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길을 넘어 축복을 향하여 = 창세기27;1-46(200705)
PW : 믿음 BIW : 고난의 길을 걸어가라 AG : 성도 TS : 믿음이란 고난의 길을 끝까지 참고 견디며 축복의 세계를 향하여 걸어가는 사람이다.
좀 모자라면 어때
‘머리가 좀 모자라면 어때? 예쁘기만 하면 되지’라고 생각한 남자가 아이큐 70밖에 안 되지만 몸매가 섹시하고 늘씬한 아가씨에게 “나랑 결혼해 줘요.”라고 프로포즈를 했습니다. 남자는 당연히 오케이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여자가 한참을 고민하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미안하지만 그럴 수 없어요.” 자존심이 상한 남자가 이유가 뭐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이에 여자가 하는 대답. “왜냐하면 우리 집 전통은 집안 사람들끼리만 결혼을 하거든요.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아빠는 엄마와, 외삼촌은 외숙모랑, 그리고 고모부는 고모랑.” 그러고 보니 맞는 말이네요. 그런데 이를 어쩌지요. 그러면 그 아가씨는 결혼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답니다. 아가씨를 결혼시키려고 하면 부모, 형제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어야겠지요.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차근차근히 하나씩 하나씩 잘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될 때까지, 알아들을 때까지, 이해가 될 때까지 계속 반복해서 가르치고 또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똑같은 말씀을 수없이 반복해서 듣고, 배우고, 또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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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은 18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간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삭이 몇 세였을 때 있었던 사건일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분명히 모세는 이 장면을 기록하면서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라고 그때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장자 에서를 따로 불러서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니, 그런즉 네 기구 곧 화살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서 먹게 하여 내가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라고 말하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정확한 이삭의 나이를 추정할 수는 없지만, 야곱이 하란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서 지내는 20년 과정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이삭의 나이를 추정해 나갈 수 있다. 보통 야곱이 하란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건너갔을 때 야곱이 젊었을 때였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성경에 기록된 연도를 따라서 야곱의 일생을 거꾸로 계산해 보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다. 야곱은 70대 초반에 밧단 아람으로 건너가서 7년 노역을 걸쳐서 레아와 라헬과 혼인한다. 그 후에 13년 동안 12남매를 낳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서 막내 베냐민을 낳으면서 라헬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는 것으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야곱이 밧단 아람에 있는 외삼촌 댁으로 건너가는 시기가 70대 초반이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등장하는 이삭의 나이는 130대 초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삭은 180세를 살았기 때문에 27장의 사건 이후에 근 50년 가깝게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간 것이다. 물론 130대 나이이기 때문에 늙기도 했고,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현대사회에서 흔하게 말하는 안과 질환 곧 백내장, 녹내장, 시신경이 훼손되어 나타나는 망막증을 넘어서 실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나타나는 안과 질환 같은 경우는 사회 환경에서 유래하는 환경오염이나 여타 상황에 의해서 일어나는 질환이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사회 환경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안과 질환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모세는 이 장면을 기록하면서 이삭이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일까? 유대인들이 살아가는 문화는 반드시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나타난다는 기본 원리에 의해서 살아간다. 곧 눈은 원인을 제공하고 마음은 결과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눈이 밝으면 마음도 밝고 선하다. 눈이 어두우면 마음도 악하고 더럽고 추악해진다는 기본 원리이다. 마음이 악하고 더럽고 추악해진다는 말은 세상 욕정에 사로잡혀서 욕심, 욕망, 탐욕이 많다라는 의미이다. 