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열려라 에바다 2016. 4. 1. 08:38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성경본문 :막10:1-12 
설교자 :김경형목사 


10장 1절-12절: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가로되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창조 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더라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묻자온대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성경은 비유요 비사다. 본문도 비유다. 역사적인 것은 다 사라졌고, 또 계속 사라질 거고, 우리들도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창세 때 처음 난 사람과 맨 마지막에 예수 믿은 사람은 천국에서 다 만난다. 그러니까 거기가 실상의 세계다. 인간은 출생을 해서 그곳에서 만나기까지 만들어지고 뛰고 하는 과정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자리도 질적 성격적으로 에덴동산이다. 에덴동산에서는 반드시 생명과를 먹는 거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시는데 말하자면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과인데, 예수님께서 이 생명과를 주시면서 ‘내 말은 영이니라’ 라고 하니까 다 도망을 가버렸다. 그러면 그들이 도대체 어떻게 알아들은 것인가? 분명히 선악과 먹은 정신을 가지고 알아듣고 다 도망을 가버렸던 것이다.


에덴동산이라도 그 안에 뱀이 있었다. 에덴동산은 천국이 아닌 세상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거니시는 동산이다. 그런데 교회에서 목사부터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성령님은 떠나신다. 그런 원칙이 들어있다.


이 세상은 에덴동산의 모형이니 세상의 부부란다면 모두는 아담과 하와다. 아담의 뜻은 만민의 아버지이니 아담이 잘 하면 만민의 아버지 노릇이 되는 거다. 하와의 뜻은 만민의 어머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어떻게 돼버렸느냐? 만민의 아버지 어머니가 됐느냐? 안 된다.


왜 이런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느냐? 우리는 이 성경을 보면서 ‘나에게 뭘 먹으라고 하고 있구나’ 이게 느껴져야 한다. 그래야 후손에게 후손에게 생명과가 내려간다. 원칙은 항상 하나님 앞에 물어봐라. 불신자, 사람에게, 법관에게 먼저 물어보지 말고 항상 하나님 앞에서 먼저 생각을 하라.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아담이 잠을 잘 때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들어 놓고 아담이 일어날 때까지 하나님께서 하와를 데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데리고 오는 그 장면이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는 의미가 있는 거다.


그런데 그 때 아담이 하와를 보자마자 뭐라고 했느냐?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다. ‘뼈 중의 뼈요’ 했으니까 다른 뼈도 있다는 말이냐?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이 표현을 오늘날 부부가 처음에 서로 만날 때의 마음을 생각해 봐라. 다른 뼈가 보이더냐? 다른 여자가 보이더냐? ‘다른 뼈가 더 좋구나’ 하더냐?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한 게 아담이 제 말로 그냥 나온 거냐? 성경에 기록이 된 것을 보니까 성령님께서 하와에게 향한 아담의 그 마음을 알고 기록자로 하여금 그것을 기록케 한 것이니 지금으로 말하자면 성령님께 감화된 말이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은 중매쟁이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혹시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결혼식장에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라는 말을 하느냐?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했으니까 부부가 살다가 ‘싫다. 좋다’ 하면서 한쪽을 내버릴 수 없는 거다. 그럼에도 아내를 내버려야 하는 경우도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알고 보면 우리의 이룰구원을 놓고 ‘아내에게 어떤 일이 나타나거든’ 그게 있는 거다.


민5:12-19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만일 어떤 사람의 아내가 실행하여 남편에게 범죄 하여 타인과 정교를 하였으나 그 남편의 눈에 숨겨 드러나지 아니하였고 그 여자의 더러워진 일에 증인도 없고 그가 잡히지도 아니하였어도 그 더러워짐을 인하여 남편이 의심이 생겨서 그 아내를 의심하든지 또는 아내가 더럽히지 아니하였어도 그 남편이 의심이 생겨서 그 아내를 의심하거든 그 아내를 데리고 제사장에게로 가서 그를 위하여 보리 가루 에바 십분지 일을 예물로 드리되 그것에 기름도 붓지 말고 유향도 두지 말라. 이는 의심의 소제요 생각하게 하는 소제니 곧 죄악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니라. 제사장은 그 여인으로 가까이 오게 하여 여호와 앞에 세우고 토기에 거룩한 물을 담고 성막 바닥의 티끌을 취하여 물에 넣고 여인을 여호와 앞에 세우고 그 머리를 풀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 소제물 곧 의심의 소제물을 그 두 손에 두고 제사장은 저주가 되게 할 쓴 물을 자기 손에 들고 여인에게 맹세시켜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네 남편을 두고 실행하여 사람과 동침하여 더럽힌 일이 없으면 저주가 되게 하는 이 쓴 물의 해독을 면하리라’ 라고 했다.


이게 비유의 말씀인데 여자가 마시는 물에 티끌을 탔는데 무슨 티끌이냐? 나무껍질이냐, 먼지냐? 뭘 먹이는 거냐? 이게 지금 비유의 말씀이니 티끌을 먹인다는 게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것은 여자의 정결성 혹은 부정을 나타내는 쓴 사건이 되는 거다.


