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

열려라 에바다 2017. 4. 5. 08:21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

 

 

김 재 성 목사   
(한신대 교수/ 민들레성서마을지기) 


ㅡ고전 15:20-26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20절).

“첫 열매”(aparche)란,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맨 먼저 드리는 물건이다. 그 후에야 나머지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 그것은 식물의 열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맨 처음으로 해내어 다른 사람들도 그 일에 동참할 수 있게 한 것을 의미한다.

제너가 종두법을 발견하기 전까지 다들 천연두가 무서웠다. 귀신보다 무서워서 오죽하면 마마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러나 제너가 종두법을 개발하여 그것을 정복한 다음에는 인류는 승리를 거두었다. 제너의 “첫 열매”가 모든 인류에게 유익을 주고 병에서 구원을 주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럽축구를 당할 수 없다고 늘 열등감을 가지곤 했다. 그런데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히딩크와 함께 선수들은 4강을 달성했다. 그것은‘첫 열매’였다. 한번 승리를 하고 나니까 이제 그들은 이전의 두려움을 걷어치울 수 있다. 전에 했으니까 이번에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첫 열매는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예수께서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하는 것도 그와 비슷한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복왕이라 불린 알렉산더 대왕도,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도, 죽음만은 정복하지 못했다. 누구나 죽음만은 정복할 수 없어서 늘 죽을까봐 전전긍긍하며 산다. TV를 켜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좋은 음식 먹는 이야기, 몸에 좋은 약 먹는 이야기, 운동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겉으로는 화려해 보일지 몰라도 그 속에는 죽음의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무서운 죽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복하셨다고 한다. 그것이 첫 열매가 되었다는 것은 이제 우리들도 죽음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의미를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전통적인 교리적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음을 선언하고 그저 믿기만 하라고 한다. 내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음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그 부활이 어떤 부활인지는 설명해주지 않는다. 신자들은 저마다 마음대로 상상하면서 부활을 믿고 있다.

그들이 제일 많이 상상하는 것은“영혼의 부활”이다. 육신은 땅 속에서 미이라가 되고 화장터에서 재로 변하지만 영혼만은 하늘나라로 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철학이나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영육의 이원론이지 기독교의 부활론이 아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부활이란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고 다만 의미의 부활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에서 부자인 네프류도프는 하녀 카츄샤를 범하고 버리지만 나중에 그 여인이 자신으로 하여 창녀가 되고 살인범이 되어 시베리아 유형을 가게 된 것을 알고, 회심하여 자기 재산을 다 농노들에게 나누어주고 카츄사를 따라가서 결혼함으로써 그의 영혼이 부활한다는 이야기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는 라스콜리니코프가 똑같은 상황에 처해서 창녀인 소냐의 도움으로 부활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모두가 부활을“회심”으로 보는 관점이다. 이런 것은 지식인들이 좋아한다. 나름대로 매력이 있다. 하지만, 결국은 부활은 의미상으로 있는 것이고 실제는 없는 것이라는 회의주의를 잉태하게 된다.

 

모든 통치와 권위와 권력을 폐하심

십자가를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누가 누구를 살해해도 영원히 비밀로 묻히면 죽은 사람만 억울하다고 생각들을 한다. 그들은 삶의 부조리 속에서 회의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진다.

지난날 4.19의 희생자들 앞에서, 5월 광주의 고난당한 사람들 앞에서 우린 어떤 말도 찾지 못했다. 미우라 아야꼬 여사는 그의 책에서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었을 때 성당에서 예배드리다가 고스란히 재로 변한 수녀들의 이야기를 했다. 그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그런 고난을 당했는가고... 하나님은 가장 순결한 그들을 제물로 받으셨다고 해석을 했지만, 그래도 나는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하나님은 왜 그런 제물을 필요로 하시는가... 우리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되지 않을 때 우리는 허무주의와 절망으로 빠진다. 역시 신은 없다거나, 죽은 놈만 억울하다거나... 민주화는 뭐고 통일운동은 뭐냐 다 시간 지나면 잊혀진다... 이런 것이 바로 절망이고 이것은 우리에게 영원한 죽음을 줄 뿐이다.

