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자료

성도의 삶이란 어떤 것인가?

열려라 에바다 2021. 7. 25. 06:46

성도의 삶이란 어떤 것인가?

1. 주일과 안식일

 

1) 안식에 대하여

 

'안식'은 히브리어로는 '샤바트'라고 하는데 '정지, 멈춤, 휴식'의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안식'은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마치신 후 쉬신 것(창 1:1-2:3)에서부터 유래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여섯째 날까지 창조사역을 모두 마치시고 일곱째 날은 복을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으며, 안식하셨습니다. 이후에 창세기에는 안식일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칠 일이라는 표현은 홍수이야기(창 7:4,10)와 관련하여 몇 번 언급되고 있으며, 야곱이 하란에서 살 때 한번 언급(창 29:27-28)되었습니다.

 

이후 출 16:21-30절에서 언급되기 전까지 안식일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도착하기 전에 신광야에서 유랑할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주셨는데, 매일 각 사람 당 한 오멜씩 취하되 다음날까지 먹지 않고 나누면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낫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제6일에는 각 사람이 이틀 분량의 만나를 거두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 외에 이틀 분의 만나를 거두게 되면 만나에 벌레가 생기기도 하였으나 안식일에는 그 전 날 거둔 만나에 벌레가 생기지 않았던 신비스러운 일들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여 안식일을 철저히 지켜서 안식일만큼은 불도 피우지 않았습니다. 또한 실제로 안식일을 범하여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잡힌 사람을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에도 이루어지는 신성한 봉사와 일이 있었는데 레위지파 중 고핫자손은 매 안식일마다 하나님을 위하여 진설병을 준비하였으며, 제사장들은 안식일의 번제물 즉 일년 되고 흠없는 수양들과 그 외의 소제물과 전제물을 준비하여 안식일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2) 올바른 안식일 준수

 

안식일은 자신을 기억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노예들을 규칙적으로 쉬게 하는, 당시 고대 사회에서는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자비로운 제도(신 5:14 이하)였습니다. 안식일을 범하는 사람은 사형에 처해지기도 했습니다(민 15:32 이하). 그러나 이 같은 명령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은 온전히 지켜지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의미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변질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지키도록 명한 안식일이 사람에게는 짐이 되어 버렸고 오히려 안식일에는 더 많은 죄가 범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을 자신들의 일에 방해되는 날로 생각하여 무겁고 부담스러운 짐과 같이 여겨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에 의해 안식일은 하나님과 인간 모두에게 가증스럽고 부담스러운 날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래서 안식일은 단지 지켜지기에 급급한 날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결국 성회와 더불어 악을 행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신 하나님께서는 변질된 안식일뿐 아니라 모든 명절까지도 폐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날인 안식일이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대로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후 느헤미야는 안식일에 장사하는 것을 철저히 금지했습니다.(느 10:31 느 13:15 이하) 구약과 신약의 중간기에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올바로 준수하기 위한 법을 더욱 발전시켰음을 우리는 신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3)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구약 시대에 하나님을 알기 위한 방편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안식일은 그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형식적으로 지켜지는 것에 대해서 비판하고, 사람과 만물을 복되고 거룩하게 하는 날인 안식을 본래의 정신을 깨우쳐 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거나 일을 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영적 사정을 깨닫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를 안식일을 범하는 이단자로 규정하였고 실제로 예수님을 살해하고자 하는 동기도 안식일을 범한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안식일에도 쉬임 없이 수많은 기사와 이적을 베푸시며 일하셨는데 38년된 병자, 나면서 소경된 자, 18 년 동안 귀신들려 꼬부라진 여자, 고창병 든 자, 손 마른 자를 고치셨습니다.

 

수십년 동안 시달리던 병마에서 놓임을 당하는 병자들을 보고도 오직 안식일을 범하는 것만을 문제삼은 유대인들의 경직된 모습을 일깨워 주시려는 것이 예수님의 의도지만, 그러나 근본적인 것은 예수 자신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 즉 그날을 복되고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이와 같이 예수님을 온전히 영접할 때에만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순간이 바로 안식일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에게는 안식일의 의미가 단순히 지키는 데 있지 않기 때문에 어느 특정한 날만이 안식일이 아니라 모든 날이 안식일이며 주일이 됩니다.

 

4) 주일에 대하여

 

안식일은 일주일의 마지막 날, 7일로서 우주완성의 날을 의미하며 이스라엘 백성의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 6시부터 토요일 저녁 6시까지입니다. 이에 비하여 주일은 안식일의 다음날인 8일째의 날로서 구원 완성의 날을 의미합니다. 이 날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께서는 지상 최후의 안식일을 돌로 막은 무덤 속에서 종결지으시고, 제8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새 날, 주일을 제창하신 것입니다.

 

주일이 제 7일에서 제 8일, 즉 일주일의 첫째 날로 지켜지게 된 역사적 배경은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그들의 지도 아래 있는 1세기의 교회가 그리스도가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모이면서부터 기원됐습니다. 사도들은 예수 부활하신 바로 그날 저녁에 예배드리기 위하여 다락방에 모였으며, 오순절 성령강림 때도 안식일 이튿날 모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매주일 첫날에 모여 성찬을 나누었고, 밧모섬으로 유배됐던 사도 요한이 계시를 받은 날도 이날입니다. 그래서 이날을 '주의 날'이라 합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지키는 주일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안식일 대신 새로 제정된 중의 날입니다.

 

안식일이 '지키는 데' 목적이 있지 않고 하나님을 알게 하는 양육과정이었다면, 주일도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한 준비과정으로서 참 의미와 참 목적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의 본질을 간과한 채 지켜오다가 결국 안식일의 의미가 변질된 것같이 오늘날의 그리스도 인들도 주일을 지키는 것에만 급급하면 주일의 본래적 의미도 퇴색하게 됩니다.

 

안식일이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구약적 그림자라면, 주일은 다시 오시는 주님에 대한 신약적 그림자입니다.

 

2. 십계명에 대하여

 

1) 십계명이란?

 

십계명은 히브리말에 의하면, 본래 열 가지 낱말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입니다. 율법의 가장 표준이 되는, 곧 신앙과 도덕 생활에 가장 근본적이고 표준적인 교훈입니다. 1계명에서 4계명까지는 하나님의 본질에 관해 설명하고, 그에 대한 인간이 취해야 할 근본 태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또 5계명에서 10계명까지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관한 도덕적 계명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2) 십계명의 구성

 

십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언급한 처음 네 계명과, 인간 관계를 취급한 나중의 여섯 계명의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유대인들은 이 십계명을 다음과 같이 둘로 나누어 생각했습니다 : (1)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2)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6-39)."

 

(1) Table(첫째 비석)

가. 다른 신들 (other gods)

나. 다른 형상들(Images)

다. 하나님의 이름(The name of God)

라. 안식일(The Sabbath)

마. 부모(parents)

 

(2) Table(둘째 비석)

가. 살인(Murder)

나. 간음(Adultery)

다. 도적질(Steel)

라. 거짓증거

마. 탐심(Covitiny)

 

십계명은 두 돌판 양쪽에 기록되어 있었다고 알려졌는데, 한 번은 백성들의 죄로 인해 화가 난 모세가 그들을 향해 던짐으로써 깨어져서 하나님께서 재기록 하셔서 다시 전달해주었다고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그 돌판은 모세의 형인 아론이 가지고 있던 싹이 난 지팡이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유랑할 때 먹었던 하나님이 내려 주신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함께 법궤, 혹은 언약궤라고 불리며, 이스라엘백성이 어디를 가든지 항상 맨 앞에서 모시고 다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후 지은 성전에 넣어두었다가 읽어버린 하나님의 궤 안에 있었다고 합니다.