생각을 해 봐라. 사람이 티끌을 어떻게 먹느냐? 그런데 그걸 먹고 죄가 없으면 잉태가 된다고 했는데 이걸 이룰구원으로 끌고 와서 보면 그게 다 해석이 되는 거다. 그걸 제사장이 먹이는데 그게 주님을 말하는 거다. 그게 형식계시요 모형계시다.


그러면 남편이 여자에게 어떤 때 의심이 생기겠느냐? 여자는 의심이 들게 살지 말아야 한다. 말하자면 남편은 별로고 남편 먹을 것도 뺏어다가 ‘이거 우리 목사님 갖다 드려야 한다’ 하면 남편이 좋아하겠느냐?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해서 아담이 그 하와를 내버렸느냐? 사실 내버리지 못한다. 왜? 아담 자기도 받아먹었으니까. 이게 실은 우리의 현실이다. 성경에 있는 것을 펴보면 자기의 현실이다.


가령 아담이 하와가 주는 선악과를 받아먹지 않았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또 다른 여자를 만들어서 아담에게 줄까? 이미 그렇게 돼 있는 걸 기록케 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이룰구원 안에서 뭘 말씀하려고 하는 게 들어있는 거다.


성경에 보면 가인이 에덴 동편 놋 땅에서 여자를 잡고 장가를 갔는데, 성경에 기록된 대로 보면 그 때 당시에 인간은 아담과 하와와 가인과 아벨뿐인데 그러면 가인과 결혼을 한 여자는 어디서 데려온 것이냐?


우리가 성경을 볼 때는 그렇게만 보지 말고 성경은 계시이니 우리의 구원도리를 가르쳐 주려고 지금 그렇게 말씀하는 거다. ‘다른 곳에도 사람들이 있었네. 없었네’ 하는 건 고고학적 발굴로 알 수도 있겠지만 다른 곳에도 사람들이 있었던 없었던 가인은 우리의 이룰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구원의 등용물로 등용을 해서 그 사건을 기록케 한 것이니 우리는 그 위주로 깨닫고 나가면 되는 거다.


그 때 당시에 그 네 명 외에 다른 사람들이 있었으면 어떻고 없었으면 어떻다는 거냐? 있었건 없었건 성경에 나타난 대로만 깨닫고 나가면 우리의 이룰구원에 지장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을 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말을 하는 것은 계시 면에서 흐려지는 발상이다. 자꾸 ‘고고학적 발굴이 어떻고’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성경을 계시로 보는 면이 흐려진다. 그런 말을 듣는 교인들도 계시의 눈이 안 열린다. 이러면 이룰구원 면에서 마귀가 간섭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게 그렇게 중요하다. 성경연구를 할 때는 그 점을 매우 조심해야 한다.


어쨌거나 여자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남자의 실수요 남자의 책임이다. 남자의 실수인데 왜 여자를 버리느냐? 지금 이 시대에 남자의 실수가 많다. 하나님께서 어느 한 쪽을 데려가기 전에는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 아무리 합의 이혼을 했더라도 창조의 원칙에서 볼 때 잘못됐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부인 교회를 버리고 이방세상을 사랑하여 따라간 적이 있는가? 없다. 이 원칙을 놓고 볼 때에 신부인 교회가 머리 되신 신랑을 버리고 이방세상과 짝지어 시집을 갈 수 있느냐?


교회는 인간창조의 목적인 구원목적대로 천국복음을, 하나님의 본질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는 전례대로 가르쳐야 한다. 전례에서 바꾸지 말아라. 소원 목적성이나 교훈의 질을 바꾸지 말아라. 그런데 바꿔놓고 틀어놓고 구부려 놓는 목사가 많이 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을 아담으로부터 여자가 나온 것으로 비유를 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짓는데 누구를 모델로 하고 지었을까? 예수 그리스도를 모델로 하고 지었다. 그 사상이 들어있다. 아담으로부터 여자가 나온 것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을 비유하고 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됨이 아내와 남편이 하나 됨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에베소서에 보면 남편과 아내를 말하면서 또 교회로 말하고 있다. 성도는 어디서 배출이 되느냐? 여자가 아기를 낳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 자꾸 배출이 된다. 교회는 여자로 비유가 돼 있다.


부부가 서로 나눠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다고 했고, 악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뜻, 선을 위해서 인간 자기를 지었는데 인간들이 개인적인 목적대로 생각을 하니 ‘좋다. 안 좋다’ 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사람을 보는 눈이 선악과 따먹은 눈을 가지고 보기 때문에 사람을 단순히 겉모양만 보기 때문이다. 사람을 겉모양만 보고 취하게 되면 그 겉모양이 그 사람의 속과 같으냐? 옛날 분들이 ‘저거 인물값 한다’ 라는 말이 있는데 생활 속에서 그런 경험을 많이 한 것 같다. 이것은 나쁜 뜻의 말이다. 사람은 속으로 들어갈수록 자기 구별 분별, 타의 언행심사를 구별 분별해야 한다.


