇는 교회입니다. 사실 루터는 종교개혁을 의도하지 않게 시작했습니다. 루터는 자기 파를 만드려고는 눈꼽만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루터는 교회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고자 했고 여러 개혁안을 제시했는데 이는 교황청에 의해 거부 당하고 도리어 이단으로 몰렸습니다. 루터는 로마 가톨릭에서 쫓겨나 어쩔 수 없이 새로운 교회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루터교, 루터파는 '루터란(Lutheran)'이란 이름이 공식 명칭입니다. 그런데 '루터란'은 독일어로 '루터 추종자들', '루터를 따르는 놈들' 정도 되는 사실상 멸칭이고 비칭입니다. 루터조차도 이런 명칭에 거부감을 나타내었지만 시간이 흐른 후 공식 명칭이 되어 버렸지요.

 

루터교는 개신교회를 규정짓는 틀을 처음 형성한 교단입니다. 오직 성서, 오직 믿음, 오직 은총 세 가지 오직(sola)으로 이후 개신교회에 큰 영향을 줍니다. 그럼에도 루터교는 로마 가톨릭의 유산이라도 잘못되지 않았으면 그대로 물려받으려 했습니다. 본질적인 것만 성서에 맞으면 되지 비본질적인 것은 이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교의 예배는 로마 가톨릭의 미사와 굉장히 흡사합니다. 교회 건물의 구조나 복식도 유사한 모습을 보입니다. 또한 루터는 예술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을 했기에 루터교는 음악과 미술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로마 가톨릭의 유산을 계승하는 문제와 예술에 대한 태도는 개혁교회와 대비되는 루터교회의 큰 특징이라 하겠습니다.

 

루터교는 개신교회의 장자이며, 교세로도 상위권에 속합니다. 그리고 저지 독일(완만한 평야 지대인 독일의 북부 지역)과 북유럽 등지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1958년에 와서야 선교를 시작했기에 교세가 미미하여 역사성에 비해 존재감이 미미합니다. 한국 땅을 처음 밟은 개신교 선교사가 루터교 목사인 귀츨라프였지만 말입니다. 귀플라프는 1832년 보령 고대도에 상륙한 바 있습니다.

 

 

2) 개혁교회

 

개혁교회는 1518년 츠빙글리와 그 후예격인 칼빈에 의해 시작되었고, 이들의 신학을 따르는 교회입니다. 츠빙글리는 루터와 함께 1세대 종교개혁자이고 상당 부분 루터의 생각과 일치했지만 몇 가지 부분에서 생각이 달랐습니다. 우선 츠빙글리는 '오직 성서'를 좀 더 보수적으로 생각했습니다. 루터가 로마 가톨릭의 유산이 틀리지 않았으면 대부분 계승한 것과 달리 츠빙글리는 로마 가톨릭의 유산 자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아울러 츠빙글리는 예술에 대해서도 인색했지요. 그래서 예배당을 무척 검소하게 꾸미고 성상과 성화 사용에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예배에서 음악 사용도 거부했지요. 그리고 츠빙글리는 성서를 통으로 읽으면서 설교하는 '강해설교'를 즐겨했습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1531년 로마 가톨릭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맙니다. 츠빙글리는 스위스 사람이었고 취리히에서 활동했습니다.

 

츠빙글리의 뒤를 이어 개혁교회의 바톤을 이은 사람은 칼빈입니다. 칼빈은 프랑스 사람으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지만 종교개혁을 따르다가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그래서 스위스 제네바로 피신하게 되는데, 이 와중에 역작 '기독교 강요'를 저술합니다. 초판이 1536년에 나왔는데 출간되자마자 베스트 셀러가 됩니다. 루터도 이를 읽고 감탄을 했지요. 칼빈은 기독교 강요의 유명세를 타고 제네바 시의회의 부탁을 받고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하게 되지만 반발이 이어 추방 당하여 스트라스부르크에 가서 마틴 부처의 가르침을 받고 동역하다가 다시 제네바로 돌아와 죽을 때까지 종교개혁을 이끌게 됩니다.

