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역경의 열매] 조동진 <2>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로 체포된 아버지

열려라 에바다 2018. 5. 8. 08:05

[역경의 열매] 조동진 <2>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로 체포된 아버지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고문 당해… 아버지 친구들 모두 기독교 지도자

 

[역경의 열매] 조동진 <2>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로 체포된 아버지 기사의 사진
1925년 촬영된 조동진 목사 200일 기념 사진. 오른쪽은 부친 조상항 선생, 왼쪽은 모친 장송실 여사.

나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께 우리 민족의 교회에서 애국심과 민족 운동이 어떻게 함께 얽혀져 왔는가를 들어왔다. 아버지는 때때로 초대 교회는 주일마다 십자가 깃발과 태극기를 교회 지붕에 휘날렸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훗날 내가 선교학을 전공하면서 이 같은 아버지 말씀은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미년 3월 1일 독립선언은 기독교인들이 주도하다시피 했다. 일본 군벌은 만세운동이 기독교 지도자들과 기독교 학교, 교회 신자들을 중심으로 확산되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그들은 민족 교회 지도자들을 탄압하면서 한편으로는 선교사들과 타협하는 이중적인 전략을 썼다. 그들의 전략은 먼저 중국 땅에서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었다. 중국에서의 독립운동과 교회 활동을 차단하기 위해 온갖 만행을 저지르면서, 나라 안에서는 소위 문화정책이라는 것을 실시했다. 일제는 독립운동을 정치운동으로 몰았다. 그리고 모든 문화 활동을 교회에서 분리시켰다.

나는 온 겨레가 일제의 민족 압살 음모에 시달릴 때인 1924년 12월 19일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부친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아버지는 망국의 한을 안고 일제 강점과 억압, 착취의 시대를 굳세게 싸우며 산 독립운동가셨다.

아버지 조상항은 14세 의주 양실학교 시절, 태극기와 일장기를 동시에 들고 평안도를 순례하던 이토 히로부미와 대한제국 황제 융희를 환영하라는 명령을 거부해 구타와 함께 퇴학 처분을 받았다. 훗날 부친은 신민회 사건과 105인 사건의 학생 주모자 중 한 명으로 지목돼 체포됐다. 1910년엔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 혐의로 또다시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과 신문을 당했다.

아버지의 친구들은 모두 한국 기독교의 초대 지도자들이었다. 백낙준 박사는 부친과 선천 신성중학교 동기였고 박형룡 박사는 같은 학교 2년 후배였다. 해방 후에도 끝까지 북한에 남아 의산노회에서 교회를 지키다가 순교한 홍하순 목사도 아버지와 신성중 동기동창이었다. 부친은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을 꿈꿨다. 출옥 후 교회를 중심으로 민족학교 설립을 원했다. 그러나 일제가 이를 쉽게 허락할 리 없었다. 1924년 일제가 설립한 양광 공립 보통학교로 유배나 다름없는 발령을 받았다. 압록강변의 독립군과 만나지도 못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100일도 채 지나지 않아 전북 부안으로 다시 유배 같은 발령을 받았다. 어처구니없게도 과수원 지배인 자리였다.

해방이 될 때까지 아버지는 뜨내기처럼 전국을 떠돌았다고 한다. 나는 보통학교를 4번이나 옮겨다녔다. 명문 고등학교로 진학하고 싶었으나 독립운동 전력이 있는 사람의 아들에게는 길이 열리지 않았다. 결국 일본인 학교인 광주상업학교를 졸업하고 한때 은행원으로 일했다.

아버지는 해방 후 조국의 영구 분단을 막아보려고 독립 촉성과 통일운동의 선두에 섰다가 억울한 누명까지 쓰기도 했다. 그 후 정치운동에서 손을 떼고 하나님의 일꾼을 길러 조국의 먼 장래에 대비하는 일로 여생을 마치셨다. 어린 시절 민족의 가락, ‘아리랑’의 뜻을 풀어 일러주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아버지는 밤마다 드리던 가족예배에서 나라 위한 기도를 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그 기도가 너무 길게 느껴져 어머니 무릎에 엎드려 잠들기 일쑤였다. 철없던 시절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