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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당원, 열혈당원,혁명당원, 셀롯

열려라 에바다 2026. 4. 23. 12:59

열심당원, 열혈당원,혁명당원, 셀롯     

 

4복음서에 나타는 열심당원은 우리나라에서 성서 번역본에 따라 열혈당원,혁명당원, 셀롯으로 나타난다. 그 의미는 <하나님의 편에서 열심인 사람>이다. 그러나 그들은 극히 폭력적으로 활동했다.

1. 열심당의 등장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에 따르면, 열심당은 정치조직으로, 기원후 1세기 유대 땅에서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에세네파와 나란히 한다. 열심당은 기원후 6년 구레뇨의 세법 개정에 반대하여 창설되었고, 갈릴리의 유다가 창시자로 간주된다. 갈릴리 유다의 두 아들 야곱과 시몬은 혁명에 참가하였고, 티베리우스 알렉산더에 의해 처형당했다. 티베리우스 알렉산더는 46부터 48년까지 유대지역의 행정장관이었다. 열심당원 시몬은 예수가 선발했던 사도이며,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이름을 올린다.

2. 열심당의 사회적 역할

열심당은 첫 번째 유대-로마 전쟁에서(기원후 66 년 - 73년) 주도적 역할을 했다. 열심당은 제사장 가족들이 신전을 운영하는 방식에 반대했다. 그들은 또한 로마를 내몰기 위해 노력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열심당 지도자 기스갈라는 갈릴리에서 싸우다 예루살렘으로 도피했다. 그는 사람들을 광신적으로 발분 시켜, 70년까지 예루살렘을 점거했으나, 로마 황제 베스파시안의 아들 티투스가 70년에 예루살렘을 재점령하고, 도시와 신전(헤롯 신전)을 파괴했다.

시카리는 열심당에 속한 극단적 조직이었다. 시카리의 의미는 <폭력적 사람들> 또는 <칼 찬 사람들>이다. 역사가 Hayim Hillel Ben-Sasson에 따르면, 시카리의 근거지는 갈릴리였으며, 그들은 사회 혁명을 위해 투쟁했다. 시카리는 열심당에 속했지만 결코 열심당에 얽매지 않았다. 그들은 유대인의 거주지를 급습해, 배교자와 부역자로 생각되는 유대인을 죽이고, 유대인들이 대의를 위해 로마와 싸우도록 설득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시카리는 첫 번째 유대-로마 전쟁 중에 살인적 공포 통치를 위한 기관을 설치했다. 아마도 많은 열심당이 동시에 시카리였을 것이다. 미시나에 등장하는 유대 지식인조차 시카리를 두려워했다.

3. 탈무드의 기록에 나타나는 열심당

탈무드에 따르면, 열심당은 종교적이지 않고, 종교 지도자를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야비한 자, 거친 자, 무법자라고 불리고 공격적이었다. 열심당은 그들의 대의를 촉진하기 위해 양식 창고와 모임 장소를 급습하고, 로마인, 유대인 부역자, 그리고 사두개인들에게 폭력을 가했다. 그들은 포위된 예루살렘 사람을 구하기 위한 타협을 좋아하지 않았다. 랍비들은 평화조약을 원했으나, 그들은 무모한 군사행동을 했다. 이 모든 것들로 인해 그들은 비난받았다. 전통에 따라 랍비들은 열심당이 내전을 일으키기 전에는 반란을 지지했다. 그러나 열심당이 내전을 일으켰을 때는 이미 희망이 사라졌다. 로마인에게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열심당은 예루살렘과 제 2 성전의 소멸에 기여했다. 바빌론 탈무드에 따르면, 열심당은 유대인들이 로마인들과 싸우도록 만들기 위해, 예루살렘에 있는 음식과 장작을 모두 불태웠다. 이 사건으로 Johanan ben Zakai는 예루살렘에서 탈출하여 베시파시안 황제를 만났고, 얌니아 학회의 설립으로 이어진 모임을 주도했다. 그 후 얌니아 학회는 랍비 유대교의 생존을 가져온 미시나를 생산하게 된다.
예수님 시대의 열심당원(또는 셀롯, Zealots)은 유대 민족주의적 성격을 가진 유대교의 한 분파로, 로마 제국의 지배에 저항하고 유대인들의 독립을 주장하던 급진적인 반란 집단이었다. 그들은 종교적 열정과 정치적 목표를 결합하여 활동했으며, 유대 민족의 해방을 위해 무력 저항도 불사하는 입장이었다. 열심당원은 유대교에서 종교적 정통성을 지키는 동시에 정치적 독립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로마의 통치를 신성모독으로 간주했고, 그에 저항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다.