 

3) 십계명의 명칭

 

성경에 "십계명"이란 명칭은 별로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십계명"을 "증거판"(출 32:15-16 신 4:1529:10 고후 3:3).또 "증거 법판"(출 31:18)이라고도 했으며, "두 돌비"라고도 한 곳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십계명이란 명칭은 제17세기(A.D)에 웃서(Ussher) 대감독이 처음 사용했다고 알려졌습니다.

 

계명이란 뜻은 가장 보편적인 말로 "명령, 지휘, 그리고 뜻대로 한다"(Commend)는 뜻과 "계명"(Commandment)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잇습니다. 계명은 하나님이나 또는 사람의 법적 명령(Order)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마음대로 지키거나 지키지 않는 절대명령들을 의미합니다. 성경의 어떤 부분에서 나오는 계명이라는 말은 금령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명령에 "....하라"는 명령만 아니라"....하지 말라"는 금령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긍정적인 것만 아니라 부정적인 것이 같이 있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명령과 금령을 함의한 단어가 구약에 약 164회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4) 십계명의 내용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십계명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함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진리의 4계명까지인데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입니다. 인간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함은 후반의 6계명들입니다. 인간과의 관계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의 근거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실천자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그 계명의 완성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함에 근거를 둔 자입니다. 고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은 곧 계명의 완성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완성자이심으로 성도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율법을 지키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1계명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이것이 첫 번째 계명으로, 그 순서로서만이 아니라 중요성에 있어서도 첫 번째입니다. 만일 이 계명에 불복하면 다른 것에는 복종할 수도 없게 됩니다. 이 계명의 열쇠는 "나 외에는"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첫 번째 분이셨고 오직 하나님께만 그들이 예배드려야 했습니다. 이 훈계는 신약에서, 예수님이 사단에게 유혹을 받을 때에 하신 말씀으로 거듭되었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 4:10)."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집착하고 의지하려 드는 것이 바로 신"이라고 말하며,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우상이라고 합니다. 금송아지에 절하지는 않으나, 황금을 경배하고, 바알의 우상에는 절하지 않으나 일만 원권 지폐에는 몸을 굽히는 것은 바로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우리 앞에 두는 것"이 아닌지요. 삶에는 많은 좋은 것이 있으나 그것이 하나님은 될 수 없습니다. 오

 

2계명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에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 20:4-6).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 어떤 모양에도 절하거나, 또 마음으로 위해서는 안됩니다. 칼빈(John Calvin)은 이 구절을 주석하기를 "진실한 하나님이심을 첫째 계명에 선언한 후에 그는 다만 홀로 경배 받으실 분이심과 또 그는 그에게 드릴 합법한 예배를 정의하여 명령했다"고 했습니다.

 

종교적 예배의 목적을 위해서라도 어떤 것 앞에서도 절을 해서는 안됩니다. 십자가나, 성모 마리아상, 성인의 동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경배해서는 안됩니다.

 

그 이유는 형상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흐리게 하며, 형상 숭배는 곧 하나님을 물질 안에 제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시 115:4-8에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고 했습니다.

 

3계명여호와의 이름을 거룩히 하라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인격과 능력과 하나님 자체를 대표하는 것이므로, 아무 때나 불러서는 안됩니다. 이 명령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고 다만 '아도나이'(주님)이라고 부름으로써 마침내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다가, '여호와'라는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에 가깝다는 성서학자들의 오랜 연구결과에 따라 여호와를 이름이라고 간주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필요 없이 무의미하게(가치 없게) 그리고 쓸데없이 거칠고, 무법하게 사용함을 금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함부로 맹세해서도 안됩니다.

허위와 거짓 말에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한다든지, 저주, 마법과 요술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참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곳은 기원, 기도, 찬양과 감사와 예배에만, 또 거룩한 믿는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사용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그것은 신성모독이 됩니다.

우리의 이름이 우리들 자신에게 중요하듯이 하나님의 이름은 그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망령되이"라는 뜻은 경망되며 불경건한 태도를 뜻하는 것으로서 경망된 욕설과 저주가 그 예입니다.

 

4계명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창조의 역사가 일곱째 날에 그친 후에 하나님은 복을 주었고 창조한 세계를 신성하게 하셨습니다. "안식"이라는 말은 휴식을 뜻하므로 그 날은 종일 아무 일도 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그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 날을 완전히 하나님께 예배만을 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신약성서에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골 2:14-17에는 아무도,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 없는 까닭은 이는 폐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힌 까닭이라고 설명되었습니다. 신약성서에서는 제 칠일이 아닌 주일의 첫날을 지키라고 명하고 있으니, 이는 이 날 제자들이 주의 만찬을 떼려 모였으며 하나님과 예배하려고 모였던 까닭입니다(행 20:7 고전 16:1-2). 이 날은 "주의 날"이라고 계 1:10에서 묘사되었으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본을 따른다면 예배만을 위한 쉬는 날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안식"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천국에 있는 것이며, 노동으로부터 해방됨을 뜻합니다(계 14:13).

 

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 계명은 가정을 지키고자 계획된 것입니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가정에서의 인간관계를 생각해야 하는 것은 가정이야말로 사회의 주춧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계명에는 지키는 자에게 주어질 보상이 덧붙여져 잇습니다. 즉 이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땅에서 오랜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계명은 신약에서 반복되었으며 그 의미는 확대되었는데, 바울은 엡 6:1-3에서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게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제6계명 살인하지 말라

 

인류의 생명에 대한 존엄성은 윤리의 근본이요. 하나님의 절대법입니다. 그 이유는 생명의 창조와 관리자는 인간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만이 좌우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허락의 한계 내에서 사람이 관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출 19:12-21:12). 그뿐 아니라 사탄도 인간의 생명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해할 수가 없습니다(욥 2:6). 그러므로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소유요, 그에 의하여 좌우됩니다. 이 하나님의 주권에서 벗어나 그 생명을 좌우하고 손상시킬 때에 그것은 죄가 되고, 거기에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이 가해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육신적으로 생명을 해하는 행위를 넘어서, 정신적으로 살인하는 것에 대해서 지적하셨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1-22)

 

7계명 간음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성의 바른 사용을 위해서 결혼 제도를 제정하셨습니다. 결혼은 인류에게 주어진 최초의 선물들 중의 하나이요. 그것은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있었습니다.

 

이 "간음이란 히브리어는 나압인데 레위기 20장 10절에 보면 남자와 여자에게 적용이 되어 있습니다. 한 남편이 다른 남자의 아내와 성적인 교통을 한다든지, 또는 한 사람의 아내가 다른 여자의 남편과 성교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 의하면 이것은 남자나 또는 여자에게만 적용이 되는 것이 아니고, 양자에게 다 적용이 됩니다. 이 죄를 범했을 때 사형입니다(레 20:10). 또 미혼 남자가 유부녀와 성교했다든지, 또 미혼 여자가 아내가 있는 남자와의 성교에도 적용되는 죄입니다. 그도 사형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그의 백성은 그 하나님에 의하여 거룩한 법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고, 또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이 죄를 범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청결을 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윤리적인 면만 아니라 또 종교적인 면에서 청결을 도모하고, 사랑의 결합과 통일을 도모하여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법질서를 잘 세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영광을 땅 위에 나타내어야 한다. 계명에 의하면 간음은 자기의 몸과 가정에 대하여 범죄함이며, 사람의 인격만 아니라 사회에 대하여 범죄함입니다.

 

그리고 끝으로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에게 외쳐 말하기를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그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고 했다(창 39:8-9). 또 다윗이 밧세바에게 범죄 했을 때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라고 했다(시 51:4).

 

이 계명은 혼인 관계를 위한 것입니다. "간음"이란 모든 부정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써 여기서는 기혼자나 미혼자가 모두 해당됩니다.

 

이 계명은 신약에서 다음과 같이 그 의의가 확대되었습니다.

(1) 육체적인 간음: 십계명에서 의미하는 것과 같은 종류.

