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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선도 <14> 군함 얻어 타고 가던 제주 전도 여행길에 풍랑

열려라 에바다 2018. 8. 23. 08:00

[역경의 열매] 김선도 <14> 군함 얻어 타고 가던 제주 전도 여행길에 풍랑

감신대 전도대와 전국서 노방전도… 뱃길에 닥친 위기 “살려달라” 기도

 

[역경의 열매] 김선도 <14> 군함 얻어 타고 가던 제주 전도 여행길에 풍랑 기사의 사진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오른쪽)가 1957년 감신대 재학 시절 충남 서산에서 전도대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감리교신학대에서의 신학 공부는 일종의 ‘수용 과정’이었다. 가장 먼저 수용한 존 웨슬리 신학은 상아탑에서 고안된 사변적 신학이 아니라 전도 현장에서 건져 올린 싱싱한 실천적 신학이었다.

처음엔 ‘선재적 은총’이 인간 주권을 강조해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키는 사상이라고 오해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웨슬리가 말하는 ‘선재적 은총’도 하나님의 주권이요 은혜였다. 선재적 은총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을 포기하지 않고 인간의 어둠 안에 한줄기 빛을 비추시는 은혜였다. 그 은혜로 죄를 알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측은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을 얻게 된 것이다.

기도 모임에도 가입했다. 구본흥 조기현 김후근 도정인 목사 등과 방과 후 말씀을 나누고 토론하며 밤늦게 기도했다. 구호부터 ‘웨슬리처럼 되자’였다. 당시 우리는 순수한 20대였다. 서구 신학의 다양하고 진보적인 학문은 수용하되, 우리의 경건함을 상실할 수 없다는 의지를 가진 청년들이었다.

당시 박대인 교수와 오명걸 선교사가 이끄는 감신대 전도대는 전국 각지에서 복음운동을 펼쳤다. 방학이나 주말이 되면 큰 장터를 찾아다니며 전도하고 개척교회 설립을 도왔다. 주로 나팔과 북, 아코디언을 이용한 노방전도였다.

나는 열차 안에서 아코디언을 켰고 동료들은 찬송을 불렀다. 그러면 술을 마시고 담배 피우던 사람, 계란 까먹던 사람들이 일제히 쳐다봤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외쳤다. “예수를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으십시오.” 그렇게 외쳐도 말리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그저 묵묵히 바라보거나 믿겠다고 다가왔다. 그러면 우리는 그 사람을 붙잡고 축복기도를 해줬다. 전도를 나갈 때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감격이 있었다.

가장 잊을 수 없는 건 만나교회를 개척한 고 김우영 목사 등과 함께한 제주 전도여행이었다. 부산에 도착하니 마침 해군 군함이 제주도로 가기 위해 출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제주도에 전도하러 가는데, 좀 타고 갈 수 없겠습니까.” “오케이.” 기다렸다는 것처럼 승선이 허락됐다. ‘세상에 해군 군함을 타고 제주도 전도를 가다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얼마나 갔을까. 해군들이 먹는 보리밥과 된장에 고추를 찍어 먹고 기분 좋게 찬양했다. 그런데 갑자기 검은 구름이 온 하늘을 덮더니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풍랑이 어찌나 거세던지 배가 곧 뒤집어질 것 같았다. 우리는 갑판 아래 침실에서 뒹굴며 먹은 것을 다 토해냈다. 머리로만 알던 풍랑과 실제 체험한 풍랑의 차이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이러다 정말 죽겠구나.’ 게네사렛 호수를 건너다 풍랑을 만나 두려워하던 제자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주님만 바라보며 절대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자기 확신’은 무참히 깨졌다. 거의 절반은 죽은 상태가 돼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전도고 영혼 구원이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하나님, 이 풍랑에서 건져 주십시오. 제발 살려 주십시오.” 그때 이런 궁금증이 생겼다. ‘함장은 이런 풍랑을 경험해 봤을까. 우리가 살아날 수 있을까.’ 한번 물어보고 싶었다. 함장의 입을 통해 이까짓 풍랑은 아무것도 아니며 무사히 살 수 있다는 희망의 말을 듣고 싶었다.

몸을 일으켜 겨우 갑판 위로 올라갔다. 거의 기다시피 해서 간신히 함장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