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접-최고의 계명(마태복음 7:7-12)
대접-최고의 계명
마태복음 7:7-12(21.6.6)
한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뉘엿뉘엿 해가 지기에 한 동네에 들어갔습니다. 마침 궁궐 같은 큰 집이 있어 주인을 불렀습니다. “저는 길가는 나그네입니다. 하룻밤만 묵고 갔으면 하는데 허락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고 했더니 주인은 “이곳은 여관이 아닙니다. 저 건너편에 있는 여관으로 가 보십시오.”라며 거절을 합니다.
이때 나그네는 한 가지 질문을 하는데. “그러면 주인장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이 큰 집에 지금까지 몇 대나 살아오셨습니까?” “예, 나까지 16대를 살아왔습니다. 왜죠?” “그렇다면 그 15대 조상들 모두는 지금까지 생존해 계십니까?” “아니죠, 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이 집도 여관집과 뭐가 다릅니까? 대대로 자고, 가고, 자고 가고를 15대나 반복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나도 하룻밤 묵고 간들 뭐가 이상한 일입니까?” 주인은 이 재치 있는 나그네의 말을 듣고, 하룻밤을 묵게 해 주고, 잘 대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나그네와 같은 인생입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도 나그네입니다. 만날 때 마다 서로 잘 대접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지난번 김삿갓이 죽은 사람의 묘비에 ‘다죽다먹’이라는 비문을 써 주었다는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다죽다먹’이 무슨 뜻입니까? ‘먹다죽다’입니다. 나그네와 같은 인생, 먹다죽다 인생이 아니라 대접하며 사는 인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대접하는 인생은 어떤 인생입니까? ‘나사봉충’이라는 말을 기억하십니까? 나누어주고, 사랑하고, 봉사하고, 충성하며 살자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본문 12절에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을 기독교 윤리의 황금과 같은 계명이라고 해서, 황금률이라고 부릅니다. 즉, 대접은 최고의 계명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말씀합니다. 같은 말씀이 누가복음 6:3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그런데 이 구절들의 우리말 번역은 너무 의역이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대접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이 말씀을 원문 그대로 번역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행해 주기를 원하는 바의 모든 것들을 그와 같이 너희가 저희에게 행하라”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 나에게 요구합니다. 내가 사람들의 요구를 안다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 주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접의 의미입니다.
대접에 대한 이 세상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그 일을 행하지 말라”입니다. 유대의 저명한 랍비인 힐렐(Hillel)은 ‘네가 싫어하는 것은 타인에게도 행치 말라’고 하였고 헬라의 스토아 철학자들은 ‘네게 해주기를 원하지 않는 일이면 다른 사람에게도 행치 말라’고 했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이면 악한 일을 말합니다. 저 일이 악한 일이라면 다른 사람에게도 그 일을 시켜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저 일이 악한 일인지 선한 일인지 분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부에서 코로나19로 원격수업을 하게 되자, 불우한 학생들의 결식을 돕기 위해서 편의점에서 식사를 해결할 수 있도록 ‘희망급식 바우처’, 쿠폰을 제공했는데, 품목도 제한적이어서 사서 먹을 수 있는 것도 제한적이고 무엇보다 더 이 쿠폰을 들고 가면 “나는 불우한 학생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함으로 낙인감을 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이 쿠폰을 쓰기를 싫어한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집에서 놀고 있는 아버지가 자녀가 자녀가 받아 온 희망급식 바우처로 술안주로 사오라고 시킴으로 아이는 더 큰 고통을 당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자녀의 형편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다면, 급식바우처로 술안주를 사오라고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접의 의미는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자기에게 좋은 일이라면 다른 사람에게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런 실천을 할 때, 내가 이렇게 대접했으니 저 사람도 나중에 나를 대접할거야, 이런 기대를 조금이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 사람이 어떤 생각과 행동을 하던지 상관하지 말고, 나로서 그 일이 선한 일이라면 적극성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대접입니다. 이런 정신이 율법과 선지자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고, 대접이라는 최고의 계명을 실천하는 힘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대접의 정신은 보복에 대한 태도에서 발휘하라고 말씀합니다. 누가 내 오른 편 뺨을 때리면 왜 왼편 뺨까지 돌려대라고 합니다. 누가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갖고자 한다면 왜 겉옷까지 가지고 가라고 합니다. 누가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한다면 십리까지 동행하라고 합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대접을 잘 하고 싶습니까? 정말 이웃을 잘 대접하고,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하고, 그를 축복하며 살고 싶습니까? 어떻게 하면 잘 대접을 할 수 있을까? 그 해답은 7-11절에 있습니다. 이 구절은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그래서 인생의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위하여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명언으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구하고, 찾고, 또 두드립니다.
예수님은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왜 우리는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려야 합니까?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자기를 위해서 구하고, 자기를 위해서 찾고, 자기를 위해 문을 두드리는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위해 구하고, 찾고, 문들 두드려야 합니다.