 

(2) 정신적인 간음: 예수께서는 행위만이 아니라 음욕을 품는 것마저도 금하셨으니 :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7,28)"

 

(3) 합법화된 간음 : 한 번이나 혹은 그 이상 이혼한 사람(성서적으로 인정되지 않는)과 결혼하는 것으로써,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 19:9) 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육체적, 정신적, 합법화한 간음을 해서는 안되는 것인데, 이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새 계명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8계명 도적질하지 말라

 

이 계명은 재산을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에서는 도둑이 훔친 물건의 몇 배를 돌려주도록 규정하였습니다. 이 계명은 신약성서에서 반복되었습니다(롬 13:9).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 12:17)고 하셨으며, 엡 4:28에서는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함으로써 소극적 의미에서 훔치지 않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주기 위해서 일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9계명거짓 증거하지 말라.

 

사람이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이 없고 자신의 허물과 죄를 알지 못하고 정직성을 상실한 때문입니다.

요 8:44절에 보면, 사단은 '거짓말쟁이'요 모든 '거짓의 아비'라고 되어있습니다. 요 14:6절에는, 그리스도는 진리라고 했다. 그래서 역사를 통하여 계속되는 투쟁은 그리스도 대 사단, 즉 진리 대 거짓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말은 우리의 내면적 성품을 드러내 보입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완전히 의로우셨기 때문에, 그가 하신 모든 말씀은 의로운 것입니다. 사람들은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인했을 때 그를 판단했던 것과 같이, 우리의 말에 의하여 우리를 판단하십니다. 우리의 언어가 진실하고, 순수하고, 깨끗하면, 세상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성품이 얼마간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 계명은 사람의 명예를 존중하기 위한 것입니다. 좋은 평판은 한 사람의 가장 가치 있는 재산 중의 하나입니다.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잠 22:1)

롬 13:9에는 여기에 관한 언급이 있습니다. 우리가 "거짓 증거"하게 되는 일이 여러 가지 있으니 법정에서의 위증, 소문을 말하는 것, 중상 모략, 거짓 진술,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는 것 등입니다. 베드로는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벧전 3:10)라고 하여 그리스도인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진리를 외쳐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0계명탐심을 물리쳐라

 

각자의 탐욕을 경계한 것이니, 탐심은 이미 언급한 여러 죄의 근원이 되는 까닭입니다. 구약에서는 타인 소유의 물건에 대한 불법적인 욕심을 뜻했으며, 특이한 점은 이 계명만이 행위 자체뿐 아니라, 그러한 마음까지도 규제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 계명도 역시 롬 13:9에 수록되었고 지금까지도 이 탐욕의 문제는 심각한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탐욕"의 뜻이 사물- 특히 물질적인 것에 대한 불법적인 사랑을 뜻하는 것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구약성서의 십계명이 타인의 소유를 탐내는 데 대해 언급하는데 반해서 신약성서에서는 자신의 것에 대해서도 지나친 욕심을 갖지 말도록 훈계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께 나아 와서 유업을 정당하게 나눠 갖게 해 달라고 청했을 때 "삼가 내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리라"(눅 12:15)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탐하는 자도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엡 5:5 고전 6:9).

 

3. 헌신과 봉사

 

헌신이란 우리의 몸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말하며, 봉사는 종(노예)의 신분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받들어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신과 봉사란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기 위해 우리의 귀중한 것들, 즉 마음과 시간과 몸과, 물질 등을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1) 헌신과 봉사의 이유

 

(1) 하나님의 은혜를 거저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그 은혜에 감사하고 보답하는 정성으로 우리에게 있는 귀한 것을 바치며 그 뜻대로 일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 자신의 골로나 아니면 돈으로 샀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거나 사람들을 섬길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구원받은 우리성도들은 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고전 6:19-20). 왜냐하면 멸망 받을 우리를 예수께서 생명을 버리시고 피값으로 사서 구원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것이 아니라 주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2) 예수님께서 헌신과 봉사의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기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고 한 대로 인간이 되신 것도 부족하여, 사람의 섬김을 받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람들의 발을 씻기고 병든 자를 고쳐주시는 희생의 삶을 사셨습니다.

 

(3) 교회는 성도들의 헌신과 봉사로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저절로 커 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섬기는 성도들의 헌신과 봉사를 통해 성장합니다. 헌신과 봉사가 없이 서로 섬기기만 요구하고 영광 받기만을 바란다면 교회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순교자의 피를 통해 교회가 오늘날처럼 성장한 것처럼, 교회와 이웃과 사회를 섬기는 성도들의 희생 없이 교회는 빛과 소금이 될 수 없고 하나님 나라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2) 헌신과 봉사의 자세

 

(1) 주어진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교회 일은 사람들의 눈에 띄는 영광스러운 일도 있고,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거나 아무리 해도 빛이 나지 않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주어지든 기쁜 마음으로 하지 않고 억지로 마지못해서 하는 것은 헌신과 봉사가 아니라 의무입니다. 어떤 일이든 마르다나 마리아가 주님을 섬기듯 기쁜 마음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2) 겸손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온유함이 세상에 능할 자가 없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겸손하고 온유한 모세나, 수고하고 무거운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하신 그리스도처럼 겸손하게 일해야 합니다. 때로 일은 많이 하면서도 교만하거나 불만이 많아서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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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작은 일을 하고도 대문짝 만하게 광고하지 않으면 조금이라도 헌신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는가 하면, 사람의 칭송을 받은 사람은 내세에서 받은 상급을 금생에서 이미 받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은밀하게 하는 선행은 하나님이 갚아 주리라고 약속되어 있습니다.

 

(4) 자신의 능력과 재능에 따라 해야 합니다.

교회에 모인 사람들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각자의 능력과 재능에 따라 교회를 섬기는 교회의 지체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고 하였습니다.

 

(5)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시험에 들어 그만두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욕에 치우치기 쉽고 분쟁과 멸시하는 시험에 들기 쉽습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생명을 면류관을 주시려고 기다리시는 그리스도를 향해 달리는 마음으로 끝까지 충성하는 마음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6) 함께 해야 합니다.

교회의 일이 어느 한 사람이나 소수의 몇 사람만이 독차지하듯, 해서 다른 사람들을 소외시키며 또한 본인도 부담감 때문에 교회생활 자체가 피곤해 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일은 거룩하고 복된 날이지 지나치게 많은 일로 인해서 피곤하고 지쳐 다음날까지도 지장을 주는 날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될 수 있는 한 여러 사람이 분담해서 함께 주의 일에 참여하고 함께 안식을 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3) 헌신과 봉사의 보상

 

(1) 구하지 않은 것까지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이방인들처럼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고 대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마 6:33). 그리하면 하나님은 구하지 않은 모든 것까지 더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의 일은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확장되고, 하나님의 정의가 땅끝까지 펼쳐질 수 있도록 헌신하는 것뿐입니다.

 

(2) 하늘의 상급이 있습니다.

겸손과 인내로 자기에게 주어진 헌신과 봉사를 다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신령의 복을 주시고 장차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영광의 자리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신과 봉사는 성도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이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써 하늘의 상급이 주어져 있는 특권을 얻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4. 섬김에 대하여

 

끌레르보의 버나드(Bernard of Clairvaux)는 "당신이 예언자의 일을 하려면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홀이 아니라 괭이와 삽"이라고 하였습니다. 유월절 잔치 자리에 모인 제자들은 그들을 발이 누군가의 손에 씻겨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일은 그 중에 제일 낮은 자가 해야 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제일 낮은 자가가 되기는 싫어 서로 눈치만 보고 있을 때 그 낮은 자가 되기로 자청한 사람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를 가져다가 제자들의 발을 한 사람씩 씻겨 주었습니다. 섬김이 무엇인지를 먼저 행동으로 보이신 후에 예수께서는 섬김의 도를 설명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 섬긴다는 것은 지배서열에 대한 우리의 욕망이나 요구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1) 섬김의 동기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선한 행위가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려는 악한 동기에서 나올 수도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자선을 행하고 구제하는 동기는 많은 경우에 그들의 공적을 쌓아 하늘에서 보상을 받고 영생을 얻으려는 동기에서 나온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의 섬김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섬김의 동기를 비판하셨습니다. 자기 의를 이루기 위해서 섬기는 것은 인간, 혹은 하나님의 칭찬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결과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며, 섬김을 받은 사람으로부터의 보답-눈에 보이는 것이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든-이 돌아오기를 열망합니다. 그러한 섬김은 기분과 마음의 지배를 받아, 섬길 기분이 내켜야 섬기고 기분이 내키지 않으면 즉시 그만둡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섬김은 지속적이지 못하고 일시적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내세우기 위한 섬김은 비록 선한 일을 하면서도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결국 공동체를 파괴하고 깨어지게 합니다.

