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역경의 열매] 김진숙 <1> “나의 고난은 홈리스 섬기라는 주님 뜻”

열려라 에바다 2017. 5. 29. 07:51

[역경의 열매] 김진숙 <1> “나의 고난은 홈리스 섬기라는 주님 뜻”

질곡의 역사 속에서 숱한 아픔 기적처럼 고비마다 용기와 희망 주셔

 

[역경의 열매] 김진숙 <1> “나의 고난은 홈리스 섬기라는 주님 뜻” 기사의 사진
미국 홈리스들의 대모(代母)로 불리는 김진숙 목사가 지난 3일 서울 도곡로 롯데백화점 앞 거리에서 두 손을 모은 채 환하게 웃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나는 미국 워싱턴 주 시애틀에서 홈리스 사역을 하는 한인교포이자 미국장로교 은퇴 목사다. 홈리스 사역에 나설 때마다 ‘홈리스 근절(END HOMELESSNESS)’이라고 적힌 보라색 옷을 입고 다녀서 여기서는 ‘보랏빛 목사’로 불리곤 한다.

내가 보라색 옷을 입는 이유는 그것이 사순절의 색깔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기까지 십자가의 고난을 함께 슬퍼하고, 홈리스를 향한 우리의 무관심과 죄를 회개하며, 나아가 그들을 섬김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명을 다하겠다는 뜻이다.

나는 아픔이 많은 사람이다. 내 삶은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다. 인생 첫 10년은 이북에서, 24년은 남한에서, 이후 47년은 미국에서 살았다. 돌이켜보면 여든두 살이 된 지금 두 발을 땅에 딛고 선 채 마음껏 숨을 들이마실 수 있는 것조차 하나님의 기적이라 생각될 정도로 거친 세월이었다. 국제정세로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피난 생활, 미국 이민 등의 기나긴 터널을 헤쳐 왔다. 질곡의 역사 속에서 개인적으로 숱한 아픔이 있었다.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어린 날 목격한 아버지의 폭력은 평생 악몽이 됐다. 열한 살 때에는 공산당을 피해 오라버니 손을 잡고 산속을 헤맸다. 월남한 이후에는 전쟁의 공포와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다. 학교 다니면서는 남존여비의 구습에 맞서야 했다. 몸도 약했다. 다섯 살 때부터 천식을 앓아 지금까지 11번이나 수술대에 올랐다. 6·25전쟁 때에는 아버지 역할을 하던 큰오빠를 잃었다. 미국으로 건너가 장남을 잃고는 하나님께 ‘제발 절 죽여 주세요’라며 매달렸다. 그렇게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이 이어졌다.

그래도 난 살았다. 하나님이 고비 때마다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셨다. 때론 함께 울어주셨다. 결국 하나님과의 싸움에서 KO 당했고 지금껏 하나님 등에 업혀 살고 있다. 역경을 견디니 기적처럼 인생 곳곳에서 열매가 송골송골 맺혔다. 내 몸 하나 살기 위해 흘렸던 눈물은 이제 미국 전역을 누비며 홈리스를 살리려는 눈물이 됐다. 하나님께서 날 업었다 여기저기 내려놓으셨는데 그곳마다 천신만고의 생을 사는 미국 홈리스들이 있었다.

때때로 내 인생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느낄 때면 그 경이로움에 나 스스로도 놀란다. 고통으로 점철됐던 내 인생을 주님이 함께 아파하신 것처럼 나는 지금 홈리스들의 아픔을 나누고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했으니 내 인생이 결국 보랏빛 인생인 셈이다.

누가 나 같은 이름 없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까 의심스럽다. 소름 돋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기억을 글로 옮기려니 끔찍한 기분도 든다. 하지만 나처럼 아픈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용기와 위로를 줄 수 있다면 의미가 있겠다 싶어 용기를 냈다. 그것이 ‘하늘 보다 높고 바다 보다 깊어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닷물을 먹물삼아 기록해도 못 다 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일이라 믿고 글을 시작하려 한다.

정리=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 사진=강민석 선임기자

약력=△함남 함흥 출생(1935년) △1946년 월남 △이화여고 △한국신학대 신학사 △미 풀러신학대학 석사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 목회학 박사 △워싱턴주 홈리스 문제 고문위원 △시애틀 둥지선교회 개척 △김진숙홈리스교육재단 설립 △미국장로교 ‘믿음의 여성상’·‘홈리스 영웅상’ △이화여고 ‘이화를 빛낸 인물’ △대한민국 국민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