 

칼빈은 2세대 종교개혁자로서, 사실 독창성은 앞 세대에 비해 떨어집니다. 즉 칼빈만의 특징이랄 게 많지는 않습니다. 칼빈의 업적은 앞 세대가 로마 가톨릭과 투쟁하면서 중구난방식으로 제기하였던 이론을 한데 모아 집대성한 데에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 강요라는 작품이 인기를 끈 이유입니다.

 

그러나 칼빈에게도 당연히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의회 제도입니다. 칼빈은 중세 교회의 타락이 주교권의 비대함에 있는 것을 보고 1인 주교에게 한정되었던 교회의 치리권을 다수의 사람들에게 나누고 이들을 '장로'라고 칭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치리를 장로들의 모임인 장로회, 줄여서 '노회'에서 하게 됩니다. 1인 권력이 의회 권력으로 분산된 셈입니다. 또 칼빈 사상의 특징은 이중예정론에 있다 하겠습니다. 이중예정론이란 하나님이 구원 받을 사람을 예정해 놓으신 것과 같이 구원 받지 못할 사람도 예정해 놓으셨다는 이론입니다. 루터도 예정론을 주장했지만 구원 받지 못할 사람의 예정에 대해서까진 이야기하지 않아 이중예정론은 칼빈 사상의 특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칼빈은 이중예정론을 교회론과 연관시켜 사용했다는 점에서 자신의 후예들과 견해를 달리했습니다. 칼빈은 츠빙글리의 유산을 충실히 계승하여 칼빈도 로마 가톨릭의 유산을 부정적으로 여겼으며, 음악과 미술 사용에 인색했습니다. 특히 칼빈은 찬송가는 시편으로만 제한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개혁교회'라는 이름은 루터교와의 관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도 교파 분열을 원하지 않았기에 로마 가톨릭과 맞서면서 한편으로 로마 가톨릭과 재통합을 시도하기도 했고, 개혁 그룹 안에서도 통합을 시도했습니다. 츠빙글리와 칼빈의 후예들은 루터교와 통합하기로 하고 합의안을 작성, 따르기로 했지만 루터교 안에서 합의안을 거부했습니다. 이에 화가 난 합의안 추종자들은 자신들이 진정 개혁된 교회, 라는 의미에서 개혁교회(The Reformed Church)라고 일컫기 시작했습니다. 합의안을 거절한 루터교는 미완의 개혁교회라고 비판하지요.

 

개혁교회는 프랑스 일부 지역과 저지대(네덜란드) 국가, 그리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로 전파되었습니다. 프랑스에서 개혁파는 위그노라 불렸고, 잉글랜드에서는 청교도, 스코틀랜드에서 장로교라 불렸습니다. 그러나 프랑스는 친 가톨릭 정책을 펼치면서 위그노를 핍박하여 거의 씨가 말랐고, 잉글랜드는 자체 종교개혁을 하면서 청교도를 핍박해서 주류가 되지 못했습니다. 스코틀랜드는 녹스라는 사람이 칼빈에게 직접 수학하며 장로교회를 거의 국교화 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잉글랜드의 청교도는 박해를 피해 대서양을 건넜고, 도착한 곳이 미국입니다. 유명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말이죠.

 

개혁교회는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이중예정론을 더욱 강화합니다. 네덜란트 도르트에서 회의를 하면서 인간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중예정론을 구원론과 결부시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칼빈과 분명 다른 점입니다. 그리고 이 점은 향후 살펴보게 될 감리교회와 크게 다른 점입니다.