 

반면에 진정한 섬김은 내부 깊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의 지시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섬깁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찬사를 요구하거나 관심을 기대하지 않는다. 참된 섬김은 섬김 자체에서 기쁨을 얻기 때문에 기분에 좌우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진정한 섬김은 서로를 끌어주고 싸매어 주며 치료해주기 때문에 공동체를 더욱 튼튼하게 만듭니다.

 

2) 섬김과 겸손

겸손의 미덕은 섬김의 훈련을 통해서 우리 삶에서 이루어집니다. 겸손은 우리가 추구할 수록 더욱 얻기 힘든 미덕 중 하나이입니다. 겸손을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겸손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헌신할 때 우리의 심령은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고 겸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자랑과 교만을 십자가에 못박게 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육신의 욕망을 쳐서 훈련하는 섬김의 과정으로 말미암아 겸손은 부지중에 우리를 찾아오며 우리는 겸손해졌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겸손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3) 섬김의 속성

제레미 테일러는 "묻히기를 사랑하라. 그리고 존경받는 않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지 말라. 칭찬이 없어도 만족하고, 업신여김을 받을지라도 괴로워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섬긴다는 것은 그 섬김을 드러내지 않는 데에 그 가치가 있습니다. 섬김을 받는 사람과 섬기는 사람만이 알고 행해지는 섬김이 진정한 것이다. 예수께서도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고, 구제할 때도 은밀히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알도록 공개적으로 드러낸 구제와 자선은 섬김이 아닙니다.

섬김에는 큰 것과 작은 것이 없습니다. 사소한 것이든 중대한 것이든 누군가를 섬기고 그를 위해서 도움을 주었다면 그 섬김은 다만 진정한 것입니다. 누군가를 섬기는 것은 그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는 어디에나 서로 돕고 도움을 받아야 할 사소한 문제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사소한 일이라 돕지 않는 사람은 큰 일도 돕지 않는다. 큰 섬김이든 작은 섬김이든 날마다 있어야 합니다.

또한 섬김은 다른 사람이 나를 섬기는 것에 대한 용납의 속성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섬기게 허락하는 것은 복종과 섬김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갚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지 말고 그러한 봉사를 은혜로 알고 받아야 합니다. 교만 때문에 섬김 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는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웃을 때 가장 온전하게 성취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진다면 우리는 그들의 슬픔의 짐을 알게 되고 함께 그 짐을 지게 될 것입니다.

 

5. 전도란 무엇인가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에서 구원받고 영원한 삶을 살게 된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전도란 죄 가운데서 고통스럽게 살며, 죽어가고 있는 영혼을 구하는 일로 그 어느 것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는 그리스도를 미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당해야 할 보편적인 의무이자, 사명입니다.

 

1) 전도가 중요한 이유

(1) 예수님께서 내리신 지상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마 28:19은 예수님이 지상에 남기신 최후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땅끝까지..." 그러므로 전도는 예수님의 유업을 계승하는 것이며, 믿는 자라면 누구나 참여해야 할 기업입니다.

 

(2)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세상에 나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4:17)는 외침전도를 시작으로, 제자들과 함께 사신 공생애 3년은 온 이스라엘을 두루 돌아다니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백성 중에서 약하고 병든 사람들을 고치신 것이 전체였습니다. 그의 제자들 역시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사도 중의 사도인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리스도가 남기신 이 일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벗어나 소아시아와 지중해 지역에서의 전도를 위해 위험한 뱃길을 마다하고 세 차례나 전도여행을 다니다가 끝내 로마감옥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당했다고 교회의 전승은 전해주고 있습니다.

 

(3) 믿는 자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열매는 전도입니다. 예수님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베어 버린다고 하셨습니다(막 11:12-14). 그러므로 포도나무가 해마다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도 전도의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합니다.

 

2) 전도의 방법

(1) 신자로서의 삶을 통한 전도

믿는 자는 믿지 않는 자에 비해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성숙해야 합니다. 만일 그들보다 못한 삶을 사는 것을 보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듣기 좋은 말이라고 해도 행동이 그에 비치지 못한다면 감동을 줄 수 없고 그러므로 그들은 마음 문을 열지 않게 됩니다. 믿는 자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확신을 줄 때 우리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보다 쉽게 그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2) 헌신의 삶을 통한 전도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흠잡을 수 없이 깨끗하고 바른 삶을 산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생활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교회밖에 있는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을 외면한다면 이는 믿지 않는 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길지 않은 33년의 삶을 믿지 않는 자들과 더불어 살다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랑과 동정심을 가지고 병자를 찾아 위로하고, 외로운 자를 가까이 하고, 천대, 멸시받는 자의 친구가 되어 주고, 가난한 자에게 구제하고, 어렵고 큰일을 만난 자에게 도움을 줄 때 그들은 감동을 받아 그리스도 앞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3) 말씀전파

사도 바울은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바울은 복음 전하는 자는 오로지 씨를 뿌리는 것일 뿐 직접 물을 주시고 기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므로 아무 염려 말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고 권고하였습니다.

 

2) 전도의 방법

 

① 먼저 전도할 대상자를 선정합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든 먼데 있는 사람이든 일단 마음에 떠오르는 사람을 전도대상자로 삼습니다.

② 전도대상자가 복음이나 기독교, 기독교인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지 않도록, 그리고 복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기도로 준비합니다.

③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회가 온 것 같은 순간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교리를 설명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간증)이 좋습니다.

④ 교회로 초대합니다.

⑤ 한번에 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때를 기다리며 지속적으로 기도합니다.

⑥ 전도대상자가 교회에 나온 경우, 그가 원한다면 먼저 담임목사님이나 그 밖의 교역자들에게 소개하고, 예배 시간에 인사하도록 이야기해줍니다. 원하지 않는다면 조용히 예배에만 참석하고 돌아가도록 합니다.

⑦ 전도대상자가 교회를 한번 방문하는 것으로 전도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목자가 양을 치는 심정으로 그가 교회 안에서 쉽게 뿌리를 내리고 참된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도하고 돌봐야 합니다.

 

3. 전도의 내용

 

전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세상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할 정도로 세상(우리)을 사랑하는 분이심을 믿게 하고, 그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뿐이라 부활하심으로써 우리 역시 죽음에서 부활할 수 있고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분이심을 전하고 누구든지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모든 죄에서 사함 받고 자유를 누리며 구원을 얻게 된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도들이 전한 소식이고, 성경과 그 사실을 믿고 있는 선한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힘써 증거되고 있는 진리입니다.

 

6. 금식에 대하여

 

금식이란 종교적, 영적 목적으로 일정기간 음식을 금하는 것으로 회개할 때(삼상 7:6), 탄원할 때(삼하 12:16), 슬픔을 표시할 때(삼상 31:13) 행합니다. 금식은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향해지는 단식 투쟁이나 건강을 위한 식이요법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육체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1) 금식의 종류

 

성경에 나타난 일반적인 금식은 모든 음식을 금하지만 그러나 물은 금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때로 부분적인 금식도 했습니다(단 10:3). 또 성경에는 음식과 물을 모두 다 금하는 사례도 보여 주는데 이는 어떤 비상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학살이 눈앞에 있을 때 정복국가의 왕비가 된 에스더는 그의 시녀와 함께 3일 동안 아무것도 먹거나 마시지 않았습니다(에 4:16). 또 이스라엘은 민족 전체가 금식하기도 했습니다.

