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여전히 수렁이었다. 아버지의 폭력과 월남, 한국전쟁과 가난 속에서 나는 언제나 살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고통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처절한 상황에서 내가 찾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었다. 나는 울지 않는 사람이었다. 열한 살 어린 나이에 작은오빠의 손을 잡고 한밤 산속을 걸어 월남할 때도, 우산을 살 돈이 없어 비를 맞으며 학교에 갈 때도 밝은 내일을 꿈꾸며 꿋꿋이 버텼다. 하지만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 애원했다.
“하나님, 제발 저를 수렁에서 빼내 주십시오. 더 이상 살 수가 없습니다. 제 아들 형수를 만나러 가게 해주세요. 제발 저를 이 나라에서 놓아 주세요.”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신 걸까. 1970년 미국에 갈 기회가 생겼다. 내 친구가 미국의 연합그리스도교 교단에서 1년간 문화교류를 위한 자원봉사자를 구한다는 광고를 가져다주었다. 곧바로 지원했다. 모든 것이 술술 풀렸고 미국으로 떠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복병이 있었다. 그해 4월 18일 김포공항에서 떠나려는데 낯선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남편의 빚을 갚으라고 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갚을만한 돈도 없었다. 그 사람은 내가 떠나면 남편에게서 빚을 돌려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내 남편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보증수표’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그들은 나를 인질로 삼으면 돈이 나올 것으로 여겼다.
너무 슬퍼 친척과 친구들이 잔뜩 배웅을 나온 자리에서 펑펑 울었다. 눈물이 꼭지 빠진 수돗물처럼 흘렀다. 남편과 다섯 살 난 용수를 두고 떠나는 서러움까지 겹쳤다. 결국 남편의 사촌형이 빚을 책임지기로 하고 풀려났다.
엄마를 태운 비행기가 하늘로 날아가고 엄마 없는 집에 들어서며 서운했을 어린 용수를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난도질당하는 것 같다. 나는 참으로 몹쓸 어미였다. 큰아들을 먼저 미국에 보내고 울고, 이제는 작은아들을 뒤에 남겨놓고 울었다.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원망스러웠다. 내 자신의 고통이 너무 커서 그랬을까. 홀로 남겨질 어머니 생각도 깊게 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국을 떠났다. 고작 1년짜리 초청장이었지만 비행기 안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23년간의 남한생활은 가난과 죽음, 병과 고통으로 가득했다. 지긋지긋했다. 슬픈 역사를 지나오면서 수많은 여성들이 함께 겪은 고통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미련 없이 새 세상으로 떠났다. 조국은 그러나 핏줄처럼 떠날 수 없는 존재였다. 지금도 애국가를 부르면 콧날이 시큰해온다. 도망친다고 외면할 수 있는 조국이 아니었다.
꼭 잠긴 옥문을 열어 사도 바울을 해방시키신 것처럼 하나님이 나의 옥문도 열어주셨다. 미국에서의 삶은 순조롭게 풀렸다. 난 미국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큰아들 형수를 찾아갔다. 2년만의 모자 상봉이었다.
형수는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미국으로 떠났다. 2년이 길었던 걸까. 날 보고 서먹서먹해하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형수 손을 잡고 오랫동안 걸었다. 걷다가 사진을 찍으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얼마가 지나자 형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마음을 열고 내게 안겼다. 1주일을 함께 보내고 난 다시 자원봉사 교육을 받기 위해 필라델피아 포츠타운의 연합그리스도교 선교본부로 떠났다.
정리=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
[역경의 열매] 김진숙 <7> 수렁 같은 삶에 지쳐… 다시 미국 보내달라 기도
美 교단서 1년간 일할 초청장 받게 돼… 출국날 공항까지 남편 빚쟁이가 나타나
![[역경의 열매] 김진숙 <7> 수렁 같은 삶에 지쳐… 다시 미국 보내달라 기도 기사의 사진](http://image.kmib.co.kr/online_image/2017/0606/201706060000_23110923759395_1.jpg)
미국으로 떠나는 날 김포공항에 배웅 온 가족과 친척, 교인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왼쪽 가슴에 꽃을 달고 있는 사람이 나다. 너무 울어서 눈이 부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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