 1. 열심당원의 기원


열심당원의 기원은 로마 제국의 유대인 통치가 강화되던 시기에 나타난다. 기원전 63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후 유대 땅은 점차 로마 제국의 속주로 편입되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지배 아래에서 여러 정치적, 종교적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유대 사회는 심각한 분열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열심당원과 같은 저항 운동이 형성되었으며,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유대 민족의 완전한 독립이었다.


열심당원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기원후 6년경이다. 당시 로마는 유대를 직할 통치하게 되면서 새로운 세금을 부과했는데, 이로 인해 많은 유대인이 반발했다. 특히 이때 갈릴리 출신 유다(Yehuda of Galilee)와 바리사이 학파 출신의 지도자인 삭카이가 중심이 되어 세금을 거부하고 로마에 저항하자는 운동을 펼쳤다. 이 운동이 열심당 운동의 시초로 여겨진다.
열심당원이라는 명칭 자체는 '열심(zeal)'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유대인의 자유를 위해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유대인들이 이방인, 즉 로마 제국에 굴복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고, 로마의 통치와 유대 민족의 타락을 막기 위해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2. 열심당원의 특징과 사상
열심당원은 정치적 독립과 종교적 열망을 결합한 독특한 집단이었다. 그들은 로마 제국의 지배를 거부하며, 하나님만이 유일한 왕이자 통치자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로마 황제에 대한 충성 서약이나 세금 납부를 신성모독으로 간주했고, 로마와의 타협을 거부했다.


열심당원은 무장 봉기를 통해 유대 땅에서 로마의 통치를 끝내고자 했다. 그들의 활동은 종종 폭력적이고 급진적이었으며, 로마의 군대나 유대 내의 친로마적 지도자들에 대한 암살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열심당원을 '테러리스트'와 비교하기도 한다. 특히 열심당원 중에서도 "시카리(Sicarii)"라고 불리는 소규모 집단은 단검(시카, sica)을 숨기고 다니며 로마에 협력하는 유대인 귀족이나 관리들을 암살하는 활동을 벌였다.


열심당원들은 종교적 정당성으로 무장 봉기를 정당화했다. 그들은 로마의 통치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허락하신 언약을 배신하는 행위로 간주했으며, 로마 제국과의 타협 없이 오직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로마인뿐만 아니라, 로마에 협력하는 유대 지도자들, 특히 사두개파와 같은 상류층 유대인들에 대해서도 적대적이었다. 사두개파는 로마와의 협력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 했고, 이로 인해 열심당원과 자주 충돌했다. 특히 사두개파 사람들....


3. 예수님과 열심당원
예수님의 시대에 열심당원은 유대 사회에서 중요한 정치적 세력이었다. 예수님이 갈릴리 지역에서 활동하시던 당시, 이 지역은 열심당원의 활동이 활발했던 곳 중 하나였다. 갈릴리 출신의 유다가 열심당 운동의 시초를 이끈 것도 이 지역에서였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 중 한 명인 시몬이 '셀롯(열심당원)'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열심당원의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저항과는 대조적이었다. 예수님은 정치적 해방이나 무력 저항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와 영적인 해방에 초점을 맞추셨다. 예수님은 로마의 지배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않았으며,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에 대한 질문에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을 하셨다(마태복음 22:21). 이는 열심당원이 주장하는 세금 거부와는 정반대되는 입장이었다.


