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그 영광과 오욕의 역사
▶ 카톨릭 선교 이전 기독교와의 접촉 가능성
경교의 당나라 전파 - ‘광명의 종교’란 의미의 경교(景敎)라 부름 - 왕실의 보호속에 200년간 선교의 영역을 넓히다가 9세기 중엽 열렬한 도교 신자였던 무종이 등극하면서 외래 종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 - 경교의 역사도 종말을 맞기 시작 - 당나라와의 잦은 교류 과정에서 경교의 신라 유입의 가능성을 추측하기도 함 - 유입의 몇 가지 증거로 1956년 불국사 경내에서 발견된 돌십자가, 마리아의 모습을 닮았다는 관음상, 해남 대흥사에 있는 동십자가 등을 들기도 한다.
◎ 경교
431년 에베소에서 열린 제3차 전교회회의에서 당시의 동로마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가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어머니(Christotokos)’라 불러야 된다고 주장 - 이단으로 정죄받음 - 당시 대부분의 교회는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로 인정하고 부르고 있었음 - 알렉산드리아 감독 씨릴이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했다’며 문제를 제기 - 당시 정통적인 기독교도들은 예수님이 신성과 인성을 온전히 갖춘 분이라는 신인일체사상을을 가지고 있었으나 네스토리우스는 신성과 인성의 실체적인 결합보다는 외형적인 결합으로 보면서 예수님을 두 가지 인격을 가진 존재로 보았다 - 추방된 이후 피난처를 찾아 각지에 흩어져 수도원을 세우고 선교사들을 파송 - 로마와 페르시아의 관계가 악화된 이후 페르시아의 지배 하에 있던 영토안에서는 그 지역 산물인 네스토리우스주의를 채택함 - 중국에 도착한 것이 주후 635년의 일 - 당나라 태종 9년 - 781년 경정은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에 ‘대진경교유행중국비’ 건립 - 대진은 로마를 가리키며, 로마의 기독교(경교)가 중국에 유행한 것을 기념하는 비라는 뜻.
◎ 임진왜란과 천주교회
예수회 선교사 사비에르의 일본 선교 - 통치자였던 직전신장의 관대한 종교정책으로 크게 확장 - 그의 휘하 장군 중 소서행장이 아우구스티노라는 영세명을 가진 카톨릭 신자였고 부산에 상륙한 일본 군인 중 10% 가량이 카톨릭 신자였을 정도 - 소서행장의 거느렸던 18,000명의 부대는 천주교부대로 알려짐 - 부대는 소서행장의 요청에 종군 신부로 세스페데스가 조선에 옴 - 한국에서의 전도 기록은 없으나 당시 노예로 일본에 끌려간 5 만명이 넘는 한국 사람들을 전비 조달을 위해 일본은 노예상인들에게 팔아 넘겼는데, 세스페데스가 이 일을 적극적으로 저지하고자 하였고, 한국어로 교리서를 번역하고, 교리를 가르쳐 2천명의 기독교 신자를 배출하게 됨 - 이들 중 상당수가 천주교 박해시 순교를 당함.
◎ 중국에서 소현세자의 천주교 접촉
만주 여진족의 추장 누루하치가 1616년 후금을 세운 후, 1636년 국호를 청이라 칭하고 조선을 침략(인조14년) - 삼전도에서 치욕스러운 조약을 맺음 - 조선은 청나라의 종자가 되어 조공을 바치고, 명나라와 단교하겠다는 내용 - 정복의 상징으로 소현세자를 비롯한 충신들을 포로로 잡아감 - 거기서 독일인 예수회 신부 아담 샬을 소현세자가 만남 - 전통적으로 ‘위에서 아래로’의 선교전략을 가진 천주교의 입장에서 앞으로 조선의 왕이 될 소현세자의 전도는 큰 사건이었음 - 소현세자가 조선으로 돌아갈 때 신앙이 돈독한 환관5명과 궁녀 몇을 황제가 하사하는 형식으로 달려 보냈으나 귀국한지 70일만에 학질로 34세에 임종 - 세자 죽음이 중국에서 가져 온 비단 때문이라는 소문으로 그가 가져온 서적이나 물품들이 모두 소각되고 달려 온 사람들도 본국으로 소환됨.
◎ 유학자들의 서학 접촉
기호 지방의 권력에서 소외된 남인 계열의 소장 지식인들 중 권철신, 권일신, 정약용, 정약전, 이가환, 이벽, 이승훈등을 중심으로 과학 서적과 서구에 대한 학문을 연구하던 것이 계기가 되어 천주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함 - 이들이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당시로는 혁명적 행위였는데, 유교의 철저한 계급을 거부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성을 강조하고, 천주를 모든 것보다 최상의 위치에 두는 것은 절대왕권을 상대화하는 혁명적 사상이었음.
▶ 한국 천주교회의 창시와 수난의 역사
◎ 이승훈의 영세
영세는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며, 7성례의 시작.
이승훈은 중국에 파견된 동지사 일행으로 함께 가 1784년 2월에 예수회 소속 그라몽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아 한국인 최초의 수세자가 됨 - 영세명은 베드로였고, 그의 나이 27세 - 국외에서 신부를 찾아가 신앙을 고백하고 영세를 받는 케이스 - 1784년은 개신교 전도가 시작된 1884년보다 100년전의 일.
◎ 초기 천주교의 태동과 가(假)성직시대, 그리고 배교의 역사
이벽은 이승훈에게서 영세를 받고 그를 신부로 하여 명동의 김범우의 집에서 예배를 드림 - 1787년에 서품받지 않은 평신도가 성례를 집행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북경에 신부를 보내달라고 요구하게 됨 - 최초로 1795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입국하였고, 그 이전에는 사제 없이 계속 비밀예배모임을 가짐 - 비밀예배모임을 갖던 중 관가에 적발 - 양반자제들은 훈방하여 방면하고, 중인인 김범우는 단양에 유배를 보냄 - 고문 후유증으로 그곳에서 1787년 37세 때 임종 - 조선 최초의 천주교 순교자 - 이 사건을 을사추조적발사건이라 함 - 이 사건 후 이승훈, 정약용, 이벽이 배교함 - 고문의 무서움과 난을 피해 은신하던 중 굶주림을 참지 못해 배교한 사례가 많음.
◎ 신해교난 - 무군부무(無君無父)의 종교로 오해받음
1785년 유하원이 상소를 올림 - 그 내용중 천주교는 ‘왕보다 교황에게 복종하라’는 것과 ‘무군무부의 종교’라는 비난이 담겨 있었음 - 이것을 입증하는 사건이 발생 - 1791년 전라도 진산에서 발생한 진산사건 - 윤지충, 권상연이 이 일로 처형당함.
▶ 기독교와 조상숭배문제
제사를 죽은 부모에 대한 단순한 효성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죽은 영혼을 신격화하는 종교적인 의식으로 볼 것이냐가 선교초기부터 제기되었던 문제.
기독교가 조선에 전래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어려움과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바로 조상제사문제.
존 로스 선교사는 1888년 런던 세계선교대회의 보고에서 ‘대원군은 만약 백성들에게 옛 조상숭배를 지키는 것을 허용한다면 3년 안에 전 한국이 기독교인이 될 것으로 믿었다’고 보고함 - 기독교를 반대한 일차적인 이유가 바로 전통적인 제사제도를 반대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는 내용.
◎ 천주교와 제사문제
천주교는 선교사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선의 유교적 지식인들에 의해 전래 - 지식층에 호소력이 있었고, 천주교의 가르침과 유교의 가르침이 상호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이해.
1601년 중국선교를 시작한 천주실의의 저자 마태오 리치는 조상숭배는 천주교의 본래 신앙과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이해 - 그러나 후에 중국 선교를 시작한 도미니칸 선교회나 프란시스코 선교회는 이단 행위로 규정하고 철저하게 반대 - 1715년 교황 클레멘트 11세가 ‘유교적 조상숭배는 성경의 교훈에 어긋나기 때문에 카톨릭 교회에서는 용납할 수 없다’는 금지령을 내림 - 1773년 교황 클레멘트 14세는 조상 제사를 인정한 예수회를 해산시키고 소속 선교사들에게 소환령을 내림 - 1790년 한국 천주교는 북경주교 알렉산더 고베아에게 조상제사 문제에 대한 자문에서 ’조상제사는 미신이므로 금해야 한다‘는 답을 들음 - 1791년 천주교도인 윤지충이 모친 상때 상례를 갖추지 않고, 친척인 권상연이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지한 일로 사문난적(유교사상을 어지럽힌 적)이라 하여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됨 - 조상제사를 거부하는 천주교는 반국가 이적 단체로 낙인 찍힘 - 유교사회를 근본적으로 위태롭게 만드는 반국가적 행위로 이해 - 1791년의 신해박해, 1801년(순조1년)의 신유박해 - 신유박해시, 주문모 신부도 순교, 100명 처형, 400명 유배 - 이 사건은 정조의 관대한 정책에 의해 급격히 성장한 천주교세에 대한 종교탄압이자, 노론등 집권보수 세력이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을 탄압하기 위한 권력다툼의 일환 - 천주교 전래 100년간 제사문제로 인한 순교자만 만 명에 이름 - 1791년의 사건으로 천주교인들은 참수형에 처한다는 것이 국법으로 인식됨 - 1936년 12월 8일 로마 교황청은 조상제사를 선조에게 효성을 표시하는 민간의식으로 선언하고, 신사참배도 단순한 국가의 예라고 선포 - 2차 세계대전시 일본과 동맹관계에 있던 이탈리아의 로마 교황청이 정치적인 이유로 신사참배와 제사문제를 허락한 것 - 오늘날 천주교는 11월 2일을 ’위령의 날‘로 정하여 전 세계가 죽은 자를 위해 미사를 올리고 있음 - 정월 초하루, 한식날, 추석등 전통적으로 조상제사를 드리는 날에 교회에서 죽은 자를 위한 미사를 올리고 있음 - 연옥설을 믿기에 죽은 자를 위한 기도나 미사를 허용.
◎ 개신교와 제사문제
개신교 초기 세례문답 가운데 첫 번째 문항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영들을 숭배하는 것과 높이는 것을 미워하시므로 조상의 영을 숭배하는 것을 따르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순종하겠습니다’였음 - 조상을 잘 섬겨야 후손이 잘된다는 민간 신앙이 조상제사의 저변에 깊이 뿌리내려져 있음을 간파했던 것 - 철저하게 반대입장을 견지 - 1904년 중국 개신교는 추도식으로 조상제사를 대치하기로 합의 - 한국에도 자연스럽게 정착됨 - 죽은 자를 위한 기도가 교리적으로 용납되지 않음 - 조상의 교훈을 기억하고 그들의 신앙과 경건한 삶의 모습을 추모하는 것은 신앙과 배치되지 않음.
◎ 황사영의 백서사건 - 선교방법론의 문제
비단에 쓰여졌기에 백서(帛書)라 부름 - 신유박해시 토굴에 피신하면서 편지를 씀 -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위해 서양의 무력과 청나라의 압력을 요구하는 편지를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려다 붙잡힘 - ‘비록 이 나라는 전멸한들 성교의 겉모양에 해로울 것이 없고’ - 물리적 힘을 기반으로 신앙의 자유를 확보하고자 하는 선교방법론 요구 - 1801년 대역모반의 죄로 죽임을 당함.
▶ 조선교구의 창설과 계속되는 박해
조선에 천주교회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교황청에 알려진 것이 1790년 10월 - 이전까지 북경주교의 관리하에 있던 조선교회는 1831년 9월 독자적인 교구로 확정케 됨 - 그러나 막상 신부 브루기에르가 들어올려고 하자 ‘서양인이 조선에 입국하면 틀림없이 박해와 재난이 일어날 것이므로 그의 입국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청의 신부 유방제의 말에 따라 브루기에르가 들어오려고 하자 조선 교회가 입국을 가로막아 자신들이 기다리던 신부를 스스로 거절한 사건이 발생함.
◎ 계속되는 박해
천주교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안동 김씨 세력에 맞서 풍양 조씨 세력이 부상 - 조씨의 요구에 따라 1839년 4월에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 반포 - 이것이 기해교난의 시작 - 이 박해로 신부와 수 많은 신도들이 죽자 정하상은 상재상서(재상에게 올리는 글)를 조정에 올림 - 최초의 호교문 - 황사영의 백서가 전교의 자유를 위해 국외의 물리적 힘에 호소하고 있었다면, 정하상의 상재상서는 자국 안에서 진리를 일깨움으로써 조정이 스스로 박해를 거두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음.
한국인 최초의 신부로 서품을 받은 자는 김대건(안드레) - 1821년 출생한 그는 16세때 모방 신부에 의해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떠남 - 근대 해외 유학의 효시 - 거기에 ‘조선신학교’가 세워짐 - 비록 외국에 설립된 것이지만 조선 최초의 신학교 - 1845년 신부 서품을 받음 - 조선교회가 창설된 지 60년만의 일 - 1846년 7월 25세의 나이로 순교 - 병오년에 일어났으므로 병오박해라 함.
1844년 철종이 왕으로 등극 - 철종은 천주교 박해로 목숨을 잃은 은언군의 손자 - 천주교에 대해 동정적인 안동 김씨 세력의 부상으로 1865년에는 신도가 2만 3천명으로 급증 - 그러나 철종이 자녀 없이 죽자, 생존을 위해 광인 행세를 하며 살아가던 흥선군의 아들이 고종으로 등극하게 되고, 나이 어린 고종을 대신해서 흥선군이 대원군이 되어 섭정을 하면서 천주교에 엄청난 탄압이 다시 시작됨 - 대원군의 부인 민씨는 매일 기도문을 암송하고, 고종이 등극하자 감사의 미사를 드려 달라고 베르뉘 주교에게 부탁할 정도로 천주교의 관심을 가졌음 - 고종의 유모 박씨도 마르다라는 영세명을 가진 열렬한 신도 - 이때 러시아 남진정책으로 괴로워하던 대원군을 남종삼이 만나 조,프,영 3국 동맹으로 러시아의 세력을 막자고 건의를 올림 - 시간이 흘러도 답변이 없고, 러시아의 세력의 위협도 점점 가시게 되고, 청에서 서양인을 살해하고 있다는 내용을 듣게 되자 대원군은 수구적 유학 계층과 함께 천주교 탄압의 길에 나서게 됨 - 1866년부터 1873년까지 적게는 8천, 많게는 2만명이 순교를 당함 - 제국주의 국가들의 강압적인 통상요구 압력등으로 인하여 신자들은 반역자, 조국을 배반한 자, 외국인 지지자로 몰려 추방, 재산몰수, 생매장까지 당하였음.
◎ 남연군 묘소 도굴 사건
대원군의 박해가 너무 심하자 대원군의 부친의 묘를 파내어 그곳에 있는 유골을 담보로 하여 대원군과 협상을 해 보자는 생각에 페롱 신부는 독일계 유대인 오페르트라는 상인에게 이 일을 부탁 - 왕실의 묘에 온갖 보물이 들어있다는 생각에 오페르트가 적극 동참 - 1868년의 이 일로 천주교는 또 한번 탄압을 받음 - 1871년 미국 극동함대 사령관 로저스가 군함을 끌고와 조선군과 교전후(신미양요),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 정책을 더욱 굳게 함.
◎ 천주교회의 한글 보급 공헌
각종 교리서를 한글로 번역, 출판 - 1906년 순 한글 신문인 경향신문(카톨릭 재단에서 창간하였닥 지금은 독립지가 됨) 발간 - 한글 번역등에 선구적 역할을 감당함으로 개신교 선교에 필수적인 성경번역과 각종 서적 출판에 기여함
1998년 말 현재 천주교회는 신도 3,804,094명으로 전체 국민의 8.2%, 성직자는 추기경 1인, 대주교 2인, 주교18명, 신부 2,800명, 남자 수도사 930명, 여자 수녀 7,209명이다.
