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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경식 <6> 출판사 임시 외판원… 목사님이 사줄 때까지 찾아가

열려라 에바다 2017. 7. 10. 07:48

[역경의 열매] 김경식 <6> 출판사 임시 외판원… 목사님이 사줄 때까지 찾아가

계단에서 떨어져 다리 골절 등 고난… 옥한흠·김삼환 목사님 등 만나 용기

 

[역경의 열매] 김경식 <6> 출판사 임시 외판원… 목사님이 사줄 때까지 찾아가 기사의 사진
김경식 목사(가운데)와 임마누엘집 식구들이 1986년 서울 거여동으로 거처를 옮긴 뒤 기념사진을 찍었다. 임마누엘집 제공

출판사에 입사해 책을 팔러 다녔다. 당시 나는 정식 사원으로 입사한 게 아니었다. 임시직이었다. 그래서 활동비는 없었다. 정사원은 교통비 1000원에 식사비 1000원을 받으며 세일을 다녔지만 나는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다녔다.

주로 교회를 찾아다니며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한 건의 주문도 받아내지 못했다. 교회 세일은 담임목사님을 만나야 책을 홍보하고 판매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담임목사님 얼굴을 보기도 전에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포기하지 않았고 몇 번이고 다시 찾았다. 규모가 큰 교회는 사찰 집사들이 뛰어나왔다.

“아니, 방금 전에도 왔는데 왜 또 오는 거야. 그만 오라고.” 어느 날은 500원짜리 동전을 주면서 다시는 오지 말라 하기도 했다. 이런 수모를 겪을 때면 외판이고 선교 사업이고 뭐고 전부 그만두고 싶었다. 서러움이 북받쳐 길을 가다 말고 화장실에 들어가 울기도 많이 했다.

그렇게 외판 세일 4개월이 지났다. 실적은 바닥이었다. 회사에서는 장애인인 내가 얼마나 버티겠냐는 식으로 봤다. 사람들은 수군댔고 사장은 장애인이라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나는 약이 올라 이를 더 악물었다.

어느 여름 날, 땀은 비오듯 흘렀고 손바닥은 갈라졌다. 갈라진 손바닥 사이로 핏방울이 빨래 짜듯 나왔다. 서울 서대문의 한 교회에 갔는데 4층 계단을 오르다 그만 굴러 떨어졌다. 오른쪽 다리는 골절됐고 그날로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오른쪽 손바닥은 옹이가 박혀 마치 예수님의 못자국을 연상케 했다. 나는 그 자국을 보면서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했다.

당시 찾아갔던 교회는 무수히 많다. 기억나는 목사님은 4명이다. 사랑의교회에도 많이 찾아갔다. 나는 옥한흠 목사님이 책을 사줄 때까지 몇 번이고 갔다. 낮에는 만나기가 어려워 새벽기도 시간을 이용했다. 밤새 교회 문 앞에 앉아 기다리다가 만났다. 옥 목사님은 그런 나의 끈기를 봤고 결국 만나주셨다. 나를 무척 좋아했다. 새벽교회 이승영 목사님도 은인이다. 그는 책을 많이 구입해 주었고 동료 목회자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도 생각난다. 교회 초창기 시절 찾아갔는데 “내가 책 살 형편은 안 되고 라면이나 한 그릇 먹고 가라”고 하셨다. 김 목사님은 내가 라면에 밥을 말아 허겁지겁 먹는 걸 보더니 “어려우면 찾아와. 내가 도와줄게”라고 했다. 갈보리교회 박조준 목사님도 잊을 수 없는 분이다. 박 목사님은 나 때문에 교회에 장애인 부서를 만들었다. 이들 목사님은 긍휼함이 많았다.

나는 세일 방법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방문했던 교회나 사무실, 성도 가정에 편지를 써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전략은 적중했다. 실적이 오르기 시작해 당시 37명 외판사원 중 1등을 했다. 1985년 성과를 인정받아 영업과장으로 승진했다. 고난과 멸시, 천대 속에서 오직 믿음으로 인내하며 최선을 다했던 결과였다. 임마누엘집 식구들도 한마음으로 기뻐해 주었다.

사장은 나를 뷔페식당에 초대해 내 손을 잡으며 고맙다고 했다. 그는 내가 회사로 처음 찾아간 날 면전에서 “장애인 세일즈맨은 써본 일이 없다. 꺼져”라고 했던 장본인이었다. 세일 성공담이 알려지면서 다른 기독 출판사들은 나를 스카우트 하려고 야단들이었다. 그러나 회사를 떠나지 않았다. 더 열심히 일했다. 그동안 겪은 서러움을 봐란 듯 만회하고 싶었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