이런 원리에 의해서 이삭은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설명이다. 이삭은 식욕이 남달리 많았던 사람이라고 모세는 설명하는 것이다. 특히 장자 에서가 사냥해 온 고기를 먹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짐승을 사냥할 때 생생하게 아무런 상처도 없이 생포할 수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화살이나 칼을 써서 사냥하게 된다. 그러면 그 짐승은 상처를 입거나 죽을 수 있다. 그러면 그 짐승은 부정한 짐승이 되고 만다. 하나님께서 짐승을 먹도록 허락해 주시면서 피채 먹지 말라고 분명하게 선을 그어주셨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육식을 하더라도 피채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사냥해 온 짐승을 아무리 요리를 잘 한다 해도 피채 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피채 먹는 자는 부정한 자가 되고,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이삭은 바로 이런 점에서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살았던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다.물론 사냥을 즐겨 하는 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살았던 사람이 아니다. 이삭이 육식을 좋아하면 종들에게 시켜서 마땅히 집에 있는 양이나 염소 더 나아가 소를 한 마리 끌어다가 피를 온전하게 뽑아내고 요리해서 먹으면 된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사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삭은 아예 하나님 앞에서 양이나 염소나 소고기는 너무 많이 먹었기 때문에 질려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장자 에서가 사냥한 고기, 하나님 앞에서 부정한 고기를 특식으로 먹고 싶어하는 것이다. 모세가 이삭이 나이가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살지 못했다는 점을 부각시켜 주면서 기록하는 것이다. 아울러 리브가가 쌍둥이를 임신했을 때,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형이, 큰 자가 동생을,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상속권, 축복권은 에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야곱에게 있음을 일깨워주셨다. 그러면 이삭은 믿음의 족장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축복권을 가진 야곱에 대하여 더 많은 사랑과 애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구했어야 옳은 것이다. 그런데도 이삭은 야곱은 본척만척도 하지 않고 오직 장자 에서에게만 온 관심을 가지고 총애하면서 하나님의 축복권까지도 상속해 주려는 실수를 범하는 것이다. 에서는 사회성이 좋아서 이미 혼인하여 자기 가정을 꾸려 나가고 있어서 특별히 부모님이 신경 써주지 않아도 자기 의를 따라서 잘 살아가고 있는 아들이다. 그런데 야곱은 70살이 넘도록 장가도 못 가고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못난 아들이다. 똑같이 자기 피를 이어받아서 태어난 쌍둥이인데, 누구는 자기 앞가림을 잘하고 있고, 누구는 지지리도 못나서 자기 앞가림도 못하고 있으면 부모로서, 아버지로서 누구를 더 생각하고 챙겨주어야 하겠는가? 당연히 못난 아들에게 더 신경이 쓰이고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고 하는 것이 부모의 심정이요 애비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삭에게는 아예 이런 마음 자체가 없는 것이다. 오직 먹고 싶은 욕망 하나밖에 없다. 그것도 하나님 앞에서 정결한 고기가 아닌, 부정한 고기를 먹고 싶어 하는 욕망밖에 남아 있지 않은 졸장부와 같은 사람에 불과한 사람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이삭의 상황을 잘 아시고 리브가 여인을 통해서 믿음의 가정을 올바르게 세워가려고 리브가의 마음을 움직이신다. 이삭이 에서에게 하는 말을 옆에서 들은 리브가의 마음에 여러 가지로 부족하고 모자라기만 한 야곱이 아버지의 축복을 반드시 받도록 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리브가는 야곱을 불러서 아버지가 에서에게 축복하려고 한다는 아버지의 뜻을 이야기하면서 형 대신에게 야곱이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가고 있다.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에게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내가 네게 명하는 대로 염소 떼에 가서 거기서 좋은 염소 새끼 두 마리를 내게로 가져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아버지를 위하여 그가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리니, 네가 그것을 네 아버지께 가져다 드려서 그가 죽기 전에 네게 축복하기 위하여 잡수시게 하라.”라고 제안한다. 어머니의 제안을 들은 야곱은 두려워서 도전해볼 여력도 없다. 야곱은 아버지에게서 축복을 받는 일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 지로 모르는 일이라고 주저주저하면서 망설인다. 그러자 어머니 리브가는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라.”라고 하면서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한다. 리브가는 야곱이 끌고 온 염소로 남편이 좋아하는 요리를 만들고, 에서의 방에서 좋은 옷을 가져다가 야곱에게 입히고 염소 털로 야곱의 손등과 목덜미에 붙여서 완전하게 에서의 모습으로 변장시켜서 아버지 침소로 들여보낸다. 리브가가 야곱에게 축복받도록 하려고 세운 작전은 100% 성공하여 이삭은 야곱에게 축복해 준다.