예수님은 무력을 통한 저항보다는 사랑과 용서, 그리고 영적인 변화를 강조하셨다. 따라서 예수님의 메시지는 열심당원이 주장하는 정치적 폭력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예수님의 몇몇 가르침, 특히 성전 정화 사건이나, "검을 사라"는 발언(누가복음 22:36)을 열심당원의 급진적 저항과 연관시키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전체적인 메시지는 정치적 폭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4. 열심당원의 활동과 몰락
열심당원은 1세기 후반에 들어서도 로마에 대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특히 66년부터 70년까지 이어진 유대-로마 전쟁은 열심당원이 주도한 반란 중 가장 큰 규모였다. 이 전쟁은 로마 제국의 유대 지역 통치에 대한 가장 큰 도전이었으며, 열심당원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반란군을 이끌었다. 그들은 유대 민족의 자유를 위해 싸웠지만, 결국 로마 군대에 의해 패배하고 만다.


70년, 예루살렘은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 함락되었고, 성전이 파괴되었다. 이 사건은 유대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후 열심당원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열심당원의 마지막 저항은 마사다 요새에서 일어났다. 73년, 로마 군대는 마사다를 포위하고 있던 열심당원들을 제압했으며, 전설에 따르면 마사다에 남아 있던 960명의 열심당원은 로마 군대에 항복하는 대신 집단 자결을 선택했다. 이 사건은 유대인들의 저항 정신을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남아 있다.


5. 열심당원의 역사적 평가
열심당원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다양하다. 그들은 유대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애국자였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는 반면, 일부는 그들의 급진적인 저항이 오히려 유대 사회를 분열시키고 더 큰 피해를 초래했다는 비판도 제기한다. 특히 그들의 폭력적인 방법은 많은 유대인들조차 지지하지 않았으며, 로마의 보복으로 인해 유대 사회 전체가 큰 고통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열심당원은 유대인의 정체성과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헌신한 집단으로, 그들의 저항 정신은 이후 유대 역사에서도 중요한 교훈으로 남아 있다. 특히 마사다 사건은 현대 이스라엘에서 중요한 역사적 상징으로 여겨지며, 오늘날 이스라엘 군대는 "마사다는 다시는 함락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맹세를 한다.


결론
예수님 시대의 열심당원은 유대 민족의 독립과 종교적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로마 제국에 맞서 싸운 급진적 집단이었다. 그들은 무력 저항을 통해 로마의 지배를 끝내고자 했으며, 로마의 통치를 신성모독으로 간주했다. 예수님과는 정치적·종교적 목표에서 차이를 보였지만, 열심당원의 활동은 당시 유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열심당원의 최후는 비극적이었으나, 그들의 저항 정신은 유대 역사에 깊은 자취를 남겼다.
   

 

주후 1세기 유대교 종파들에 대하여 신약성경, 특별히 복음서에서 구체적이지 않지만, 그들의 이름은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사두개파, 바리새파, 그리고 가장 스쳐가는 이름처럼 열심당원이 언급되고 있다.  ζηλωτής(젤로테스)라는 단어는 열정(passion), 열심(zeal), 시기심(jealousy)을 뜻하는 명사 ζῆλος(젤로스)에서 온 것이다.
   열심(ζῆλος)에 대하여는 이미 2권에서 서술하였기에, 유대교 종파로서의 의미를 가진ζηλωτής(젤로테스)를 생각해 본다. 바울이 언급하는 하나님에 대한 열심, 율법과 전통을 지키고자 하는 열심은 단순한 개인적 바램이나 목적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방 문화, 특별히 우상숭배와 관계된 이방종교와 이방관습에 대한 거부감과 배척은 신구약 중간시대에 유대교(Ἰουδαϊσμός, Judaism)라는 종교적 민족적 정체성의 강화로 이어졌다. 유대인처럼 사는 것(Judaism)은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일상에서는 안식일과 정결법을 지키는 정체성을 말한다. 이것에 대한 종교적 일상적 도전이 예수의 삶과 교훈이었기에, 예수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대제사장들과 갈등하였고 대립하였다. 유대교 지도자들의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가 정죄 받은 죄목은 ‘신성모독’의 죄였다(막 14:64). 성전과 율법에 대한 무시와 모독이 곧 자신들의 종교적 권위와 지위에 위협이 되는 것으로 판단한 대제사장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은 처형권이 없는 그들이기에 로마총독의 재판에 회부하여 죽게 만드는 방안으로서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주장하고 선동했다는 혐의로 빌라도 총독에게 고발하여 사형을 받도록 공모했다. 하나님의 통치를 내세우며 반로마적 메시아적 운동을 주동하는 사람들(messianic pretenders)을 정죄하는 용어가 ‘자칭 유대인의 왕’이다.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 고발하하여 결국 예수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을 볼 때, 로마의 통치를 거부하는 유대교의 한 당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ζηλωτής(젤로테스, 열심당원)의 존재이다.
 
