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자료

노아의 고독과 아픔

열려라 에바다 2011. 10. 18. 22:17

 

노아는 처음으로 밭을 가는 사람이 되어서 포도나무를 심었다. 한번은,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자기 장막 안에 아무 것도 덮지 않고 벌거벗은 채로 누워 있었다. 가나안의 조상 함이 그만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보았다. 그는 바깥으로 나가서, 두 형들에게 알렸다. 셈과 야벳은 겉옷을 가지고 가서, 둘이서 그것을 어깨에 걸치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덮어 드렸다. 그들은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돌렸다(창 9:20-23).



노아는 구약성서에서 의인(義人)의 대표적인 표상입니다. 그의 의로움으로 비롯된 방주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인류는 지금까지 이어지지 못했겠지요. 대홍수의 표류에도 소멸되지 않은 '노아의 가족'은 그런 의미에서 '생명의 고리'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우리는 그러한 노아의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의 아들 함이 바로 그런 현장의 첫 목격자가 된 것입니다. 노아의 의인적 표상은 여기서 여지없이 깨어지고, 그 감추어졌던 추함이 드러나고 맙니다. 함은 아버지의 그러한 모습을 정직하게 대면하면서 이를 세상에 알립니다. 술에 만취하여 주정을 부리다가 벌거벗은 줄도 모르고 잠에 골아 떨어져 버린 노아. 우리 시대의 존경받는 목사에게서 이런 모습이 누군가에게 드러났다고 하면 그 충격과 실망은 얼마나 깊을까요? 아버지 노아의 권위는 이로써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죽음의 시간과 물길을 그토록 절박하게 가로질러 새로운 생명의 터를 일구어 가고 있는 노아는 어찌하여 이런 추락에 정신없이 몸을 내어 맡겼을까요? 그리고 그러한 노아를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요?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우선 밭을 갈아 포도나무를 심습니다. 오랜 표류의 생활을 청산하고 이제 땅을 딛고 시작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아버지로서 식량이 될 수 없는 포도나무부터 심는 것은 이해가 쉽게 가지 않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렇게 해서 수확한 포도를 노아는 하나님 앞에 바쳐 제사를 지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위해 포도주를 만들어 마시고 취해 버립니다. 이것은 실상 충격적인 일입니다. 가족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시지요. 그가 방주를 만들어 대홍수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을 때 세상은 비웃었고, 그러한 아버지의 뜻을 따라 방주에 들어가는 것은 실상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은 결국 옳았고, 대홍수의 재앙에서 가족의 생명을 구해낸 그의 권위는 확고해진 셈입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옳고, 아버지는 언제나 의로우며 아버지는 언제나 존경스러운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환상이었음이 밝혀지고, 깨어지는 시간이 오고야 만 것입니다. 아버지는 가족들의 생계와는 관련이 없는 포도나무를 한가롭게 심더니 그것도 자신이 마시기 위해 술로 빚어 곤드레 만드레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포도나무를 심을 때부터 불만스럽더니, 이런 아버지에 대한 허상이 부서지면서 아들 함은 아버지의 삶이 못마땅했으나 그 움직일 수 없는 증거로 자신의 생각을 입증할 길이 없었을 겁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럴 기회가 왔습니다. 아버지의 술주정과 추태의 현장을 목격했고, 그 현장 보존을 위해 그는 아무 조처도 하지 않고 그대로 물러나와 형들에게 이를 고합니다. 대충 이런 정황이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런 상상을 하게 됩니다.



형들에게 너무나 확실한 증거를 보이고, 더 이상 아버지 노아의 권위와 윤리, 신앙에 의지해서 가족의 미래를 개척해 나갈 수는 없을 것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설득하기 위한 함의 계산은 그러나 여기에서 어긋나고 맙니다. 그의 형들은 함에게 동조하지 않고, 아버지의 수치를 가립니다. 현장을 인멸해버린 것이지요.



아이들은 어릴 때 대체로 아버지에게서 우상을 발견합니다. 아버지는 무엇이든지 알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으며 무엇이든지 옳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자라면서 아버지의 허상을 목격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어느새 '고개숙인 자'가 되어 갑니다. 자식보다 능력 면에서나, 윤리적인 권위 면에서나 또는 세상에 대한 대응력, 그 어느 하나 제대로 앞서는 것은 없으면서, 위선적인 훈계와 잔소리로 위엄을 지키려 합니다. 이것이 자식에게는 갈수록 역겨워지는 것이죠. 아버지는 더 이상 존경의 대상이 아니며, 더 나아가서는 멸시의 대상조차 되어버립니다. 그렇게 볼 만한 확실한 증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식은 그렇게 해서 자기도 모르게 '함'이 되어 갑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 노아가 어떤 세월을 겪어 왔는지, 그로써 의인됨을 지키고 가족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내면에 치른 고난과 아픔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지 않습니다. 방주에서 나왔을 때 아버지 노아가 받았을 그 무서운 충격, 친구도 친지도 누구 하나 없는 세상에 자신과 가족들의 몸을 가누어야 하는 이 생존의 광야. 그래서 자식들에게조차도 그 고뇌와 아픔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홀로 포도주를 마시고 만사를 잊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아버지 세대의 고독과 아픔을 자식이 모르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들 아버지 세대들은 무서운 시대를 통과해 오면서 그 내면의 상처를 부둥켜안고 만취하지 않고는 달랠 수 없는 영혼의 아픔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위로하고 있을까요? 시대가 변화하면서 능력이 되지 않는 아버지 세대들을 혹여나 속으로 경멸하고 사는 세대들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식의 성숙함은 그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저절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렇게 부모의 아픔을 껴안고 그것을 감싸는 모습에서 이루어집니다. 거기에서 인간이 겪는 고뇌의 실체를 만나고, 그 헌신을 감사해 하며 치러낸 고비를 다함없이 품어내는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부모의 허물과 오류를 따지고 드는 똑똑한 자식"을 키우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따지고 들어서는 아니 될 것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부모의 남모를 고뇌의 내면을 어루만지면서 인생의 깊이를 함께 나눌 그런 마음이 따듯한 자식을 키우는 데에는 실패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들 자신이 우리들의 부모에게 이미 '함'이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기독교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리장 / 마태(사도행전 12:1-2)  (0) 2011.10.18
노아 시대 홍수 심판의 의미  (0) 2011.10.18
노아는 어떻게 혼자 방주를 만들었을까  (0) 2011.10.18
노아의 아내   (1) 2011.10.18
성령의 사역  (0) 2011.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