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과교제

성선설과 성악설

열려라 에바다 2020. 5. 6. 08:28

성선설과 성악설

 

 

왜 본성론인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을 연구 또는 교육의 대상으로 삼는 모든 사람들은 인간의 심성문제에 대하여 흥미를 갖지 않은 사람이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가장 알기 어렵고 또 다른 동물과 비교할 때 매우 복잡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항상 변동하는 과정 중에 있고 비록 개개인의 개성이 모두 다르다 하더라도 역시 그들의 공통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은 선한가? 그렇지 않으면 악한가? 또는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한가? 또는 善하지도 악하지도 않은가? 만일 본성이 선하다면 어떻게하여 그 선을 배양할 것이며 악하다면 어떻게하여 그 악을 제거할 것인가? 옛부터 지금까지 동서양에는 인성에 관한 학설과 학파가 매우 많다.

 

그 대표적인 두 학설로 성선설과 성악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성선설과 성악설은 동일한 인간 행위의 결과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을 한다. 그러한 서로 다른 해석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견해가 서로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성품을 단정지어 말한다는 것은 매우 힘들 것이며, 그러한 단정에는 모순적인 측면도 없지 않을 것이다.

 

 

 

성선설

 

맹자가 주장한 도덕설의 중심이념을 이루는 것. 성은 선한 것이며, 그러기 때문에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 등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각각 인.의.예.지의 4단(四端)인 것이며 사람은 4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단(端)이라 함은 善이 발생할 가능성을 가진 시초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맹자는 이에 대하여 상세하고 논리적인 설명을 하지 않았으며 또 악의 기원에 대한 설명을 하지 못하였다. 성선설.성악설은 송나라 때의 주자학파에 의하여 본연기질론으로 종합되었다.

 

 

 

성선설의 개념의 구체화

 

동양 철학의 성선설 : 성선설은 "인간은 선하다"는 이론이다. 따라서 집안이든 나라든 모든 사회는 '인간'이 이끌어 나가야 한다고 본다. 이들은 인간안에서 '선한 요소'를 찾는데, 그 요소는 '도덕적 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이성이 인간 사회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고 보므로 성선설은 대략 '유심주의(관념론)'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이성을 계발한 사람은 지식인이다. 지식인이란 그런 이성과 인격을 함양한 사람이다. 따라서 성선설은 지식인이 국가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는 이론이다. 다시 말해서 지식인이 관료.정치가이어야 하며, 관료.정치가는 지식인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조선 시대의 사대부란 '지식인이며 관리이며 지주'인 사람을 의미한다. 이것은 결국 '지식-권력-경제'의 삼위 일체를 뜻한다. 이런 점에서 성선설은 지식인과 관료를 옹호하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철학에서의 성선설 : 서양에서는 성선설이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고 다만 소수의 철학가와 교육가 사이에 유행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학설은 위로 스토아 학파에까지 소급될 수 있다. 스토아 학파는 인성, 물성의 자연에 근거하여 공동의 이성법칙을 찾았는데 인간은 단지 자연의 이성법칙에 따라서 행하기만 하면 이것이 바로 지선한 행위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시세로(Cicero : 106∼43 B.C.)와 시네카(4 B.C.∼65 A.D.)에서부터 루소(J.J.Rousseau : 1712∼1728)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쳤다. 루소는 서양의 성선설을 주장한 대표적인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사회계약약론」(Contact Social)과 「에밀」(Emile)의 두 저서를 남겼는데 전자는 정치문제를 논하였고, 후자는 교육사상을 발휘하였다. 루소는 두 저서에서 모두 극히 자연상태를 강조하였고 자연생활을 주장하였다. 루소는 두 저서에서 모두 극히 자연상태를 강조하였고 자연생활을 주장하였다. 인류의 자연본성은 본래 선한 것인데 역사문명과 사회제도의 영향을 받아 악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대개 자연으로부터 온 것은 반드시 참되고,참될 뿐만 아니라 또한 선하다." 또 "자연이 만든 사물은 모두가 다 선하지만 일단 인위를 거치면 악으로 변한다."고 주장하였다. 선은 천성에 속하고 악은 인위에 속한다. 그밖에 서양에서 성선의 관점을 가진 이는 피히테(Fichte : 1762∼1814)와 프로벨(Froebel : 1782∼1852)등이 이 있다.

 

 

 

성악설

 

순자(筍子)가 주장한 학설로서 <사람의 성은 악이다. 그 선한 것은 僞이다.>라고 주장하는 것. 위라는 것은 작위, 즉 배워서 말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의 자연의 성은 악이기 때문에 작위를 쌓아서, 즉 배우고 배워서 선으로 가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성이 악이라는 근거를 이기적 욕망에 두었는데 선의 기원을 설명할 수 없었으므로 인성의 선한 면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행위의 도덕적 가치판단에서는 결과론의 입장에 섰다.