 

개혁교회는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스탠스를 유지합니다. 이는 개혁교회의 특성에서 기인합니다. 앞서 설명하였듯 칼빈은 2세대로서 앞 세대 개혁자들의 이론을 하나로 정리하여 체계화시켰는데, 이것이 선명하고 뚜렷한 교리 체계를 세우는 데는 효과적이었지만 고정된 틀을 만들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직성을 불러일으키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교회는 보수적인 성향을 유지하고 있기에 외부에서 보기에 고집 세고 융통성 없는 이미지로 비춰졌습니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정신으로, 우리로 치면 기개가 곧은 선비와 같은 모습으로 많은 가르침을 줍니다.

 

3) 성공회(잉글랜드 국교회)

 

성공회는 '성공 회'가 아닙니다. 자기들만 성공하겠다는 교회가 아닌 거죠^^; '성 공회'입니다. 그리고 '공회'라는 것은 '공교회', 즉 The Church라는 의미입니다. 자기들 교회가 정통 교회이고 제대로 된 교회라는 명칭에서 나온 겁니다. 명칭부터 다루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이 성공회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성공회는 잉글랜드 국교회에서 출발했습니다. 여기서 잠깐. 잉글랜드 국교회가 성공회일 수는 있어도 성공회는 잉글랜드 국교회만 있는 게 아닙니다. 수학 기호로 표기하면 '국교회→성공회'는 될 수 있어도 그 역은 성립하지 못합니다. 원 명제가 참이어도 역은 참이 아닐 수 있는 것이죠. 아무튼 국교회에서 출발했기에 간략한 배경을 다뤄야 이해가 편합니다.

 

보통 국교회는 헨리 8세의 바람기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이는 무르익은 분위기에 스파크를 틔웠을 뿐이지 근본적인 원인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를 바람기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잉글랜드는 섬나라이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유럽 대륙의 국가들과는 좀 다른 행보를 보여 왔습니다. 그리고 그 자체로도 교회 역사에서 오랜 전통을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15, 16세기 들어 교황권이 약화되고, 국가주의가 대두될 때 잉글랜드도 이 분위기를 탑니다. 거기에 장미 전쟁으로 왕위 계승에 온 나라가 휘둘렸던 역사는, 당시의 왕 헨리 8세에게 왕자를 필요로 하게 만들었습니다. 아시다시피 헨리 8세는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을 교황에게 요구했지만 캐서린의 배경(합스부르크 왕가,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의 고모)을 두려워 한 교황에게 거절 당합니다. 이에 헨리 8세는 잉글랜드 교회를 독립시킵니다. 이런 행보는 동서 분열 이후 서방 지역의 모든 교구를 자신의 관할하에 두었던 교황의 억지에 반기를 든 이유 있는 움직임이었습니다. 이로써 잉글랜드는 독자적인 길을 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국교회는 크게 세 번의 변천을 겪습니다.

 

첫번째는 헨리 8세 때인데, 헨리 8세는 잉글랜드 교회의 독립만을 원했을 뿐 교리 개혁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는 교황 자리에 잉글랜드 국왕이 앉은, 가톨릭의 잉글랜드 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는 헨리 8세의 유일한 적장자였던 에드워드 6세 시기입니다. 에드워드 6세는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에 삼촌들이 섭정을 했고, 삼촌들은 종교개혁에 영향을 많이 받은 이들이라 이때부터 국교회도 교리 개혁에 나섭니다. 특히 이때는 스트라스부르크에서 활약하던 마틴 부처가 박해를 피해 잉글랜드로 넘어와 있었기에 부처의 자문을 받아 토마스 크랜머의 주도로 국교회의 종교개혁이 이뤄집니다. 앞서 언급하였든 부처는 칼빈과 깊은 관계가 있었기에 이 시기 국교회의 모습은 개혁교회와 비슷해집니다.

