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편 14절-15절: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14절: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하나님께서 누구를 친하게 가까이 하느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다.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당신의 언약을 보이신다는 약속이다.
친밀함이 어디서 나오느냐? 친밀함은 의사단일성에서 나오는 거다. 쉽게 말하면 마음이 맞는 데서 친한 것이 나온다. 그러면 뭐가 맞는 것이냐? 소원이 같고, 목적이 같고, 취미가 같고, 추구성이 같고, 지향성이 같으면 자동적으로 친밀해진다.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곧 이 단일성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내가 하나님의 소원 목적에 맞추고 하나님의 취미에 맞추면 내가 하나님의 것으로 된다. 이렇게 되니 그 분과 친해진다. 쉽게 말하면 닮으면 친해지는 거다. 친구가 뭐냐? 마음이 같으니 친구가 되는 거다. 친하면 서로 만나면 즐겁다. 대립이 되면 친해질 수가 없다.
내가 하나님과 친밀하면 그 분을 자꾸 닮아가게 된다. 하나님이 좋으니, 하나님과 친하니 같이 있게 되고, 같이 있으니 자꾸 하나님을 닮아가게 된다. 좋은 친구와 같이 있으면 좋은 친구를 닮아가게 되고, 나쁜 친구를 자꾸 만나면 나쁘게 닮아간다. 이 이치를 어기면 안 된다.
하나님이 세상염려 걱정을 하실까? 우리가 하나님이 좋아서 하나님께로 붙었는데 만일 하나님이 늘 우거지상을 하며 세상염려 걱정을 한다면 그 옆에 있는 우리도 자꾸 세상 쪽으로 끌려 내려가고 어두운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염려 걱정을 하는 사람을 친한 친구로 사귀면 그 사람은 물론이고 자기도 어두워지기 시작을 한다. 그래서 친구도 잘 사겨야 한다. 사람을 잘 사겨야 한다. 빛과 가까이 있으면 자기는 밝아진다. 밝아지면 마음이 쾌활하고 모든 것이 분별이 된다.
여호와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것을 예배의식의 순서나 어떤 종교적인 사업이나 업적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인격적 의사적인 면에서 하나님과 가까이 해야 한다. 이게 옳고 바른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님과 친하고, 예수님과 친하니 그 예수님을 믿는 성도끼리 친하고, 이래야 한다. 친밀하지 못하면 성도의 교제가 없고, 믿음이 자라지 못하고, 자기 축소가 되어버린다. 자기가 쭈그러진다. 예수님을 가까이 하면 배울 것이 많고 깨달을 것이 많다. 나에게 영원히 유익이 된다.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친구를 사귈 때 영원히 유익이 되는 사람을 사겨야지 깡패를 사겨서 그 사람이 경찰서에 잡혀가서 ‘네가 누구와 같이 있었느냐?’ 하니까 나와 같이 있었다고 하면 나는 죄도 없는데 그만 낭패를 보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도 좋은 사람을 사겨야 하고, 신앙적으로는 더 말할 것이 없다. 신앙인이 물질적 돈 욕심으로 되어있으면 피해를 보기 마련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예수님과 친밀하면 깨달음이 점점 많아지고, 깨달음이 많아지니 자기의 활동적 폭이 자꾸 넓어지고, 생각하는 것이 깊어지고, 생각이 깊어지면 사람이 넘어짐이 없이 튼튼해진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반드시 이렇게 되게 되어있고 되어야 한다.
예수를 믿은 지 수 년 혹은 수십 년이 되었다고 해도 자기를 생각해 볼 때 ‘이거 내가 뭔가 잘못됐구나’ 하는 게 있다면 얼른 바른 인생으로 들어와야 한다. 안 그러면 바람 부는 대로 날려 다니고, 가정은 가정대로 힘이 없어지고, 시험에 들게 되고,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고, 결국은 나중에 바로 하려고 해도 더 힘들어진다. 바로 잡히지를 않는다. 왜 그러냐? 자기가 이때까지 살아온 정신이 그렇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신 마음을 잘못 먹으면, 친구 하나 잘못 사귀면 자기 평생을 도둑맞게 된다.
자기가 여호와 하나님과 의사적으로 통하면 그 어떤 바람이 불어도, 유행의 바람이나, 물가의 바람이나, 시대적인 어떤 바람이 불어도, 개인이나 가정에 어떤 사건이 와도 그런 것에 요동하지를 않는다.