▶ 개신교 선교 이전 서양문화와의 접촉
한국선교를 타진하는 흔적들은 16세기부터 끊임없이 역사속에 등장.
1627년 경주 앞바다에 표류해 입국한 벨트브레(박연) - 군사훈련을 받고 병자호란에 참전 - 전공을 인정받아 한국여인과 결혼하여 1남1녀까지 둠 - 최초의 귀화 서양인, 최초의 혼혈아 출생등의 기록을 가지고 있음 - 배의 난파로 표착하는 외국인들의 통역을 담당하는 통역관으로 일하며 조선에서 생활.
1653년 제주도에 표착한 헨드릭 하멜 - 군복무 수행 - 1666년 13년만에 하멜과 일행 8명이 여수를 떠나 나가사끼로 탈출 - 표류기를 저술 - 한국선교에 관심을 가진 많은 선교후보생들에게 유용한 한국입문서가 됨.
1816년 군함을 이끌고 조선의 서해안을 탐사하기 위해 입국한 영국 해군대령 머리 맥스웰과 바질 홀 - 본국으로 돌아간 후 한국을 유럽전역에 소개.
● 선교사 내한 이전의 개신교와의 접촉과 한국선교의 특징
▶ 한국개신교의 사상적 구분
1] 1930년 이전
한국교회를 주도한 중심세력은 선교사들.
만주 우장에서 한국선교를 위해 헌신하던 로스와 매킨타이어 선교사 - 의주청년들의 선교활동의 밑거름.
2] 1930-1960년
한국인들이 주도하는 교회로 리더쉽이 전환 - 1919년 이후 일제의 문화정책은 해외 유학을 장려하게 됨 - 해외 유학에서 돌아온 이들이 중심이 되어 1930년대의 한국교회의 리더쉽을 형성 - 박형룡[구 프린스턴의 메이천 밑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구 프린스톤의 변증학적 전통과 반현대주의 사상을 전수받음]의 정통주의, 김재준의 진보주의, 정경옥의 자유주의, 이용도의 신비주의,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등 다양한 신학조류가 등장하여 신학적 다양화의 시대로 접어듬 - 반선교사, 탈서구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 - 김교신의 성서조선처럼 우리의 기독교를 찾으려는 강한 욕구가 표면화되기 시작.
◎ 감리교
1930년대 이전 한국감리교회는 장로교의 영향, 부흥운동의 영향, 아펜젤러와 같은 복음주의적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복음주의 신앙이 대체로 지배하고 있었음 - 1934년 선교 50주년 기념으로 감리교에서 출판한 아빙돈 단권주석이 자유주의 분위기로의 전환을 알리는 신호탄 - ‘신앙은 보수, 신학은 자유’,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다’라는 두 모토 - 정경옥을 중심으로 이 세상 속에서의 문화적 책임을 강조하는 문화-자유주의의 경향으로 흐르기 시작.
한국의 전통종교인 유교와 기독교를 접목시키려 했던 최병헌의 교회의 토착화는 문화변혁이라는 감리교 신학사상의 중요한 원형을 형성.
◎ 장로교 진보주의
김재준 중심 - 카나다 선교회와 소수의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사상적인 맥을 계승.
1938년의 평양신학교 폐교와 1940년의 조선신학교 설립.
3] 1960년대 이후
교파를 초월해 토착화운동, 근본주의운동, 복음주의 운동이 한국교회를 주도함.
1962년 ‘복음의 토착화와 한국에서의 선교적 과제’라는 유동식 교수의 논문에서 시작된 토착화 논쟁은 1970년대 윤성범 교수의 성(誠)의신학(기독교와 유교의 진리체계를 접목시킨 신학), 서남동 교수와 안병무 교수의 민중신학과 감신의 변선환 교수의 종교다원주의를 거치면서 한국교회의 한 신학조류로 정착.
근본주의는 토착화 신학을 반기독교적 사상으로 정죄하고, 복음의 적용을 강조하며 사회적인 책임을 강조하는 복음주의 운동도 동시에 경계 - 반지성주의, 폐쇄주의, 반사회주의적인 성향, 교권주의, 반문화적 성격.
▶ 개신교 선교준비
한국선교는 복음을 수용할 준비가 이루어진 적기상태에서 시작됨 - 19세기 말엽 한국은 종교적으로 공백기 상태.
◎ 칼 구출라프 선교사
미국의 2차 대부흥운동, 유럽의 경건주의 부흥운동, 영국의 복음주의 부흥운동으로 19세기 중엽 유럽과 북미 나라들은 선교의 붐이 동시에 일어나 세계선교가 가속화됨 - 그러나 선교사들이 자국의 힘을 바탕으로 선교를 추진하고자 했던 것은 사실.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한 두 사람 - 1832년의 칼 구출라프 선교사, 1866년의 토마스 선교사.
한국에 처음 발을 디딘 개신교 선교사 구출라프는 충정도 호주만 앞 고대도에 도착하여 국왕에게 통상을 원한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냄 - 회신을 기다리면서 주민들에게 감자씨를 주며 파종법과 재배법을 가르쳐 줌 - 주기도문을 우리나라 말로 번역 - 1달 후 왕실로부터 조선은 중국황제의 허락 없이는 어떤 외국이나 외국인과 통상할 수 없다는 전갈을 받고 떠남.
◎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
1866년 미국상선 제너랄 셔먼호에 통역 겸 안내자로 승선하여 조선에 입국 - 당시 조선은 쇄국정책을 국책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외국과의 무역이 금지됨 - 셔먼호는 무역선이면서도 중무장을 하고 있었음 - 물러가라는 명을 어기고 내륙 깊숙이 침투함 - 셔먼호가 조사를 하려고 배에 오른 이현익을 억류하자 상호간에 접전이 벌어짐 - 불에 타 배가 전소되었고 토마스 선교사는 물로 뛰어 들어 헤엄쳐 뭍에까지 왔으나 병졸 박춘권에 의해 27세로 죽임을 당함 - 죽임을 당하면서 병졸 박춘권에게 한문성경을 건네주었고 박춘권은 이후 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어 안주교회 영수가 됨 - 토마스가 남긴 성경을 뜯어 벽지로 썼던 영문주사 박영식의 집은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넙다리골 예배당이 됨.
◎ 국내 정치 상황
1866년 셔먼호 사건이 발생하고나서 국내의 최고의 이슈는 개항 - 이 문제와 관련된 3가지 입장, 위정척사파, 동도서기파, 급진개화파가 존재.
1] 위정척사파
대표적 인물로 이항노, 기정진, 김평묵, 최익현 - 보수적인 민족주의 입장 - 개항은 망국의 길 - 기독교도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 - 기독교를 위험한 종교로 본 이유는 기독교가 동양의 전통적 위계질서를 완전히 파괴해 버린다고 보았기 때문 - 남녀가 평등하다는 기독교 정신이 위계적 구조인 유교사회와 충돌을 일으킴 - 전통문화에 대한 긍지를 심어주었던 위정척사파는 민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음.
2] 동도서기파
대표적 인물로 김윤식, 김홍집 - 온건한 개화를 주장 - 모델로 삼은 것은 중국 -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음.
3] 급진개화파
대표적 인물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서재필 - 일본을 모델로 하여 급진적 개화를 하자고 주장 - 서구문화의 근간인 기독교를 수용할 것을 주장 - 양반제도 타파를 주장 - 양반의 세력이 피지배층에 비해 너무 많기 때문에 이것이 조선의 성장을 가로막는다 주장 -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후 박영효,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 - 박영효가 고종에게 상소문을 올림 - 오늘날 천주교와 야소교가 왕성한 구미 각국은 그 나라가 가장 강하고 왕성한데 우리의 조선 유교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둘 다 쇠퇴하여 이 때문에 국세가 침약하였으므로 한심하고 탄식할 따름이다는 내용 - 불교신자인 김옥균이 서구문명이나 기독교에 대해서 긍정적이었던 것이나 일본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조선선교를 호소한 것은 기적 같은 일.
◎ 만주에서의 준비
존 로스와 존 매킨타이어 - 처남 매부지간 - 로스는 1874년 고려문을 방문 - 고려문은 공식적인 통로로 청나라와 조선이 일년에 네 차례 시장을 열었던 지역 - 거기서 이응찬을 만남 - 이응찬이 로스의 한국어 선생을 하게 됨 - 이응찬은 1875년 고려문에서 의주 청년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를 만남 - 1976년 이들 네 명은 매킨타이어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음 - 한국 개신교 신자가 된 첫 번째 사건 - 서상륜이 1879년, 김청송이 1883년 세례를 받음 - 이들 6명의 공헌으로 존 로스 번역본이 1882년 누가복음, 요한복음, 1884년에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이후 1887년에는 ‘예수성교젼서’즉 신약이 완간됨 - 존 로스역은 서상륜역이라 할만큼 서상륜의 공이 큼 - 한문이 전혀 없는 순 한글로 번역 - 이들은 번역후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와 권서(성경책을 갖고 다니며 사 보라고 권면하는 사람)와 매서(성경책을 팔고 다니며 전도하던 사람)가 됨.
1] 김청송
고향 집안현으로 돌아와 쪽복음을 동네에 배포 - 1884년 75명이 로스에게서 세례를 받음 - 조선에 공식적으로 선교가 시작되었던 해에 이미 75명이라는 믿음의 공동체가 존재하고 있었음.
2] 이성하
고향 의주에서 복음증거 - 건강악화로 백홍준이 그의 사역을 계승함 - 백홍준은 로스를 비롯 외국인과의 내통 사실이 드러나 1893년 검거후 2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 옥사함 - 최초의 공식적인 개신교 순교자가 됨.
3] 서상륜
황해도 송천리에 자리잡음 - 송천리에 소래교회가 지어짐 - 1885년 60명의 교인이 소래교회에 있었음 - 1887년 최초의 장로교회 새문안교회가 설립될 당시, 설립 멤버 14명 중 13명이 서상륜과 서경조에 의해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이었음.
◎ 일본에서의 준비
이수정을 통한 복음의 준비 - 일본의 농업정책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이수정은 1882년 일본으로 건너감 - 거기서 율전 박사를 만나 그의 인격에 매료됨 - 율전박사가 안천영이라는 일본 목사를 소개해 주었고 이수정은 1883년 4월 29일 미국 선교사 조지 낙스로부터 세례를 받음 - 이후 한문성경에 토를 단 현토성경 ‘신약성서 마가전’을 1884년 11월에 출판 - 1883년 12월호와 1884년 3월호 ‘미션너리 리뷰 오브 더 월드’에 한국선교를 호소하는 편지를 보냄 - 언더우드가 한국을 향해 오던 중 요코하마에 들려 이수정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우고,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을 가지고 들어옴 - 그 어느 나라도 선교사가 입국할 때 그 나라 말로 된 성경을 가지고 와서 선교를 시작한 경우가 없음 - 갑신정변 후 외국유학생을 소환하는 소환령을 조정이 내림 - 이수정도 1886년 5월 28일에 귀국 - 일본에서의 한국선교 호소로 개화파로 분류된 이수정은 귀국후 바로 처형 - 백낙준은 이수정이 귀국 전 기독교 신앙을 버렸다고 주장.
☞ 기억해야 할 몇 가지 사실.
1. 한국의 선교는 성서번역에서부터 출발했다는 점.
2. 한국인에 의해서 스스로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점.
3. 교회가 한국인 스스로에 의해서 자립의 틀을 형성하기 시작했다는 점.
4. 하나님께서 한국선교에 대해 깊이 개입하시고 일하여 오셨다는 사실 - 불교신자 김옥균이 한국을 살릴 수 있는 길이 기독교라고 외치고, 농업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에 건너간 이수정이 세례를 받고 한국선교를 촉구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만주인을 위해 활동하겠다던 로스와 매킨타이어 선교사가 한국선교를 위해 성경을 번역하며 일생을 헌신하였던 사실.
5. 한국의 고위층 위정자들이 기독교를 반대했던 것은 기독교 자체가 아니라 기독교와 한국의 전통 문화가 서로 대립적인 관계에 있다고 보고 그로 인해 한국의 전통문화를 파괴한다고 믿었기 때문.
6. 한국의 왕실이 공식적인 개신교 선교를 허용하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개신교 선교를 묵인하고 있었음 - 명절 때 선교사들에게 왕실의 선물이 전달된 사실.
◎ 쇄국정책에서 개항까지
불란서의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제독의 침략 사실과 독일상인 오페르트에 의한 분묘 도굴사건은 조선의 서양에 대한 반감을 더욱 가중시켜 대원군으로 하여금 쇄국정책의 결의를 굳히는 계기가 됨 - 대원군(조선시대에 왕위를 계승할 적자손이나 형제가 없어 종친 중에서 왕위를 이어받을 때 신왕의 생부를 호칭하던 말)의 전제적인 강압정치는 적지 않은 반발을 초래함 - 유생 최익현이 대원군의 실정을 통박하며 시작된 반대원군 정서로 인하여 대원군 하야 - 대원군의 하야로 열강들이 조선에 개항을 요구.
1876년 2월에 일본과 강화도조약 체결 -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에 맺어진 불평등 조약 - 조약 체결 후 20개월 이내에 부산항 외에 2개 항구를 개항할 것[1880년 원산항 개항, 1883년 제물포항 개항], 일본 상인들의 세제와 주거에 대한 편의제공, 일본인들의 해항측량등 제공, 일본인의 범법행위에 대한 재판은 일본공사가 맡는다는 내용.
◎ 일제의 한국침략
1894년 7월 청국군이 한국에 상륙한 것을 빙자하여 1만 여명의 병력이 한국에 상륙 - 8월 1일 청국에 선전포고 - 청일전쟁에서의 승리로 일본의 횡포는 더욱 극심해짐 - 1904년 2월 10일 러시아에 선전포고 - 1905년 9월 5일 러일강화조약 체결 - 내용은 ‘일본은 한국에 정치, 경제, 군사의 우월권을 취득한다’는 것.
◎ 친일파와 한일병합
1905년 11월 17일 을사5조약 체결 - 을사5적 -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1906년 2월 조선통감부 설치
1907년 7월 18일 고종황제 강제 퇴위후 아들 순종을 제위에 오르게 함 - 정미 7조약 체결 후 군대 해산, 헌병 해산 등으로 한국을 완전히 장악.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 후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격하시키고 조선통감부를 조선총독부로 승격시킴 - 초대 총독으로 데라우찌 임명 - 국내 모든 항일단체가 해산되었으나 교회만 현존하게 됨 - 병합당시 기독교는 1,900교회 20만 신자, 755개의 기독교 학교와 3만여 학생, 230명의 교역자가 있었음.
◎ 조미조약과 미국에서의 선교준비
청국의 관리 이홍장에 의해 조선과 미국의 수교가 주선 - 1882년 5월 제물포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 당사자 조선이 배제되고 청국의 이홍장과 미국의 슈펠트가 체결 - 1882년 6월에 영국 및 독일과 조약 체결, 1884년 6월 러시아, 1886년 불란서와 조약 체결.
1883년 7월 수구파의 거장 민영익을 단장으로 한 견미사절단 파견 - 서구문명의 발전을 목도하고 충격을 받음 - 시카고로 가는 기차 안에서 가우쳐 목사를 만남 - 민영익과의 대화중에 조선에 대한 선교가능성을 확인한 가우쳐 목사가 일본의 매클레이에게 편지를 보냈고 매클레이 선교사가 1884년 6월에 내한하여 김옥균의 협력을 얻어 고종으로부터 의료선교와 교육선교는 해도 된다는 답신을 받음.
