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시25:22-26:1]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열려라 에바다 2021. 8. 11. 09:28

25편 22절-26편 1절.

25편 22절: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구속하소서.

26편 1절: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25편 22절: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구속하소서.’ ‘이스라엘’이란 ‘하나님께서 너를 다스릴 것이다’ 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를 다스려 주는 것이 좋겠는지, 마귀가 자기를 다스려 주는 것이 좋겠는지? 하나님이 자기를 다스려 주는 것이 확실히 좋으냐? 두들겨 패도? 하나님은 죄에 대해 용서가 없다. 그래서 두들겨 패도? 마귀에게 가면 아주 대우를 잘 해 주는데? 죄를 짓고 감옥 속에 들어가면 대우가 좋지 않느냐? 먹는 거 거저 주지, 입는 거 거저 주지, 먹고 나면 운동 시켜주지. 자기는 밥만 먹고 똥만 싸면 된다. 그래서 감옥에 가고 싶으냐?

구약 때는 육적 이스라엘을 두고 한 말이지만 계시적으로 보면 오늘날 교회 성도들은 영적 이스라엘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는 신앙정신을 우리가 받아가질 수 있는 거다. 그러니까 영적으로는 아브라함이 후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거다. 하나님으로부터 다스림을 받으려면 진리를 받아야 한다.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받아야 한다. 안 받으면 하나님의 통치를 안 받겠다 그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그 말씀으로 자기가 통치를 받고 다스림을 받으면 자기 속에 기쁨이 오는 거고, 모든 지혜지식성과 도덕성 면에서 차원이 높이 올라간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을 닮으니 모든 사고 판단 이해타산이 올라간다. 차원이 높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통치, 말씀통치, 생명통치를 받기 때문에 지혜지식성이 올라가고 도덕성이 하나님의 도덕성으로 올라간다. 그런데 예수 믿은 지 수십 년이 됐는데도 안 올라가고 있다면 자기가 아무리 열심히 충성봉사를 하고 자기가 아무리 성령을 받아서 펄펄 뛴다고 해도 그건 아니다. 존재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로되 그 속에 들어있는 인격성적인 면은 하나님을 못 닮았구나.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이 예수님을 가르치는 거고, 하늘나라를 가르치는 거고, 교인들은 그 말씀을 받고 하늘나라의 사람으로 만들어져야 하는데 교회에 열심히 다녔어도 하나님으로 안 닮아져 있다면 이건 뭔가 잘못됐다. 예수를 잘못 믿었든지, 잘못 가르쳤든지, 아니면 둘 다 잘못됐든지. 어쨌든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대 위에 놓일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이란 ‘하나님께서 너를 다스릴 것이다’ 라는 뜻이다. 그래,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우리 입장에서 우리 주님이 맛있는 걸 들고 오면 좋겠느냐, 쇠몽둥이를 들고 오면 좋겠느냐? 예수님이 자기에게 찾아오신다면 면류관을 들고 올까, 회초리를 들고 올까, 쇠몽둥이를 들고 올까, 아니면 펄펄 끓는 불못을 들고 올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걸 시시각각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냥 교회만 다니면 안 된다.

껍데기 예수, 찌꺼기 예수로 믿는다면 이게 예수 믿는 거냐? 하나님을 공경하되 어떻게 공경하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서 공경하라. 다시 말하면 너의 전 인격 전폭으로 공경하라는 거다. 그러면 자기 전 인격, 자기 전 생애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삶을 살면 자기는 밥 빌어먹는 거냐? 자기는 세상에서 거지가 되고 처절해질까?

안 믿는 사람들도 복을 원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복을 원한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참 복을 버리고 안 믿는 사람들처럼 썩어지고 없어질 복을 원하느냐? 참 복을 원하면 모든 것은 덤으로 따라오는 거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찌꺼기 예수님을 믿고 있다. 자기 볼 장 다 보고, 자기 할 것 다 하고, 자기 쓸 것 다 쓰고, 할일 없으면, 별 볼일 없으면, 시간이 남으면 예수를 믿는 식이다. 그래, 좋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너를 찌꺼기로 대해줄 거다. 하나님께서 너를 찌꺼기로 다스릴 거다.

영이 중생된 사람을 지옥에는 못 보낸다. 다만 팔다리를 분질러서라도, 눈알을 빼서라도 너를 바로 만들어서 천국으로 데리고 올라간다. 이게 하나님의 역사라. 이건 목사가 공갈을 치는 게 아니라 ‘인간 자기가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 어떻게 공경을 하느냐? 얼마나 높이느냐, 낮추느냐?’에 따라 그대로 대해 주신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 가감이 없다. 봐주는 게 없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봐주는 게 없다. 하나님의 법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내가 너를 다스릴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 위치, 자기 처신, 자기 생활한 그대로가 오늘날 현재의 자기다. 남이 그렇게 해준 게 아니다. ‘미련하면 미련한 대로, 지혜로우면 지혜로운 대로, 게으르면 게으른 대로, 부지런하면 부지런한 대로, 성격이 모가 나면 모가 난대로, 성격이 부드러우면 부드러운 대로 내가 너에게 그대로 대해주리라.’ 오늘날 현재적 자기로 되어있는 상태는 하나님의 허락 하에 자기의 성격과 성질대로 된 것이니 누구에게 한하겠느냐? 누구에게 원망을 하겠느냐? 세상을 원망하지 말아라.