남편과 아내도 의사적으로 통해야 한다. 서로 안 통하면 위험하다. 부부라고 하는 것은 밤에 잠잘 때만 부부가 아니다. 이것만 생각한다면 짐승과 같다. 인간은 인간끼리 의사적으로 통해야 한다. 이게 인간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사람을 만날 때 얼굴과 얼굴끼리 대면을 하게 되어있다.
목자와 양도 의사적으로 통해야 한다. 의사적으로 통하면 친밀해지고, 친밀하면 서로가 즐겁다. 강압적 억압적 명령적으로 통하면 문제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의 사리사욕에 목적을 두고 사람을 사귀려고 하는데 이런 사람은 사람의 마음을 사냥하려는 마음이 들어있어서 이 사람의 인격은 썩는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 중에는 예수님의 성품으로 인격화 되는 그 면이 아니라 예수이름을 이용을 해서 세상과 친한 사람이 참 많다. 우리 이웃에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 예수를 믿는 사람과 친했는데 예수를 안 믿는 이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도와줬더니 그 사람들이 다 자기에게 피해를 주고 도망을 갔다고 한다. 내가 이 말을 들을 때 같은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냐? 이처럼 예수이름을 이용해서 사람을 속여먹고 도망을 가는 그 속에는 도둑이 들어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사람을 더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왜냐? 이리가 양이 옷을 입고 오기 때문이다. 물질적 육적 면의 사리사욕을 취하기 위해서 예수이름을 가지고 오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 것을 이뤄달라고 예수를 믿는 신앙은 하나의 종교인이다. 예수이름을 이용해먹는 나쁜 사람이다. 예배의식은 여호와 하나님과 친해지는 하나의 방편인데 교회 안에서 이 예배의식을 이용하여 성도들을 세상과 친해지도록 하는 마음도적이 수없이 많다. 교회 안에 성도들의 마음을 도적질하는 거짓된 종들이 수없이 많다. 거짓된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간단히 말하면 물질축복 중심이다. 그 다음에는 신비체험 중심이고, 그 다음에는 충성봉사 중심이다. 위주가 그렇다. 이걸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이런 것들에는 사람의 마음을 도적질할 수 있는 허점이 얼마든지 있다. 교인들이 이런 데 빠지면 다 도적맞고 만다.
참 종이 뭐냐? 성경을 통해서 보면 모세는 참 종인데, 애굽 같은 세상에서 사람을 광야로 뽑아낸다. 애굽은 세상을 상징하는데, 일반적으로 생각해 보면 세상이 살기가 좋지 사람을 광야로 데리고 나가면 그곳에 집이 있나, 먹고 살 게 있나? 살기가 참으로 어렵다. 그런데 모세는 백성들을 세상이라고 하는 죄악 된 애굽에서 노예로 살지 않도록 광야로 뽑아낸다. 사람은 사는 것이 좀 불편할지라도 자유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백성들이 광야로 나가야 만이 애굽의 바로 왕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유로 살 수 있는 거다. 이 자유는 하나님의 법으로서의 자유다.
자유인에게는 법이 있다. 죄인에게는 법이 없다. 죄인 자기는 법이 없이 사는 걸 자유라고 하지만 그러나 사람은 도덕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법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거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법 아래 묶여진다. 이런 인간을 죄를 안 짓게 만들면 법 아래 있는 게 아니라 법과 상관이 없이 사는 자유인이 된다. 그러면서 법의 사람으로 되는 거다. 이게 얼마나 자유로우냐? 그래서 참 자유는 하나님의 법밖에 없다.
우리 인간은 물질인 육신을 입었기 때문에 자연법을 지키게 되지만 하나님의 법은 자연법에서 사는 게 아니라 생명법, 하나님의 법에서 사는 거다. 그래서 성도들은 자연법에 얽매인다기보다 자연법을 이용을 하며 사는 거다. 그러니 얼마나 자유로우냐?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과 절친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아들을 주었다. 그리고 그 아들의 후손들이 약속대로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수없이 많아졌다. 그러니까 신앙의 자손들이 많다. 도덕성의 차원이 놓은 자손, 신앙의 차원이 높은 자손이 많다.