7월 10일인 속죄일에 당연히 금식하며 죄를 자백하고 몸을 괴롭게 하였다. 이후 이스라엘은 금식일을 일 년에 네 번으로 늘였는데, 그것은 예루살렘이 함락한 4월 9일, 성전이 파괴된 5월 9일, 유대의 총독이었던 그다랴가 살해된 7월 2일, 그리고 예루살렘이 포위된 10월 10일이었다. 정통 유대인들은 이중에서 5월 6일의 금식일을 오늘날까지도 지키고 있습니다. 유다가 침략을 받았을 때 여호사밧 왕은 백성에게 금식할 것을 선포하였습니다(대하 20:10). 요나가 심판을 선포하자 짐승을 포함하여 니느웨 성 전체가 금식하였습니다(욘 3:6-9). 신약시대의 바리새인들은 주 2회 금식일로 지켰습니다. 1756년 영국의 국왕은 프랑스의 침략 위협을 받고 금식의 날을 선포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초기 감리교 신자들에게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할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2) 금식의 목적

 

예수께서 금식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은 금식이 좋다거나 아니라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금식의 동기에 관한 것입니다. 금식은 오로지 하나님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금식과 주를 섬기는 일은 동시적인 일이 되어야 합니다(행 13:2).

 

금식은 그리스도가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그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는데 예수의 제자들은 왜 금식하지 않느냐고 묻자 예수께서는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엔 금식할 것이니라"(마 9:15)고 하셨습니다. 예수와 함께 있을 때, 그때는 금식할 때가 아니라 잔치할 때였다. 그러나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는 지금은 금식이 요구되는 때입니다.

 

7. 시험이란 무엇인가?

 

악은 선보다 훨씬 더 매혹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악의 유혹에 넘어가며, 악을 행하기는 쉬워도 선을 따라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 중에는 더 큰 유혹과 더 많은 시험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닙니다. 악이 선을 질투하며, 악한 영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넘어뜨리려고 늘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런 시험에 대해 잘 알고 이에 믿음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이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1) 시험의 종류

 

(1) 신앙을 잃게 하려는 시험

시험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성도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마귀의 시험이 있고, 성도를 연단 시켜 복 주시려는 하나님의 시험이 있습니다. 마귀의 시험이란, 사람의 약점을 폭로하거나 잘못을 범하도록 올가미를 놓는 악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마귀들이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어 가는 성도들을 공격하는 일입니다. 이는 마귀가, 그리스도를 몰랐을 때에는 자기의 조종 아래 있던 사람이 예수를 믿음으로 자기를 떠나가게 되니까 이를 훼방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성도로 하여금 범죄케 하고 타락시켜,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믿음을 버리고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시험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도를 멸망시키는 것, 선을 멸하는 것이 마귀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목적으로 행해지는 마귀의 시험 중 대표적인 바로 구약의 욥기에 나오는 시험입니다. 마귀는 동방의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널리 알려진 욥을 시험하여,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저주하는 말을 하게 하려고 온갖 재앙을 가져다줍니다. 욥은 아무 잘못도 없이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고 그 많던 아들딸들이 횡사하고 마침내 자신의 몸에 병까지 앓게 됩니다. 그러나 욥은 그 시험에서 패배하지 않아 마침내 다시 하나님의 축복을 갑절로 받았습니다.

 

(2) 신앙을 연단 시키는 시험

반면에 성도들을 연단 시켜 복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시험도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에 행하시는데, 아브라함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에 믿음으로 순종하여 믿는 이들의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믿음으로 받는 축복의 첫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100세에 얻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그의 독생자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1-2).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명령에 대하여 거부하거나 반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자신의 아들을 죽이려고 모리아산으로 칼을 들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들 이삭이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한 자식이지만 그러나 그가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삭을 그에게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거두어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며, 그에게서 외아들을 빼앗아 가는 것도 하나님의 더 크고 더 놀라운 섭리에서 계획되어진 일임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시험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믿음을 버리는 유혹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2) 마귀가 주는 시험에 걸려드는 이유

첫째로, 인간의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이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 이상으로 돈이나 권세, 명예, 향락을 더 많이 소유하려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욕심이 마귀를 향해 문을 열게 만드는 것이고, 마귀의 꾀임에 넘어가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초대교회는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는"(행 4:32) 집단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인들 중에 속한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부부는 자신들의 땅을 팔고,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고 일부만 가져다 전부라고 사도들 앞에 내어놓은 것 때문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6).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잠 16:8).

 

둘째로, 자기 교만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그래서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는데서 인간은 교만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모르고 자신을 과대 평가하게 될 때 하나님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무시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하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 마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죄에 빠지게 됩니다. 부족함이 전혀 없이 풍족한 에덴동산에서 하와는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는 사단의 꾀임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온 인류가 죄인이 되는 비극을 가져왔습니다(창 3:6)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전 4:6).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딤전 3:6).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 3:2).

 

셋째로,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신앙은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에서 시작되고, 성경 말씀을 통해 믿음이 자라고, 그 말씀 위에 굳게 서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 말씀을 떠나서 우리의 믿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말씀 위에 굳게 서지 않으면 마귀가 시험할 때 이를 물리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신 후에 그를 찾아온 사단에 의해 세 번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마 4:1-11). 예수를 찾아온 사단은 그가 40일 동안 굶은 것을 이용합니다. 마귀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놀라운 능력을 가진 자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시험, 높은 곳에서 내려도 천사들이 받쳐줄 것이므로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려보라는 시험, 자기에게 절 한번만 하면 온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주겠노라는 시험을 합니다. 마귀는 인간이 허약해진 틈을 타서 물질욕, 명예욕, 권력욕을 자극하고 시험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모든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말씀을 알지 못하면, 가슴에 새겨 놓지 않으면 순간순간 찾아오는 마귀에게 대항할 무기가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7).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3) 성도들이 받는 시험

첫째로, 새신자가 당하기 쉬운 시험이 있습니다. 새신자는 믿지 않을 때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우상 숭배에 빠지기 쉽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손금이나 관상을 본다든지 점쟁이를 찾아가 택일을 하는 등 과거의 습성을 버리지 못할 때 성령을 근심하게 합니다. 믿지 않는 가족들로부터 오는 시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적하여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가족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믿음으로 지혜롭게 이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고후 6:16).

 

둘째로, 새신자든, 믿음생활을 오래한 사람이든 누구에게나 시험은 옵니다. 어떤 이 돈이, 또 어떤 이는 명예나 권력이 최고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즉 삶의 목적인 신이 되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물질이 궁핍할 땐 돈으로 시험합니다. 또한 물질이 풍요해도 그것이 오히려 시험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세상의 영광에 싸여서 하나님을 멀리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여 시험합니다.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좇지 말라"(잠 1:10).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나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까 두려워 함이니이다"(잠 30:9).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케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니 청컨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하시더이다"(민 22:7).

 

4) 시험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

첫째로, 시험은 감당할 만큼만 주어짐을 믿어야 합니다.

모든 시험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에게서 재산과 건강을 빼앗음을 통해서 우리를 시험할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의 생명만은 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서 자신의 믿음을 굳게 지켜나가야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을 정하여 성경을 매일 읽고 무시로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둘째로, 이기는 자는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게 됨을 믿어야 합니다.

