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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진숙 <2> 아버지 폭력 견뎌낸 어머니… 여성신학 공부 계기 돼

열려라 에바다 2017. 5. 30. 07:51

[역경의 열매] 김진숙 <2> 아버지 폭력 견뎌낸 어머니… 여성신학 공부 계기 돼

오빠 결혼식날 잔칫상 부순 폭군 아버지… 어머니 “공부해 당당한 여성 돼라” 격려

 

[역경의 열매] 김진숙 <2> 아버지 폭력 견뎌낸 어머니… 여성신학 공부 계기 돼 기사의 사진
내 어머니 박효숙 권사. 평생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렸던 어머니는 내게 종종 “공부 많이 해서 절대로 학대 받지 않는 자신 있는 여성이 돼라”고 당부했다.

나는 1935년 7월 26일(음력) 함경남도 함흥시 성청정 3정목 95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들 세 명 뒤에 내가 태어나니 할머니는 “고것 잘했다”고 좋아하셨다고 한다. 오빠 중 한 명은 내가 태어나기 전 세상을 떠났다. 동네 최고 부잣집에 태어나서 먹고 입는 것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10살까지였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지만 어린 시절은 끔찍했다. 아버지의 무자비한 폭력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그게 날 슬프게 했다. 불행했던 어머니는 신경성 속병을 앓았는데 나 역시 그런 어머니 뱃속에서 나고 자라서 그런지 어려서부터 소화불량과 각종 질병에 시달렸다.

아버지는 미남은 아니지만 보통 키에 피부가 희고 말씀이 적었다. 어머니와 결혼하고도 기생집을 드나들었다. 장남이 태어났는데 다른 여자와 살았다. 지금도 아버지의 폭력적인 모습이 선하다. 간혹 집에 오면 오빠들의 성적표를 조사했다. 성적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회초리를 들었다.

그러다 한 번은 어머니까지 때리기 시작했다. 집에서 애들 공부도 봐주지 않고 뭐했냐는 것이다. 어머니를 때리다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어머니의 머리채를 잡아 부엌으로 질질 끌고 가서는 아궁이에 집어넣으려고 했다. 자식들이 모두 울고불고 매달려 아버지를 말렸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리고 심장이 멎을 것만 같다.

아버지는 그토록 난폭했다. 아버지가 집에 오는 날은 지옥이었고 우리끼리 있는 날은 천국이었다. 아버지는 큰 오빠가 장가가는 날에도 난리를 쳤다. 사돈댁 손님들이 다 자고 있는데 잔칫상을 부수면서 난동을 부렸다. 너무 겁이 나 앞집으로 도망쳤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길에서 아버지와 비슷한 사람을 본 적이 있는데 소름이 돋을 정도로 끔찍했다. 지금 이 나이가 되어서도 아버지를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니 미안하고 서글프다.

어머니는 머리가 명석한 분이었다. 학교를 다니지 못했지만 어깨 너머로 한글을 깨우쳤다. 밤에 내가 공부할 때 말없이 곁에서 바느질을 하셨다. 이따금 “어머니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으면 “네가 한다면 하겠지비”라고 하셨다. 어머니의 믿음은 내가 학업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힘이 됐다.

어머니는 젊어 함흥에 살 때 교회에 다니셨다고 한다. 훗날 내가 예수를 믿고 어머니를 다시 교회로 인도했다. 어머니는 서울 오장동에 있는 제일장로교회에 오래 출석했다. 어머니는 내게 여성신학의 토대를 물려주셨다. 어머니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며 ‘왜 여자는 이런 불이익을 당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품으며 자랐다. 어릴 적 자주 아픈 나를 몇 시간이고 업어 달래던 어머니의 따스한 등을 기억한다. 지금도 어머니 등과 하나님의 위로를 생각하면 감사의 눈물이 흐른다.

1945년 해방을 맞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북한에는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섰다. 일본 기미가요를 부르다 김일성 찬양가를 불러야 했다. 소련 군인들이 들어왔다. 그들의 팔에는 시계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동네 유지였던 아버지 친구 몇 명이 맞아 죽었다거나 여자들이 소련군인들에게 겁탈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상황이 갈수록 험악해졌다.

정리=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