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역경의 열매] 김선도 <12> 미군 교회 군목 도움 받아 1년 만에 예배당 건축

열려라 에바다 2018. 8. 21. 08:27

[역경의 열매] 김선도 <12> 미군 교회 군목 도움 받아 1년 만에 예배당 건축

내친김에 목사님 사택까지 지어…당시 건축 도운 美 사병 훗날 목사

 

[역경의 열매] 김선도 <12> 미군 교회 군목 도움 받아 1년 만에 예배당 건축 기사의 사진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오른쪽)가 경기도 의정부 캐나다야전병원 근무 시절 캐나다 군의관과 함께했다.

“어떻게요. 안 그래도 온 나라가 전쟁복구로 난리인데 어디서 교회건축에 필요한 자재를 구한다는 말입니까.” “목사님, 해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한번 뛰어 보겠습니다.”

순식간에 가슴에서 치고 올라온 말이었다. 그렇다고 무슨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중공군과의 전쟁에서 살아남아 내 내면의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한 후부터 내 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산 광복동에서 계하영 아저씨를 만났을 때도, 군산역에 내린 내 발걸음이 선양동을 향한 것도…. 그때는 막연하게 느껴졌던 목소리가 나를 이끌지 않았던가. 지금도 그 목소리가 이끄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교회건축을 선언한 뒤 밤이고 새벽이고 교회를 찾아 기도했다. 66㎡(20평) 남짓한 천막교회 바닥에는 비닐이 깔려 있었다. 엎드릴 때마다 특유의 화학물질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나님, 우리 교회 건축을 허락해 주십시오. 교회를 건축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십시오.” 그때 불현듯 머릿속에 캐나다 야전병원에서 만난 미군교회 군목이 떠올랐다. 이튿날 그 군목을 찾아갔다.

“목사님, 부탁이 있어 왔습니다.” “오우, 닥터 김.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제가 의정부에 있는 천막교회에 다니는데 건축을 하려 합니다. 그런데 재정도, 자재도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도와주겠지’ 하는 마음에 있는 그대로 형편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미군 부대 교회와 군목들의 힘을 빌려 봅시다. 부대에 자재가 많으니까 충분히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미 군목의 도움으로 자재를 얻게 됐다. 미군용 트럭이 천막교회에 수없이 들락날락하더니 자재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더욱 감사한 건 그 자재들이 미군용 자재에서 덜어낸 게 아니라 본래 한국에 나눠 주기로 했던 비축용 자재였다는 점이었다. 정당하게 이뤄진 지원이었다.

그때 교회건축을 도운 미군 사병 중 한 명은 훗날 미국 오클라호마에서 감리교 목사가 됐다. 50여년이 흘러 오클라호마에 참전용사들의 기념비를 세우는 행사에 참석했을 때 그를 만났다. 그 아들도 대를 이어 감리교 목사를 하고 있었다.

건축이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최요한 목사님의 설교는 점점 더 확신이 차올랐다. “구하라 그리하면 얻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릴 것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리라’는 말씀이 강단에서 쏟아졌다.

‘말씀이 현실이 되고 믿음이 성취되는 게 이런 거구나. 아무것도 없는 천막교회가 빈손으로 일을 이렇게 성취할 수 있구나.’ 최 목사님을 비롯해 천막교회 성도 40명의 마음이 똘똘 뭉치는 것을 보았다.

예배당은 불과 1년 만에 세워졌다. 그런데도 남은 자재가 차고 넘쳤다. “이젠 목사님 사택을 지읍시다.” “그럽시다.” 그러고는 사택을 2개월 만에 뚝딱 지었다.

이번에도 누군가 한마디 했다. “이번 건축의 공신이 김 권사님인데, 권사님 사택도 지읍시다.” “그럽시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순간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이건 아닌 것 같았다. “안 됩니다. 저는 그러면 교회 못 다닙니다. 이미 저와 우리 가족은 신설동에 살고 있습니다. 제발 그런 말씀은 말아 주십시오.”

그때 내가 거절하지 않았다면 다윗에게 무너지지 않을 영원한 집을 지어 주시겠다던 하나님의 축복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광림교회라는 하나님의 성전 봉헌도 말이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