 

 

 

성악설의 개념의 구체화

 

동양 철학의 성악설 : 성악설은 "인간은 악하다"고 보므로 사회나 국가를 인간이 이끌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들은 인간의 바깥에서 국가 사회를 이끌 수 있는 원동력을 찾는다. 그것을 순자는 예(행위 규범), 한비자는 법과 권력(법치), 묵자는 하느님이라고 하였다. 예(주례)나 법은 국가의 제도이며, 이 제도를 운영하는 힘이 권력이다. 그리고 그 제도와 권력을 최종적으로 쥐고 있는 사람이 군주이며 하느님을 대신해서 인간 사회를 통치하는 것도 바로 군주이다. 따라서 성악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강력한 군주 이론을 내세운다. 국가의 구성원을 크게 보아 '백성-관료-군주'라고 한다면 성악설은 군주를 옹호하는 이론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국가의 힘은 백성의 생산.전쟁 능력에서 나오기 때문에 관료의 착취와 비능률을 제거하고 백성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이 군주권과 국가 권력을 강화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성악설은 백성을 옹호하는 이론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관료.지식인 중심의 성선설과 대립한다.

 

 

 

「순자」성악편에 이런 말이 있다. 『인간의 본성은 惡한 것인데 이것을 善이라 하는 것은 위 곧 인위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다. 이제 사람의 본성을 보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이익을 좋아하는 성질이 있어 이것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에 자연 다른 사람과 싸워 빼앗으려는 마음이 생기게 되고 사양하는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다. 또 사람은 나면서부터 남을 질투하고 미워하는 성질이 있어 이것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에 자연 음란한 행실이 생기게 되고 동시에 예의와 조리가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사람이 타고난 본래의 성이나 감정이 가는 데로 따를 때에는 반드시 서로 싸우고 빼앗게 되므로 이것이 분한을 범하고 조리를 어지럽히는 행위가 되어 마침내는 난폭한 세상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는 반드시 스승과 법도에 의한 교화와 예의에 의한 교도가 필요한 것이니 이것을 받음으로써 비로소 사람은 서로 사양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되고 조리에 합하게 되어 마침내는 세상이 평화롭게 되는 것이다. 이것으로 보면 인간의 본성은 악이라고 하는 것이 분명하니 이것을 선이라고 하는 것은 인위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구부러진 나무는 반드시 이것을 바로잡는 도지개에 넣거나 또는 불을 쬐어 반듯하게 잡아준 다음에야 비로소 쪽 곧게 되는 것이요, 또 무딘 쇠붙이는 숫돌에 간 뒤에야 비로소 쪽 곧게 되는 것이요, 또 무딘 쇠붙이는 숫돌에 간 뒤에야 비로소 날카로와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은 악이다. 이것은 반드시 스승과 법도가 있으므로써 비로소 바르게 되고 또 예의가 있으므로 비로소 다스려지는 것이다. .........후천적인 학습이라든가 노력이 전혀없이 자연으로 이루어져 인간에게 갖추어진 것, 즉 선천적인 것을 일러 성이라 하고, 학습에 따라 능숙해지고, 노력에 따라 완성될 수 있는 힘이 인간에게 있는 것, 즉 후천적인 것을 일러 위 곧 인위라고 한다. 이것이 본성과 인위의 구별이다.』

 

 

 

순자 성악설의 문제는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 ①인간은 욕망을 가졌다는 점에서 악하다. 욕망을 가진 인간이 어떻게 예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예란 욕망을 절제시키는 규범이다. 반면 욕망이란 무한히 뻗어 나가면서 절제를 거부하는 것이다. 만약 인간의 마음에 욕망 이외의 요소가 없다면, 욕망에 고삐를 채우고 재갈을 물리는 예 규범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②나아가 인간이 악하다면 인간을 선하게 만들어 주는 예는 어디에서 나왔는가. 모든 인간이 악하다는 것은 역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면 욕망을 절제하게 하는 예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순자의 대답은, 욕망의 끝까지 가면 이성이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10)

 

 

 

순자이외의 동양 철학에서의 성악설

 

묵자의 철학 : 묵자는 약자의 입장에 서서 "왜 강자는 힘으로 약자를 겁탈하는가"를 묻는다. 현실이란 힘으로 움직인다. 그런데 그 힘이 꼭 그렇게 겁탈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는가. 반대로 그 힘으로 약자를 사랑할 수도 있지 않은가. 묵자는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는 사랑을 강자들에게 요구한다. 아니 더럽고 추악하기 때문에 사랑하라고 한다. 그것이 바로 겸애(兼愛)이다.11)

 

한비자의 철학 : 인간의 욕망에는 식욕과 성욕같이 생리적인 것이 있고, 권력욕이나 소유욕, 명예욕같이 사회적인 것이 있다. 고자나 순자는 타고난 인간의 본성을 '음식 남녀'의 동물적 욕망으로 보는 반면 한비자의 성악설은 권력욕, 소유욕 같은 사회적 욕망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한비자가 설명하는 인간의 본성은 소름 끼칠 정도로 사악하고, 그가 제시한 극단적인 인간 통제 방법, 즉 정치론은 섬뜩하리 만큼 억압적이고 전제적이다. 그러나 한비자가 설명하려는 것은 일반인들의 상식적인 삶이 아니라 나라를 통치해야 하는 최고 권력자의 일이다.

