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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적도(失籍島) ***

열려라 에바다 2011. 11. 3. 15:39

 



*** 실적도(失籍島) ***



- 글 / 정 지 용 -


배가 추자도에 다다랐을 때 잠이 깨었습니다. 지지과(地誌科) 숙제로 지도를 그리어 바칠 적에 추자도쯤이야 슬쩍 빼어 버리기로소니 선생님도 돋보기를 쓰셔야 발견하실까 말까 생각되던 녹두알만하던 이 섬은 나의 소학생 적에는 시험 점수에도 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 달도 넘어가고 밤도 새벽에 가까운 추자도의 먼 불을 보니 추자도는 새벽에도 샛별같이 또렷한 것이 아니오리까! 종래 고무로 지워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말은 이 섬에게 이제 꾸지람을 들어야 할까 봅니다. 그러나 ‘나의 슬픈 교육은 나의 어린 학우들의 행방과 이름조차 태반이나 잃어버렸는데도 너의 이름만은 이때껏 지니고 오지 않았겠나! 이 밤에 너의 기슭을 어루만지며 너의 곤히 잠든 나루를 스치며 지나게 된 것도 전생에 적지 않은 연분이었던 모양이로구나.’ 하였습니다.

갑판에서는 떠들썩하고 희희거리던 사람들이 모두 깊이 잠들었습니다. 평생에 제주 해협을 찾아오기는 코를 실컷 골기로 온 양으로 생각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쩐지 나는 아까워서 눈을 다시 붙이고 잠을 청해 올 수가 없었습니다. 배가 점점 가까이 다가감을 따라 섬의 불빛이 늘어서기를 점점 넓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섬에도 전등불이 켜진 곳은 실상 그 중에도 한 부분에 지나지 않을 것이요, 그 중에도 술과 담배나, 울긋불긋한 뺨을 볼통히 하고 있는 사냥개나 사슴이나 원숭이를 그린 성냥갑이나 파는 집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선인(船人)과 어부들이 모여 에튀 주정하며 쌈하며 노름하며 반조고로하고 요망한 계집들이 있어 더한층 흥성스러운 그러한 종류의 거리에 뿐일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외에 개 짐승이나 나무나 할아버지, 손자, 형수, 시동생 할 것 없이 불도 없이 검은 바닷소리와 히유스름한 별빛에 싸이어 자는 어촌이 꽤 널리 있을 것입니다. 어쩐지 성급하게도 배에서 뛰어나려 한숨에 기어올라보고 싶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이상스럽게도 혀끝에 돌아가는 사투리며 들어보지 못한 민요며 연애와 비애(悲哀)에 대한 풍습이며 ― 그러한 것들이, 어쩐지, 보고 싶어 하는 생각이 불일 듯 하는 것이 아닙니까. 설령 쫓아 올라가서 무턱대고 두들긴 문앞에서 곤한 잠에서 뿌시시 일어나온 사나운 할머니한테 무안을 보고 말음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이 섬은 나의 호기심을 모두 합하여 쭈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배가 바로 섬에 닿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사이를 두고 닻을 내리고 쉬는 것입니다. 노를 저으며 오는 작은 목선(木船)들이 마침 기다렸었노란 듯이 몰려와서 사람을 나리우고 짐을 풀고 하며 새벽 포구가 왁자지껄하며 불빛이 요란해지는 것입니다. 웬 짐짝과 물화(物貨)가 이렇게 많이 풀리는 것입니까. 또 실리는 물건도 많은 것입니다. 밤이라 섬의 윤곽을 도저히 볼 수 없으나 내가 소학생 적에 가볍게 무시하였던 그러한 절도(絶島)는 아닐 것이 틀림없습니다. 희뚝희뚝하는 작은 목선에 실리어 섬으로 가는 젊은 여자 몇은 간단한 양장까지 한 것이었고, 손에 파라솔까지 가진 것이니 여자라는 것은 절도에서도 몸짓과 웃음이 유심히 사람의 눈을 끄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더욱이 말썽스럽지 않은 섬에서 보니깐 더 싱싱하고 다혈적(多血的)이고 방심한 것이 아니오리까. 밤에 보아도 건강한 물기가 듣는 듯한 얼굴에 웃음소리 말소리가 물결 위에 또랑또랑 울리며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닌 이른 새벽에 무엇이 그렇게 재깔거릴 것이 있는 것이며 웃을거리가 많은 것입니까. 사투리는 사투릴지라도 대개 알아듣을 수 있는 말이며, 짐 푸는 일꾼들의 노랫소리는 실상 전라도에서도 경기도에서도 듣지 못한 곡조였으나, 구슬프고도 힘차고 굳센 소리였습니다. 생활과 근로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절로 생길 수 있는 노래 곡조인 것에는 틀림없습니다.

목선 한 척이 또 불을 켜 들고 왔는데 뱃장 널빤지 쪽을 치어들고 보이는 것은 펄펄 뛰는 생선들이 아닙니까! 장어, 붉은 도미, 숭어 따위가, 잣길이 씩이나 되는 놈들이 우물우물하지 않습니까! 값도 놀랍게도 헐한 것입니다. 사라고 권하기도 하는 것이요, 붉은 도미 흐벅진 놈을 사서 갑판 위에서 회를 쳐서 먹고 싶은 것입니다. 독하고도 맛이 감치는 남도 소주를 기울이면서 말이지요. 눈이 초롱초롱하고 펄펄 살아 뛰는 놈을 보고서 돌연한 식욕을 일으키는 것은 사람의 본성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절제로서 가볍게 넘기지 못할 그러한 맹렬한 식욕에까지 이른 것도 아니니 그야 하필 붉은 도미뿐이겠습니까? 이렇게 나그넷길로 나고서 보면 모든 풍경에 관한 것이나, 정욕이나 식욕이나 이목(耳目)에 관한 것이 모두 싱싱하고 다정까지도 한 것이나, 대개는 대단치 않은 절제로써 보내고 지나고, 그리고 바로 다시 떠나가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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