● 초기 선교사들의 활동과 그들의 신학사상
▶ 각국 선교사들의 입국
◎ 조선의 첫 선교사 알렌의 입국
중국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 중 1884년 9월 20일에 제물포 항에 도착 - 공식적인 입국신분은 미국공관의 공관의 -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이 발생 - 개화파 자객의 칼을 일곱 군데나 맞아 혈관이 끊긴 민영익을 치료 - 민영익이 ‘당신이 미국에서 온 것이 아니고 이 사건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극찬을 함 - 1885년 4월 10일 최초의 서양 근대 병원 광혜원[은혜를 널리 베푸는 집] 개설 - 4월 26일 제중원으로 개명.
◎ 한국 선교의 개척자 언더우드의 입국
1885년 4월 5일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와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입국 - 이들은 자신의 생애 동안에 영광스러운 재림이 이루어지기를 소망 - 한국에 파송된 대부분 선교사들의 보편적인 현상 - 1887년 아펜젤러와 함께 성서번역위원회를 발족 - 국내 입국한 개신교 선교사로는 최초로 1886년 7월 11일 알렌의 어학선생이었던 노춘경에게 세례를 베품.
◎ 각 선교회의 입국
1887년 성공회 소속 울프 선교사
1889년 호주장로교 소속 데이비스 남매 - 1890년 4월 6일 데이비스가 천연두로 세상을 떠났고 동생 메리는 호주로 돌아감.
1889년 침례교(펜윅)
1892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4명이 입국 - 북장로교 선교사였던 언더우드가 5000달러[두 명의 선교사가 2년간 선교할 수 있는 선교비]를 남장로교 해외선교부에 보내 선교사를 파송하게 됨.
1898년 카나다 장로교 선교사 게일[한국어를 한국 사람보다 더 유창하게 한 사람] - 선교회의 후원이 아니라 YMCA의 후원으로 입국.
1898년 러시아 정교회, 1904년 안식일교, 1907년 동양선교회라는 이름으로 성결교, 1908년 구세군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국내선교활동 시작.
☞ 한국선교와 관련하여 기억해야 할 몇 가지 사실.
1. 거의 같은 시기에 다양한 선교회가 입국하여 한국 개신교 선교를 시작함.
2. 장로교는 네 개의 선교회가, 감리교는 두 개의 선교회가 거의 같은 시기에 입국함으로서 장감선교회가 거의 한국개신교 선교를 주도함.
3. 천주교가 직접적인 선교방법을 택한 반면 개신교는 간접적인 방법을 택했다는 것.
◎ 영아소동사건
1888년 외국 선교사들이 한국의 유아들을 유괴해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나돌아 폭동으로 발전한 사건.
개신교는 천주교와 달리 선교초기부터 고종의 윤허를 받고 왕실의 총애와 보호를 받으며 시작 - 1888년 4월 금교령이 내려짐 - 일차적인 이유는 천주교가 건축을 하는 과정에서 조정의 비위를 건드렸기 때문 - 천주교가 현 명동자리에 대성당을 건축하고자 하였는데 이 성당이 궁전보다 높은 곳에 세워질 계획이었으므로 왕실이 휜히 내려다보이는 것을 조정에서 반대함 - 건축 중단을 요구하였으나 천주교가 거부하고 강행함 - 전도금지령으로 악화됨.
이 금교령의 와중에 영아소동사건이 발생(1888년5-9월) - 선교사들에 대한 불신과 오해가 증폭되면서 터지게 됨 - 외국공관은 아이고기를 먹는 곳으로, 병원은 범죄의 소굴로 지목됨 - 당시 왕실과 가까운 선교사들은 영아소동이 민비를 획책하는 적들이 고의로 일으킨 사건으로 분석하고 있었음 - 왕실이 외국인들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자 대원군은 위정척사파를 등에 업고 백성들을 선동하여 외국인에 대한 폭동을 유도하였던 것.
▶ 하나의 조선교회 설립논쟁
1893년 장로교 공의회 조직 - 하나의 장로교회를 설립하자는 목적 - 북,남,호주장로교가 결의 - 1905년 9월 15일 4개의 장로교 선교회와 2개의 감리교 선교회 소속 150여명의 선교사들이 교파를 초월하여 하나의 기독교회를 한국에 설립하려는 목적으로 장감연합공의회를 조직함 - 이미 성서번역과 기독교교육, 문서선교와 의료선교에서 연합사업을 실시하고 있었음 - 1887년 성서번역위원회를 장로교 선교회와 김리교 선교회가 함께 발족하여 1900년에 신약을, 1910년에 구약 번역을 완료 - 이것을 구역이라 하고 이를 보완한 1937년의 성경을 개역이라 함 - 장감연합 공회는 1906년 평양숭실 대학을, 1914년에는 세브란스 병원을, 1916년에는 연희전문학교를 공동으로 설립해 운영함 - 그러나 장감연합 공회는 본국 선교회의 반대와 각 선교회의 개별 선교사업의 성공으로 인해 무산됨 - 부흥운동을 통해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각자의 사업강화에 열중함 - 1907년 장로교가 독노회 조직하고 7명의 목사를 배출하고 같은 해 감리교는 협성신학교를 설립하여 독자적인 틀을 마련함 - 교회가 커갈수록 교파통일은 더욱 멀어짐 - 오늘날 교파와 교단이 난무한 이 시대에 하나의 조선교회 설립 노력을 다시 상기하는 것은 대단한 의미가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 본국선교회가 반대한 이유 3가지
1. 보수적인 장로교와 현대주의 입장을 지지하는 감리교의 신학적 입장의 차이.
2. 총체적인 하나님나라 확장의 관점보다는 교단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이 교단의 이익을 대변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3. 칼빈주의(한번 받은 구원은 영원히 보장된다) 체계에 기초한 장로교와 알미니안(구원받은 사람도 행위로 믿음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께 버림받을 수 있다) 주의에 기초한 감리교가 어떻게 하나의 독립적인 교단을 설립할 수 있겠느냐 하는 생각.
▶ 개신교 선교정책
초기 선교사들이 사용했던 선교정책은 의료 및 교육선교, 성경번역, 연합사업, 그리고 선교지 분할정책으로 대변할 수 있다.
◎ 의료 및 교육선교
장로교 선교사 알렌이 주축이 되었던 광혜원이 장로교 선교사 중심으로 운영되자 스크랜톤이 1894년 감리교 상동병원을 세워 독립함 - 의료 선교는 민중과 정부 양쪽의 마음을 사로잡는 계기가 됨 - 알렌이 미국에 보고한 자료에 의하면 1년에 20529명을 치료한 것으로 나타나 있음 - 당시 한양의 인구가 30-50만 명이었으니 이것은 엄청난 숫자.
1885년 배재학당, 1886년 5월에 이화학당 설립 - 고종이 ‘인재를 배양하는 학당’이라는 의미로 배재학당이라 친히 이름을 지어 주었고, 명성황후가 ‘배꽃같이 순결하고 아름다우며 향기로운 열매를 맺어라’는 의미로 이화학당 교명을 지어줌 - 1910년까지 중등학교 이상의 교육기관 37개교를 설립함.
◎ 성경번역
초기에 한글성경을 완성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장로교인 - 한글 성경에 장로교 색깔이 강하게 나타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음 - 한글 성서 번역이 한글 문화에 끼친 영향은 지대함.
◎ 선교지 분할
지나치게 불필요한 선교 경쟁을 피하고 선교를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한국에 파송된 선교단체는 1893년 교계예양이라는 선교지 분할 협정을 체결함 - 이 체결에 의해 북장로교는 평안도 지역과 경상북도 지역을, 카나다 선교회는 함경도 지역을, 호주선교회는 경남지역을, 그리고 남장로교는 전라도 지역을 맡음 - 한 지역을 한 선교회가 맡음을 통하여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선교가 이루어졌다는 장점과 더불어 오랫동안 한 선교지에 한 선교회의 신학만이 지배함으로 말미암아 그 신학을 이데올로기화하는 폐단도 발생하게 됨 - 1930년대의 진보주의자들은 대부분 카나다 선교회가 담당했던 함경도 지역 출신들이었다는 사실 - 또한 선교지 분할정책은 지방색을 가속화시킨 폐단을 낳았고 구세군이나 침례교, 성결교등의 군소 교단이 선교지 분할 정책에서 소외되어 버린 단점도 지니고 있었다.
◎ 교계예양의 내용들
1. 5천명 이상의 도시는 공동으로 선교.
2. 5천명 미만의 도시는 이미 선교를 시작한 선교단체가 기득권을 가지며 6개월 동안 공석일 경우 타 선교회가 선교를 시작해도 좋다.
3. 가능하면 선교가 시작되지 않은 지역에 선교를 착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함.
4. 서로 다른 교회를 존중함.
5. 다른 선교 지역으로 교인들이 이동할 경우, 자유의사대로 하되 반드시 목사의 추천서를 받는다.
6. 조사들에 대해서는 선교회가 직접적으로 보조금을 지불하지 말 것.
7. 모든 문서의 규격은 통일한다.
▶ 선교사들의 사상과 삶
진보주의 학자들은 한국의 근본주의 신학이 등장한 것은 1930년대 박형룡 박사의 등장 이후로 보지만, 보수주의 학자들은 선교사들의 신학이 상당히 보수적이었음을 강조한다. 보수주의 학자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보수적인 신학교에서 신학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보수적인 신학 사상을 소유했을 것이라는 추측에 따른 것이다.
◎ 선교사들의 출신학교별 분류
1. 맥코믹 신학교
사무엘 마펫 - 평양신학교 초대 학장, 1907년 총노회 설립시 노회장으로 선임 - 그의 아들 마포 삼락은 아버지에 대해서 ‘아버지는 상당히 보수적인 사람이었지만 성경의 축자 영감이나 완전무오성을 고집하는 근본주의자는 아니었다’고 주장.
스왈론(소안론) - ‘하늘가는 밝은 길이’를 비롯한 여러 편의 찬송가를 작사
곽안련 - 찰스 알렌 클라크 선교사
2. 유니온 신학교
레이놀즈(이눌서) - 평양신학교 최초의 조직신학 교수
크레인 - 이눌서를 이어 조직신학을 가르쳤고 한국에 최초로 무천년설을 가르침.
3. 프린스톤 신학교
로버트(라부열) - 1925년 평양신학교 교장
해밀톤(함일돈)
☞ 장로교 선교 초기에는 맥코믹 출신(부흥운동에 상당히 긍정적)들이, 1924년 라부열 선교사가 평양신학교 교장에 오르면서는 프린스톤 출신들이 기여함.
1837년 미국 장로교는 노예문제와 통합안 문제로 뉴 스쿨과 올드 스쿨로 갈라짐 - 뉴 스쿨은 어번 신학교와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를 중심으로 진보적인 입장으로 흐르게 되었고, 올드 스쿨은 프린스톤과 맥코믹 신학교를 중심으로 보수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됨.
▶ 선교 초기 폭발적인 교회성장
1884년 1명에 불과했던 선교사의 수가 1910년 206명, 1927년에는 323명으로 급증.
1907년 최초의 장로교 목사 일곱 명이 배출된 후, 1920년에 180명, 1930년에 400명, 1936년에는 524명으로 급증.
교회의 수도 1901년 199개, 1910년 1,157개, 1920년 1,738개, 1930년에 2,335개로 급증.
세례를 받는 교인수도 1890년 40명에서 1900년 1,086명, 1910년 10,082명으로 급증하다 1920년에는 5,603명으로 하강.
전체 세례교인수는 1886년 9명, 1900년 7,500명, 1910년 119,273명, 1920년 144,062명, 1930년 194,678명, 1936년 341,700명으로 급증.
◎ 한국교회의 급성장의 이유들
1. 전통종교들의 타락과 무능이 교회의 성장을 촉진시킴.
2. 리더쉽에 잘 따르는 한국인의 국민성과 유순성.
3. 불안한 시대에 평안함에 대한 한국인의 갈구.
4. 국왕의 호의.
5. 여성의 지위향상.
6. 한국인의 애국심이 교회를 통해 표출됨.
7. 신비 종교에 대한 한국인의 갈망이 부흥회를 통해 발산됨.
8. 서양에 대한 동경이 교회를 통해 수용.
9.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채택.
◎ 성경중심의 선교정책
1890년 네비우스 선교정책 채택 -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거의 대부분 20대로서 선교경험이 부재 - 언더우드 26세, 아펜젤러 27세, 알렌 27세, 스크랜톤 29세, 게일 25세 등 - 경험이 풍부한 선교사를 갈망하던 중 중국에서 활동하던 네비우스 선교사가 1890년에 방한하여 2주 동안 세미나를 실시 - 이후 자립, 자치, 자전을 중심으로 한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채택됨.
◎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내용들
1. 선교사들이 개인적으로 순회전도를 한다.
2. 모든 선교사역에서 성경이 중심에 되게 한다.
3. 한국인 스스로가 전도하게 한다.
4. 한국인 스스로가 교회를 치리한다.
5. 경제적으로 한국인 스스로에 의해서 자립한다.
6. 모든 신자는 그룹의 영수와 순회 조사 아래서 조직적인 성경공부를 한다.
7. 성경적인 권징을 엄격히 실시한다.
8. 다른 선교단체들과 연합하고 협력한다.
9. 법정 소송 사건이나 그와 유사한 문제는 간섭하지 않는다.
10 가능한 한 민중의 경제 문제에 도움을 준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부정적인 영향은 사회적인 책임을 간과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1910년대까지는 사회적인 책임과 복음이 균형을 이루었다가 1918년부터 1930년까지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지나친 강조로 사회적인 책임이 소원해지고 내세적인 신앙이 뿌리를 내리게 됨.
◎ 성경중심의 교회교육과 신학교육
성경중심의 교회교육과 신학교육은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구현 방법 - 그러나 선교사들이 주도했던 평양신학교의 결점을 지적하자면 균형 잡힌 신학교육이 부족했다는 점, 지나친 교파주의를 심어주었다는 점, 사회적인 책임을 간과하게 만들었고 내세적인 종말신앙을 심어주어 현실을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 초기 기독교의 부흥과 수난
◎ 교회의 애국운동, 사회개혁활동, 항일운동
기독교는 한말 격동기에 안으로는 사회적 개혁이 요청되고 밖으로는 국가의 자주성 유지가 문제되던 시기에 전래됨 - 일반 서민들은 자신들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받기 위하여 입교하였고, 관료들 중에는 개화와 독립을 위하여 입교하게 된 사람들이 많음 - 초기 기독교인의 뚜렷한 의식 3가지 - 반봉건의식, 자주의식, 항일의식.
반봉건의식 - 기독교 교육을 통한 구습의 타파, 인간평등을 통한 사회신분 제도 타파, 노동의 신성 강조, 여권의 재인식과 성 차별의 철폐, 인권과 법에 대한 각성 - 감리교에서는 1895년 일부다처주의를 정죄하고 첩을 가진 자는 교인 자격이 없으므로 교회에서 추방하기로 결의함 - 황해도 평산 감바위교회에서는 ‘부부가 서로 존댓말을 쓸 것과 한 자리에서 식사할 것을 결정’함. .
자주의식 - 민족문자로서의 한글의 재인식과 그 보급활동 및 한국사에의 깊은 관심 - 국기 게양, 국왕 탄신일등의 애국적 집회개최, 독립협회등의 사회단체의 결성 및 그 참여도에서 확인됨 - 교회조직을 통하여 여론집약, 민중계몽, 정치적 결속을 시도하였다는 의의가 크다.
1901년 9월 선교사들로 구성된 장로교 공의회에서는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교회의 비정치화를 규정한 결의안을 채택함 - 1901-5년 사이 민족의 위기상황에서 교회의 사회의식이 크게 내면화되고 이 내면화의 결과로 1907년의 대부흥운동등이 드러남.