 

 

 

서양철학에서의 성악설의 개념

 

중국의 성악설은 성선설 다음에 건립되었지만, 서양에서는 먼저 성악설이 생기고 난 뒤에 성선의 관점이 생겼다. 서양의 사악한 인성관은 사악한 세계관에 근본을 두었고 사악한 세계관은 종교의 영향에서 생겼다. 기독교는 인류의 시조 아담이 원죄를 지었기 때문에 사악한 길로 떨어졌고 그 후손들은 태어나면서 악한 경향을 가지고 나온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악하다는 주장이 일찍부터 신조가 되어버려 이에 대해 의심하거나 논변을 벌일 여지도 없었다. 중세의 교부철학자 아우구스티누수(Augustine) 이래의 논자들은 모두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후 이탈리아의 마키아벨리(N.Machiaveli : 1447∼1527)와 영국의 홉스(J. Hobbes : 1588∼1679)와 독일의 쇼펜하우어(shopenhauer : 1788∼1860)는 모두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주장하였다.

 

 

 

성선설, 성악설의 비교

 

 

 

성선설, 성악설의 근본적인 차이점들

 

인간이 합리적인 존재인가, 아니면 불합리한 존재인가. 이 문제가 중국 철학에서 성선설과 성악설로 드러나는데, 이는 본성을 선과 악이라는 측면에서 설명하는 이론이다. '性'이란 인간의 마음에 '본래적인 것', '타고난 것'이라는 뜻이다. 성선론자들은 '본래적인 것', '본질적인 것'이라는 의미를 중시하므로 그들이 쓰는 '본성'이라는 말은 '도덕적 이성'을 가리킨다. 그 이성이야말로 인간에게 본래적인 것이며 본질적인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반대로 '타고난 것'이라는 뜻을 중시하는 성악론자들에게 본성은 '감정 욕망'을 의미한다. 인간이 태어날 때 '타고난 것'은 바로 감정 욕망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학자에 따라 가리키는 대상이 다르기는 하지만, '본성'이라고 할 때는 일단 인간의 능력, 특히 마음의 본질을 말하며, '행위의 원동력'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 원동력이 선한가 악한가 또는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를 탐구하는 이론일 바로 성선설과 성악설이다. 따라서 성선설과 성악설 모두 결국은 선악의 문제를 통해서 인간의 본성을 문제 삼는다.

 

인간을 비합리적인 존재라고 보는 것은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하는 성악설로 드러난다. 그런데 성악설에 대해서는 많은 오해가 있다. 즉 성악설은 '인간을 멸시하는 이론'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성악설이 모든 인간은 악하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언제나 비합리적이라는 것도 아니고, 악과 불의를 위한 이론인 것도 아니다. 모든 사람이 언제나 비이성적이라면 이 세상에 남는 것은 무질서와 혼돈뿐이며, 아무런 철학도 심지어는 성악설 자체도 펼 수 없을 것이다. 성악설은 오히려 이 세상의 악과 불의를 물리치기 위해 악의 실체를 정확히 인식하고 대처하자는 데서 나온 것이다.

 

 

 

성선설, 성악설의 해석상의 차이점 비교

 

맹자의 성선론은 인류진화의 시기 중에서도 인성은 동물적 본성 이외에도, 인과 의로서 이미 완성을 이루었다고 보았다. 비록 처음엔 인과 의의 수치가 극히 미약했더라 하더라도, 맹자는 인간이 금수와 다른 점으로 의를 깨닫는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는 교육을 중시하여 본성과 교육의 진전은 상호 인과적임을 깊이 깨달았다. 그러므로 맹자는 "그 마음을 극진히 하는 자는 그 성을 알고, 그 성을 알면 천을 안다."고 하였고, "仁義禮智는 밖에서 나에게 녹여서 부은 것이 아니라 내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나 생각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구하면 얻고 놓으면 잃어버린다" 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맹자는 그 당시 利를 중히 여기고 義를 가벼이 보아 싸우고 죽이기를 좋아하는 시대상의 자극을 받아 인의예지를 특히 더 강조하였고, 이를 인성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하여 당시의 폐단을 구하려고 하였다. 순자의 성악론은 동물진화시기에서 인성과 기타 생물의 본성과 결코 차별이 없고, 본성의 동작은 본능의 지배를 받다가 구 후 점점 이지성과 군거성과 도덕성에서 나온다는 데서 착안하였다. 仁이나 義의 수치의 발전은 모두 인위적 진화에서 나온 것으로 원래는 악한 것이었다. 그는 "성이란 것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교화는 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분명히 후천적 교화의 공을 승인하였는데 이것은 공자의 '習相遠'의 說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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