그런데 이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야 이삭아, 자식을 하나만 낳아서 잘 길러라’ 했을까?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가견적인 우리나라에서 얼마 전까지도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고 하다가 요즘은 하나도 안 낳으려고 하니까 큰일 났다고 한다. 결국 공동묘지로 갈 늙은이들은 우글거리고 젊은이들은 몇 명이 안 되면 대한민국은 힘이 약해지고 영토를 빼앗기게 된다. 그래서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우리 교인들은 시집장가 가서 열 둘 씩만 낳는다면 40년이 지나면 대한민국에 궁극교회 교인들이 엄청나게 많아지겠구나.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아들을 주셨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 들어있는 성육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들에게 역사적으로 보여주셨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당신의 나라에서 당신의 자녀들과 함께 영원히 살게 하신다는 언약을 완전히 이루실 것이다.
또 성경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과 친밀한 자에게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해주고 싶은 신나는 사건들이 많이 있다. 우리도 그런 맛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성도들이 정말 믿음의 사람이 되면 이 현실세상에서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역사를 체험하고 가게 되는 거다. ‘기도해서 병 낫고’ 이런 차원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여준다. 자기 생각 밖의 좋은 사건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이런 체험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믿음으로 연단을 받는 것이 있어야 한다. 어려운 상황을 지나면서 믿음을 지키면서 그것을 이겨내는 것이 있어야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된다.
교역자의 세계에서도 하나님의 역사가 임하는 것을 많이 본다. 부정적인 면으로도 보고 느낄 수 있고, 긍정적인 면으로도 보고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본인은 그걸 잘 의식을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 눈에는 그걸 보는 거다. 그러면 신앙 믿음으로 바로 살려고 하는 성도들, 또는 그런 종들을 위해서 나는 내 나름대로 기도가 들어가는 거다.
이 외에도 온 세상을 노아에게 준 것이라든지, 다윗이 골리앗을 때려눕힌 일이라든지, 다니엘이 사자 굴에서 살아나온 일이라든지, 다니엘의 세 친구가 7배나 뜨거운 풀무불 속에서 불 탄 냄새도 없이 살아나오게 하는 것이라든지 이게 다 여호와 하나님과 친하니까 신바람이 나는 일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거다.
이런 것들은 그냥 문자적으로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게 아니라 그 속에는 영적 정신적인 면의 교훈이 들어있는 거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7배나 뜨거운 불속에 들어갔는데, 불은 고통을 말한다. 그러니까 7배나 더 뜨거운 불이란 보통 사람은 견지지 못할 혹독한 정신적인 고통을 의미한다. 이런 혹독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 사람에게 하나도 해가 없게 해서 그들을 높이 올리시는 장면이다. 이런 일들이 이 세상에서 얼마든지 있는 거다.
이들이 이런 역사를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불속에서 걸어 나오기 이전에 불에 타져 죽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격적 정신 사상적 각오적 결단적 하나님과의 친밀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인격이 참으로 부럽다. 이들이 7배나 뜨거운 불속에서 타지지 않고 살아나온다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런 불속이라도 능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의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친밀성이 중요한 거다. 인격적인 관계성이 없이 무작정 밀고 나가는 것은 고집이 돼버린다. 인격적인 관계성이 아니라면 고집이 되고, 이 고집으로 불속에 들어간다면 그대로 불에 타지는 거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장면에서도 ‘신앙의 성격과 성질이 본질적으로 바로 된 거냐, 안 된 거냐?’ 하는 면을 유심히 구별을 하고 분별을 해야 한다. 그냥 각오를 한다고 해서 ‘저건 신앙이다’ 그게 아니라 ‘그 신앙의 성질이 어떤 거냐?’ 하는 면도 따지는 거다. ‘예수를 믿다가 죽었다. 독립만세를 부르다 죽었다. 그러니 순교다’ 하기도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무조건 그렇게 보는 게 아니다.
오늘날 자기도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불속에 들어갔다가 자랑스럽게 걸어 나오고 싶으냐? 하나님과 절대로 가를 수 없는 인격의 친밀성이 없이 ‘예수 믿는 사람은 불에 들어가도 안 타진다’ 하면서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불속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겠느냐?
내가 하나님과 친해지면 하나님이 나를 누구처럼 대해주실까? 하나님과 친해지면 하나님처럼 대해주신다. 얼마나 좋으냐?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좋은 것만 주신다면 내가 하나님과 친해질 텐데 왜 자꾸 싫은 맛을 보여주느냐? 그래서 친해질 마음이 없는 거냐? 고통스러운 맛을 자꾸 보여주니까 그만 겁이 나서 교회에 다니기 싫어지는 거냐? 그래, 생각을 해봐라. 세상도 지나가고 자기도 지나가는 나그네에 불과하다. 사람은 다 지나가는 인생이다. 가지 말라고 아무리 붙들어도 지나가는 거다. 네가 지나가는 것을 붙잡고 얼마나 오래 살겠느냐? 오래 살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느냐?
