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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선도 <10> “너희 가족 다 군산에 피난 와 있다” 꿈같은 소식

열려라 에바다 2018. 8. 17. 07:45

[역경의 열매] 김선도 <10> “너희 가족 다 군산에 피난 와 있다” 꿈같은 소식

부산서 아버지 의형제에게 들어, 단숨에 군산으로… 동생과 극적 조우

 

[역경의 열매] 김선도 <10> “너희 가족 다 군산에 피난 와 있다” 꿈같은 소식 기사의 사진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가 가족을 찾기 위해 도착한 부산과 전북 군산은 피난민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6·25 전쟁 당시 피난민들 모습. 국가기록원 제공

정든 상리장로교회 교인들과 시골 학교 교사, 학생들과 아쉬운 작별을 할 시간이 됐다. 예고된 이별이었다. 주민들은 이미 내가 떠날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부산에 내려가겠습니다. 그곳에 피난민을 위한 임시수용소도 있다고 하니 거기 내려가서 가족을 찾아봐야겠습니다. 의사가 되는 과정을 밟으려 해도 부산에 내려가야 한다고 하니, 제가 갈 곳은 부산인 것 같습니다.”

차를 얻어 타고 부산 광복동으로 향했다.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일 정도였다. 설령 내 가족 중 누군가가 이곳에 있다고 해도 인파에 가려 보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여기저기 음식점이 많았다. 돼지국밥집, 밀면집, 오뎅(어묵)집. 어머니가 해 주셨던 음식이 생각났다. 겨울 밤참으로 해 주셨던 차가운 냉면, 김치와 두부랑 잘게 썰어 내 주셨던 동치미 국물, 순대국밥….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어머니가 더욱 그리웠다. ‘어머니 아버지, 도대체 어디에 계신 건가요.’

피난민 수용소를 향해 발걸음을 향했다. 그때였다.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그 많은 사람 사이에서 갑자기 낯익은 얼굴 하나가 불쑥 나타난 것이다.

“삼촌!” 반가움이란 이런 것인가. 전혀 예상치 못한 분을 그 많은 사람 틈에서 만나게 됐다. 신문기자 출신으로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으신 계하영씨였다. 나는 그분을 삼촌이라 부르며 잘 따랐다.

“이야. 너, 선도 아니네. 너 고저 살아 있었구나.” “예, 삼촌.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어디 계십니까.” “군산에 있지.” “군산이요? 군산이 어딘데요.” “전라도 군산. 고저 너희 가족들은 다 거기 피난 내려와 있으니 걱정 말라우. 부모님과 네 동생들 다 살아 있지.”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얘기를 듣자마자 한달음에 군산으로 향했다. 의사 자격시험은 나중 일이었다. 그냥 달렸다.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물었다. “군산이 어딘가요.” 트럭을 얻어 타고 기차도 타고 군산역에 도착했다. 내리자마자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주님, 저희 가족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군산을 전혀 모릅니다. 지금부터 제 걸음을 주님께서 친히 인도해 주시옵소서.’

그냥 걸었다. 발길이 닿는 대로 정처 없이 군산 이곳저곳을 걸었다. 피난민 수용소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가족들이 거기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야말로 바닷가 모래밭에서 바늘을 찾는 심정이었다. 군산에 가족이 있다는 정보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선양동이라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낡은 초가집과 초라한 건물이 들어찬 판자촌이었다. 약간 굽이진 언덕길이 보였다. 사람들이 쉬어 갈 만한 비탈길에 판자를 늘어놓고 장사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순간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오고 가는 사람들 틈에 내가 너무도 잘 아는 얼굴이 보였다. 홍도였다. 내 동생 김홍도! 그 언덕길에 마치 나와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기다린 것처럼 동생이 앉아 있었다. 판자에 초콜릿, 양담배 같은 것들을 늘어놓고 앉아 장사를 하고 있었다.

“야, 너 홍도 아니냐.” 순간 동생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동생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동생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입을 뗐다. “형님!” 동생과 나는 부둥켜안았다. “홍도야, 울지 마라.”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