항일의식 - 기독교는 항일민족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함 - 장로교 경우, 1907년 독노회가 조직되고 1912년 총회가 조직되는 등 교단조직이 강화됨 - 이 강화된 전국조직을 통해 독립운동에 대한 모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3.1운동도 전국적 운동으로 확대될 수 있었음 - 애국심의 표현으로 주일마다 교인들은 자신들의 집과 교회에 태극기를 게양 - 위기의 순간마다 기도회를 개최 - 일제는 교회에 나가는 기독교인들을 항일의식을 선도하는 불순분자로 분류하게 됨 - 부정세금 불납운동, 조세저항운동, 일본 상품 불매운동, 국채 보상운동(당시 일본에 진 빚을 갚아야만 자주 독립국가가 가능하다는 취지에서 시작하였고, 운동의 방법은 2천만 전 국민이 3개월 간 금주, 금연을 하고 여인들은 식사 때에 반찬을 줄여 남는 돈을 모으자는 것) 그리고 조만식에 의해 주도된 물산장려운동.
◎ 통감부의 기독교 정책
정치는 통감이, 정신적 교화는 종교가 맡아야 한다는 정책 - 이등박문과 해리스간의 약속했던 내용 - 이 시기에 미국이 취했던 침략 방조적인 정책 - 1905년의 가쯔라-태프트 밀약등에 의해 지도급 선교사들은 친일, 반한적 태도를 보임.
일제는 1910년대부터 줄곧 일선동조론(일본과 조선은 같은 조상이다)과 그것을 정책화한 내선일체, 황국신민화를 강요했고, 조선어와 국문자의 사용 금지, 한국학 연구 중지등을 명했으며, 창씨개명과 태양신(일본 국조신)숭배를 위한 신사참배, 동방요배등을 강요함 - 이러한 민족말살정책에 대해 최현배, 김윤경, 장지영등은 국어수호운동으로, 남궁억, 안재홍등은 국사수호운동으로 저항함.
◎ 1907년 부흥운동과 영계 길선주
장님 길선주 목사 - 1869년 출생 - 1907년 최초 일곱 명의 장로교 목사 중 한 사람,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20년간 목회, 장대현교회를 시작으로 1907년 평양부흥운동이 일어남 - 평양 대부흥운동은 단순한 교회성장이 아니라 인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회개와 각성운동이었음 - 한국교회에 새벽기도를 시작한 인물이며, 남녀불평등을 타파하기 위해 남녀 좌석 사이에 있던 포장을 철거하기도 함 - 도교에 심취하였던 젊은 시절의 고행으로 인하여 시력이 점점 상실됨 - 3.1운동 때 민족대표 33명 중 하나로 2년 간 옥고를 치름 - 부흥회를 인도하다 35년 11월 18일 소천.
◎ 지성인의 기독교 비판
3.1독립운동 후 교회가 사회적인 책임과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신앙을 내향화시키는 경향이 드러남 - 성경중심의 선교를 강조한 나머지, 사회적 책임을 간과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 - 이와 같은 교회의 태도 변화는 처음 기독교에 대해 긍정적이고 협조적이던 지성인들과 사회단체들의 기독교에 대한 태도를 수정시키는 요인이 되었으며, 이들에 의한 기독교 비판이 거세게 일어남 - 대표적인 인물이 이광수였고, 비판적인 단체는 사회주의였다.
◎ 이광수의 야소교 비판
1917년 7월 ‘청춘’지에 쓴 글 - 개신교회가 조선에 미친 영향으로 서양의 사정 소개, 도덕의 진흥, 교육의 보급, 여자의 지위 향상, 조혼의 폐지, 한글의 보급, 사상의 자격, 개성의 자각과 개인주의의 자각 등 여덟 가지를 지적.
1917년 11월 ‘청춘’지에 ‘금일 조선 야소교회의 결점’이라는 글을 통해 기독교를 강도 높게 비판 - 조선교회는 계급적이고 교회지상주의적[교인 아닌 자는 악인으로 여기며, 세상학문을 천히 여기고, 종교적 이외의 사업을 천히 여김을 지적]이며 교역자가 무식하고 미신적이라는 4가지의 결점을 지적하면서 ‘인류에 복리를 주는 사업은 다 하나님의 일일 것이외다....6일간에 인류의 복리를 위하여 하는 사업이 온통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이외다. 차라리 6일간 봉사하다가 일요일에 안식한다함이 지당할 것이외다’라고 주장.
1918년 매일신보의 글 - 금일 조선 사상계에 가장 조직적이요, 위대한 세력을 가진 자가 교회이며 유교의 조선이 장차 야소교의 조선이 되지 않을까 의심케 할 만큼 세력이 위대하다.
☞ 이광수의 비판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
1. 기독교를 비판했던 그가 한국의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는 점
2. 그의 비판이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 - 비판의 원인을 교회가 제공.
3. 기독교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던 이전의 태도와 달리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생겨났음을 반영하여 주는 사건이라는 점.
◎ 사회주의의 등장
조선에 사회주의 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3.1.운동 전후의 일 - 사회주의 세력은 민족주의와 반 기독교 운동을 통해 세력을 확장해 감 - 1927년 양주삼 목사는 코리아 미션 필드지에 ‘교회는 이제 한국에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기독교에 대한 민족의 일반적인 태도는 전일과 판이하다. 이것은 놀라움이 아니라 충격이다’고 토로 - 사회주의 세력들은 기독교가 사회의 변혁에 무관심하고 종교적 측면에만 심취되어 있는 것에 대해 비판을 제기.
☞ 사회주의 사상을 주장했던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이고 긍정적인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 조선 사회당을 창당한 이동휘는 방향 잃고 기울어 가는 조선 민족을 살릴 수 있는 대안은 기독교라고 외쳤던 인물이며, 김규식[새문안교회 장로]
과 여운형[평양신학교 출신]도 기독교 지성인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 일본의 기독교 박해 - 105인 사건
기독교인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남궁억, 주시경, 이승만, 신흥우 등이 독립협회 조직.
일제의 105인 사건 조작 - 데라우찌 총독 암살을 모의했다는 내용으로 전국의 항일 지도자 700명을 체포, 구속후 122명 기소, 105명에게 유죄판결을 내림 - 기소자 중 81명이 기독교인.
◎ 기독교와 3.1운동
1918년 8월 20일 평양신학교 출신 여운형을 중심으로 신한 청년당이 조직 - 11월 28일에 파리 평화회의에 새문안교회 장로 김규식이 대표로 파견 - 간도, 일본에서의 독립선언 발표 후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을 벌이기로 기독교 자체로 계획을 세움 - 천도교측에서 함께 할 것을 요청하여 연합으로 하기로 결정 - 기독교 대표 함태영, 천도교 대표 최린, 불교대표 한용운을 결정 - 1919년 3월 1일 고종의 국장일에 독립만세운동을 하기로 결정 - 33인의 대표는 파고다 공원으로 가면 유혈사태가 발생할 것을 염려한 연희학교 베이커 교수의 조언에 따라 태화관에서 별도의 모임을 가짐 - 이때부터 학생들과 어른들이 분리되어 독립만세운동을 벌임 - 33인중 기독교 대표가 16명이었고, 태화관에 모인 사람은 29명 - 양전택, 길선주, 정춘수, 유여대 불참 - 서울에서 시작된 이 운동이 지방의 각 교회를 중심으로 전국운동으로 발전 - 3.1.운동으로 인한 수감자 9.059명중 2.032명이 기독교인 - 전체의 22.4% - 일본의 조합교회는 조선총독에게 ‘정부가 더 강력한 무력으로 위압해야 한다’고 권고.
독립운동 후 교회가 독립운동가의 은신처와 자금 전달 역할을 감당 - 기독 여성들을 중심으로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와 둑립군을 돕다 심한 고초를 당하기도 함 - 3.1운동을 통해 기독교가 외세종교가 아니라 민족종교로 인정을 받게 됨.
◎ 3.1운동 후 기독교인의 양분
3.1운동 때 비폭력으로 만세를 불러도 외국에서 도와주지 않아 많은 희생만 발생하게 되자 무기를 들고 독립을 이룩하자는 무장단체들이 결성 - 기독교인들도 여기에 동참한 사람들이 있었으나 전체 교회의 흐름은 조국 독립에 대한 소망을 상실하고, 현실도피주의, 개인의 안전만을 추구하는 신앙생활을 강조하며 교회의 생존에 역점을 두는 경건주의적 비사회참여의 경향이 강화됨 - 이러한 결과로 신비주의 부흥운동이 강화됨 - 교회가 독립운동을 포기하자 이 공백을 사회주의자들이 이끌고 감 -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계속하였고 이후 6.10만세 운동도 주도 - 교회생존에 역점을 두었던 교회는 결국 신사참배결의로까지 나아갔고 교회는 일제의 앞잡이 단체로 전락하게 됨 - 반대로 교회의 타락에 분노하며 많은 기독교인들이 사회주의 단체에 가입하게 됨 -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단체인 한인사회당에 이동휘가 가입했고, 여운형은 전도사직을 포기하고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해방정국에서는 최문식 목사가 대구폭동을 주동했고, 이재복 목사는 14연대 반란을 주동하게 됨.
● 1920-30년대의 다양한 신학사상
개신교 선교초기부터 자유주의는 보수주의와 공존하고 있었음 - 소수의 뉴욕 유니온 출신들과 신학교 출신이 아닌 의료, 교육, 여자 선교사들은 자유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음 - 1910년 미 북장로교 선교부도 현대주의 성경관을 가진 소수의 선교사가 한국 선교지에 있음을 인정함 - 현대주의자들은 과학적 사고와 일치하는 기독교, 이성과 일치하는 합리적인 기독교를 모토로 내검.
◎ 김장호 자유주의 논쟁
한국인 최초로 자유주의적 주장을 한 사람이 김장호 목사 - 자유주의가 보수주의 신학의 요람 평양신학교 출신이며 가장 일찍 개신교를 받아들인 황해노회 소속인 김장호 목사에 의해 촉발됨으로 한국교계가 주목하게 됨 - 김장호 목사는 1918년 12월 6일 황해노회로부터 이단자로 낙인 찍혀 제명됨 - 그는 모세의 홍해기사를 밀물과 썰물의 간만의 차에서 생긴 자연현상으로 설명하고, 오병이어의 기적도 사람들이 도시락을 가지고 와서 나눈 나눔의 식사라 주장하며, 성경에서 말세, 재림, 부활이라는 단어를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 - 현대과학과 일치하는 참된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과학과 모순되는 초자연적 특성들을 다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 - 김장호 목사가 이런 사상을 가지게 된 원인은 현대주의 사상가였던 공위량 선교사 밑에서 조사로 있었기 때문 - 김장호 목사는 제명되기 전 반선교사의 기치를 내걸며 민족주의적 조선 기독교를 표방하면서 조선기독교회를 설립하고 만주 길림에 교단신학교 길림신학교를 설립 - 창립목적 2항을 보면 ‘각국 각파의 선교사가 들어와서 제각기 제 교파 세력을 증강시키느라고 분쟁이 벌어져서, 민족을 분열 이간한다. 이 폐단을 막고 우리나라 사람끼리 교파를 세워 민족정신을 통일하기 위하여’라고 되어 있다 - 그러나 출발 당시부터 친일적인 색깔로 가득함으로서 조선적 기독교의 주체성을 외쳤던 본래의 취지가 상실됨.
◎ 다양한 신학사상의 등장
1930년대는 새로운 신학이 등장했던 신학적 다원화 시대 - 박형룡의 소위 정통주의, 김재준의 진보주의, 정경옥의 자유주의가 뿌리를 내리게 된 시대 - 여기에 이용도의 신비주의,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도 등장 - 1930년대는 신학적 전환의 시대, 혼돈의 시대, 신학적 변천의 시대라 명명됨.
일제는 3.1운동후 문화정책으로 통치방법을 변경 - 소수의 엘리트를 육성시키고, 그들이 한국인들을 일본화 교육시켜 한국을 지배하겠다는 정책 - 이 정책시행 후 일제는 유학을 장려 - 유학의 주요 대상지는 일본과 미국 - 이때 유학을 떠났던 사람들이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시기가 1930년대 - 김재준, 송창근, 채필근에 의해 바르트 사상과 진보 사상이 소개 - 감리교는 일찍부터 최병헌을 중심으로 전통 종교와 기독교를 조화시키려는 시도를 하다 1930년대 정경옥의 영향으로 ‘신앙은 보수, 신학은 자유’,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라는 문구가 강조 - 기독교를 평가하는 기준이 계시에서 체험으로 바뀜 - 일반고등교육을 통해서도 현대주의가 유입되었고, 특별히 카나다 연합선교회가 현대주의 사상을 소개하는 창구 역할을 함.
◎ 장로교의 신학적 혼란시대
최초의 신학박사며, 최초의 한국인 평양신학교 교수며 신학지남 편집장이었던 남궁혁 박사가 송창근, 채필근, 김재준을 특별기고라는 이름으로 신학지남에 글을 쓰게 함 - 1934년에는 선교 50주년 기념으로 감리교에서 아빙돈 주석을 발행하였는데 이때 장로교 소속 김재준, 송창근, 채필근, 한경직목사가 합류했음이 밝혀지면서 총회적으로 이 문제를 거론하게 됨 - 이 시기에 장로교의 지도적 인물인 김영주 목사가 모세오경의 모세저작을 거부했고, 김춘배 목사는 여성을 옹호하는 글을 기독신보에 기재해 논쟁을 일으킴.
◎ 신학지남 논쟁
신학지남이 1930년대 신학논쟁의 불을 지핌.
1. 김재준
일본의 청산학원과 미국 프린스톤, 웨스턴신학교에서 수학 - 1930년대 초부터 평양 숭인상업학교의 성경교사로 있으면서 신학지남에 글을 기고하기 시작 - 자신의 사명을 ‘정통주의로 통조림된 한국 장로교회에 어딘가 숨쉴 구멍을 티워주는 것’이라 생각 - 1935년 1월호 권두언에서 일년 전 선교 50주년을 맞아 성대하게 자축하며 기뻐하던 선교사 주도의 한국장로교회를 가리켜 ‘쉰한 살 먹고도 삼촌덕에만 살려는 못난 아들’이라고 평함.
2. 채필근
비교종교학에 관한 글들을 기고 - 1931년 11월호에서 ‘우리는 모든 종교의 특이성을 인정하면서도 국제평화의 실현에 관한 것인 한에서 모든 종교는 협력할 수 있는 것’을 믿는다는 평화선언안을 소개 - 자유주의자들에 대해 한 치에 관용도 없는 정통주의에 대해 관용을 베풀라는 충고도 주장 - 이후 신사참배를 주도한 일본 앞잡이가 됨.
3. 송창근 - 가장 강도 높은 비판자
조선교회의 가장 큰 문제를 윤리문제로 봄 - 한국교회의 정통주의를 가리켜 ‘위선자요 형식주의자요 이십 세기 바리새인들’이라고 비판 - 일반적으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신조의 지적승인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있는 교회를 향해 믿음은 삶 속에서 드러나는 것임을 강조 - 1935년 신학지남 ‘감격의 세월’이라는 교계평론에서 ‘예배당을 지어야 하겠습니다. 목사 주택을 지어야겠습니다. 그러니까 부흥회를 열어야 겠습니다. 성신이여 강림하사....그대들은 성신이 그대들의 소사인줄 아느냐?’라는 원색적인 비판을 가함.
4. 박형룡
박형룡은 선교사들의 신앙을 그대로 지켜내는 것을 시대적 사명으로 인식 - 신학적으로는 근본주의 -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성과도 결부되어 있던 근본주의 신학은 1900-192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일종의 변형된 정통주의 - 박형룡은 3명의 신학지남 기고에 반대하여 편집위원을 사임하고 반대여론을 불러일으킴 - 그 결과 총회의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1935년 5월 송창근과 김재준의 글이, 1935년 9월 채필근의 글이 마지막으로 신학지남에 실림 - 1930년대는 신학적 입장에 따른 전투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음.
김재준의 삶이 개방적이었다면 박형룡은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편.
