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로와 시돈에 대하여

*** 두로 ***
고대에는 시돈 남쪽으로 약 40㎞, 악고 북쪽으로 45㎞지점에서 바다 쪽으로 나가 있는 어떤 섬에 위치한 뵈니게의 주요 성읍이었지만, 오늘날은 반도에 위치한 '추르'를 가리킨다.
B. C. 19세기 애굽의 저주 문서와 14세기 아마르나 서신에서는 두로가 독립 왕국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으나, 그 성읍이 B.C. 3000년 이전에도 존재하였다는 고대 전승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성읍은 약 1200년경 시돈 사람에 의해 재발견된 것으로 보인다. 쐐기 문자 기록으로 '우슈'로서 언급된 그 섬 맞은편 본토 정착지는 헬라인에 의해 '고대 두로'로 알려졌고, 그 섬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로 역사의 상당 부분은 성쇠하는 애굽 세력의 그늘 밑에서 일어났다. 힉소스 왕가가 애굽에서 축출된 후 여러 바로 왕들은 온갖 성공의 척도로서 뵈니게를 휘둘렀다.
이런 상황하에서 두로 사람들은 염색 상품, 목재, 곡식, 기름, 포도주, 금속 상품, 노예 등을 싣고 지중해 무역로를 바삐 왕래하였다. 그들도 수많은 중요한 상업 식민지를 두었으며, 그 가장 성공한 예가 카르타고였다. 히람 1세, 다윗 및 솔로몬과 친분을 가졌던 10세기 두로 왕(삼하 5 : 11 ; 왕상 5)은 지중해 동부에 두로 왕국을 찬연히 세웠고 두로 제1황금기를 구가하였다. 그는 두로에서 괄목할만한 건축 사업을 시작하였고, 근처의 헤르쿨레스(Hercules) 섬을 합병시켰다(현재는 물에 잠겨 있다).
에트바알(Ethbaal) 1세 (B.C. 약 887-856년)는 외교에서와 같이 상업에서도 두로의 영향력을 확대시켰고, 그 섬 남단에 750m나 되는 긴 방파제를 갖춘 새로운 주요 항구 '애굽 항'을 설치하였다. '시돈 왕'이라 칭하는 에트바알하에서 두로는 뵈니게 성읍 중 제일의 성읍으로 떠올랐고 능동적으로 식민지화하는 일에 들어갔다. 에트바알의 딸 이세벨은 이스라엘의 아합과 결혼하였고 이세벨의 딸 아달랴는 유다 왕 요람과 결혼하였다. 그 결과 이방의 종교적 풍습들이 도입되었다(왕상 16 : 29-19 : 18).
이러저러한 죄들로 인해 이스라엘 선지자들은 두로의 멸망을 예고하였다
(사 23장 ; 겔 26 : 2-28 : 9 ; 암 1 : 9-10).
앗수르 제국 군대는 B.C. 10세기 초엽 수리아와 뵈니게를 약탈하기 시작하였고, B.C. 9세기부터 두로는 수많은 앗수르 통치자들에게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B.C. 612년 앗수르의 패망으로도 두로는 해방되지 않았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13년 동안(B.C. 586-573년) 그 성읍을 포위하고 주종 계약을 맺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페르시아 제국의 출현으로 두로는 더욱 약화되어 시돈에 대한 그들의 권리를 포기하였고, B.C. 520년 카르타고는 두로와의 관계를 종식하였다. 그러나 두로는 계속 무역에 종사하였다(에 3 : 7 ; 느 13 : 16).
B.C. 333년 알렉산더 대제가 잇수스(Issus)에서 페르시아인들을 격퇴함으로써 두로는 또 다른 제국과 부딪히게 되었다. 알렉산더가 지중해 연안으로 진출할 때 두로는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그는 일곱 달 동안 두로를 에워쌌다. 헬라인이 섬 주변에 둑길을 만들려고 '고대 두로'의 건물과 기념비들을 잡석으로 사용한 후 그 성읍은 마침내 몰락하고 말았다.
그 성읍의 많은 거민은 죽임을 당하였거나 노예가 되었다. 두로 경제는 셀류코스 왕조하에서 다소 회복되었고, 헬라 문화가 유입되었다. 로마 시대엔 그 성읍이 수리아 관할 아래 있었다. 예수님은 갈릴리 사역 중 한동안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나신 적이 있었다(마 15 : 21-29). 아래 지도참조
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은 말씀을 듣기 위해 갈릴리에서 온 '허다한 무리' 가운데 섞여 있었다(막 3 : 8).
종말론적 선언에서, 예수님은 그의 사역에 반응을 보이지 않은 팔레스타인 성읍들의 운명을 이 이방인 성읍이 받을 심판과 대조시키셨다(마 11 : 21-22).
바울은 그의 마지막 예루살렘 여행 여로에서 두로에 사는 그리스도인들과 며칠을 보냈다(행 21 : 3-7).
행 12 : 20-23에 의하면, 두로에서 온 대표자들은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죽음 이야기 가운데 언급되고 있다. ※ 참고 문헌H.J. Katzenstein. The History of Tyre(Jerusalem : 1973).

*** 시돈 ***
고대 페니키아 사람들의 도시 국가이다. 베이루트에서 남쪽으로 약 36km 떨어진 오늘날의 '사이다'(Saida)에 위치하였는데, 두로에서는 북쪽으로 약 36km 떨어져 있는 셈이다. 창 10:15에서는 가나만의 장자로도 일컬어지고 있다(대상 1:13, KJV "Zidon").
이 성읍은 '아마르나 서신'(Amarna Letters)과 호머의 저작들 가운데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 이곳은 바다를 항해하기 위한 페니키아 제일의 항구였다. 초창기에는 이집트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가 뒤에 힉소스가 그들을 지배하였지만 그 후에 다시 이집트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 (애굽의 19왕조).
B.C. 1200년경에 해양 민족들에 의하여 페니키아가 붕괴하였는데, 그 전까지는이곳 시돈이 페니키아의 주요 도시였다. 그 후로부터는 두로가 좀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시돈은 재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상징적인 도시로 남아있게 되었다.
그 후 이곳의 역사는 수리아, 팔레스타인의 작은 국가들과 공통된 운명을 밟게 된다. B.C. 677년에 앗수르의 에살핫돈에 의하여 멸망 되었으며, B.C. 7세기 말경에 잠시 애굽의 지배 아래 놓이기도 한다. 그러나 곧장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 정복 되었으며, 그 후 페르시아에 의하여 다시 지배를 당하였다.
아닥사스다 3세 때의 반란은 단명으로 끝났으며, 오히려 그 성읍은 불타고 수천의 인명만 손실을 입게 되었다. B.C. 332년에는 마게도냐의 알렉산더에 의하여 정복 되었으며, 그후 셀류코스 왕조와 로마시대에는 상업의 중심지로 다시금 번영과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구약에서는 페니키아 사람들을 보통 시돈 사람으로 칭하고 있다(참조. 신 3:9, 삿 10:12, 왕상 5:6).
예수님과 바울도 시돈을 방문한 적이 있다(막 7:31, 행 27:3).
예수께서는 그분의 가르침에 대하여 반응을 나타내지 못하였던 갈릴리 지방의 이스라엘 도시들보다 오히려 이방의 시돈을 더 높게 평가하셨다(마 11:21-22).
바울은 시돈에 살고있는 친구를 방문하였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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