 

세번째는 엘리자베스 1세 때입니다. 에드워드 6세가 요절한 후 아라곤의 캐서린의 딸이자 헨리 8세의 장녀인 메리 1세가 즉위합니다. 메리 1세는 선천적으로 가톨릭 신자일 수밖에 없었죠. 메리 1세는 에드워드 6세 시기의 다소 급진적인 개혁에 반동을 걸어서 가톨릭으로 회귀합니다. 이 시기에 많은 박해가 있었기에 메리 1세는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별명을 받게 되지요. 그러나 메리 1세의 치세는 짧았고 후사가 없었기에 왕위는 엘리자베스 1세에게 넘어갑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 1세와 달리 선천적으로 국교회 신자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헨리 8세의 두 번째 부인인 앤 불린의 딸로, 메리 1세와 대척점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현명했기 때문에 언니 메리 1세가 되돌려 놓은 국교회의 성향을 에드워드 6세 때로 다시 복구시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다간 또 다시 큰 숙청이 필요했을 테니까요. 대신 엘리자베스는 중용을 택합니다. 로마 가톨릭의 장점과 개혁교회의 장점을 수용해서 절충한 것이지요. 이것을 중도(Via Media)라고 하며 국교회의 가장 큰 특징으로 자리매김합니다.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 확립된 중도적인 모습은 다음 왕인 제임스 1세에 의해서도 계승되었습니다. 찰스 1세, 2세, 제임스 2세 때 잠시 흔들리긴 하지만 중용의 길은 국교회의 큰 특징으로 남습니다.

 

그렇기에 국교회는 예배 의식은 가톨릭과 비슷한 모습이지만 교리적으로는 개신교회 같은 특징을 지닙니다. 성공회 성당을 가면 천주교 성당과 다를 바 없는 게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또한 성공회는 로마 가톨릭과 같이 주교제도를 그대로 이어 받고 있습니다. 

 

국교회는 잉글랜드가 곳곳에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같이 잉글랜드 영역 밖으로 세력을 확대합니다. 그래서 '국교회'라는 틀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19세기에는 옥스퍼드 운동이라는 것이 열려, 교회와 국가 간의 위치가 재정립되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운동으로 인하여 국교회는 이제 성공회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성공회의 장점이자 단점은 확고한 틀이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위에서 설명한 중도적인 모습 때문인데, 그에 따라 여러 교파의 장점을 흡수할 수 있고, 포용력과 적응력이 빠릅니다. 하지만 이것이 단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공회는 과거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의 권세(?)에 힘입어 세계 곳곳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교세가 미미합니다.

 

4) 재세례파와 침례교

 

재세례파는 종교개혁의 또 다른 그룹입니다. 명칭에서 볼 수 있듯 '재세례'를 주었기 때문에 '재세례파'라는 명칭을 얻었습니다. 이유는, 스스로 믿음을 고백하지 않은 상태에서 행한 유아 세례는 효력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로마 국교가 된 후,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인인 상태에서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을 유아 세례라고 하는데, 재세례파는 유아 세례가 신자 본인의 의사에 의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참된 세례가 아니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자기 믿음에 의한 신앙. 이것이 재세례파의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재세례파는 또 다른 종교개혁 그룹보다 굉장히 급진적이었습니다. 이들은 봉건 제도와 신분 질서를 부정하면서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하지만 재세례를 주장하고 또 급진적인 정치 사상을 갖고 있었기에 재세례파는 로마 가톨릭뿐 아니라 같은 종교개혁 그룹 안에서도 극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급진적인 재세례파가 독일 뮌스터에서 난을 일으켰다가 처참히 진압된 후, 재세례파는 평화주의로 노선을 틀었습니다. 주요 인물이 메노 시몬즈인데, 이 사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재세례파 집단은 메노나이트, 라고 일컫습니다.