불로 연단해야 강한 쇠가 되고, 수 없는 정제 과정을 거쳐 순금이 나오는 것과 같이 연단을 받은 후에 믿음이 성숙하고 아름다워집니다. 그리고 승리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과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연단 시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믿고 따르도록 인도하십니다.(롬 5:3 이하)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의 시험을 거쳐 하나님이 원하시는 백성이 된 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한 땅을 선물받았습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3).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4).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 1:12).

 

8. 사단과 귀신에 대하여

 

사단이라는 말은 대적자라는 의미로 악한 영들의 우두머리이며, 귀신은 거의 신약에서만 등장하는 악한 영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은 선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선한 것일지라도 타락하면 악한 것이 됩니다. 커다란 선의 가능성을 가진 것일수록 타락하면 더 큰 악이 됩니다. 예를 들어, 칼은 선하게 쓰여지도록 만들어진 도구입니다. 칼을 일상 생활에 잘 사용하면 선한 물건이 되지만 칼을 살인의 도구로 사용하면 악한 물건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원래 사단은 하나님을 보좌하던 천사장 루시퍼로서 그의 임무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그가 자기의 능력을 너무 믿은 나머지 큰 교만에 빠져서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자기 무리들과 천상에서 쫓겨나 악한 일을 도맡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피조물인 천사가 교만함으로 타락하여 악한 사단이 되었습니다. 선한 천사도 타락하면 악한 사단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도 타락하면 사탄의 모습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악한 자라도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 때 선한 천사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마귀까지도 사용을 하십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데에는 마귀도 제 맡은 몫이 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그 예를 우리는 욥기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욥 1:6-12).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계 12:9).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고후 11:14).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1) 사탄과 귀신이 하는 일

첫째로, 사람의 죄를 하나님께 참소합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슥 3:1). 사단은 우리의 잘못을 찾아내고 이를 하나님께 일러바치는 역할을 합니다. 사단은 성도와 하나님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하여 이리저리 성도의 약점을 찾아 시험하는 일을 합니다.

 

둘째로, 이 세상을 지배합니다. 사단은 이세상의 통치자요(요 14:30), 공중 권세 잡은 자(엡 2:2)입니다. 그들은 그 권세를 가지고 사람들을 조종하며 자기 욕심을 따라 행하게 만들며 번뇌하고 올무에 빠져들게 만들어 결국 멸망으로 인도하는 일을 합니다. 예수님은 사단의 모든 사역을 막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습니다(요일 3:8).

 

셋째로,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일을 합니다.

사단이나 마귀는 본래적으로 거짓말쟁이요, 속이는 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속이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게 만들며 구원의 확신을 흔들어 놓습니다. 그리하여 믿음에서 떠나게 만들며, 올바른 신앙 안에 굳게 서 있는 성도들조차 삼키기 위하여 우는 사자처럼 두루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딤전 4:1).

 

넷째로, 성도를 시험합니다. 사단은 심지어 예수님조차도 시험하였다가 실패한 일도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마 4:1). 사단은 의로운 자라고 소문난 욥을 시험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려고 했으나 욥은 그의 시험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2) 사탄과 귀신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첫째로, 하나님은 사단이 이 세상에서 일정 기간 활동하도록 내버려두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성도를 보호하시면서 성도의 믿음이 성장하고 강건하여지게 하십니다. 성도들은 이 시험을 통해서 믿음이 정금같이 강해지고 완전해집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둘째로, 그러나 하나님은 사단을 완전히 놓아두시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가두어 버리십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사단과 그 추종자들을 끝이 없는 지하(무저갱)에 가두어 버리실 것입니다. 그 때에 이 세상에는 천국시대가 옵니다.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계 30:3).

 

셋째로,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무저갱에 있던 사단의 세력은 잠간 놓여 다시 활동하다가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의 불 속에 던져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최후의 심판 때에 이들을 지옥 불에 던져서 영원토록 벌받게 하십니다. 다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 20:10).

 

3) 악한 영들에게 승리하기 위한 방법

첫째로,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듯이 적을 알아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단과 귀신의 정체와 그들이 하는 일, 그들의 목적 등을 알고 나면 시험이나 유혹이 와도 넘어가지 않고 굳건히 신앙생활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 2:11).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사단도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고, 사람을 속이기 위해 그 말씀을 이용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단과 싸워야 할 뿐 아니라 그 말씀을 올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에게 하듯 사단은 하나님 말씀을 자기 멋대로 왜곡해서 사람으로 하여금 엉뚱한 길로 가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창 2:17)고 하셨으나 사단은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고 물었습니다. 말씀을 왜곡하는 사단의 역사를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단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단체입니다. 이 이단들은 하나님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자기들의 교주의 주장을 따르게 합니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 6:10-11).

 

9.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1) 죽음

죽음에는 영적인 죽음과 육체적인 죽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이란 썩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먼저 영적 죽음이란 사람이 하나님과 단절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육신이 살아서 모든 활동을 하고 있어도 그 영혼이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육체적 죽음이란 육체가 영혼과 분리되는 것입니다. 육신이 죽었다고 해서 사람의 모든 것이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몸과 결합되어 있던 영혼이 그 몸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번 이 땅에 태어난 것은 반드시 한번은 죽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죽음을 맛보지 않고 직접 하나님에게로 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에녹과 엘리야입니다. 그러나 이들 외에는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9).

영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죽음이란 죄의 결과로 오며, 죄란 창조주 하나님을 불신하고 그 명령을 져버리는 것입니다. 불신이 죄를 낳고 죄는 죽음을 가져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 15:14).

 

2) 부활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하셔서, 부활하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는데, 이 때의 예수님의 몸은 예수께서 다시 살리신 야이로의 딸이나, 나인 성 과부의 아들, 나사로처럼 다시 또 육체적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몸은 살과 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영적인 몸으로 이루어진 것이다(고전 15:20,44)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성도들은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날에 부활하게 됩니다. 그런 까닭에 성경은 믿는 자의 죽음을 잠자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죽음에서 승리하신 예수님을 믿을 때 죽음이 극복됩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40).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믿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확인하고 나서는 완전히 변화되어 담대히 예수의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습니다. 죽어 가면서 까지도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부활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500명의 형제들도 증인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 500여 명의 성도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4-8).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예수님이 진실로 다시 사셨음을 믿었고 죽음의 위협에 얽매이지 않고 담대한 복음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고 장사한 지 삼일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도 역시 부활을 예배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은 착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모두 부활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부활한 모든 사람에게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심판은 두 가지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믿음을 잘 지킨 성도들에게는 영원한 부활로의 축복이요, 불신자들에게는 영원한 지옥으로의 저주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히 9:27).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죄인의 죽음은 영원한 저주를 뜻합니다. 그래서 죄를 회개하지 못하고 죽은 자에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성도의 삶은 영원한 삶을 뜻합니다. 성도에게 죽음은 결코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은 귀중한 것이요 복된 것이요 떳떳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생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것이요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으로서 죽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10. 천구과 지옥에 대하여

 

천국과 지옥에 대한 정확한 답변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현대를 사는 우리가 "정확히 안다"고 하는 말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에 한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에만 한정됩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모두 사랑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사랑을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는 없습니다. 즉, 상대가 나를 사랑하는지 혹은 사랑하지 않는지를, 그리고 사랑한다면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과학적으로 정확하게 측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 삶 속에 많이 있으며, 특히 신앙의 진리는 과학적으로 입증이 불가능한 것 중 하나입니다. 우리 신앙의 기초는 과학적인 탐구나 발견에 그 터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과 우리의 신앙적 체험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과학이 탐구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 있으며, 과학적으로는 영원히 입증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먼 훗날 과학적으로 우리의 신앙이, 즉 하나님의 존재나 천국과 지옥 등이 입증된다면, 그 때는 신앙이 아니라 우리의 지식의 한 부분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성경에서 천국은 하늘 나라 혹은 하나님의 나라 등으로 표현되며, 지옥은 음부, 무저갱, 혹은 어두운 곳 등으로 묘사됩니다. 그 표현이 어떠하든 천국과 지옥은 실제로 존재하며,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선하고 바른 삶을 살았는가에 따라 어느 곳으로 갈 것인지가 결정됩니다.