박형룡에 대한 다양한 평가 - 전투적인 근본주의자(유동식), 칼빈주의적 근본주의자(신복윤) - 공통점은 ‘근본주의자’ 라는 것 - 박형룡은 현대주의에 대해 전투적 자세를 지닌 근본주의를 기독교 자체로 이해- 특별히 성경의 권위를 변호하는데 집중 - 그가 프린스톤에서 유학하던 1923-26년이 근본주의 대 현대주의의 논쟁이 미국에서 가장 극심했던 시기 - 메이첸 밑에서 공부한 그는 제2의 메이첸이 되어 한국의 보수주의를 변호해야 한다는 사명의식을 가지게 됨 - 구 프린스톤의 신학을 그대로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 신학자의 소명이며 그것에서 벗어나는 자야말로 신학을 변질시키는 인물로 이해 - 그의 영향은 한국교회에 반문화주의, 반사회주의를 심화시키게 됨 - 한국의 신학적 보수주의가 신학적 폐쇄주의로 치닫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 - 그는 복음주의 조차도 신복음주의로 매도하면서 자유주의와 같은 맥으로 이해 - 이런 원인 중 하나는 역사의식의 결여에서 비롯 - 시대가 변해도 박형룡은 늘 1920,30년대 미국의 기독교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살았던 사람.
◎ 아빙돈 단권 주석 논쟁
한국선교 50주년을 기념해 감리교에서 출판한 아빙돈 단권주석에 대해 감리교는 환호했지만, 장로교는 교단적 차원에서 목회자들이 그 주석을 구매하지 말 것을 결정 - 아빙돈 단권 주석은 이 땅에 소개된 최초의 주석 - 이 주석번역시 장로교의 김재준, 송창근, 채필근, 한경직 목사가 참여한 것이 문제의 발단 - 아빙돈 단권 주석은 당대의 비평학을 과감하게 수용하였고, 따라서 성경을 오류가 있지만 권위 있는 책으로 받아들임 - 총회는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에 기반한 주석의 번역작업에 참여한 4명의 목사들에게 번역에 참여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다시는 집필하지 않을 것과 재판시 자신의 글을 빼겠다는 약속을 할 것을 요구했으나 채필근 목사만 이에 동의하고 나머지 3명은 ‘전체 번역과 편집작업에 관여한 바 없고, 자신들이 번역한 내용에는 문제 될 것이 없으며 다만 자신들의 글로 인하여 교회가 소란해 진것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신학지남에 발표함 - 이 주석사건으로 인하여 장로교와 감리교의 신학적 입장이 확연하게 드러났으며 장로교 안에서도 동질감이 상실되었다는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게 됨.
◎ 창세기 저작권문제와 여권논쟁
서울의 남대문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김영주 목사가 모세의 오경저작권을 부인하고 성진중앙교회 김춘배 목사가 교회내 여권문제에 대해 불만을 토로 - 여자는 잠잠하라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당대에 한 지방교회에 국한된 바울의 조언이며 따라서 이 시대의 교회는 여성들의 지위를 현실화시켜 주어야 한다고 주장 - 이 주장들로 인하여 총회는 1934년 23회 총회 때 연구위원회를 조직하고 목사면직 등 강경하게 대응함 - 결국 김영주, 김춘배 목사는 총회의 압력에 굴복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번복하게 됨.
참고로, 가장 먼저 여성안수를 인정한 교단이 감리교(1931년부터 여성목사 배출) - 그 다음이 기장(1975년), 예장 통합(1996년)이 뒤따름.
◎ 적극신앙단 논쟁
1932년 YMCA총무로 있던 신흥우를 중심으로 결성된 적극신앙단 운동은 탈선교사, 탈보수주의, 탈서구화, 탈전통을 내세우며 기독교 토착화를 주장 - 기존 선교사들이 주도하는 교단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이 단체에 적극 참여 - 신흥우가 속해 있던 감리교에서 먼저 이 운동을 배척하기 시작하였고 장로교는 1935년 총회에서 이 운동이 장로교 교리에 배치되는 위험한 단체이며, 따라서 모든 장로교 목사들이나 평신도들이 여기에 가담하지 말 것을 권고하는 결정을 내림 - 이 운동은 신흥우의 자유분방한 생활과 친일적인 성격으로 결국 실패함 - 주도인물이었던 전필순, 정춘수, 박희도 모두 1943년에 조직된 조선혁신교단에 앞장섰던 친일파였고, 이후 반민특위에 회부되었음.
◎ 이용도 목사와 이단성 문제
남에게 배우고자 했던 ‘학생심’의 소유자 이용도 목사가 교계로부터 비판을 받은 것은 그의 사역 말기의 일 - 1932년 가을 입신상태에서 예언을 하던 신학교 여성 유명화를 가리켜 ‘주님’이라고 불렀다는 설이 퍼지면서 이용도를 이단으로 의심하기 시작 - 이용도 목사는 이들 예언자들을 하나님의 예언자들로 믿고 그들의 신탁을 성령의 역사로 받아들이게 됨 - 이용도가 이들 예언자들을 인정했던 이유 중 하나는 이들의 생활이 건전했기 때문 - 길선주 목사는 이들의 예언이 성경과 별도로 감정에서 비롯되었음을 비판하면서, ‘마귀의 역사’ 라 규정 - 또한 이용도 목사의 소개로 평양 교계에 소개됐던 한준명 목사를 사람들이 ‘거짓 예언자, 사기꾼,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로 비판하면서 이용도 목사도 비판하게 됨 - 이용도 목사는 기성 교단의 핍박을 받는다는 이유로 한준명 목사를 수용하여 줌 - 이용도는 ‘99가지의 흠이 있어도 한 가지 좋은 점을 사랑하여 전체를 사랑한 무차별적 사랑의 사람’이었다고 변종호는 변호.
◎ 김교신과 무교회주의
1930년대 일본의 황국신민화 정책의 와중에도 민족의 자존심을 끝까지 지켜준 인물이 바로 김교신 - 일본에서 유학했으면서도 친일로 전향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조선 사람으로 남아 있기를 원했던 민족주의자이자 교회의 제도와 가견적인 교회관을 거부하고 불가견적인 교회를 유일한 교회로 주창하며 기성교회를 주저하지 않고 공격했던 예리한 비평가 - 일본에서 우찌무라 밑에서 공부하고 동료인 정상훈, 함석헌, 송두용, 류석동, 양인성과 함께 귀국 후 성서조선을 창간 - 1942년 성서조선 158호 권두언 ‘조와: 개구리의 죽음을 슬퍼함’이 문제가 되어 성서조선이 폐간되고 1945년 45세의 일기로 소천.
성서조선 창간호에서 ‘우리는 오직 성서를 조선에 주고자 한다....영원한 새로운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라’고 주장 - 끝까지 창시개명을 거부하고 서양선교사들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음 - 1936년에는 ‘내가 내촌선생에게서 배운 것은 무교회주의가 아니요, 성서의 진리였다’고 고백 - 1927년 7월 창간사에서 ‘그리스도보다 외인을 예배하고 성서보다 회당을 중시하는 자의 집에는 그 발의 먼지를 털지어다. 성서조선아 너는 소위 기독교 신자보다도 조선혼을 가진 조선 사람에게 가라’고 기록 - 구원은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명백히 하는 것이 무교회주의의 사명으로 봄 - 기성교회가 갖기 쉬운 지나친 교권주의, 물량주의를 경계하고 단순한 예배당을 중시하는 사고에서 그리스도인의 모임 자체를 교회의 신성한 본질로 고찰해야 할 필요성을 제시함.
● 교회의 친일행각과 신앙적 변절
◎ 일제의 민족정기 말살 정책
3.1운동 후 사이또 총독이 부임하여 문화정책을 실시 - 이것이 기독교와 갈등을 일으킴 - 1925년 남산신궁이 완공되었고 면 이상에 1개씩 전국에 2,229개의 신사를 설립하여 전국민에게 신사참배를 강요 - 신사의 기원은 일본의 가미(神)에 대한 신앙과 이에 대한 제사의식에서 출발 - 명치이래 신도는 일본의 국교가 됨 - 자연물, 역사적 인물, 조상, 권력자들을 ‘가미’로 섬김 - 1931년 만주사변 후부터 본격적으로 강요 - ‘신사참배는 애국적 국가 의식이니 모든 국민이 반드시 지켜야 할 마땅한 생활규범’이다 - 신도는 일본 조상의 영과 국가 공로자의 영, 순국 군인들의 영을 숭배하는 종교로 한국사람은 자기들을 괴롭힌 일본 조상과 죽은 군인의 숭배를 강요당한 것.
▶ 신사참배 논쟁
일제시대 한국교회가 만난 가장 큰 박해는 1936년부터 45년까지 있었던 신사참배 강요 - 1911년 105인 사건이나 1919년의 삼일운동 탄압보다도 더 크고 직접적으로 기독교 신앙에 위협을 가했던 운동.
◎ 신사의 본질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조선을 일본의 황국신민으로 만들려는 일환으로 시작 - 남산에 조선신사조영공사를 1925년에 완성하고 전국에 크고 작은 무수한 신사를 건립 - 일제는 신사를 종교적인 차원이 아니라 국민의 국가에 대한 예의 차원이라 선전 - 그러나 ‘신사와 조선’을 쓴 ‘오야마’조차도 ‘신사를 종교라 칭할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종교가 되지 않으면 아니된다’고 기록.
◎ 신사참배 강요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과정에서 가장 우선순위를 둔 곳이 기독교 학교 - 천주교회는 1936년 ‘신사참배는 종교적 행사가 아니고 애국적 행사이므로 그 참배를 허용한다’는 교황청 발표이후 참배하였고 감리교도 국민의례에 불과하다며 공식적으로 참배하기 시작 - 남장로교 선교부 총무 풀톤은 1937년 2월에 ‘모든 기독교 학교가 폐교되고 심지어 한국 선교지에서 철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신사에 참배할 수 없다’는 풀톤성명을 발표 - 이후 기독교학교는 폐교되거나 자진 폐교하게 됨.
◎ 신사참배 반대운동
1935년 11월 14일 야스다게 평남 도지사는 도내 전학교에 신사참배 명령을 내림 - 기독교계 학교의 반대 - 전국 각 도에서 도내 전학교에 신사참배 명령을 내렸으나 기독교계 학교가 거부하여 폐교되거나 자진폐교함 - 카톨릭, 감리교에 이어 장로교도 1938년 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 - 이 결의에 반대한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펼쳐짐 - 이기선 목사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펴기 위해 자신이 사역하던 평북 의주의 북하단교회를 사임하고 전국에 부흥회를 인도함 - 반대운동을 펴던 목사들의 결의내용을 보면 신사참배를 하는 학교에 자녀를 입학시키지 말 것,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일으켜 현실 교회를 약체화내지 해산시킬 것, 신사참배 반대 신도를 규합하여 가정예배를 드리며 그것을 육성하여 교회를 신설할 것. 신사참배하는 교회에 출석하지 말 것, 신사참배한 목사에게 성례를 받지 말 것, 신사참배하는 교회에 십일조나 연보를 하지 말 것 등이다 - 일제는 신사참배 반대를 주도하는 목회자를 투옥하고 교회를 폐교시켰으며 교단을 해체시키기도 함.
1942년 3월 일본은 한국의 기독교를 일본 기독교 조선혁신교단으로 개명하고 성경과 찬송가도 일부 삭제함 - 그해 12월에 성결교 교단지 활천지 폐간, 서울신학교도 폐교시키고 예수재림을 주장한다 하여 성결교 목사,장로,집사등 300명 검거후 1943년 12월 29일 성결교 해체, 이후 교회를 군수공장으로 사용함 - 성결교 해산 성명서의 내용 중 ‘여호와 이외 신이 없다는 사상을 선포하여 온 것은 실로 국민사상을 혼미에 빠뜨린 것으로 그 죄를 통감하는 바입니다...자발적으로 해체하게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해산을 주동한 인물은 이명직 목사.
신사참배 반대로 2천여명의 성도가 구속되었고 50여 명이 고문 끝에 순교하였고, 200여 교회가 폐쇄됨.
신사참배 반대를 주도했던 인물들 - 박관준, 안이숙, 이기선, 한상동, 주기철, 손양원, 최봉석, 이인재, 채정민, 최수옥, 고흥봉, 김화준, 최정희, 오윤선, 손영복, 최덕기 등.
◎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
1. 박봉진 목사(성결교) - 철원성결교회 담임으로 있던 중 신사참배 반대로 투옥 후 순교.
2. 이기풍 목사(장로교) - 13년동안 제주도 복음화에 헌신하던 중 신사참배 반대로 순교.
3. 유관순(감리교) - 이화학당 재학 중 고향으로 내려가 만세운동 주도 - 주동자가 누구냐고 물으면 ‘하나님이다’라고 대답 - 그의 밥에 쇳가루와 모래를 섞어 주어 위장을 파괴시켜 죽게 함
4. 신석구 목사(감리교) - 3.1.운동 참가로 구속 후 재판시 ‘오늘에 형식상으로 조선 독립이 성립되지는 않고 있으나 씨를 뿌리는 사람이 반드시 추수가 있을 것을 판단하고 일하는 것처럼 반드시 조선 독립의 열매는 거두어질 것임에 틀림없다’고 대답 - 1942년 대동아전쟁 승리 예배를 거부한 것이 죄가 되어 또 구속 - 수감 중 해방으로 석방됨 - 해방 후 인민공화국 재판에서 10년형 선고받고 복역 중 인민군이 퇴각하던 1950년 10월에 처형됨.
5. 주기철 목사(장로교) - 평양신학교 학생들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 신학생 장홍련이 평북노회장 김일선의 기념식수를 도끼로 찍어버림을 시작으로 반대운동을 전개 - 장홍련을 사주했다는 명복으로 주기철 목사 구속 - 1940년 일본 경찰이 설교를 하지 말 것을 요구할 때 ‘하나님에게서 받은 설교권인데 경찰이 그만두라고 해서 그만둘 수 있겠느냐’고 하였고 ‘그만두지 않으면 체포한다’는 말에 ‘설교는 내가 할 일이고 체포는 당신이 할 일이다’고 대답 - 신사참배 반대로 인해 1940년 평양노회에서 목사직 파면 - 수감 중 고문으로 순교.
예수를 버리는 것이 죽는 길이며, 예수를 따라 죽는 것이 정말 사는 것이라 자각 - 이 민족이 죄를 자복하고 주께 돌아오는 바로 그것이 민족의 구원과 해방의 출발이라 생각 - 당시 정치적 민족주의자들과의 차이.
6. 최봉석 목사(장로교) - ‘천황이 높은가? 하나님이 높은가?’라는 질문에 ‘하나님이 높다’고 대답하였고 ‘예수가 두 번째 와서 세상을 심판하는가’라는 질문에 ‘예수님이 두 번째 와서 심판도 하고 천황도 죽는다’고 대답 - 고문 끝에 순교.
7. 박관준 장로(장로교) - 십자의원을 경영하던 의사로 안이숙 성도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1939년 3월 22일 종교법안이 상정되는 날 일본 국회 2층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사명자’이다 소리를 지른 후 경문 ‘일본은 유황불에 망한다’를 1층으로 던짐 - 즉시 체포 후 국내로 이송되어 수감 중 70일 금식을 계속하다 순교.
8. 한상동 목사(장로교) - ‘천황도 사람이다’하여 신사참배 반대투쟁 전개 - 수감 중 해방이 되어 출감.
9. 안이숙 성도(장로교) - 신사참배를 거절하여 교사로 있던 학교에서 축출 - 일본말을 잘 하여 박관준 장로가 일본동행을 요구 - 국회사건 후 체포 - ‘천황은 사람이며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으로 간다’는 말로 심한 고문을 받고 수감 중 해방이 되어 출옥됨 - 일본은 45년 8월 18일 교도소에 수감중인 전 기독교인을 사형집행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음.