야곱이 축복을 받고 아버지 침소를 나가자마자 에서가 사냥하고 돌아온다. 에서는 아버지가 좋아할 수 있도록 맛있는 음식을 요리해서 아버지의 침소로 들어가서 아버지에게서 축복을 받으려고 했지만, 이미 야곱이 축복을 가로채고 받아버린 후라서 더 이상 축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에서는 아버지 앞에서 대성통곡하면서 자신에게도 축복해 달라고 애원한다. 에서가 통곡에 가까운 애원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더 이상 축복권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 에서는 더 이상 축복할 수 없다는 아버지 앞에서 나오면서 아버지가 곧 죽고 나면 반드시 야곱을 죽여버리겠다고 중얼중얼거리면서 나온다. 에서가 중얼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리브가는 급하게 야곱을 밧단 아람에 있는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보내기로 작전을 세운다. 리브가는 야곱을 불러서 네 형이 너를 죽여서 원한을 풀려고 하니 외삼촌 댁으로 피해 있으라고 하면서 남편에게 찾아가서 야곱의 결혼 문제를 언급한다. 리브가는 “내가 헷 사람의 딸들로 말미암아 내 삶이 싫어졌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면 내 삶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외가로 보내서 야곱이 혼인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애원한다. 리브가의 말을 들은 이삭은 야곱을 불러서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고, 일어나 밧단 아람으로 가서 네 외조부 브두엘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네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축복하면서 야곱을 밧단 아람의 외가댁으로 보내는 것이다. 야곱을 외가댁으로 보내는 것은 리브가의 작전이 맞아떨어져서 보내는 것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리브가와 이삭에게 역사하셔서 야곱을 외가댁으로 보내는 것이다. 야곱이 계속 가나안 땅에 머물러 있게 되면 결혼할 수도 없고, 결혼하지 않으면 후손을 볼 수 없고, 후손을 볼 수 없으면 하나님의 축복도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야곱으로 하여금 축복의 길을 걸어가도록 하시기 위하여 먼저 고향과 부모님의 집을 떠날 수밖에 없도록 만들고 있다. 야곱은 외가댁으로 가서도 사람 취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조카요 사위라는 신분이지만, 전혀 자유권이나 주인으로서의 신분을 받지 못하고 마치 종들처럼 취급을 받으면서 고난의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 그 고난이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축복으로 나아가는 길목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야곱에게 고난의 길이 없었다면 더 이상 축복의 길도 열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미 예견해 주셨던 축복을 야곱이 받을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어떻게 이끌어가고 계시는 것일까?
D4.
① 욕심에 눈먼 장님으로 만드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앞으로 50년 가깝게 살아야 할 이삭의 눈을 어둡게 만들어주시고, 정결한 음식이 아니라 부정한 음식을 좋아하는 마음을 넣어주시면서 사냥을 잘하는 에서에게 사냥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면서 야곱이 축복받을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도록 역사해 주신다. 하나님은 아버지 이삭에게 식욕에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의 세계를 제대로 분별할 수 없도록 하시면서 궁극적으로는 야곱에게 축복하시도록 역사하신다. 사실 많은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달랑 쌍둥이 두 아들만 있는데, 아무렴 에서와 야곱을 구별하지 못하는 아버지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삭에게 속아주도록 이삭의 의식 세계를 깜깜하게 감겨주고 계시는 것이다.
② 못난 자식을 애타게 여기는 마음을 사용하시는 하나님.
