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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진숙 <5> 열다섯살에 전쟁 통 200리 길 오가며 가족 부양

열려라 에바다 2017. 6. 2. 11:19

[역경의 열매] 김진숙 <5> 열다섯살에 전쟁 통 200리 길 오가며 가족 부양

서울에 쌀 팔고 다른 물건 사 시골에 팔아… 다섯 식구가 상자로 만든 집서 3년간 지내

 

[역경의 열매] 김진숙 <5> 열다섯살에 전쟁 통 200리 길 오가며 가족 부양 기사의 사진
부산 피란시절 영도섬에서 촬영한 사진. 나는 이때 중학교 3학년이었는데 나무로 만든 사과 궤짝을 책상 삼아 열심히 공부했다.

인민군에게 잡혔던 작은오빠는 화장실에 간다고 둘러대고 도망쳤다. 우리 식구는 곧장 서울을 떠나 큰오빠 친구가 사는 경기도 구둔이라는 곳으로 갔다. 작은오빠는 그 집 부엌에 토굴을 파고 3개월을 숨어 살았다. 영어사전 하나로 그 긴 시간을 버텼다.

큰 올케는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갔다. 어머니는 두 살, 네 살짜리 조카들을 돌봤다. 열다섯 살이었던 내가 밥벌이를 해야 했다. 200리 길을 걸어 서울에 쌀을 가져다 팔고 받은 돈으로 다른 물건을 사 다시 시골에 파는 동네여자들을 따라나섰다. 그렇게 하라는 사람들은 없었지만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200리는 끼니때만 빼고 쉬지 않고 걸어도 이틀이 걸리는 거리였다. 날이 어두워지면 노숙을 했다. 날이 밝으면 쌀 한 말을 머리에 이고 어깨에 지며 서울로 갔다.

서울에 도착해 쌀을 팔아 고무신을 샀다. 그리고 다시 이틀간 200리를 걸어 집에 오면 앉은뱅이가 됐다. 다리와 발목이 너무 아팠다. 어머니는 시장에 나가 고무신을 보리나 감자로 바꿔왔다. 3개월간 2번 서울을 왕복했다. 800리를 걸은 셈이다.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이 걸어서인지 키가 크지 못하고 무릎의 연골도 무리가 왔다. 지금도 그때 고생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30년 같은 3개월이 지나고 1950년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됐다는 소문을 들었다. 서울에서 쌀을 팔고 고무신을 사서 구둔으로 떠나려던 밤이었다. 그날 밤 거리는 지옥 같았다. 폭격에 맞아 피 흘리는 사람, 당황해서 이리저리 뛰는 사람 등이 길거리를 메웠다. 인민군은 서울 시내에 불을 지르고 보는 사람마다 죽인다고 했다. 밤새 총소리 대포소리를 들으면서 헤매다 새벽을 맞았다. 예전에 살던 판잣집으로 향했다. 길가에는 시체가 즐비했다. 판잣집은 사라지고 없었다. 어머니가 항아리에 담아 땅에 묻었던 소지품과 사진도 사라졌다.

서울로 돌아왔지만 두세 달 만에 다시 피난을 가야 했다. 1·4후퇴였다. 군인 가족이라 기차에 태워준다고 해 서울역으로 달려갔다. 기차가 만원이라 문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가까스로 유리창을 넘어 기차에 올랐다. 사람들은 기차가 설 때마다 밖으로 나와 밥을 지어 먹었다. 기차는 예고 없이 출발했는데 밖에서 밥 먹던 사람들이 밥솥을 든 채 유리창으로 기차에 올라탔다.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서울을 출발한지 12일 만에 부산진역에 도착했다. 그곳도 막막했다. 물 한 모금 살 곳이 없었다. 부산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보따리를 베개 삼고 땅바닥을 구들 삼고 하늘을 천장 삼아 역마당에서 며칠을 보냈다. 노숙 3일째가 되자 한 노인이 자기 집 마당에 들어와 자라고 했다. 그 분 집 마당에 텐트를 쳤다가 다시 미군 시레이션 박스로 하꼬방(상자로 만든 집)을 지어 다섯 식구가 3년을 살았다. 겨울에는 돌을 달궈 수건에 싸고 큰 이불로 덮은 뒤 온 식구가 발을 넣고 잤다. 내 나이 만 16세가 되기 전이다.

나는 어머니와 생계를 꾸렸다. 한 시간을 걸어 부산 야미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와 길거리에서 팔았다. 목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어머니와 나는 새벽 3시에 자리를 잡았다. 집 주인이 대문을 잠갔기 때문에 어머니와 나는 담을 넘어야 했다.

정리=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