10. 정태희 장로(성결교) - ‘내 생명이 있는 한 나를 버리지 않는 예수를 내 어찌 배신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신사참배 반대 - 고문으로 순교
11. 조만식 장로(장로교) - 3.1운동에 가담하기 위해 오산학교 교장직을 사임함 - 그를 통하여 학교에 어려움이 올 것을 방지하기 위해 - 1922년 당시 국민 생필품의 80%가 일본산이라는 것을 보고 조선물산장려회 결성하여 국산품 애용을 권장 - 평생 짧은 두루마기를 입고 살 정도로 검소한 생활과 절제 생활을 함 - 조선일보 사장으로 있을 시 양복을 입을 것을 권고하자 ‘나 조만식을 만나지 입은 옷을 만나느냐’하며 거절함 - 1941년 윤치호, 이광수가 평양에서 학병지원을 권장하는 연설을 하고 있을 때 일제는 조만식 장로에게도 연설을 부탁하였으나 ‘나는 남은 여생 입을 다물고 살기로 작정한 사람이오, 돌아가시오’라고 하며 강력히 거절 - ‘기독교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연설에서 첫째 하나님과는 믿음으로, 둘째 자기와는 극기(인내)로, 셋째 대인관계는 헌신이라고 강조 - ‘내가 죽은 뒤에 비석을 세우려거든 비문을 쓰지 말고 그 대신 커다란 눈동자 두 개를 새겨주오. 그러면 저승에서라도 한눈으로는 일본의 망하는 것을 보고 또 한 눈으로는 조국의 자주독립을 지켜 볼거야’ 라고 함 - ‘오늘날 우리 민족이 이렇게 가난하게 된 원인은 자기 것을 천시하고 남의 것을 귀히 여기는데 있다’고 질타함 - 해방 후 건준 평양위원장, 조선민주당 당수를 역임하다 전쟁중 피난을 거부하다 죽임을 당함.
◎ 신사참배를 결의한 교역자들
1941년 1월 일제는 창씨개명과 한국말과 글의 사용금지를 명령하여 한국인들을 완전한 일본인으로 만들려고 함 - 김치 대신 다꽝, 치마 대신 몸배, 어린이들 놀이도 고무줄 가지고 놀도록 하고, 윷보다 화토를 장려하여 의식구조를 완전히 망가뜨려 다시는 일본에 항거하지 못하도록 정책을 시행 -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이기 이전에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정책 - 개신교중 가장 먼저 신사참배를 결의한 감리교의 신사참배 결의문을 보면 ‘아 국체의 진 정신과 내선일체의 원리를 실현하야 총후 국민의 의무를 이행하고 신체제에 순응함은 아 기독교인의 당연한 급선무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음.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한강, 부산 송도에서 일본 귀신대장 ‘미스 기바라’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 - 갈홍기, 유형기 목사등은 목사들을 교육한 후 세례 후 머리에 일장기를 두르고 남산 조선신궁까지 구보한 후에 신사참배를 하도록 함 - 해주장로교 김응규 목사는 천황사진에게 배례하기를 건의할 정도 - 1937년 8월 1일 승동교회에서 ‘시국설교 및 기도회’를 개최하여 내선일체를 재인식할 것과 일본의 전승을 위하여 매일 아침 기도할 것을 결의 - 1940년 조선신학교를 개설한 승동교회 차재명 목사는 ‘충량 유위한 황국의 기독교 교역자를 양성한다는 목적으로 수업한다’고 함 - 신흥우는 ‘우리는 조선인이기 전에 일본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위대한 구주 예수는 먼저 그 나라를 사랑하고 가르쳤다. 그 나라는 바로 대 일본제국이다’고 주장함 - 정인과는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것은 국민으로서 하지 못할 자국에 대한 반기를 드는 것’이라 하여 일본을 자국이라 함 - 총독부 강요에 따라 교회마다 국기게양대를 만들어 일본기를 게양하게 하였고, 교인들에게 국기에 대한 배례, 동방요배, 국가봉창, 황국신민서사제창등을 하게 함 - 교회 안에 ‘가미다나’를 설치하고, 예배를 드리기 전 여기에 절을 먼저하고 천황에게 동방요배를 한 다음 예배를 드림 - 목사들 복장은 일본식 군복 - 기독교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이 신도의 창조설화와 위배된다고 하여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를 고백하지 못하게 하여 이 문장들을 빼고 신앙고백하게 함 - 1944년 감리교 정춘수 통리사는 ‘구약성서와 신약의 묵시록을 사용치 말고 사복음서만 가지고 설교하고 예배를 주1회만 드리고 나머지 시간은 노력 봉사할 것’을 결의 - 1940년 성결교 이명직 목사는 ‘우리는 성서교훈에 의하여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로 난 줄을 믿으며, 대일본제국을 통치하시는 천황을 봉대하고 국헌을 중히하며 국법을 순종한다’로 성결교 헌법을 개정 - 또한 그는 ‘황실은 신성불가침이요 절대요 통치자이므로 공경해야 한다. 신자는 제도에 순응해야 한다’고 활천 219호에 기고 - 1938년 27차 장로교 총회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 - 우리들은 신사가 종교가 아니며 동시에 기독교 교리에 반하지도 않는 본뜻을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인 점을 자각한다. 따라서 이제 신사참배를 솔선 실시하고 나아가 국민정신 총동원운동에 참가하며 또 현 시국 하에서는 총후 황국시민으로서 충성을 다할 것을 약속한다 - 1938년 홍택기, 김길창, 양주삼, 김종우, 이명직 목사등은 기독교 대표로 일본의 이세신궁 가시하라신궁 등에 참배함 - 1943년 감리교 총리가 된 정춘수 목사는 ‘기독교조선감리교단으로 혁신을 단행하여 명실공이 대일본의 종교라는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고 강조하며 ‘각기 본분을 다하여 군국에 충성을 보답한다’라고 주장함 - 예배당을 매각하여 일본의 전쟁비용으로 헌납함 - 조선기독교는 교단별로 일본 교회로 통합하여 ‘일본 기독교 조선 장로교단’ ‘ 일본 기독교 조선 감리교단’등의 이름으로 교단이름이 개정 - 1945년 7월 19일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합시켜 버림
대표적 친일 기독교인들 - 유형기, 정춘수, 정인과, 갈홍기, 윤치호, 구자옥, 양주삼, 신흥우, 김활란, 이명직, 홍택기, 박응률, 박인현, 길인섭, 김길창, 심익현, 오문환, 전영도, 채필근, 송창근, 김관식, 박희도, 차재명, 김영주 등.
◎ 징병제, 정신대징집을 찬양한 교역자들
1942년 총독부에서 징병제를 발표하자 친일파들은 일제히 환영함 - 1942년 5월 11일 기독교 대표들은 승동교회에서 ‘징병제 시행감사 전 경성 신도대회’를 개최하고 성명서를 제작 - ‘합방 이후 이 날이 오기를 얼마나 앙망하고 있었던가....지금이야말로 황국신민이 되는 대도가 열린 것이다....아등기독교는 솔선 몸으로서 이것이 지도에 당한 정신대가 되기를 전 동포에 호소하고 또한 서약하는 바이다’ - 김활란은 1942년 12월 ‘신시대’에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반도여성은 웃음으로 내 아들과 남편을 전장으로 보내야 한다’며 적극 협력을 강조 - 선전선동만 한 것이 아니라 군수품 제작을 위해 교회 종 2,500여 개를 헌납 - 정인과 목사를 중심으로 한 조선야소교장로교 애국헌납 기성회에서는 비행기 한 대와 기관총 구입비를 바침 - 감리교는 교회를 매각하여 군납헌금을 함 - 1942년 7월 장로교는 조선 장로호라는 해군 비행기와 육군 비행기를 미군과 싸워 이겨달라고 헌납하였으며 이 헌납예식은 신도의식으로 거행.
일본 매춘부등을 중심으로 운영되던 군 위안소도 1938년부터 성병들의 문제 등으로 인해 안전한 한국여성들을 모집하여 운영하기 시작함 - 정신대 징집을 잘 한 관리들을 포상하는 정책을 통해 무자비하게 징집해 감 - 심지어 12-14세의 국민학생들도 징집해 감 - 정신대를 많이 보내는 학교에게는 교장이 영전되는 특혜를 줌 - 1945년 5월까지 강제 징용자는 210(50)만명, 정신대로 끌려 간 사람은 20만명에 이름.
◎ 태평양 전쟁을 찬양한 교역자들
1940년 프랑스와 네델란드가 나치스에 항복하여 동남아시아에서 그들의 군사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자 일본은 이 기회를 틈타 이 지역을 점령하기 위하여 태평양전쟁을 도발 - 1941년 12월 20일 미.영 타도 좌담회가 박희도 목사의 사회로 개최됨 - 그 자리에서 나온 발언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백락준(조선야소교서회 편집총무) - 이렇게 숭고하고 위대하고 엄숙한 한낱의 전쟁을 가진 적은 없었다 - 해방후 문교부 장관과 연세대 총장 역임.
2. 전필순 목사(조선장로교회 부총무) - 이 성전의 목적관철을 위해 전심 전력을 바쳐서 싸울 것입니다 - 이후 장로교 통합측 총회장이 됨.
3. 정춘수(조선감리교 총감독) - 복음의 해독 중 하나는 이 세상은 장차 멸망할 것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그 완전한 함락이 시간문제임을 믿을 때 형언할 수 없는 유쾌함과 감격에 휩싸이는 것입니다 - 해방후 천주교로 개종, 평신도로 지냄.
4. 김인영 목사(조선감리교 신학교장) - 미국인은 선교와 함께 투자를 행하고 종교와 함께 장사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5. 한원석 목사(장로회보 주간) - 그들은 입으로는 정의와 인도,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지만 우리들 유색인종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우월감을 갖고서 우리를 이용했을 뿐 베푼 것은 멸시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6. 양주삼 목사(조선성서회 행정총무) - 우리는 오직 황국과 더불어 생사를 함께 할 결심이 있을 뿐이다.... 드디어 반도 청년학도 제군에게도 무인으로서 출전할 기회가 주어졌음을 나는 한없이 기뻐한다.
7. 최태용 목사(복음교회 감독) -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것을 일본국에 바치도록 신에게 명령받고 있는 것이다. 징병제 실시가 그것이다. 우리는 일본국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박희도는 1939년 동양지광을 창간하고 권두언에서 ‘내선인의 뇌리에 2개의 대립된 민족의 존재를 연상시키는 것 같은 관념을 불식시키고’라고 주장하며 징병제가 실시되자 동방을 향해 엎드려 경배하며 ‘감격에 목이 메였다’고 함.
채필근은 ‘국민 정신 총동원이 필요한 이때 종교인들도 국가에 충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이단이라고 말하는 자야말로 도리어 이단이다’고 주장.
◎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던 일본인과 한국인
1. 일본 동경대학 총장이며 기독교 신자였던 야나이하라 - ‘일본은 망해야 하며 일본은 망할 것이다’라고 외치며 데모를 함.
2. 해주의 감리교 김만식 전도사 - 중,일전쟁은 성스러운 전쟁이 아니라 죄악이다.
3. 안동교회 이윤재 장로 - 우리 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 때 오히려 한글을 연구하여 우리말 사전을 출판한 일로 1943년 함흥감옥에서 순교.
4. 홍천의 모곡감리교 남궁억 전도사 - 벚꽃 심기 운동이 한창일 때 무궁화 심기운동을 펴고 민족정신을 고취시킴.
5. 조만식 장로 - 징병제 찬양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
● 해방후 교회의 분열
해방이후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한국교회 재건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됨 - 재건운동의 5원칙 발표 - 교회의 지도자들은 모두 신사참배를 했으니 권징의 길을 취하여 통회 자복한 뒤 교역에 나설 것, 권징은 자책이나 자숙으로 하되 최소한 2개월 간 통회 자복할 것, 목사나 장로가 휴직 중에는 집사나 평신도가 예배를 주관할 것, 교회 재건의 기본 원칙을 전국에 전달하여 일제히 시행할 것,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도 복구 재건할 것 - 홍택기 목사는 ‘교회를 등에 지고 일제의 강제에 할 수 없이 굴복한 사람의 노고가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와 책벌은 하나님과의 직접 관계에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다’라고 하면서 재건원칙에 반대하며 분열되기 시작.
◎ 북한 교회의 재건운동
1945년 9월 4일 평양노회가 산정현교회에서 회집하여 자복하고 3일간 금식하면서 부흥사경회를 개최 - 신사참배한 목회자는 최소 2개월간 휴직하면서 통회자복할 것과 그동안 집사 혹은 평신도가 예배를 인도할 것, 신학교를 복구 재건할 것 등의 기본원칙을 발표 - 신사참배한 목회자들이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고생한 사람이나 그 고생은 마찬가지였고, 교회를 버리고 해외로 도피생활을 했거나, 혹은 은퇴생활을 한 사람의 수고보다는 교회를 등에 지고 일제의 강제에 할 수 없이 굴한 사람의 수고가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공박하기 시작함 - 실망한 이기선 목사가 평북 지방에 교회 30여곳을 개척하고 1949년 5월에 재건교회라는 간판을 달고 새로운 단독교회를 출발 - 이것이 '재건파‘ - 이들은 신사참배 죄를 회개하지 않은 교회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
◎ 북한에서의 기독교 박해
일제시대 친일행위에 대한 철저한 친일 청산을 감행했던 북한정권에 있어 친일에 앞장섰던 교회와의 갈등은 필연적 - 북한정권의 행사와 별도로 기독교계에서는 3.1절 행사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약 일만여명의 성도가 모여 따로 개최 - 1946년 3월 2일 정치보위부에서는 교역자 일제 검거를 시작 - 교역자가 없어 예배를 드릴 수 없는 형편으로 교회가 자동해산 될 위기에 처함 - 정권과의 갈등은 토지개혁 문제로 인해 더욱 심화됨 - 1946년부터 토지개혁을 실시하면서 모든 교회 재산을 정부에 헌납하라는 지시를 내림 - 토지개혁 환영대회를 마치고 농민들이 교회를 난입해서 난동을 부리는 일들이 빈번 - 1946년 11월 3일 일요일 선거를 실시하자 5도 연합회에서는 선거에 반대하고 김일성 정권에 진정서를 보냈으나 김일성은 ‘과거 일제 시대에는 주일에도 신사참배를 하고 보국대에 나가 일한 자들이 신성한 선거를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며 정권에 비협조적인 교회를 파멸시킬 계획을 비서인 강량욱 목사에게 지시함 - 주일선거를 평일로 바꾸어 달라고 교회대표들이 모여 청원하였으나 거절당함 - 투표 당일인 주일에 온 종일 교회에 머물며 투표거부운동을 벌임 - 투표에 참여하지 않은 교역자와 교인들을 정치보위부로 끌고가서 고문을 가하기 시작함 - 정권에 의한 핍박을 피해 많은 교역자들이 월남함 - 정일선, 송정훈, 김철훈 목사 등은 ‘어떻게 목사가 자기만 살기 위해서 교회를 버리고 남으로 탈출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면서 탈출을 반대하다 순교를 당함 - 조선민주당을 결성하여 50만명의 당원을 확보했던 조만식 장로도 ’이 가엾은 백성을 남겨두고 나만 살겠다고 월남할 수는 없다. 나는 살아도 북한 동포들과 같이 살고 죽어도 북한 동포들과 같이 죽을 것이다‘하면서 월남을 거부.
◎ 기독교도 연맹조직
1946년 11월에 평신출신이며 김일성의 외조부의 육촌동생인 강량욱 목사에 의해 기독교도 연맹이 조직됨 - 여기에 가입하지 않는 교역자는 강단에 설 수 없다는 것과 1947년 4월까지 가입할 것을 강요하여 많은 교역자가 가입 - 1948년부터는 평신도의 가입도 강요 - 1948년 9월 1일까지 85.118명의 교역자와 신도가 가입 - 기독교도 연맹조직 이후부터 예배당 정면에 김일성 초상화를 걸게 됨 - 총회장에 김익두 목사 선출 - 한국전쟁 당시 사살됨.