어머니 리브가는 장자 에서는 특별하게 자기가 돌봐주지 않아도 자기 앞가림을 하고 있는데 반하여, 야곱은 여전히 가슴 아프게 만드는 약한 아들이다. 리브가는 에서의 부인들, 며느리들을 마음에 들어하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늘 고부간의 갈등이 있었지만, 그래도 장남은 자기 앞가림을 하고 있고, 자기 식솔들을 거느리고 있는데 반하여, 야곱은 70살이 넘도록 결혼도 못하고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언제나 마음이 짠하고 아프기만 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떻게 하든지 아버지의 축복을 받게 해서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은 마음뿐이다. 야곱이 축복은 고사하고 저주받으면 어쩝니까? 라고 하면서 주저주저하고 망설일 때에도 저주는 내가 받을테니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따라오라고 하면서 이끌어간다. 리브가도 자신이 야곱에게 해 주려고 하는 행위가 정당한 방법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리브가는 야곱에게 염소 떼에 가서 염소 새끼 두 마리를 끌고 오라고 하면서 염소라는 짐승을 등장시키고 있다. 염소는 수치스러운 행위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짐승이다. 정당하고 명예로운 일에는 반드시 양이라는 짐승을 사용한다. 리브가가 야곱에게 양 새끼를 끌고 오라고 했어야 옳은 것이다. 그런데도 리브가는 양 새끼가 아니라 염소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는 것이다. 수치스럽고 옳지 않은 방법이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야곱에게 축복받도록 해 주고 싶어하는 애미의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것이다. 이런 어머니의 애끓는 마음이 있었기에 야곱이 비록 고난의 길을 걸어가야만 했지만, 그 고난의 길을 넘어가면서 자기 가정도 꾸려나가게 되고, 축복의 사람으로 세워지게 되는 것이다.
③ 버림당한 이의 원한을 사용하시는 하나님.
에서는 자기가 받아야 할 장자의 축복을 동생이 가로채 갔다는 생각 때문에 동생을 살려두고 싶지 않은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난다. 동생을 죽이지 않으면 자기 자신이 살길이 없을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에서는 이미 세상적으로 너무 많은 것을 받아 누리는 사람이다. 그러면 이번에는 동생이 그 축복을 받으면 얼마나 좋으냐 하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졌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마는, 에서는 자신이 받아야 축복을 중간에 가로채 빼앗아갔다는 생각 하나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쌍둥이 동생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생을 죽이려고 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동생을 죽이려고 하는 마음이 너무 강하다 보니 자기 속으로 웅얼웅얼하면서 하던 말이 어머니의 귀에까지 들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급하게 어머니에 의해서 야곱을 떠나보내도록 하는 것이다.
L4 & B4
하나님은 야곱으로 하여금 지금까지의 평안한 삶, 안락한 삶이 아니라 이제는 고난의 새로운 길을 걸어가도록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야곱을 고난의 길로 걸어가도록 하시기 위하여 부모님도 사용하시고, 형님도 사용하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의 길을 걸어가도록 이끌어가시는 것이다. 만약에 부모님과 형님의 이런 일이 없었다면 야곱은 구태여 부모님과 고향을 떠나서 외가댁으로 고난의 길을 걸어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북한 이탈주민이 35000여 명이 자유대한민국으로 넘어와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북한 이탈주민들은 이구동성으로 북한에 불어닥친 고난의 행군과 갖가지 압박과 핍박이 아니었다면 구태여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에서 온갖 고초를 당하고, 인신매매 당하면서 고통스럽게 살다가 자유대한민국으로 넘어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북한 이탈주민들은 북한에서, 중국에서 인간 이하의 삶을 사는 고초가 오히려 복이 되어서 자유대한민국에서 사람답게, 인간 대접받으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추진해 나가시는 축복의 세계로 이끌어가시기 위하여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의지와 주권의 세계로 이끌어가시는 것이다.
