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역경의 열매] 김승일 <2> 한겨울 택시 세차하다 중풍 맞은 어머니

열려라 에바다 2017. 4. 18. 07:50

[역경의 열매] 김승일 <2> 한겨울 택시 세차하다 중풍 맞은 어머니

정신 없이 물 뿌리던 모습 아픈 기억… 가난한 집안 사정 깨닫고 대학 자퇴

 

[역경의 열매] 김승일 <2> 한겨울 택시 세차하다 중풍 맞은 어머니 기사의 사진
단란했던 가족들과 함께 찍은 어린 시절의 김승일(오른쪽 두 번째).

깊은 잠에 빠진 새벽 4시 반 ‘따르릉’하고 전화벨이 울렸다. ‘누가 이 이른 시간에 전화를 하지.’ 잘못 걸린 전화라 생각하고 받지 않았다. 하지만 전화벨은 계속 울렸다. 하는 수 없이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누구신가요.” 전화기 넘어 목소리는 중년의 남자였다. 그 남자는 “○○○씨 댁 맞죠. 전화 받으시는 분은 가족이신가요”라고 물었다. 낯선 남자로부터 어머니 이름을 들으니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왠지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머니 행동이 좀 이상해요. 어디 불편하신 것 같아요. 얼른 어머니 회사로 오셔야할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어머니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어머니는 어제 저녁 택시회사에 세차일을 하러 가셨는데 마음이 착잡해졌다. 옷을 대충 챙겨 입은 아버지와 나는 어머니가 일하는 회사로 발길을 옮겼다.

그날 새벽은 엄청 추운 한겨울 날씨였다. 어머니 회사에 도착하자, 먼발치에 홀로 서 있는 어머니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갔다. 전화 온 남자의 말대로 어머니가 좀 이상했다. 택시가 아닌, 아무 것도 없는 맨 바닥에 물 뿌리는 호스를 들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서성이고 있었다. “어머니, 왜 이러고 계세요. 집에 가셔야죠. 저 알아보시겠어요. 막내 승일이에요….”

곧 바로 병원에 가서 정밀진단을 받았다. 어머니 병명은 뇌출혈이었다. 흔히 말하는 ‘중풍.’ 이후 어머니는 2년가량 투병생활을 했다. 말이 어눌해지고 몸까지 불편해졌다.

내게 어머니는 특별한 존재였다. 늘 옳고 그름이 분명하던 분, 키가 작고 왜소하셨지만 성격이 다부지고 열정적으로 가족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다. 너무나도 헌신적인 어머니였던 것이다.

충격에 빠졌다. 어머니가 정신을 잃은 채 바닥에 물을 뿌리시던 모습은 지금도 잊지 못할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죄책감이 들었다. 어머니를 더 잘 모셨어야 했는데. 아들로서 평소 혈압이 높았던 어머니의 건강을 좀 더 챙겨 드렸어야 했는데….

어머니가 발병한 뒤 비로소 집안사정을 알게 됐다. 가난한 우리 집, 착하지만 경제적인 능력이 부족한 아버지, 대학등록금 마련도 힘들다는 것 등등.

무엇보다 세 차례 쓰러지신 어머니가 불쌍했다. 자식 키우느라 고생하신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밤새도록 자식 학비를 마련하시느라 고생하신 어머니가 아닌가. 이것저것 생각하니 힘들고 막막했다. 어떻게 할 능력도 용기도 당시 내겐 없었다.

문득 머릿속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성악공부를 그만둬야겠다.’ 우리 집 형편에 성악 공부는 사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학비 때문에 어머니를 힘들게 했다는 죄책감이 맴돌았다.

짐이 되기 싫었고 학교를 다닐 자신감도 없어졌다. 점점 학교 캠퍼스 언덕을 오르기 힘들었다. 평온하게 수업을 받는 다른 학생들이 부러웠다. 마음속엔 시기와 질투, 분노와 불평 등 안 좋은 생각으로 가득했다.

결국 대학을 자퇴했다. 명랑하고 밝았던 내 모습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노래로 칭찬을 받던 기억도, 세계적인 성악가가 되겠다는 꿈도, 다 물거품이 됐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듯 했다. 인생의 긴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정리=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