 

재세례파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교회가 바로 침례교입니다. 침례교는 사실 기원이 명확하진 않지만 재세례파에서 주장하는 '자기 믿음에 의한 신앙'을 그대로 이어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명칭에서 볼 수 있듯 침례교는 세례가 아닌 침례를 베풉니다. 침례란 세례의 한 방식입니다. 세례는 머리에 물을 적셔 죄를 씻고 교회에 가입하는 의식인데, 본래는 강이나 바다 등지에 온 몸을 담그는 침례 방식에서 점차 세례로 간편화 되었습니다. 침례교는 이 침례의 방식을 복구시켰습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침례교회의 특징은 개혁교회와 비슷한 철저한 성경 중심적인 성향입니다. 더 나아가 침례교회의 또 하나의 큰 특징은 '개교회주의'입니다. 이는 각 교회가 서로 독립되고 어떠한 연합 조직도 만들지 않는 것이지요. 개혁교회가 노회, 총회 같은 연합 조직고 치리 기구를 갖고 있는 것과 달리 침례교회는 자기 교회의 일은 자기가 처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침례교는 미국 개신교회 중 가장 규모가 큽니다. 침례교의 개교회주의가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미국의 성향에 잘 맞는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특히 미 남부에서 침례교의 세가 큽니다. 성향은, 보수적이죠.

 

5) 감리교회

 

감리교회는 성공회(정확히 말하자면 국교회)에서 분리된 교회입니다. 국교회 사제였던 존 웨슬리의 부흥 운동에 의하여 형성된 교단입니다. 웨슬리가 활동한 18세기에 국교회는 정체되어 있었습니다. 상류 계층과 결탁한 국교회는 하층민들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18세기는 영국이 커다란 변혁을 맞이한 때입니다. 인클로저 운동 등으로 도시에 사람들이 몰렸고 대부분 노동자 아니면 빈민이 되었습니다. 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했지만 그만큼 복지 제도는 갖춰져 있지 못할 때였습니다.

 

웨슬리는 이때 국교회 지도자들이 관심 갖지 않던 하층민들에 관심을 보입니다. 이들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자 이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난 것입니다. 웨슬리의 부흥 운동은 점점 커져갔고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핍박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전 사회가 '술에 취한 것'과 같았던 당시 영국 사회에 웨슬리가 일침을 가했기 때문입니다. 계속된 핍박에도 웨슬리의 부흥 운동은 점점 커져갔고, 웨슬리 사후, 웨슬리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국교회와 분리 독립하게 됩니다. 

 

감리교회의 특징은 우선 교리를 들 수 있습니다. 감리교회는 개혁교회와 교리면에서 대척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혁교회는 이중예정론으로 사람의 구원 여부를 철저히 하나님께 둡니다. 반면 감리교회는 선행은총론과 자유의지론으로 사람의 구원 여부는 사람에게 달렸다고 말합니다. 개혁교회는 사람의 본성은 100% 악하기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을 선택할 수도 없고 하나님을 알 수도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나서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때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은 무엇이냐'라는 물음이 제기되는데, 개혁교회는 여기에도 하나님의 예정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하였기 때문입니다. 반면 감리교회는 사람의 본성이 100% 악하다는 점에서는 개혁교회와 견해를 같이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총은 사람을 떠나지 않아, 복음이 제시되기 전에도 하나님의 은총이 어느 정도 사람에게 머물러 있음을 말합니다. 이것이 선행은총, 즉 복음이 오기에 앞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합니다. 이 선행은총으로 사람은 어느 정도 하나님에 대해 미약하게나마 인식하게 되고, 복음이 제시됐을 때 이를 선택할 수 있는 여지도 생깁니다. 그래서 구원 여부는 사람의 선택, 즉 자유의지에 달린 문제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죠.