본래부터 야곱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받을 사람으로 예견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예견되어 있는 축복이지만, 그 축복을 이루어감에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모든 것들을 사용하여 그 축복의 세계로 이끌어가신다. 사냥 고기를 먹고 싶어 하는 아버지의 노욕(老慾), 식욕(食慾)이 많은 아버지를 눈먼 장님으로 만들어서 사용하시기도 하신다. 장자보다 뭔가 부족해 보이는 아들 때문에 늘 가슴 한 켠에 아련하게 아픔을 느끼고 있는 어머니를 사용하시기도 하신다. 자신이 받아야 할 축복을 가로채 버렸다고 하면서 원망하고 불평하고 심지어는 죽여버리겠노라고 벼르고 있는 형 에서의 마음도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가족들의 다양한 성품과 마음을 사용하여 야곱을 축복의 세계로 이끌어가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견해 놓으신 축복의 길이지만, 그 축복으로 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다. 하나님은 축복받기로 예정되어 있는 사람에게 고난의 길을 통과하게 하신다. 야곱은 자기를 지극히 사랑해 주는 엄마를 떠나고 고향을 떠나는 고난을 당해야 한다. 야곱은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 리브가는 야곱을 오라버니 댁으로 보낸 이후에 성경에는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어떻게 살다가 언제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갔는지도 알 수 없다. 야곱은 자신보다도 형을 더 좋아하고 사랑하는 아버지의 편견, 편애를 받아야만 되었다. 야곱은 형의 미움이라는 고난을 받아야만 되었다. 야곱은 외삼촌 댁으로 가서 20년 동안 조카의 신분이요 사위의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종처럼, 노예처럼, 일꾼처럼 살아야만 하는 고난을 당해야만 되었다. 야곱이 20년 동안 밧단 아람에서 4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고 12남매를 낳고, 자신의 재산을 모아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목에도 에서의 무서운 눈초리를 의식하면서 밤잠을 제대로 잘 수 없는 고난을 당해야만 되었다. 그렇게 고난의 시간을 살아야만 되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한 번도 야곱을 떠나거나 잊어버리지 않고 항상 동행해 주시면서 지켜 주시고, 복을 주시고 역사해 주시면서 궁극적으로 축복의 사람으로 만들어 세워 가신다.
야곱은 비록 사회성과 능력이 뒤떨어져서 사회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삶을 살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엄마의 지긋한 사랑을 받으면서 비교적 평안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평안한 사람에게는 더 이상 새로운 세계에 대하여 도전하고 싶어하는 도전의식이 없다. 지금 삶이 너무 편하고 좋은데 뭐 하러 고생하면서 힘들게 살아야 하냐? 하는 생각 때문에 새로운 것에 대하여 호기심과 도전의식도 없다. 그렇게 안일한 삶을 살아가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고난의 길을 주면서 그 고난을 이겨내게 하면서 비로소 축복의 사람으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가는 것이다. No Cross No Crown이라고 한다. 고난의 십자가가 없으면 승리와 영광의 면류관이 없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고난의 십자가가 있어야 승리와 영광의 면류관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승리와 영광의 면류관을 주시기 위해서 온갖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게 하시는 것이다. 저가 좋아하는 말이 하나 있다. “유인필승(有忍必勝) 무인필패(無忍必敗)”라는 말이다. 곧 인내가 있으면 반드시 승리하고, 인내가 없으면 반드시 패배한다는 말이다. 고난의 길에 반드시 동행해야 할 단어가 바로 인내(忍耐)하는 것이다. 신앙인이 살아가는 길은 반드시 인내라는 친구를 벗 삼아서 인내와 두 손을 꼭 잡고 같이 걸어가야 한다. 그 길이 지금은 고난의 길이지만, 결국에는 축복의 길, 상급의 길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궁극적으로 축복의 세계로, 영광과 승리의 면류관을 씌워주시려고 하신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가기를 원하신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걸어가는 신앙인은 반드시 고난의 길을 인내하며 믿음으로 이겨내는 사람이다. 그 고난이 곧 축복의 길임을 믿고 끝까지 믿음으로 이겨내야 한다. 믿음으로 고난을 이기는 자만이 축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믿음으로 고난을 이기는 자만이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다. 믿음으로 고난을 이기는 자만이 축복의 근원이 될 수 있다. 우리 모두가 믿음으로 고난을 잘 이겨내어 축복의 주인공, 축복의 통로, 축복의 근원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아멘.
대전와우리교회 http://cafe.daum.net/GRACEOFJ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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