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 달라고 본능적으로 내뱉은 기도였지만 죽음에 직면한 충격은 나의 가치관과 이성을 새롭게 변화시켰다. 그때 내가 관념적으로 알고 있던 생과 사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내 나이 스물두 살이었다. 나는 죽음이라는 종착역이 정해진 길에서 숨 가쁘게 달려가는 생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전쟁의 한복판에서 깨달았다. 이 각성 앞에서 내가 믿던 예수 그리스도의 틀이 바뀌었다. 도그마처럼 굳어 있던 교리적 신앙의 관념이 죽어 나갔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내 속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되었다. 그때 나는 이렇게 외쳤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더 이상 나의 무지의 구름 뒤에 계시는 모호한 추상이 아니다. 그분은 구체성이며 나의 현실을 때리시는 분이다. 나의 고정관념을 해체시키시는 분이며 내 존재의 집을 새로 지으시는 분이다. 나는 내가 생각한 관념의 틀에서 스스로에게 종말을 고했다. 1951년 1월 4일 김선도, 너는 죽었다. 죽은 것이다. 내 생각의 틀에 매장됐던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했다. 그리고 나도 그분과 함께 새롭게 거듭났다. 이제 펼쳐질 나의 생애는 덤으로 주어진 인생이다. 이제 ‘절대 예수, 오직 예수’를 붙잡고 살 것이다. 죽을 영혼을 살리는 영혼이 돼 살아갈 것이다.”
1953년 가을이었다. 나는 엄밀히 따지면 군인이 아닌 상태에서 참전한 임시 군의관 신분이었기 때문에 휴전 후 군에서 나와야했다. ‘하나님, 이제 저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정말 갈 곳이 없었다. 막막했다. 가족을 찾아야 한다는 초조감도 고개를 들었다. ‘부모님과 형제들은 월남했을 것이다. 분명 남한 땅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이다.’
남한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낯선 땅이었다. 아는 사람도 없고 아는 곳도 없는 땅.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지 분명하게 소명을 받았으나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대답하지 못하는 나그네의 삶이 시작됐다.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장씨 성을 가진 소위가 그때 내게 다가왔다. “김선도, 혹시 경남 고성에 같이 가지 않을래. 내 고향이야.”
군에서 치료해 준 일을 계기로 친해진 그가 딱한 내 처지를 알고 손을 건넨 것이다. “그럴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무엇이 다가오든 그것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래, 지금부터 내게 다가오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섭리다. 내게 다가오는 섭리를 적극적으로 맞이하겠어. 또 뭔가 기다리고 있겠지.’
장 소위와 함께 낡은 트럭과 기차를 갈아타고 걷기도 하면서 고성으로 내려갔다. 그때 낯선 남한 땅을 처음으로 봤다. 군데군데 전쟁의 참화가 쓸고 간 폐허들이 보였다. 무너지고 초토화된 집과 건물들이 대다수였다.
그 사이로 사람들의 얼굴도 보였다. 여전히 밭을 일구는 사람들, 냇가에서 뛰노는 아이들, 소들이 풀을 뜯고 있고 개가 툇마루에 앉아 졸고 있었다. 묘한 감정이 일어났다. 얼마 전까지 내가 겪은 끔찍한 체험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드디어 고성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나는 3가지 문제를 놓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뭘 해야 하나. 목사가 되고자 했으니 바로 목사가 돼야 하나, 일단 남한 의사 자격증부터 따야 하나. 어떻게 하면 잃어버린 가족을 찾을 수 있을까.’ 일단 뭘 해야 할지 찾기 위해 교회부터 나갔다. 상리장로교회였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역경의 열매] 김선도 <8> 휴전 후 나그네 되어 낯선 땅 남한 고성으로
치료해 준 소위가 자기 고향으로 인도… 무엇을 해야 할지 찾기 위해 교회 나가
1953년 7월 휴전협정 체결 때 한국측 대표였던 최덕신 육군 소장(가운데)이 휴전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다.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는 그해 경남 고성으로 내려왔다. 국가기록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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