 

여기서부터 감리교회는 신자의 철저한 경건 생활을 강조하게 됩니다. 개혁교회의 또 다른 교리적 특징인 '성도의 견인(Perservance of Saints)'인데, 이는 한 번 구원 받기로 예정된 신자는 결코 구원으로부터 유리되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이 또한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기에 도출된 논리인데, 이는 자칫 신자들의 방종을 야기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감리교회는 구원은 신자들의 결단에 달린 문제이므로, 신자들이 하기에 따라서 구원이 상실될 수 있는 위험을 경고합니다. 그래서 감리교회에서는 신자들이 끊임없이 경건생활을 하게 하고, 특히 내적인 경건만이 아니라 외적인 경건, 즉 웨슬리가 그리했던 것처럼 사회의 문제에 관심하고 참여하게 합니다. 이런 과정을 성화, 즉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그렇기에 감리교회는 신자들의 내적 경건과 아울러 신자들이 속한 사회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부분을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내적인 경건도 더욱 강조하는데, 웨슬리는 신자의 내적 경건을 돕는 의식들을 많이 활용하였습니다. 웨슬리는 이를 '은총의 수단(means of grace)'라고 불렀고 이를 통해 신자들의 신앙이 자랄 수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웨슬리는 성찬의 회복을 그 누구보다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의 경건을 돕기 위해 예술, 특히 음악을 적극 활용하였습니다. 존 웨슬리의 동생 찰스 웨슬리는 같은 국교회 사제였지만 찬송 작사에 재능이 있어 평생 9천편에 달하는 찬송시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찬송시에 자신들의 신학 사상을 담았고, 이를 통해 못 배운 하급 계층 사람들을 효율적으로 교육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진행된 웨슬리의 부흥 운동 중에서는 이 과정에서 신비한 이적과 은사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즉 감리교회는 성공회처럼 중용적인 스탠스에서, 사회 문제에 관심하는 사회 참여적 성향과 열정적이고 열광주의적인 경건 성향, 성례주의적인 성향, 엘리트적이면서도 대중적인 성향을 모두 지니고 있습니다.

 

아울러 감리교회는 성공회에서 나왔기에, 성공회처럼 주교 제도를 갖고 있습니다. 다만 성경에서처럼 주교를 '감독'이라고 부릅니다. '감리교회'라는 명칭부터가 '감독이 치리하는 교회'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공회나 천주교처럼 감독에게 많은 권한이 있고, 감독이 교역자의 인사권을 갖고 있습니다(그러나 한국 감리교회에서는 이 제도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감리교회는 부흥 운동에 평신도들을 많이 참여시켰고, 속회를 비롯한 소그룹 모임과 연회와 같은 의회 기구를 통해 보다 소통이 원할한 교회 정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감리교회는 영국에서 시작되어 미국으로 건너가 침례교와 더불어 미국에서 가장 큰 개신교회가 되었습니다. 아울러 성공회처럼 영국 식민지로도 많이 건너가 전세계적으로도 많은 교세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6) 성결교회

 

성결교회는 감리교에서 나왔습니다. 특히 미국에서 시작되었는데, 19세기에 성결 운동(Holiness Movement)으로 태동한 교단입니다. 감리교회의 여러 특징 중 은사주의에 좀 더 방점을 둔 교단이기에 감리교회에 비해 좀 보수적이면서 더 열광주의적인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7) 구세군

 

구세군도 감리교에서 나왔습니다. 하지만 성결교와는 달리 영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구세군은 감리교회의 여러 특징 중 사회적 경건 실천에 강조점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빈민 구제 등과 같은 사회 문제에 중점을 두지요. 12월이 되면 구세군에서 자선 냄비 활동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구세군의 또 다른 특징은, 교회 제도를 군대처럼 조직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구세군은 목사가 아닌 '사관'이라고 부르며, 총지도자를 '사령관', 교회를 '영문', 신학교를 '사관학교'라고 명명하며 복식도 군대의 제복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8) 오순절 교회(순복음)

 

오순절 교회 또한 크게 보면 웨슬리 사상에 영향을 받은 교단입니다. 성결교가 감리교의 열광주의적인 모습을 좀 더 강조했다면 오순절 교회는 이를 더욱 강조한 특징이 있습니다. 1901년 미국 아주사 거리에서 일어난 부흥 운동은 병이 낫는 신유,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 등으로 특징 지어집니다. 오순절 교단은 우리나라에서는 순복음 교회로 알려져 있고, 남미 등지에서 현재도 큰 부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5. 한국 개신교회의 분열