ζηλωτής(젤로테스)는 단순히 하나님과 율법에 대한 열심과 열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주후 1세기에 정치적 종교적 종파로 존재했던 고유명사 ζηλωτής(젤로테스)이다. 예수의 열 두 제자 중에 어부 시몬과 동명이인이었던 시몬을 가리켜 “가나나인 시몬”(마 10:4; 막 3:18) 혹은 “셀롯이라는 시몬”(눅 6:15; 행 1:13)이라 칭하고 있다. ζηλωτής(젤로테스, 셀롯)의 아람어 등가어가 Καναναῖος(카나나이오스)인데, 후자는 히브리어 קִנְאָה(킨아흐, 열심)에서 유래된 것이다. 열심당의 기원에 대해서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일으킨 유대인 반란전쟁(주후 66-70년)은 요세푸스의 역사저작 [The Jewish War]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예수의 한 세대 이후에 일어난 이 전쟁은 로마군단에 의한 성전파괴와 예루살렘 멸망으로 이어졌고, 약탈과 파괴, 수십 만명의 죽음과 포로라는 불행을 유대인들이 겪게 되었다. 이 예루살렘 불행을 아는 예수는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눅 19:41). 누가복음은 로마군대가 예루살렘을 에워싸는 것을 그림처럼 묘사하였다(눅 19:43; 21:20). 예루살렘 멸망의 불행은 결국 열심당원의 반란 때문이었고, 로마군대로 포위된 예루살렘 성읍 안에서 행한 열심당원들의 악한 행위들을 비판하며, 1세기 역사가이며 증인이었던 요세푸스는 로마군대를 오히려 하나님의 대리자로 묘사하였다.
 
요한복음에서 유대교 지도자들은 십자가형틀 위에 붙은 예수의 죄목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인 것에 불만을 품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적으라고 빌라도 총독에게 요구한다(요 19:21). 이것은 빌라도 총독 전후에 일어난 많은 거짓 메시아 운동의 연장선에서 예수의 운동을 정죄하는 것인데, 실제로 빌라도 총독은 사마리아에서 일어난 메시아 운동을 잔인하게 피의 학살로 진압하면서, 그것의 잔인함과 무고한 죽음들에 대한 사마리아 사람들의 탄원에 결국 로마로 소환되고, 총독직에서 물러나게 된다(주후 36년). '자칭'의 의미는 '주장하지만 결국 진실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열심당원의 신정정치 운동과 연관된 '자칭 메시아들'이 있었고,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자칭 유대인의 왕', 곧 가이사에 대한 반역자라고 총독에게 항의한다(요 19:12).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는 자신의 나라는 하늘에 속한 것이고, 만일 세상 나라를 원하는 것이라면 자신의 종들이 자신을 위하여 싸울 것이라고 변호한다(요 18:36). 유대교 지도자들의 판단과 요한복음 18장에서의 예수의 최후진술은 열심당원의 존재와 그들의 주장과 행동을 배경으로 삼고, 또 예루살렘 멸망의 불행이 열심당원과 관계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을 잘 알고 있는 저자의 시점을 보여주고 있다. ζηλωτής(젤로테스)의 존재가 만들어낸 불행을 알고 있었고, 예수의 제자 중 시몬과 같은 열심당원들의 주장, 곧 하나님의 통치(theocracy)를 주장하며  이방제국 로마의 지배를 거부하며 일으킨 이념적 폭력적 행동의 어리석음을 암시하고 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는 로마의 통치와 로마관리들에 대한 우호적 입장을 보여주며, 하나님의 통치가 이념적 민족적 폭력적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한다. 누가복음에서 강조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 안에,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통치이다: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b-21).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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