15절: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육신의 눈을 사물을 보고 판단하고 구별하고 느끼는 눈이다. 그 다음에 생각하고 사고하는 마음의 눈, 이성의 눈이 있다. 마음의 눈은 안 보고도 판단을 하고 결정을 내린다. 누가 말을 할 때 귀로 듣고 마음속으로 판단을 한다. 그 다음에 영의 눈이 있다. 영의 눈은 진리의 눈, 성령의 눈,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천국을 향하는 눈이다.
그러면 하나님을 보려면 이 세 가지 눈 중에 어느 눈으로 보아야 하겠느냐? 영의 눈으로 봐야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거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눈은 영에 대해 밝은 눈이다. 영의 눈은 차원적으로 고차원적 높은 눈이다. 눈도 저질적인 눈이 있고, 중간쯤 눈이 있고, 그 다음에 아주 높은 눈이 있다. 그러면 어느 눈이 제일 낮은 눈이냐? 육신의 눈이다. 육신의 눈은 예수를 안 믿는 사람도 보고 판단하는 눈이다. 그 다음에 마음으로 보는 눈이 있는데, 마음으로 보고 판단하는 이 눈은 믿는 사람도 가지고 있고, 일반사람들도 가지고 있다.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영의 눈을 가지고 진리를 중심해서 진리 따르는 양심을 가지고 판단을 해서 마음으로 결정을 내리기 때문에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 마음으로 판단하는 것과는 다른 거다. 차원이 높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무슨 눈으로 보고 어떤 마음을 가지고 판단을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생각의 차원이 다른 거다. 세상을 소원 목적하여 바라보는 눈은 저질적 저차원적인 눈이다. 세상을 자기의 소원 목적으로 해서 바라보는 눈은 저질적 저차원적인 눈이다. 그렇다면 자기의 눈은 어떤 눈이냐? 이 세 가지 눈의 질을 어느 정도 알면 자기가 어떤 눈을 가지고 살고, 어떤 눈을 가지고 보는 것인지를 알게 된다.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그물에서 어떻게 한다?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한다. 세상은 온통 그물 밭이다. 눈이 어두우면 그만 이 그물에 걸려든다. 이 그물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그물이다. 그러나 영의 눈을 가지고 보면 이 그물이 보이는 거다. 그러면 누가 이 그물을 쳐 놓은 거냐?
그물은 조직적으로 이뤄져 있다. 구멍이 큰 그물이 있고, 작은 그물이 있다. 그리고 고기 잡는 그물의 모양이 아주 여러 가지다. 또 짐승을 잡는 그물도 있다. 그런 것처럼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짜 놓은 조직된 그물이 있다. 회사도 하나의 조직이니 일종의 그물이다. 사회도 그렇고, 정치계도 그렇고, 다 조직으로 이뤄져 있다. 기업을 운영을 하기 위해 조직된 그물은 돈을 잡기 위한 그물이다. 회사운영은 돈을 잡기 위한 그물이다.
그리고 또 하나님께서 짜 놓은 그물이 있다. 이 그물은 보이지 않는 그물인데, 이것은 영적 신앙 사상적 정신면에 속하는 거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그물이다. 사람들이 짜 놓은 조직을 하나님의 허락 하에 마귀가 이용을 할 수도 있고, 마귀가 해놓은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에 이용해 버리는 그물도 있다. 세상은 도망가는 자를 붙잡기 위해 형사를 풀지만 하나님은 불순종자를 잡기 위해서 모든 만물을 당신의 그물로 사용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순종을 잘 하면 모든 만물이 자기 앞에 와서 ‘나를 써 주십시오’ 하지만 불순종하고 교만할 때는 모든 만물이 와서 자기를 거스른다. 그러니 얼마나 고통이겠느냐?
구약의 모르드개 사건을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예정대로 하시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인간들의 조직, 종교적인 조직, 마귀가 하고 싶은 모든 활동을 다 붙잡고 성도를 위해서 구원으로 이용을 해 버리신다. 참 신비롭다. 그러니까 우리가 누구를 친구로 삼으면 좋겠느냐? 하나님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친구로 삼는 거냐? 하나님의 뜻을 찾는 사람이 하나님을 친구로 삼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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