김용진, 배정덕, 김인준, 박대선, 윤창덕 목사등은 ‘기독교도 연맹은 김일성을 위한 어용집단’이라고 가입을 거부 - 기독교도 연맹의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 - 우리는 김일성 정부를 절대 지지한다, 우리는 남한 정권을 인정치 않는다, 교회는 민중의 지도자가 될 것을 공약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솔선하여 참가한다 - 기독교도 연맹 회장 김익두 목사는 1950년 8월 8일 비행기 전차의 군납헌금 10만원을 헌납한 후 ‘미제의 무력침공을 반대한다’라며 기독교인 전쟁 승리 총 궐기 대회를 개최 - 인민위원회 부수상이었던 홍기주는 목사.
◎ 북한 교회의 정치운동 시도
일제시대를 통해 교회는 비사회적, 몰역사적, 몰민족적 성격을 띠었다고 비판을 받았음 - 1945년 9월 평북 신의주 제일교회 목사 윤하영과 신의주 제2교회 목사 한경직은 ‘기독교사회민주당’을 결성 - 이후 ‘사회민주당’으로 개칭 - 평남에서는 김화식 목사를 중심으로 ’기독교자유당‘창당이 모색되었으나 창당 하루 전 모두 검속되어 대다수가 옥사하거나 실종됨.
◎ 3.1독립운동 기념식과 교회의 탄압
1946년 3.1절 기념예배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드리기로 함 -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에서는 자신들과 함께 자신들이 주관하는 기념행사에 참석할 것을 요구 -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는 없다 하여 거절 - 반대하는 교역자 60명을 검거 - 이 사건을 계기로 우익기독청년들이 남한하여 내려오기 시작 - 1946년부터 시행된 토지개혁은 '토지는 밭갈이하는 농민에게'라는 구호를 내걸고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하에 이루어짐 - 모든 재산의 국유화정책 시행 후에 교회는 지금까지 자신들이 썼던 예배당을 임대료를 내고 사용하기도 함 - 신학교도 평양 장로회신학교와 감리교의 성화신학교를 1950년 3월 강제통폐합 - 당시 평신의 600, 성화의 200, 총800명의 학생 중 사상검증을 거친 후 120명만 선출하여 공부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강제 제적시킴.
● 남한에서의 재건운동
◎ 미군정의 한반도 인식의 왜곡
하지 장군은 한반도에 상륙하기 전 선발대 해리스 준장에게 ‘한국은 일본제국의 일부로서 우리의 적이다’라고 선언함 - 한반도는 일본 영토의 일부로 처리되어 연합군의 점령대상이 됨 - 치안유지 명분으로 미 군정은 일본 앞잡이 경찰 80%를 그대로 채용하고 국군 창설 준비로 경비대를 조직할 때도 일본군 출신 98%로 군사영어학교를 개설하여 조직
◎ 감리교의 분열과 통합
해방후 부흥파와 재건파로 나뉨 - 부흥파는 일제의 잔재와 부역 교역자들의 완전 퇴진을 주장했고, 재건파는 죄가 많고 적음을 논할 것이 아니라 누구나 죄를 통회하는 신앙부흥을 통하여 교회를 재건하자고 함 - 1949년 4월 20일 합동에 성공했다가 1954년에 다시 분열 후 1958년 8월 재통합이 이루어짐
◎ 성결교
해방 후 총회장에 박현명 목사, 신학교 교장에 이건 목사를 추대 - 박현명 목사는 해산성명서에 서명하였고, 이건 목사는 징병제를 찬양하였지만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거나 항의하거나 친일파를 규탄하는 일이 없어 교단이 분열되지 않음.
◎ 기독교 사회주의자와 사회주의 목사들
1930년대 들면서 기독교가 점점 현실도피주의적으로 개인의 안전만 추구하자 신비주의와 사회주의가 극성을 부리기 시작 - 김익두, 길선주, 이용도 등의 신비주의 신앙운동 및 재림과 종말신앙이 활발 -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현실에 시정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하자 사회주의자로 변신 - 장로교 전도사였던 여운형 등이 대표적 인물.
1. 이동휘 - 1918년 볼세비키의 도움으로 하바로스크에서 한국 최초로 한인 사회당을 조직하여 당수가 됨 - 1919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가 됨 - 1920년 고려 공산당을 조직 - 1934년 저격당했다는 설과 1938년 소련정부에 의해 처형당했다는 설이 있음.
2. 여운형 - 1910년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마치고 서울 승동교회 전도사로 봉사 - 1920년 한국 독립을 지원해 주겠으니 고려 공산당에 가입하라는 소련 보텐스키의 권유에 공산당에 가입 - 최초로 공산당 서적을 번역한 사람 - 1933-36년 조선일보 사장을 역임 - 해방후 건국준비위원회를 전국적으로 조직 - 일제가 조선을 떠나면서 일체의 권한을 여운형에게 이임하였으나 미군이 이를 인정하지 않음 - 1947년 근로 인민당을 조직하여 당수가 됨 - 1947년 한지근에게 저격당함.
여운형은 오늘의 기독교는 벌거벗은 나사렛 예수 골고다의 희생의 예수를 잊어버리고 교회를 강도의 소굴로 만든 매매의 기독교인들이 가득 차 있다. 이러한 현상은 직업적 목사들에게 더욱더 그렇다. 그 안에 있는 청년들은 마치 소경을 따라가는 소경과 같고 이리를 따라가는 양무리와 같아 참으로 불쌍한 교인들이다라고 주장 - 기독교가 사회에 공헌한 것이 금연, 금주, 축첩 반대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어떻게 이 사회를 정의로운 사회로 만들겠는가 하면서 기독교는 극단적 자본주의와 계급사회라 규탄함.
3. 이대위 목사 - 법을 지키는 정신과 분배의 도덕성이 확립되는 데는 기독교 정신이 앞서서 확립해 주어야 하는데 한국 기독교는 극단적 자본주의 체제로서 기독교 자체부터 법의 정신과 분배 정신을 어기고 있기 때문에 항시 사회주의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다며 사회를 개혁하려면 우선 기독교 자체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
이만규, 최문식(대구 폭동 주동), 이재복 목사(14연대 반란 조종, 남로당 서열4위)는 기독교의 사회개혁은 그만두고 기독교를 사회에 이로운 단체가 아니라 이 사회에 해독만 주는 단체라 비판하며 과격한 혁명을 주장 - 이재복은 친일 기독교 인사들이 해방 후에도 고스란히 교권을 유지하는 상황을 보고 혁명을 통해서라도 바른 기독교가 뿌리내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남로당에 가입했다고 체포 후 스스로 털어놓음.
◎ 한국전쟁과 기독교
1949년 소련군이 철수하면서 장비를 인민군에게 인계하므로 인민군의 전력이 증강되기 시작함 - 이승만은 기회 있을 때마다 북진통일을 부르짖음 - 1949년 7월 신성모 국방부 장관은 우리 국군은 대통령의 진격명령을 대기하고 있다고 함 - 미군은 한국의 군사원조 요청을 거절하였는데 물자를 지원해주면 북진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 - 1950년 1월 애치슨은 소련을 자극하지 않는 발언을 함 - 인민군 작전국장 유성철은 1950년 8월경에 남한이 북침할 것으로 판단되어 남침하였다고 증언 - 김일성도 앉아서 죽느니 싸우다 죽자고 북한 백성들을 설득하게 됨 - 남한정부는 6월 23일 경계령을 해제하고 전후방 장병들에게 휴가와 외박을 보냄 - 전쟁 발발후 6월 27일 정기뉴스 시간에 이승만 장로는 미군이 지원하기로 했으니 서울 시민은 피난을 하지 말라고 방송하고 28일 새벽 2시 30분에 한강대교를 폭파시켜 버림 - 6월 27일 교역자 40여명이 모여 서울 사수 결의를 다짐 - 한경직 목사는 우리가 왜정 때도 맥없이 신사참배를 하고 저항도 못하고 해방을 맞이했고 또 이북에서 양들을 버리고 월남했으니 이제는 참회하는 의미에서도 우리는 양을 지키고 또한 수도를 지킬 순교적 각오를 하자고 역설하고 바로 도망쳐 버림 - 서울 수복후 도강파와 잔류파의 싸움 - 도강파는 잔류파에게 왜 피난하지 않고 인민군에 협력하였느냐고 공격하고 잔류파는 서울을 사수하자 결의해 놓고 도망친 자가 누구냐? 미안한 마음으로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고 위로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논박 - 이승만 정부도 부역한 자들에 대한 극단적 재판 가운데서도 잔류파 교역자에 대해서는 처벌하지 않고 내사를 중단시킴 - 천주교는 북한에서도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하지 않고, 왜정때도 일본을 찬양하지 않았으며 전쟁과 동시에 교회해산명령을 내리고 피난을 권하여 피해가 적었음 - 한국전쟁 기간 동안 많은 교회와 교역자들이 피해를 입게 됨.
● 고신과 기장, 합동과 통합의 분열사
1945-59년까지의 시기는 분열과 대립의 시기.
1940년 조선신학교 설립 - 평양신학교와의 신학적 단절, 성경무오 거부, 세계조류의 수용, 유수한 신학교 육성을 모토로 내걸고 황국의 기독교 교역자를 양성함을 목적으로 설립 - 김재준은 성경은 구원에 관한 책이지 과학에 관한 책이 아니며, 따라서 과학이나 역사적인 오류를 담고 있다고 주장 - 세계의 다양한 신학자들을 국내에 소개 - 한국인이 주도하는 신학교를 설립해 한국인의 심정과 상황을 반영하는 신학교육을 제창했다는 면에서 의의가 있음.
박윤선 목사를 주축으로 조선신학교의 진보주의 신학교육에 대한 반동으로 고려신학교 설립 - 평양신학교를 역사적으로 계승하고자 함 - 개혁주의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던 박윤선 박사 - 개혁주의 유산을 계승하지 못하고 반문화주의와 반지성주의를 반영하는 근본주의라는 평가를 받음.
◎ 장로교의 갈등
1947년 4월 17일 51명의 조선신학교 학생이 자신들이 받는 신학교육이 자유주의니 총회가 개입해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청원서를 총회에 제출 - ‘우리는 먼저 신앙은 보수적이나 신학은 자유라는 조선신학교의 교육이념을 수긍할 수 없습니다...자유주의 신학과 합리주의 신학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 그들은 교육 내용중에 모세오경의 모세의 저작권 부인, 제1이사야와 제2이사야의 구분, 성경조성의 외부적 영향, 바벨탑과 노아 홍수의 역사성 부인, 성경의 무오성 부인등이 있다고 주장 - 1947년 9월 박형룡 목사가 만주에서 귀국하여 이 문제를 처리함 - 이 사건을 계기로 보수적인 풍조가 다시 총회를 지배하게 됨 - 1948년 총회에서 조선신학교에 보수적인 교수를 더 영입시키는 것을 골자로 한 조선신학교 개혁안이 통과되었으나 조선신학교에서 거부하였고 이에 총회는 총회의 입장을 반영하는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고 학장으로 박형룡목사를 내정 - 1947년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왔던 박형룡 목사는 여러 선교회와 관계를 맺고, 총회의 인준을 받기 원했지만, 고려신학교 측은 오직 진정한 메이첸주의자들인 독립선교회와만 관계를 맺고, 신사참배를 한 사람들이 주도하는 총회의 인준을 받는 것은 세속화를 의미하는 것이라 주장하며 거부 - 노선의 차이로 박형룡목사는 고려신학교를 떠나게 됨.
◎ 고려신학교의 탄생
출옥파와 친일파의 갈등 - 산정현 교회 한상동 목사가 월남하여 주남선, 박윤선 목사와 만나 1946년 9월 2일 고려신학교를 세움 - 1946년 48회 경남노회에서 고려신학교 인정을 취소하자 1946년 12월 3일 한상동 목사는 ‘불순한 태도를 고침이 없이 그대로 나아가는 경남노회가 바로 설 때까지 탈퇴한다’고 선언하고 67교회를 데리고 신사참배 교역자들과 결별 - 신학교 교장에 박형룡 목사가 취임 - 1947년 경남노회가 자신들의 잘못을 통회하자, 한상도 목사가 49회 노회에서 탈퇴를 철회 - 1948년 4월 고려신학교 교장 박형룡 목사는 메첸파 선교사와 신앙노선 갈등으로 고려신학교 교장직을 사임 - 박형룡 교장이 떠난 후에 1949년 총회에서 고려신학교는 총회인준 학교가 아니기에 학생을 추천해서는 안 된다고 결정 - 1948년 9월 경남노회 49회 노회에서 고려신학교 설립 인정을 다시 취소 - 1952년 10월 경상노회만 따로 총노회를 열고 총회와의 결별을 선언 - 346교회, 210명의 전도사, 56명의 목사가 분립해 고려파를 설립.
◎ 김재준 목사와 기독교 장로교의 출범
평양 경인상업고등학교 교목으로 있을 시 신사참배 반대로 학교에서 축출 - 평양신학교가 폐교되자 김대현 장로의 50만원 헌금으로 19409년 조선신학교를 설립 - 1946년 ‘신학’ 11월호에 ‘정통신학은 신신학보다 더 교묘하게 위장한 정통적 이단이라’고 하자 조선신학교 학생들이 진정서를 제출하여 사건이 발생 - 학생들의 진정서를 보면 ‘신앙은 보수적이나 신학은 자유다’라는 학교 이념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 김재준, 송창근, 정대위, 한경직 목사의 강의에 대한 불만등이 담겨져 있다 - 진정서에 대해 김재준 목사는 ‘성경에는 다소 오류가 있으나 그 속에 구속하는 이치가 있다고 믿는다’고 답변 - 1952년 총회는 장로교 신조 제1조에 어긋나는 것을 가르치는 자들을 징계한다는 결정을 내림 - 조선신학교의 김재준 목사를 겨냥한 결정 - 총회때 김재준 목사의 교수의 면직, 목사직 박탈, 조선신학교 졸업생 교역자 불채용을 결의하자 조선신학교 설립을 주도한 경기노회는 총회의 결정에 불복하고 1953년 6월 한신 대학에서 38차 총회를 개최하고 기독교 장로회라는 이름으로 공식 출범 - 카나다 선교회와 700교회 12만명의 신도가 참여.
◎ 합동과 통합의 분열
☞ 통합측에서 말하는 내용
- 장로회 신학교는 신학교 부지로 국립공원 터를 불하받기 위하여 당시 학교 회계 김창준 장로가 박호근씨를 박형룡 교장에게 소개해줌 - 미국 선교부로부터 지원받은 학교 대지 구입비 2,253만환을 영수증도 없이 박호근씨에게 박형룡 교장이 지불함 - 정부 관원에게 뇌물을 주기로 하고 받아간 돈 - 돈이 사라진 것에 대해 횡령사건으로 규정하고 총회에서 박형룡 교장에 대한 인책 움직임이 있자, ‘인책을 하면 한국에서 보수 정통이 무너진다’며 N.A.E목사들이 반대함 - N.A.E는 김재준 목사를 학교에서 내어쫓았던 51인의 학생과 그 외 10여명이 1952년 7월에 조직하여 12월에 이 단체에 가입한 것. 이 운동의 고문이 박형룡 박사였음 - 박형룡 교장을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박형룡을 반대하는 자들의 신학을 문제삼기 시작 - W.C.C는 용공이요 신신학이요 단일교회를 지향한다고 공격하면서 매도하자 많은 목회자와 장로들이 현혹되기 시작함 - 이 문제로 결국 1959년 44차 총회에서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됨 - 합동은 1962년 박병훈 목사가 주도하는 호헌파가 분열, 김치선 목사가 주도하는 성경장로회로 분열을 거듭하다 1963년 고신측과 합동하였다가 다시 분열됨 - 현재 합동측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분열되어 있음 - 분열하느라 정신이 없는 교단이 사회에 관심이나 제대로 가질 수 있었겠는가.