 

예수 시대 갈릴리에서도 이런 삶의 부조리를 겪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죄인 취급을 받았지만 예수를 만나서 구원의 기쁨을 맛보았다. 사회에서 다른 사람과 밥상을 같이 하지 못했지만 예수와 함께 밥상공동체를 이루면서 비로소 사는가 싶이 살게 되었다. 그런데 권력자들은 그 예수를 가장 잔혹한 반역자에게 본보기로 집행하는 십자가형에 처하였다. 갈릴리 사람들은 그 부조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예수는 죽어야했는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은 나중에 바울을 위시한 신학자들이 해석하고 교회가 고백한 것이다. 하지만 십자가 사건이 일어날 당시에 그들은 그런 의미를 생각하기보다는 그저 이번에 죽임 당한 여학생의 부모와 그 목사님 부부처럼 그저 황당하고 가슴 아프기만 했을 것이다. 의미는 아주 나중에 겨우 생각할 수 있다. 당사자는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서 “예수 부활하셨다”는 외침이 우렁차게 나타났다. “내가 예수를 뵈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것이 기적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부활의 신비이다.

로마의 권세는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갈릴리 청년 하나쯤 십자가에 못 박아서 민중들을 협박하는 일은 그들이 늘 하는 일이다. 그러면 남은 자들은 대개 겁먹고 도망가거나 부인하거나 변절하여, 더 효과적으로 군중을 진압하고 협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회피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지심으로써, 그들은 의로운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하잘 것 없는 깡패 집단이요, 약소국을 짓밟고 착취하는 불한당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예수의 십자가 때문에, 그들의 권력은 정당성이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힘이면 다 되고, 산 놈이 최고라고 하는 논리도 이제는 먹혀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죽은 예수가 산 로마를 이기고 있다. 세례 요한을 죽이면 예수가 천리만리 도망갈 줄 알았는데 더 큰 위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면 교회는 지리멸렬하고 사라질 줄 알았다. 그러나 더 큰 세력으로 우후죽순처럼, 진달래처럼 여기저기서 피어나기 시작했다.“예수 부활하셨다”는 외침이, 예수께서 십자가형을 당하신 적진 한복판인 예루살렘에서 울려퍼졌다. 이것이 예수의 부활 소식이다. 그것은 기존의 모든 통치와 권위와 권력과 아울러 부조리함을 폐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부활과 최후 승리에 대한 묵시적 전망을 갖고 있다. 그것은 영지주의나 그리스철학의 이원론과는 아주 다르다.

23 그러나 각각 제 차례대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첫째는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요, 그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24 그 다음에는 마지막이 올 것인데,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 모든 통치와 권위와 권력을 폐하시고,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실 것입니다.

닐 엘리엇(Neil Elliott)은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예수의 죽음은 “피조물을 얽어매고 있는 모든 권력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해방 전쟁’의 시작”이라고 해석한다. 또, “하나님의 최후의 승리를 예고하며, 권력의 멸망이 임박했음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십자가형을 당한 그리스도의 부활이다”고 말한다.

요즘 한기총이라는 보수 단체가 기승을 부린다. 그들은 독재시대에는 늘 독재자를 위해서 조찬기도회를 하거나, 교회가 정부 비판을 하는 것은 정치참여이므로 순수하지 않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더니 요즘은 어떻게 된 일인지 걸핏하면 반정부 시위를 하고 광화문 앞에서 촛불 시위를 하면서 김정일 상을 태우고 김정일 이 빨리 죽게 해달라고 통성기도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통치와 권세와 권위를 폐하셨는데, 그들은 오히려 세상의 보수주의라는 통치와 권세에 복음을 가두고 그리스도를 그들을 축복하는 분으로 왜곡하고 있다.

