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역경의 열매] 김진숙 <3> 가난으로 어렵게 다니던 中2 때 한국전쟁 터져

열려라 에바다 2017. 6. 1. 10:42

[역경의 열매] 김진숙 <3> 가난으로 어렵게 다니던 中2 때 한국전쟁 터져

아버지처럼 의지하던 큰오빠 전사, 작은오빠도 인민군에게 잡혀가

 

[역경의 열매] 김진숙 <3> 가난으로 어렵게 다니던 中2 때 한국전쟁 터져 기사의 사진
난 어린 시절 사진이 거의 없다. 우산조차 못 살 정도로 가난했으니 사진을 찍는 일이 귀했다. 이화여중 1학년 때 나를 예수님께 인도한 친구 조영순(왼쪽)과 함께 찍은 사진.

서울에서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춥고 배고프고 고달팠다. 어머니는 회현동의 한 호텔에서 빨래 일을 했고 큰오빠는 그 호텔에서 통역관으로 일했다. 우리 식구는 만두를 쪄 길거리에서 팔기도 했다. 근근이 입에 풀칠하는 수준이었다. 난 1949년 돈암국민학교를 졸업했다. 4학년에 월남해 졸업하기까지 우리 식구는 4번이나 이사했다. 어린 시절 이 경험이 나중에 집 없이 고생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계기가 될 줄 누가 짐작했겠는가.

가난한 피란민 아이였으니 부잣집 아이들이 많은 이화여중 진학은 꿈도 못 꿨다. 담임선생님은 그래도 입학시험을 쳐보라고 했다. 시험을 치르고 잊고 있었는데 합격 소식이 날아들었다. 어머니와 큰오빠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학비 댈 형편이 못되니 “누가 시험을 치라고 했느냐”고 호통을 쳤다. 집안의 돈을 모두 모아도 학비의 절반이 되지 못했다. 큰오빠가 이화여고 교장 신봉조 선생을 만나 사정했다. 신 선생은 “있는 돈만 가지고 아이를 데려 오라”고 해 가까스로 학교에 입학했다.

멋쟁이 친구들 사이에서 제대로 된 교복조차 입지 못했다. 국방색 여군 윗도리를 얻어 물을 들이고 흰 칼라를 달아 입고 다녔다. 누가 봐도 교복이 아니었다. 그래도 친구들은 날 놀리거나 업신여기지 않았다. 비오는 날에 자가용으로 등교하는 아이들도 많았고 비옷을 입은 친구도 있었다. 내겐 비옷은커녕 우산조차 없었다. 그건 사치였다. 동복이든 하복이든 단벌이었다. 밤에 빨아 말려서 아침에 다려 입었다. 교복이 구겨지는 것도 막고 버스비도 아낄 생각에 묵정동에서 정동 학교까지 걸어 다녔다. 그래도 난 공부하는 즐거움에 빠져 주눅 들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 때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6월 25일은 주일이었다.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군인이 됐던 큰오빠는 머리에 기름을 발라 얌전하게 빗어 넘긴 채 외출했다. 큰오빠는 단정하고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날 아침 집을 나서던 게 내가 본 큰오빠의 마지막이었다. 내 든든한 후원자이자 아버지 같던 큰오빠와의 이별은 날 아프게 했다. 아버지 없이 살 수 있지만 큰오빠 없이는 살 수 없었다. 올케 언니와 어머니, 나는 매일 울었다. 지금도 이 글을 쓰면서 운다.

인민군은 3일 만에 서울로 들이닥쳤다. 정치인들은 국민을 버리고 달아났다. 우리 가족은 북한에선 숙청 대상인 지주였고 남한에서는 대한민국 국군의 가족이었다. 잡히면 즉시 총살감이라는 불안 속에 떨었다.

인민군이 들어온 지 며칠 뒤 나는 한강 근처에서 셔츠 바람으로 잡혀가던 미군을 봤다. 그 때 본 미군의 처참했던 얼굴을 6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한국전쟁에서 숨진 미군이 5만4000여명이라고 한다. 미국으로 돌아가 자살한 군인은 전쟁터에서 죽은 군인보다 많다고 한다. 남북한 인명 피해도 각각 100만 명이 넘는다. 큰오빠도 그 중 한 명이다. 전쟁은 너무나 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밤에 몰래 큰오빠의 군복을 태웠다. 군인 가족이라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조마조마한 삶을 살았다. 우리는 판잣집의 앞문과 뒷문을 죄 열어놓고 잠을 잤다. 언제라도 도망갈 수 있도록 준비해야 했다. 그러다 이번에는 작은오빠가 인민군에게 잡혀갔다.

정리=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