 

이제는 한국 개신교회의 분열상에 대해 다루고자 합니다. 그런데 한국 개신교회의 주류는 장로교회이고 장로교회 내에서 분열된 수가 또 제일 많습니다. 전세계적으로 봤을 때 교세가 크지 않은 장로교회가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큰 교세를 자랑하게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하지만 전세계 장로교회에서 한국 장로교회가 규모가 가장 크다는 자부심이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을 가져온 큰 원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 장로교회는 1884년 알렌에 의해 의료 선교의 형태로 처음 시작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언더우드에 의해 직접적인 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미국의 북장로교, 남장로교, 호주 장로교, 캐나다 장로교가 들어오게 됩니다. 1907년에는 평양에서 대부흥 운동이 일어나 장로교의 교세가 크게 성장했습니다. 이때를 계기로 한국 장로교회는 벌써 독립을 하게 됩니다. 해방 전까지 한국 장로교회는 단일한 교회였습니다.

 

1) 고신 분열

 

그러던 것이 1952년 고신측 분열로 교파 분열의 첫 포문이 열립니다. 계기는 일제 말 있었던 신사참배 문제였습니다. 장로교회는 일제의 신사참배 압력에 굴복하여 총회를 열어 신사참배를 통과시키고 총회가 끝나자마자 신사에 가서 진짜 참배를 합니다. 하지만 장로교회 내부에서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많았고, 이들은 일제에 의해 각종 고문과 투옥 등의 핍박을 받습니다. 이렇게 일제에 끝까지 저항하다가 해방 때까지 살아남아 석방된 이들을 '옥중성도'라고 합니다.

 

옥중성도들은 핍박을 이겨낸 신자들이었기 때문에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보기에 교단의 기득권자들은 한낱 기회주의자에 불과했습니다. 당연히 갈등이 발생했으나 옥중성도는 다수가 아닌 소수였기 때문에 금세 수세에 몰렸습니다. 옥중성도의 대부분 근거지는 경남에 있었고 이들은 부산에 '고려신학교'를 세우고 이를 교단 직영 신학교로 해 주길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부담스러워 한 교단에서는 승인을 하지 않았고, 일련의 갈등을 거쳐 1952년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고신파가 분열하게 됩니다. 

 

2) 기장 분열

 

이듬해 장로교회에는 또 다시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이번에는 신학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장로교회는 해방 전까지 평양에 신학교를 두어 목회자를 양성해냈습니다. 이를 흔히 '평양신학교'라고 하는데, 공식 명칭은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였습니다. 그런데 평양신학교는 신사 참배에 반대하면서 폐교를 당했고 장로교회에서 공식적인 목회자 양성은 잠시 중단됩니다(물론 대체 신학교가 있긴 했지만 친일 성향이 문제였습니다). 이때 서울에서 평양신학교를 대체할 '조선신학교'가 설립이 되어 총회의 인준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해방 후 조선신학교의 신학적 성향에 문제가 제기 되었습니다. 보수적인 장로교회의 분위기와 다르게 굉장히 진보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일부 학생들이 교수들의 신학적 성향을 문제 삼자 총회는 조선신학교를 대체할 다른 신학교, 곧 장로회신학교를 새로 세웠습니다. 이 과정에서 조선신학교는 교단의 압력을 받았고, 이에 거세게 항의하면서 결국 제명 처리가 되고, 조선신학교 측은 '한국기독교장로회'라는 이름으로 독립해 나갑니다. 조선신학교는 이후 한국신학대학이 되었고, 후일 '한신대'가 되었습니다.