지금 교회가 거의가 보면 선악과 따먹은 지식을 자기 눈의 기준으로 세워서 ‘선이다. 악이다’ 하고 있다. 모양도 그렇고, 보기도 그렇고 모든 게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더더군다나 기독교 안에서 조차도 여자끼리 결혼하고 남자끼리 결혼하고 한다. 세상이 아무리 그렇더라도 교회에서 이게 될 말이냐? 또 그런 교회에는 그런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그게 자유냐?


히스기야가 바벨론 사자에게 내탕고를 다 보여줬는데 이건 교만이요 자랑이다. 하나님을 자랑해야 하는데 병이 나으니까 자기가 믿음이 있는 것처럼 그랬다. 나중에 보여준 그걸 다 빼앗겼다. 그 때 히스기야가 스스로 한 말이 있는데 이 말을 내가 해석적으로 말을 한다면 ‘아, 내 속에 물질성이 가득 들어있는데 저 나쁜 놈이 다 빼앗아 갔으니 나는 홀가분하구나’ 라고 한 것이다. 이는 마치 자기는 회개한 것처럼 기분이 좋다 그 말이다.


이 소리가 어떻게 느껴지느냐? 이런 해석도 있느냐? 자기에게 대고 이 말을 해석을 해 봐라. 자기 집에 불이 나서 다 타버린다면 ‘우리 집이 제일 좋은 집이고 값나가는 집이었는데 이것도 하나님 앞에 교만이었는지 다 태워버려서 야, 기분 좋다’ 그런 해석도 있느냐? 이건 이룰구원의 기준이 아니고 제 마음대로다. 이건 기준에서 빗나간 것이다. 또 하나는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 하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이 큰 죄를 많이 지으면 은혜가 많다는 그 말이냐? 어떻게 그렇게 생각을 할까?


부부가 헤어질 수 있는 경우는 첫째는, 안 믿는 쪽에서 하나님의 본질로 예수 믿는 것을 이유로 들어서 헤어지자고 하면 그런 것에는 매일 필요가 없다. 그런데 한참 살아서 아기가 있고 그럴 경우는 어떻게 되느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면 왜 이런 말이 돼 나왔을까? 단순히 그 장면만 볼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런 지경으로까지 나왔나’ 하는 면을 볼 때 여자이건 남자이건 도대체 예수를 어떻게 믿었기에 이 모양이 되었나를 봐야 한다. 집안의 물질을 전부는 교회에 갖다 주고, ‘우리 목사님 목사님’ 하면서 남편 월급을 다 교회에 갖다 주면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남편이 그런 여자와 살려고 하겠느냐? 이건 완전히 잘못된 거다.


남편이 안 믿더라도 여자가 살림 잘하고 가정 잘 돌보고 남편 내조 잘 해도 이혼하자고 할까? 아이도 있고 하면 물질을 생활에 잘 쪼개서 쓰고 해야 한다. 예수 잘 믿고 살림살이 잘하고 남편에게 싹싹하고 한 여자를 버린다면 그 남편은 바보다.


그 다음에 어느 한 쪽이 간음죄를 지었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용서하고 사랑을 한다면 사는 것이지만 이혼을 하자고 하면 이혼이 되는 것이다. ‘사랑하면 사는 것이지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말하는 거다. 호세아서에 보면 이게 나온다.


주님이 보실 때 소원 목적적으로나 영적 면에서 세상 쪽으로 따라가는 그런 간음죄가 얼마나 많으냐? 그런 장면을 봐라.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가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정죄했느냐? 그 여자에게 지옥가라고 했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라고 말씀을 했다. 그걸 생각해 봐라. 그게 인격의 세계다.


그런데 옛날 분들 못마땅한 게 옛날 남자들은 제 멋대로 나가서 술도 먹고 바람도 피고 해놓고는 여자가 볼 일이 있어서 조금 늦게 들어오면 다잡는 이거 정말 못마땅하다. 이게 타락성이다.


세 번째는 폭행이 있는 부부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남편의 성격이 문제라거나, 딴 여자가 있어서인지, 정말 아내가 보기 싫어서인지? 다른 곳에 첩을 두고 본처를 구타한다면 이건 이혼하자는 뜻이리라. 이럴 때 이혼을 한다면 아이들의 양육비는 이혼하자는 첩을 둔 쪽에서 부담을 해야 한다. 그런데 아이가 내 쪽 네 쪽이 있느냐?


그리고 네 번째는 누구든지 이혼의 사유를 만들면 서로가 상처를 입는다.


다섯 번째는 영의 눈으로 신앙사상을 보면 교회가 세상과 세상 것을 좋아하면 이미 예수님과 멀어진 상태요, 그 다음에 오는 것은 가정에 문제가 온다. 필연적으로 오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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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