 

1) 지옥이란 어떤 곳일까요?

지옥이란 악인이 처하게 될 영원한 형벌을 받는 곳인 게헨나를 번역한 말입니다. 게헨나란 예루살렘 교외의 힌놈 골짜기를 가리키는 말로 구약시대에는 이곳에서 어린아이를 잡아 몰록이라는 우상신에게 바치는 희생제사가 거행되었습니다. 후에는 쓰레기를 태우는 장소가 되었으며 후기 유대문학에서 죄인들을 심판하는 곳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신약에서 지옥은 꺼지지 않는 불이 타오르고 죽지 않는 벌레들이 우글거리며(막 9:43), 울며 이를 가는 캄캄한 장소(마 8:12)입니다. 천국이 하나님의 축복과 기쁨이 있는 곳이라면 지옥은 하나님의 영원한 저주와 형벌이 있는 곳입니다. 이 지옥은 복음을 거부하고 하나님 없이, 악하게 산 자들과 마귀와 그 사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러나…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계 21:8).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

 

2)천국은 어떤 곳일까요?

천국은 하나님과 함께 하며 지복을 누리는 곳입니다. 입신 중에 천국을 경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그렇게 몇 마디의 말로, 인간의 언어로 다 표현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도 표현될 수 없을 전도로 아름다운 곳이라고 성경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의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에서는 천국의 모양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천국의 성은 각종 보석으로 꾸며져 있으며 길은 황금 길이며 수정같이 맑은 생명 강가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과일이 주렁주렁 열려 있으며 밤이 없고 하나님의 권능의 빛만이 아름답게 비취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계 21:11).

그 천국은 고통이나 눈물, 괴로움 따위의 아픔이 전혀 없는 곳입니다. 천국은 완전한 기쁨과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곳이며, 더 이상 눈물이나 고통이나 죽음이 없는 영원한 곳입니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3-4).

 

하나님과 천사들이 있는 천국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가는 곳입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며, 천사들과 먼저 믿은 성도들이 완전하고 흠 없고 기쁨이 넘치는 삶을 누리는 곳이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부활하여 영생하는 곳입니다.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찌로다 아멘 하더라"(계 7:10-11).

 

예수님께서 전해주신 열 처녀의 비유처럼 준비하며 깨어 기다리며, 주를 기쁘시게 자에게 천국은 주어집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8-9).

 

11. 종말과 재림에 대하여

 

1) 종말

"종말론(Eschatology)"이란 개념은 '마지막'을 뜻하는 그리스어 eschaton과, 이론, 서술을 뜻하는 그리스어 logia를 결합한 것입니다.따라서 종말론은 곧 마지막의 것, 혹은 마지막 일에 대한 이론을 뜻합니다.그런데 마지막 일은 인간의 끝을 뜻할 수도 있고, 세계의 마지막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따라서 종말론은 개인의 마지막 곧 죽음의 문제를 다루는 개인적 종말론과, 세계 혹은 우주의 마지막 문제를 다루는 우주적 종말론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종말론은 별다른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그것은 교의학의 체계에서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하나의 '부록'과 같은 것으로 취급됐으며, 그래서 교의학 체계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루어져왔습니다.그러나 오늘날 종말론은 기독교 신학에서는 물론 사회 전반에 걸쳐 매우 관심 있는 문제로 부상하고 있습니다.오늘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생태계의 오염과 파괴, 핵무기로 인한 지구 전체의 총체적 파멸의 위험, 인류 역사에 있어 그 유례를 다시 찾아 볼 수 없는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과 이로 말미암은 인류의 미래의 불확실성,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세계의 종말에 대해서 관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시한부 종말론은 기독교 역사상 언제나 등장했다.주후 2세기에 일어난 몬타니즘을 추종하는 단체는 천년왕국이 소아시아 프리지아의 페푸차에 세워질 것이라 믿으면서, 엄격한 금욕 생활과 철저한 순교 정신을 강조했습니다.그러나 그들의 종말 예언은 빗나가고 말았습니다.16세기 노스트라다무스는 1999년 일곱째 달에 세계 종말이 올 것이라 예언했으며, 19세기 윌리암 밀러는 1843년 3월 21일과 1844년 3월 21일 사이에 예수가 재림해 세상을 불로 씻어버릴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그러나 이들의 예언들은 모두 거짓임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때와 그 시는 자신도 모르고 오로지 성부 하나님만이 아신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종말이 가까울수록 신실한 성도를 미혹하는 무리가 나타납니다. 그들은 종말의 때를 예언하며 수많은 성도를 미혹하여 사회와 교회에 커다란 혼란을 야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종말의 때를 알 수 없다고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5:1-3).

 

2) 그리스도의 재림

 

(1) 재림의 징조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간의 역사는 그 종국에 달하게 되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종말에 대한 성서의 예언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재림에 대하여 말씀하셨으며(마 24:30 요 14:3), 승천할 때 천사도 예고하였고(행 1:11), 사도들도 이에 대해 여러 번 강조하였습니다(행 3:20-21 살후 1:7,10). 그러나 그 시기는 아무도 알지 못하며(마 24:43 벧후 3:10). 다만 몇 가지 중대한 징조로써 짐작할 뿐입니다.

 

가. 복음의 세계적 전파

복음이 전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져서 그리스도에게 돌아올 기회가 부여됩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에 이르면 주의 재림이 가까운 증거입니다(벧후 3:9)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나. 이스라엘의 회심

이스라엘 민족 중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슥 12:10 롬 11:25,26). 성경은 마지막 때가 되면 이스라엘이 독립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또한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롬 11:26).

 

다. 적그리스도의 출현

사람들을 미혹하는 적그리스도가 등장하나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으로 멸절될 것입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막 13:8).

 

라. 대배교(大背敎)와 대환난

거짓 선지자(마 24:11,24)와 거짓 그리스도(마 24:5,23)가 등장하여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변절하게 만들며, 성도들이 전쟁과 기근과 지진으로 인하여 큰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마 24:7-9,21).

 

3)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는 공중에서 재림하십니다. 예수께서 하늘로 승천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의 사자는 "너희 가운데서 하늘을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대로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고 하있습니다. 예수 자신도 자신의 재림에 대하여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눅 21:27)고 예언하셨습니다.

 

그날에 전 인류가 예수님의 재림을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동이나 서, 남이나 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공중에서 임하시는 예수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1:7).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는 죽었던 성도들이 부활할 뿐 아니라 살아있는 성도의 육체도 변화를 받습니다. 그리고 부활한 성도는 공중으로 올라가게 되고, 지상에는 무서운 대환란이 임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 4:16).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고전 15:51).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7).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10).

 

4) 성도의 자세

세계 파국의 종말과 예수의 재림은 언제 있을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깨어 근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도는 믿음의 인내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기 위해, 예배와 기도의 영적 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12. 교회 용어

 

1) 교회자주 쓰는 용어

 

(1) 아멘 : "의지 또는 의뢰한다"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의 부사를 음역한 것으로 "그렇게 되옵소서," "참으로," "진실로" 등의 의미입니다. 기도나 송영의 마지막에 쓰는 예배용어입니다.

 

(2) 할렐루야 : "여호와를 찬양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말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때에 사용되며 성도들이 서로 인사하거나 부흥회 같은 곳에서 강사를 소개할 때 할 때, 기도할 때에도 사용됩니다.

시 135:3을 제외하고는 시편의 처음 혹은 끝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3) 계시

 

하나님의 오묘한 진리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들려주거나 보여주는 것, 혹은 마음속에서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모든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성경에 비추어서 해석되어져야 합니다. 가장 크고 분명한 계시는 하나님을 그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여주신 예수님 자신입니다.