누가복음 11:5-13절을 보면 왜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려야 하는지 그 이유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벗이 있습니다. 밤중에 그가 찾아와서 문을 두드리면 말합니다. “벗이여 나에게 떡 세덩이를 꾸어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지금 내게는 먹을 것이 하나도 없다”
집 안에서 친구가 대답을 합니다.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이미 문은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 없노라”며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느냐 비록 벗됨으로 인해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 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떡 세 덩이를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떡 세 덩이뿐이겠습니까? 더 있으면 더 줄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하면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과 같습니다. 그리고 추가된 말씀이 있는데, “너희가 악할 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합니다.
왜 친구는 한 밤중에 떡 세 덩이를 구합니까? 여행 중에 찾아온 배고픈 친구를 대접하기 위해섭니다. 지금 이 친구는 떡 세 덩이를 누구에게 구합니까? 자기의 요구를 들어줄 만한 친구 집에 가서 구합니다. 이 비유에서 세 덩이의 떡을 주는 친구는 누구를 말합니까? 하나님을 비유합니다. 지금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지만 배고픈 친구를 대접하려고, 대접하고 싶어서 한 밤중이라고 염치 불구하고, 찾아와서 떡 세 덩이이를 구하면서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구하는 것을 주시고, 찾는 것을 주시고, 닫힌 문을 열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심지어 성령까지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의 말씀입니까?
내 힘으로 무엇인가 성취하려는 태도는 인본주의이고, 이런 것은 기독교인의 생각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아닙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다리불구자를 향해서 주목하며 말합니다. 우리를 보라. 그 순간 다리불구자는 무엇을 얻을까 하며 바라보았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동전을 던져주었지, 누가 나를 보라고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동전이 아니라 금덩이라도 주려는 가 보다 하며 쳐다보았습니다.
베드로가 말합니다. “은과 금은 네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 손으로 잡아 일으키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즉시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뛰고 걷고 성선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다리불구자를 위해 최고의 대접을 한 것입니다. 다리불구자는 많은 돈을 기대했지만, 돈과 비교할 수 없는 건강을 얻고, 영혼의 구원까지 얻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즉흥적으로 다리불구자를 일으킨 것은 아닐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규칙적으로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고 내려오면서 그 자리에 앉아있는 다리불구자를 보았고, 그를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는가를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 방법을 찾았을 것입니다. 문을 두드려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구하는 자에게 성령까지도 주신다는 약속대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났습니다.
마가복음 2장을 보면 중풍병자 한 사람이 네 명의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많은 사람들로 예수님께 갈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그들은 지붕에 올라가,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를 달아내려 고침을 받게 했습니다. 이들이 중풍병자를 낫게 하는 것이 최고의 대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예수님께 구했고, 예수님을 찾았고, 예수님을 향해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 방법이 지붕을 뚫는 일이었습니다. 길이 열린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내 힘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서로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 구하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지 못할 때, 내 힘으로 사랑하기 힘들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 힘으로 남편을 사랑고, 아내를 사랑하기 힘들 때, 내 힘으로 자식을 사랑하기 힘들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원수까지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랑하는 것이 대접이라고 했는데, 대접할 힘이 없는데,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세 가지 실천 단어가 있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일입니다. 내가 무엇인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구하고, 믿음으로 찾고, 믿음으로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누가 해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까? 하나님입니다. 야고보서 1:6-7절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구하는 자에게 응답해 주십니다. 친구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한 밤중에 떡을 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떡을 구하고, 문을 두드리는 이유는 내 친구는 결코 배고픈 친구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능력이 없어서 사람들을 대접할 수 없지만, 우리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셔서 내가 구하는 것을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은 배고픈 사람들을 먹을 것을 제공함으로 대접하려고 했습니다. 이곳은 빈들이라 먹을 양식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빌립에게 묻었습니다. “빌립아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을 수 있을까?” 이에 빌립은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합니다” 돈이 부족하고, 돈이 있어도 이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떡을 사서 먹을 수 있겠느냐는 생각입니다. 돈도 없고, 떡도 없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결론입니다.
이때 안드레가 예수님께 “예수님, 여기 한 아이가 가져온 도시락이 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어린아이 도시락인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믿음이 있다면, 예수님이 이것 가지고 안 되겠습니까? 축복을 내려주십시오. 예수님께 구하고, 예수님께 찾고, 예수님을 향해 문을 두드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을 찾았고,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 결과 남자만 오천명이 먹고, 남은 조각들이 열 두 바구니가 되었습니다.
대접은 율법과 선지자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대접란 무엇입니까? 내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하려는 마음입니다. 원수라고 대접하려고 한다면, 누구의 사랑이 필요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마음도 사랑도 없습니다. 그래서 구하고, 찾고, 문들 두드려야 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죄인을 대접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렸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땀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기도하셨습니다.
대접은 최고의 계명입니다. 우리의 삶은 나그네와 같고, 한번 뿐입니다. 대접하는 일을 너무 어려운 계명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날마다, 조금씩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림으로 응답을 받는 놀라운 축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사랑, 십자가 사랑으로 이웃과 내 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대접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예일교회 이동섭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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