 

기장측 출신 목사 중 유명한 이는 문익환 목사님입니다. 문익환 목사님 한 분만 보더라도 기장의 신학적 성향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진보적이며, 사회 참여적인 성향이 강합니다.

 

3) 통합 합동 분열

 

고신과 기장 분열 이후 장로교회는 또 한 번의 큰 분열을 겪습니다. 이른바 통합 합동 분열입니다. 이 분열로 생겨난 두 교단의 명칭이 '통합', '합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름과 달리 두 교단은 아직도 갈라져 있으니, 아이러니합니다.

 

이들의 분열은 기장 분열과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진보적인 조선신학교를 대체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서울에 장로회신학교를 다시 세웠습니다. 그리고 장차 두 신학교를 합쳐 총회 직영의 '총회신학교'를 출범시키려다가 6.25가 일어납니다. 서울로 환도 후 옛 남산신궁 자리를 받아 신학교를 세우려고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3천만 환이나 되는 거액을 사기 맞습니다. 당시 장로회신학교 교장이었던 박형룡 목사가 남산신궁 자리를 불하받기 위해 한 정치인에게 뒷돈을 줬는데 정착 그 정치인이 먹튀를 해 버린 탓이었습니다. 목사가 뒷돈을 댔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밝히기 어려울 것이라는 약점을 그 정치인이 교묘히 이용한 탓입니다. 어찌됐든 박형룡은 이 일에 책임을 지고 교장직에서 물러나는 등 수세에 몰립니다.

 

이때 장로교회 안에는 박형룡과 더불어 유명한 한경직 목사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둘 다 영향력이 컸으나 신학적 성향이 달라 이미 해방 즈음에 두 사람을 중심으로 한 계파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3천만 환 사기 사건으로 박형룡 측이 수세에 몰리고 한경직 측이 부상합니다. 그런데 한경직 목사는 신학적으로 좀 더 유연한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한경직 목사는 일제강점기 때에 진보적인 '아빙돈 주석' 번역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자연스레 한경직 목사 측은 세계교회협의회(World Church Council, 약칭 WCC) 가입에도 긍정적이었는데 장로교회의 보수적인 성향상 WCC 가입은 전적인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수세에 몰린 박형룡 측은 WCC를 용공으로 몰면서 한경직 측을 공격했고, 이러한 두 계파의 갈등은 1959년 총회 분열로 가시화 됩니다.

 

처음에는 각자의 총회가 열린 교회의 이름을 따라 박형룡 측은 승동측, 한경직 측은 연동측이라 불렸습니다. 그런데 총회 분열을 수습하기 위해 연동측에서 승동측과 재결합하기 위해 '통합 총회'를 열었으나 승동측이 불참함으로 '통합'이란 별칭만 생겼습니다. 승동측은 신학적 성향이 비슷했던 고신측과 합하여 '합동 총회'를 열었으나 몇 해 안 되어 다시 고신측이 분열해 나감으로써 역시 '합동'이란 별칭만 생기게 되었습니다. 

 

통합측은 옛 명칭대로 '장로회신학교'를 광나루에 다시 세웠으며, 합동측은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를 합쳐 세우려 했던 '총회신학교'라는 이름으로 사당동에 부지를 마련하여 학교를 세웠으니 이것이 총신대의 시작입니다.

 

앞서 언급하였듯 통합측은 중도 우파적인 성향을 가져, 신학적으로 완전히 진보적이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진보 신학을 수용하는 교단입니다. 반면 합동측은 우파, 또는 극우의 성향을 가져 신학적으로 굉장히 보수적입니다.

 

4) 합동 내 분열

 

1959년 통합 합동 분열 이후 합동측은 내부에서 또 다시 수많은 분열을 겪습니다. 일일이 설명하기에는 복잡하고 힘듭니다. 장로교회의 교단이 200여개 가 된다고 했을 때, 대부분은 범 합동 계열입니다. 대표적인 교단은 합동, 백석, 대신 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