 

그것은 미국에서 수입된 것이다. 미국에서는 보수 크리스천들이 공화당과 군수재벌들을 지지하면서 이라크 공격도 지지하고 부시 정부만 지지하고 있다. 그렇게 세상 권세와 권력에 협력하고 의지하면서 어떻게 예수 부활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예수의 부활은 교리상으로 믿거나 영적인 부활을 믿기에 실천에서는 그런 행동을 거침없이 할 수 있다.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

“마지막으로 멸망받을 원수는 죽음입니다”(26절).

바울의 묵시문학적 비전은 정치적 차원만 갖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죽음을 극복하는 더욱 깊은 삶의 차원을 갖는다.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고전 15:55-57)

시체가 살아나는 것이 부활이 아니다. 죽은 사람의 영이 돌아오는 것이 부활이 아니다.

 

기독교는 “몸의 부활”을 말하지 “몸으로부터의 부활”을 말하지 않는다. 부활은 죽음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승리이다.

성경에 사울이 답답하니까 무당을 찾아가서 죽은 사무엘을 불러올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민속 이야기의 흔적이라 하겠다. <흑인 오르페>라고 하는 영화에서도 애인이 죽자 너무나 그리워서 무당을 찾아가서 영혼을 불러내는 것을 제법 아름답게 그리는 대목이 있다. 최근에는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로 나와서 많은 사람들을 울렸다. 그런 영화들은 <오르페우스와 유리디시> 같은 그리스 신화를 깔고 있다. 그런 것들은 은근히 우리를 속이고 있다. 부활은 영혼의 부활인 것처럼 믿게 한다. 그것은 요즘 <신돈>이라는 드라마에서도 유행을 한다. 우리나라 영화가 늘 다루는 주제인데, 고려의 공민왕이 노국대장 공주를 너무나 사랑하다가 공주가 죽자 늘 그리워하여 신돈이 영혼을 불러준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알고 보니 공주와 많이 닮은 여자를 공주로 변장시켜서 데려다 놓은 것이었다. 그래도 이 이야기에서는 그것이 속임수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런 것은 다 속임수이거나 신화이거나 은유이지 실제로 그렇게 사람이 부활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은 그런 의미일 수 없다. 사람들이 권세에 굴종하고, 로마 황제만이 최고로 알고, 힘 있는 자가 약한 사람들을 강제로 내리 누르고 지배하고 식민 통치하고 세금을 걷어가고 그러는 것이 통치와 권세요 그것만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권력과 권세와 통치를 폐하고 새로운 시작을 하셨다는 것이다. 새로운 권세, 새로운 인간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으니, 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의 부활도 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을 것입니다.”(21-22절)

두 가지 인간형이 대조가 되고 있다. 아담은 범죄한 사람이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새로운 존재, 새로운 인류의 첫 열매가 나타났다. 예수 그리스도이다. 가장 부조리한 그 십자가가 승리의 상징이요 출발점이 되었다. 가장 무력하게 못 박힌, 거리낌이요 어리석음인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승리가 되고 지혜가 되고 능력이 되었다. 그 신비는 믿는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다. 그런데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죄가 더 이상 나를 얽어매지 못하고 죄 때문에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세상의 권세가 더 이상 무섭지 않고 죽음이 더 이상 두렵지 않다. 늘 죽을까봐 두려워하며 전전긍긍하고, 죽기가 무서워 권력자들에게 굴종하고, 죽는 사람만 억울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리스도가 첫 열매가 되심으로써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되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고 자신 있게 외치게 되었다.

주님의 일을 계속해서 하라

 