 

(4) 메시아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인데, 즉 구세주를 가리키는 말로서 그리스도와 동의어입니다. 구약시대에서는 왕이나 제사장, 선지자의 취임식에서 제사장들이 그들의 머리 위에 기름을 부었습니다(레 4:3 6:15). 예수님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한 참된 왕이요, 하나님과 죄인인 우리 사이를 이어 주는 대제사장이요, 선지자인 기름부음 받은 자이시다. 지금은 예수님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된 것입니다.

 

(5) 보혜사

 

이 말의 원뜻은 "위로자" "돕는 이"로, 법정에서 옆에 서서 도와주는 변호인을 가리키는 법적 용어였습니다. 이 용어는 마 10:19-20에서 세속적인 유대 관원들 앞에 기소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임하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묘사하는 데 쓰였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뒤에 그를 대신해서 제자들을 인도하고 복음을 이해시키고 시련과 박해에 참고 견디게 한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말합니다(요 14:16).

 

(6) 알파와 오메가

 

희랍어 알파벳의 첫 자와 마지막 글자로서 하나님 자신을 나타낸 말이며, 또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나는 처음과 나중입니다."

 

(7) 음부

 

우주를 3층(하늘, 땅, 땅밑)으로 이해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은 자의 영혼들이나 마귀들이 살고 있는 믿고 있던 땅 밑의 세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비유, 거지 나사로와 부자에 나오는 그 부자가 죽어서 간 곳이 바로 이곳 음부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아브라함의 품 곧 하나님 나라에서 평화와 안락을 누리고 있는 나사로를 보기도 하고 아브라함하고도 대화를 하지만 그곳은 서로 오갈 수 없는 곳입니다.

 

(8) 인자

 

사람의 아들이라는 이 용어는 예수께서 자기를 지칭할 때 쓰신 말입니다. 단순히 인간 내지는 인간의 아들이라는 뜻만이 아니고, 구주를 뜻하는 단 7:13의 용법이 그 배후에 있습니다. 하나님이시지만 이 세상에 고난을 받는다고 하는 점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9)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는 말인데, 구약시대 이사야 선지자가 아하스에게 예언하였습니다(사 7:1-25). 마태는 이사야의 이 말을 인용하고 예수님을 임마누엘의 실현이라고 보았습니다.

 

(10) 중보자

 

서로 대립해 있는 두 사람 사이에서 적의의 원인을 제거해 주고, 우정의 회복과 언약체결을 위해 알선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구약시대에 중보자는 제사장이었으나, 신약에 와서는 예수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 세상에 오셨습니다(딤전 2:5-6). 그러므로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11) 호산나

 

"이제 구원하옵소서"란 뜻의 히브리말로서 시 118:25로부터 인용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무리들이 환영하여 부르짖는 환호의 소리로서(마 21:9 막 11:9), 이는 메시아를 대망하는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환영함을 나타냅니다.

 

(12) 송영

 

송영은 영어로 doxology라고 합니다. 의미는 신을 찬미하는 시, 예배 끝의 찬송가(송영), 언어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뜻입니다. 송영은 영광 송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영광송은 원래 대 영광송이 있고 소 영광송이 있었습니다. 대 영광송은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말로 시작하며 대체로 웅장하고, 소 영광송은 가사가 아버지께 찬양으로 시작하며 후에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사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글로리아 파트리(Gloria Patri)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그 후 거의 모든 시편이 송영이 되었기 때문에 특별히 삼위 일체를 찬양하는 곡을 보통 송영과 구분해서 글로리아 파트리(Gloria Patri)라고 합니다.

 

(13) 심방

 

심방이란 교역자와 교인들이 신도들의 가정으로 찾아가서 예배드리고, 축복을 빌며, 개인적 만남을 갖는 것입니다. 심방받는 자세는 사람의 방문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주님께서 찾아오시는 것으로 여겨 기쁘게 영접해야 합니다.

 

심방의 종류

 

① 새신자심방 : 새로 등록한 신자의 가정을 찾아감

② 환자심방 : 가정이나 병원에서 앓고 있는 교우들을 방문함

③ 대심방 : 전 교우들의 가정을 심방하는 대심방

④ 특별심방 : 교우들의 생일이나, 개업 등 특별한 일로 요청할 때 목사가 하는 심방

 

(14) 관주성경

 

성경본문에 기록된 주요한 내용이나 용어 중 같거나 비슷한 것, 혹은 인용되거나 비교할 만한 사항을 다른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도록 간단한 부호로 표시해 놓은 성경. 관주 기호로는 자음(ㄱ....ㅎ)과 모음(ㅏ, ㅑ..으 이 애)을 사용하고, '인'은 인용, '비'는 비교, '보'는 보라는 약칭을 사용. 관련 장절 표시는 한문으로 쓰며, 장절 구분은 ○표로 하고 있습니다(예 15: 12 → 十五○十二).

 

2) 교회의 상징

 

(1) 십자가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속량하시려 죽으신 형틀로 기독교를 대표하는 상징적 표시,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의 상징. 십자가는 로마시대 사형을 판결받은 죄수들을 매달아 서서히 고통 속에서 죽어가게 만드는 처형도구 중 하나였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칭하고 민심을 미혹케 했다는 명목으로 동족 유대인들에게 체포당하고, 심문받은 후 당시 유대를 정복한 로망의 총독 빌라도에 의해서 사형을 언도받고 갈보리 언덕에서 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후, 그 죽음이 예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에 의해서 기독교의 구원의 상징이 되었다. 영어의 cross라는 말은 라틴어 crux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본래 십자형 형틀은 네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림

 

가. crux immissasms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십자형으로 예수께서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입니다.

나. crux commissa, 또는 세인트 안토니의 십자가라고 불리는 이 형태는 영어의 T짜 형입니다.

다. 적십자 마크처럼 가로와 세로가 똑같은 크기입니다.

라. crux decussata, 또는 안드레의 십자가라고 불립니다.

 

십자가형은 페니키아, 카타기니안, 이집트, 그리고 로마인들이 사용한 가장 잔혹하고 야만적인 처형방법이었다. 그러므로 기독교 이전 시대에 있어서 십자가는 삶의 고통과 고뇌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들의 저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리심에 대해서 단순히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마 27:35 마 15:24)고만 서술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의 구세주의 희생적인 죽음 때문에 종교적인 상징물이 되었는데 고전 1:17에 따르면 십자가의 복음(케리그마)은 인간의 말의 지혜에 대조되는 신적인 것입니다. 엡 2:16에 의하면 십자가는 화해의 중개물이며, 골 1:20절에 따르면 십자가는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경건한 유대인이었던 바울이 볼 때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저주를 받은 자들이 달리는 형틀이고, 로마인들에게 있어서는 비웃음의 대상이지만(갈 3:13) 그러나 그 예수가 달려 죽은 그 십자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것이며, 그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것입니다.

 

(2) 물고기

 

그리스도의 상징이며, 갓 세례받은 자, 거듭난 자나 성만찬의 상징으로 2세기경부터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은신해 있던 카타콤 벽화에 빵과 포도주 그림과 함께 나오는데 학설에 따르면 물고기라는 단어의 희랍어 익투스(ICQGS)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단어의 희랍어 jjIhoou'" Crioj", Qeou' Ui[oJ", Ewthjr의 첫 글자를 합쳐서 만든 글자라 합니다.

많은 가톨릭 교인들이 추측컨대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기념키 위하여 매 금요일마다 고기를-물고기로 대체하였지만-먹지 않습니다.

 

(3) 예전 색깔의 의미

 

흰색 - 순결, 기쁨, 승리, 진리, 완전, 성결, 영광

보라 - 슬픔, 참회, 고난, 겸손

빨강 - 성령, 피, 불, 열심

진홍 - 고난

녹색 - 생명, 성장

검정 - 애도, 슬픔(성금요일에 사용)

청색 - 희망

금색 - 하나님의 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