☞ 합동측에서 말하는 내용
- 한국장로교가 가입해 있는 KNCC의 모체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있자 1954년 명신홍과 김현정을 대표로 파송하여 WCC의 입장과 성격을 파악한 후 보고할 것을 요청 - 서로 다른 상반된 보고로 혼란이 가중됨 - WCC를 찬성하는 이들은 한국교회가 이제는 세계 조류와 맥을 같이하고 보조를 같이하기 위해서라도 WCC에 적극 참여하여 배워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반대하는 이들은 이 단체가 교회의 일치가 아니라 연합을 꾀하고 있는 단체이며, 이를 위해서 신학적인 선을 철폐하여 새로운 신학조류를 받아들였고, 심지어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용공적인 성향이 있다는 것 - 한경직, 박형룡박사를 중심으로 한 양측의 싸움은 성명서 발표와 반박등으로 점점 갈등이 깊어지게 됨 - 1959년 총회전에 남장로교 선교구역 안에 있는 10개 노회가 WCC탈퇴를 선언 - 1959년 9월 24일 44차 총회가 대전중앙교회에서 열림 - WCC문제로 논쟁이 계속되다가 총회가 무산되고, 무산되자 WCC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상경하여 연동교회에서 모여 총회를 속회하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분열을 원치 않으며, 필연코 통합을 이루고 말겠다고 자신들을 통합이라 명칭함 - WCC를 반대하는 이들도 11월 24일 승동교회에서 따로 총회를 개최하고 우리는 결코 분열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의 소원은 합동이라며 자신들을 합동측이라 명명함 - 이것이 이후 교파의 이름이 됨 .
● 1960년대 이후 교회와 신학의 변화
▶ 정체성 파악의 시기
감신의 문화토착화, 한신의 정치, 사회참여의 토착화[민중신학] , 연신의 기독교 민족주의 토착화.
토착화 신학자들은 기독교 신앙이 서구에만 의존하는 것을 반기독교적, 사상적 식민지적 예속이라 함 - 해방신학 등 남미의 토착화 신학에 영향을 받았고 시대적 배경과 정치, 사회적 상황이 새로운 신학을 요구하게 됨.
◎ 토착화운동의 빛과 그림자
토착화의 긍정적인 면은 한국신학을 모색해야 한다는 신학함의 필요성과 거기에 대한 과제를 환기시켜 주었다는 점, 그리고 그들의 학문성과 기독교와 문화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고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세계 교회와의 교류, 세계 조류속에 한국 기독교를 바라보도록 자극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부정적인 면으로는 복음의 지나친 상황화, 상황을 극대화한 나머지 텍스트를 약화시켰다는 점, 종교혼합주의 현상으로 기독교의 정체성 혼동을 불러 일으킨 것을 들 수 있다.
◎ 복음주의 운동의 발흥
전통적인 신앙을 견지하면서도 대 사회적인 책임을 회복하려는 노선이 점점 강해지고 있는 추세 - 역사가 없는 교회, 역사를 도외시한 교회는 성장할 수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
● 해방이후 정부와 교회의 야합의 역사
한국교회 차원에서 친일 문제를 체계적으로 처음 언급했던 사람은 매산 김양선 목사 - 총회의 의뢰를 받고 1954년 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를 집필 - 책에서 해방 이후 교회 분열과 혼란을 가져온 것이 친일 협력자들이었음을 날카롭게 지적 - 결국 이 책은 총회의 인준을 받지 못하고 판매 금지를 당함.
◎ 이승만 정권과 기독교
독립운동가에 대해서는 냉대하고 친일파에 대해서는 보호와 우대를 하여 민족정기의 싹을 자름 - 이승만 정권 당시 소위 반민특위에 의해 일제에 부역했던 많은 목사들이 검거되자 일단의 목사들은 이 장로 대통령을 찾아가 설득을 시도 - 설득의 논리는 소위 '적색분자 색출론'으로서 기독교 지도자들의 일제 부역은 교회를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행위'라로 변호하고 대신 '친일파보다 빨갱이를 잡는 것'이 시급하다는 논리 - 이 설득이 주효하여 반민특위는 4개월만에 해체되었고 그 이후에 친일파 청산에 목소리를 높이는 자는 빨갱이로 매도함 - 6.25전쟁 이전에 월남한 적지 않은 수의 북한 지역 기독교인들이 친일지주 계층이었다는 사실은, 이후 이들이 중심이 된 이승만 정권 이후의 초기 한국 교회의 주류 세력들이 손쉽게 권력에 빌붙고 사대주의적 사고에 찌들었으며 노동자와 농민들의 생존권 요구에 적대적인 이유를 암시해 준다.
이승만 장로는 대통령 선서시 성경 위에 손을 얹고 기도로서 하나님께 감사함 - 제헌국회 때 이윤형 목사가 개회기도를 함 - 1952년 2대 대통령 선거 때 기독교는 이승만을 돕기 위한 선거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그를 도움 - 1960년 3.15 부정선거 때 이승만 장로와 이기붕 권사는 150만 성도들에게 드리는 말씀을 올려 선거 협조를 요청 - 1960년 2월 18일 교계 지도자 초청모임에서 목사들은 이승만 장로를 지지함 - 3.15부정 선거시 이승만과 이기붕의 표가 총 유권자의 표보다 더 많이 나오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 -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 - 이기붕 권사는 총은 쏘라고 준 것이지 가지고 놀라고 준 것이 아니다며 폭력적 진압을 당연시함.
◎ 박정희
1942년 만주군관학교 졸업시 대동아 공영권을 확립하는 성전에서 나는 싸꾸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라고 대표 답사를 함 - 다카키 마사오로 창씨 개명 - 해방이후 장교로 좌익운동을 하다 구속된 후 좌익분자 명단을 제공해 주는 조건으로 특별사면됨 - 이 사건으로 불명예제대를 하였으나, 한국전쟁 후 친일파 장교들에 의해 중령으로 승진되며 다시 군인의 길로 들어섬 - 1961년 1월 12일 육군본부 개인 보안심사위원회에서 과거의 사상이 의심스럽거나 근무실적이 나쁜 장교 153명을 강제 예편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박정희가 이 정보를 미리 알게 됨 - 그의 전역 예정은 1961년 5월말 - 강제 예편 전 5월 16일 군사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음 - 1969년 3선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1972년 10월에는 계엄령을 선포 - 유신헌법에 의해 1972년 12월 23일 장충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2,359명 중 2,357명이 찬성투표하여 다시 대통령이 됨 - 1979년 10.26때 김재규에 의해 암살됨.
◎ 박정희 정권에 협력했던 기독교
1961년 군사반란을 일으킨 것에 대해 반대하던 미국정부에게 반란정부를 지지해 줄 것을 요청하기 위하여 기독교 대표 한경직, 최두선, 김활란, 정일권이 미국으로 감 - 1965년 한일협상조인에 보수교회는 적극 지지함 - 1969년 9월 4일 김윤찬, 조용기, 김준곤, 김장환 목사 등 242명의 목사는 대한기독교연합회를 조직하여 3선 개헌지지 성명을 내면서 더욱 강력한 영도력을 지닌 지도체제를 바란다고 강력한 독재를 요구 - 1972년 유신개헌과 유신헌법을 지지한다고 성명서 발표 - 대한기독교연합회는 회장 김윤찬 목사가 미국시민권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발견되어 미국으로 가 버리자 해체됨.
◎ 박정희 정권에 대항했던 기독교
1962년 일본과의 굴욕적인 한일협상조인 후 전국 교회에서 철야 금식을 실시 - 3선 개헌이 발표되자 김재준, 박형규, 함석헌등이 중심이 되어 반대운동 전개 - 1973년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린 후 박형규 목사는 유신반대 시위를 함 - 이 사건을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내란음모사건으로 조작, 발표하여 박형규, 권오경, 김동환등을 구속함 - 수많은 목회자들이 유언비언 날조죄 등으로 구속 수감됨 - 1975년 통합 총회는 ‘신앙을 사수하고 국가 장래 비극을 막기 위해 전 교단적으로 투쟁할 것을 천명한다’고 성명서 발표 - 1975년 기독교 장로회 총회는 유신헌법을 철폐하고 민주헌법으로 개정해야 한다고 성명서 발표 - 1975년 민주수호기독자회에서는 ‘유신헌법 철폐하고 박정희는 하야하라’고 요구 - 박정희 정권은 반정부적인 목회자가 사역하는 교회를 사찰하고 감시하며 기도회를 방해하고 설교를 도청하거나 녹음하여 성직자를 구속 - 전북 김제의 난산교회 강희남목사는 공산주의를 이기는 길은 부정부패의 근원인 유신정권의 뿌리를 뽑는 길이다고 하여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됨.
독재에 저항했던 교역자들 - 조용술, 오충일, 고영근, 임태평, 인명진, 조화순, 문동환, 서경석, 이해동, 안병무, 서남동, 문익환, 강희남 등.
다윗의 죄를 지적했던 나단 선지자처럼 교회는 항상 국가의 움직임이 독재로 향하지 못하도록, 즉 하나님의 뜻을 어기지 않도록 감시하고 죄를 고발해야 한다.
◎ 군부독재자 전두환과 어용목사들
하나회 회장 전두환을 중심으로 12.12반란이 발생 - 정권을 잡는 명분을 찾던 중 광주를 희생양으로 삼음 - 5월 30일 국보위를 발족시켰는데 국보위 종교담당으로 신촌성결교회 정진경 목사, 입법에는 조향록 목사가 참여함 - 1980년 8월6일 정진경, 한경직, 조향록, 김지길 ,강신명, 지원상, 신현균, 김창인, 문만필목사등 22명이 참여하여 전두환 상임위원장을 위한 조찬기도회를 개최 - 정진경 목사는 기도에서 일찍이 군문에 헌신해서 훌륭한 지휘관으로 나라를 방위하는 데 충성을 다하게 하신 것과 구석 구석 악을 제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전 위원장이 남북통일, 국가의 번영, 그리고 민주화 실현 등 민족의 열망을 이루는데 큰 일꾼이 되어 그 업적이 후세에 남도록 해 달라’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학살자를 축원함 - 이 조찬기도회를 방송사들은 생중계 했을 뿐 아니라 두 번이나 재방송을 보냄 - 조찬기도회는 같은 달 16일 최규하 대통령 하야, 21일 전군지휘관회의 전두환 대통령 후보 추대,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 체육관 선거, 9월 1일 전두환 대통령 취임으로 이어지는 신군부 집권 시나리오의 핵이었음 - 역사의식의 결여로 인해 학살자에게 7년여간의 독재를 가능케 한 길을 한국교회가 열어줌 - 전두환을 향해 용비어천가를 불러대는 상황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과 다름이 없음 - 진정 찾아가서 위로해야 할 자를 제대로 찾아 위로하지 못하고 책망이 필요한 자에게 늘 필요이상의 사랑과 지지를 보냈던 어리석음의 반복 - 1달 뒤 ‘전대통령 취임 축하 조찬기도회’를 9월 30일 신라호텔에서 1,300여명의 각계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함 - 이후 4만 여명에 달하는 삼청교육대 입소자들에 대해 그들의 억울한 형편을 살펴보기보다는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자랑하기 바빴던 교회 -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여 결국 같은 공범자가 됨 - 김정호 혜화성결교회 원로목사는 5공때 ‘데모하는 놈은 빨갱이다’ 설교함 - 1987년 항거 때도 교회는 이들에 대해 ‘폭도, 좌경, 빨갱이’라 매도하기에 바빴음.
1982년 3월 18일 부산에 있는 미문화원 지부에 대한 방화 사건 - 주동자인 문부식과 김은식은 부산 고신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었으며, 이들에게 도피처를 제공한 사람은 최기식 신부 - 미국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 사건이자, 반미운동의 불을 지핀 사건 - 이 사건으로 인해 외세에 대한 자주의식의 고양과 더불어 남한 독재정권에 대한 반동심리로 인해 주체사상에 대한 연구와 관심이 증대함.
◎ 김영삼 정부와 기독교
3당 합당의 야합을 통해 정권창출을 한 김영삼 장로 - 1992년 12월 3일 천명의 교역자들이 모여 신앙인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며 김영삼 장로를 공개지지.
김영삼 정부 이후 한반도 분단체제 종식을 위한 통일운동을 전 교회적으로 널리 펼쳐서, 오늘날 남북간의 경제 문화교류 등 민간분야 지원의 물꼬를 텄음 - 이러한 교회의 활동은 다가올 통일시대를 대비한 평화선교의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 불의한 권세에 대한 굴종이 교회에 남긴 상처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핮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왕의 궁임이니라’(아모스 7.13)라고 말한 ‘이 땅의 아마샤들’이 교회권력의 최정상에 군림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독점하고 있는 한 한국교회의 개혁과 성경 말씀으로의 회복은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독재자들은 분단을 최대한 이용하여 자신들의 독재를 유지, 강화시켜 나감 -
교회는 불의한 권력과의 밀월관계를 담보로 유형․무형의 특혜를 받으며 자신의 안일과 교세확장에 몰두함 - 종교계 일부가 정치권에 정치자금을 제공하고, 선거 때 특정 후보를 위해 각종 종교집회를 주선하는 등의 대가로 불법건축 허용, 세금 감면 등의 반대급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
교회의 체질속에 깊게 뿌리내려져 있는 권력에 대한 굴종의식을 떨쳐 버려야 - 초대교회의 핍박의 이유 가운데 하나였던 황제숭배반대와 징집거부를 기억해야 - 신앙은 모든 것을 상대화하는 혁명적 사고이자 삶의 방식인 것.
역사적 몰이해는 시대에 대한 분별부족과 아울러 궁극적으로 역사의 마지막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의 부재를 드러내는 것 - 하나님을 진정 믿는 자가 현세의 안락을 위해 그렇게 변절하고 불의한 권력 앞에 굴종하겠는가.
믿음의 실천을 제대로 살아오지 못한 불행한 과거를 가지고 있는 교회가 과연 믿음의 실천을 강조할 수 있었겠는가 - 실천보다는 추상화된 교리를 반복하고 삶을 통한 믿음의 행위보다는 인식론적 내용이해를 믿음으로 주입시킨 오늘의 교회현실은 불행한 과거에 대한 덮음 속에서 나온 불행한 결과이다.
만일 포악하고 야만적인 권력일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니 문제삼을 수 없다고 한다면,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해 바로 앞에 섰던 모세나, 구약의 예언자들, 헤롯의 죄를 꾸짖었던 세례요한과 헤롯에게 ‘여우’라고 욕했던 예수님의 말씀들을 모두 성경에서 삭제해야 할 것이다 - 용기 없음으로 인한 자신의 한계를 성경에 대한 왜곡된 해석으로 덮어버릴려고 해서는 안될 것.
1967년 일본 기독교단은 2차 세계대전 하에서 일본 기독교단의 책임에 관한 고백을 통해 과거 일본 교회가 전쟁에 협력한 것이 잘못되었음을 공개적으로 발표하였음 -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 남의 나라 전쟁에 자신의 민족을 억압하는 쪽에 서서 전쟁에 협력했다고 하는 것은 크나큰 범죄이며 양심적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일 - 또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영적인 것을 추구하기보다 탐욕에 포로가 되어 하나님의 역사적 부름에 응답하지 못한 해방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도 뼈를 깎는 참회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 - 이러한 거듭남이 있을 때에만 한국교회는 성경적 공동체로 탈바꿈할 수 있을 것이며, 이 사회의 그 존재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특별히 복음주의 청년학생들이 이러한 회개운동을 가능케 만드는 동력이 되어야 할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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