첫 열매가 처음 드리는 제물이며, 그것 때문에 나머지를 쓸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일들은 오늘 우리에 의해서 계속되어야 한다. 부활의 본래적 의미가 다시 산다가 아니라 일어난다는 뜻이다. 죽은 줄 알았던 갈릴리 사람들이 일어나서 예수 부활하셨다고 외친 것이며, 끝난 줄 알았던 예수의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죽으면 그만이라는 허무주의에 굴복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이 두렵지 않다. 그래서 이미 승리한 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영혼의 부활이 아니라 오늘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그들이 일으킴을 받는 현실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몸은 시체가 살아난 몸이 아니다.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시체 가운데 계시지 않고, 우리 가운데 계시다. 우리가 살아 있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할 이가 없다. 우리가 밥상 공동체를 복원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밥상 공동체는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우리가 죽음을 이기고 찬양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승리도 남의 얘기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이유 없는 고난이 많다. 부조리함도 많다. 그 고난을 견디면서 절망에 빠지는 사람도 많다. 그들에게 다가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고 증언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부조리한 십자가를 지셨지만 부활하셔서 첫 열매가 되시고 우리 소망이 되셨다고 증거해야 한다. 그리고 축하하는 잔치를 조촐하게라도 열면서 주님이 이룩하신 밥상 공동체를 이어가야 한다. 그것은 그저 밥 한 끼 먹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수께서 하신 일을 우리가 계속해서 한다는 의미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려면 무덤으로 갈 필요가 없다. 예수의 무덤은 비었고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예수는 밥상 공동체가 있는 곳에 계신다. 바울이 어디 귀신으로 나타난 예수를 만났는가?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만났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직접 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오늘 우리도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주님을 만났다고 고백해야 한다. 주위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증거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고난도 어려움도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

성금요일에 신자들은 촛불을 켜고 함께 기도를 드린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다. 작은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한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할 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 엠마오 길로 가던 제자들이 주님과 같이 길을 가면서도 그가 누군지 몰랐다. 나그네를 영접하고 주님이 생전에 하시던 떡을 떼는 일을 할 때 비로소 눈이 열려서 주님을 알아보았다. 오늘날 우리도 성찬식을 한다. 주님이 하신 일을 계속해서 하는 것이다. 그때에 우리는 부활하신 주를 만날 수 있다.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정복하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주님으로부터 와서 주님께로 돌아갈 믿음을 갖고 산다. 부조리한 일을 당하고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반드시 우리가 부활하고 승리할 것을 믿는다. 세상 사람들은 “내일이면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는 허무주의에 빠지지만, 그리스도를 첫 열매로 간직하는 우리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억울하게 사자 밥이 되고 고난당한 사람들이 운이 없어서 죽었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반드시 살아나는 묵시문학적 부활의 비전이 있다. 처음에는 그리스도 그 다음은 죽은 사람들 그리고 우리가 변화될 것을 믿는다. 우리 모두는 죽어도 반드시 부활하고 살아도 반드시 변화를 받아 주님과 함께 이 세상을 다스리며, 그때에 부활하고 죽은 자들의 억울한 사정이 신원되는 날이 오는 것을 믿는다. 그리스도께서 지금 영원할 것 같은 모든 통치와 권세와 권력을 폐하시고 최고의 심판관이 되셔서 수고한 이에게 면류관을 주시고 위로해 주실 것이다. 사람은 돈을 위해 사는 것도 로마의 권세를 위해 사는 것도 아니요, 바로 부활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도 그 부활에 동참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오늘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그 은총의 삶을 살고 심판날 주께서 주시는 그 상을 받으려고 사는 것이다. 우리는 우연히 생겼다 존재도 없이 사라지는 공수래공수거이거나 이 풍진 세상을 만나 허무하게 죽어가는 의미 없는 존재들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도 값 주고 산 몸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갈 거룩한 성도들이다. 우리가 이룩하는 밥상, 우리가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천국의 삶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나그네를 영접하고 작은이들을 돌보는 선교도, 빵을 떼고 잔을 나누는 친교도 모두가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축하하는 부활의 잔치 마당이다. 다들 죽음을 두려워하며 전전긍긍하며 살지만 우리는 죽음을 이기신 첫 열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 외치면서 찬양하면서 살아간다. 이와같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일들을 계속해서 해 나가는 가운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감격과 은총이 넘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설교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0) 2017.05.29
주제 144,000인  (0) 2017.05.29
"부활의 세가지 의미"(요 21:5-21)   (0) 2017.04.05
[스크랩] 부활의 생명으로 살자  (0) 2017.04.05
부활 영광   (0) 2017.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