‘하나님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 자기 그림자는 자기를 따라가는 거지 자기 그림자가 부자를 따라가거나, 인물 좋은 사람을 따라가거나, 날씬한 사람을 따라가거나, 세상에서 명예 영광자를 따라가지 않는다. 자기 그림자는 자기를 따라간다.

모든 환난에서 이스라엘을 구속할 이는 오직 주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구속’이란 죄를 사해준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로 기본구원, 기본구속을 받았다. 이걸 전제로 한 상태에서 그 바탕에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자녀로 만드시기 위해 당신의 자녀를 환난을 통과하게 만든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편안하게 살다가 천국에 데리고 가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환난일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환난을 거치게 한다.

게으른 사람에게 가난이 왔다면 이건 당연한 거다. 그런데 게으르니까 가난이 오고, 부지런한데도 가난이 올 수도 있다. 그러면 게으른 사람에게 가난이 오면 게으른 사람이 어떻게 깨달아야 하겠느냐? 부지런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게을러서 가난한 사람에게 불쌍하다고 하며 입히고 먹이고 받들어 놓으면 이 게으른 사람이 어떻게 되겠느냐? 이러다가 남이 갖다 주지 않으면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천상 도둑질이나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다. 이건 망하는 거다.

사람은 게으르면 못 쓴다. 부지런해야 한다. 부지런한 것이 자기 영광이고 자기 칭찬이다. 성경에도 손을 부지런히 놀리는 자에게 뭐가 온다? 부요가 온다. 재산이 많아진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면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일반적으로도 그렇지만 신앙의 사람은 더 부지런해야 한다.

믿는 우리로 환난을 통과하게 하면서 죄를 깨닫게 하는데, 죄를 깨닫게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죄를 안 짓도록 한다. 환난을 통과하면서 자기 죄를 깨닫고 더 나아가 ‘내가 여기서 무엇이 부족한가? 무엇이 더 있어야 하겠는가? 아, 나에게 지식이 없구나. 나에게 지혜가 없구나. 나에게 인인관계 연관성적인 면에서 선 사랑 거룩 진실한 이 속성이 없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

환난을 통과하게 되면 자기가 깨달을 게 참 많다. 깨달아져 나와야 한다. 그래서 남을 원망하면 안 된다. 남을 원망하면 너는 그 어려운 사건 환경을 통과하면서 깨달음도 없다. 시험을 쳤는데 맞는 답이 하나도 없구나. 환난을 통과하면서 죄를 안 짓도록 해야 한다. 그러려면 깨닫게 해야 한다. 진리이치의 말씀을 가지고 깨닫게 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환난을 통과하면서 자기가 만들어져야 한다. 모든 면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가난하게 살면 투정이 잘 나온다. 부부끼리 잘 싸운다. 돈이 많이 있을 때는 원망할 게 없지만 가난에 쪼들리게 되면 속에서 다른 사람을 향해서 뭔가가 자꾸 올라온다. 이게 마귀시험이다. 그러나 이런 환난은 성도의 영인의 기능과 지능 면을 성장케 하고, 영능의 실력을 쌓게 하고, 신앙 믿음 면에서 깨닫게 해준다. 속사람이 자라게 한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은 환난을 당하면 예수 팔아먹고, 말씀 팔아먹고 한다. 언제까지 그러겠느냐?

환난을 통과하면서 이성과 몸이 성화가 되는 것인데, 이 성화구원은 이성과 몸이 하나님의 성품화 되는 거다. 이 성화구원은 자기의 일반적인 성격과 성질까지 하나님의 성품으로 바뀌는 것이다. 예수 믿으면 거듭난다는 말에는 영이 중생되어 거듭나는 것도 있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의 성격과 성질도 예수님의 것으로 거듭나야 한다.

아무리 일반적으로 성격 성질이 좋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야 한다. 다시 다듬어져 나와야 한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시원시원한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의 속에 들어있는 지식은 선악과 따먹은 타락된 기존지식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이게 거듭나야 한다. 생명적 지식으로, 말씀의 지식으로 거듭나야 한다.

영은 기본구속을 받아서 중생이 되었고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할지라도 예수 믿기 전에 들어있던 성격과 성질이 그대로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인인관계 연관성이 이뤄지지를 않는다. 이러면 자기 옆에 사람이 안 붙는다. 관계성이 뚝 끊어져 버린다. 이러면 어떻게 전도를 하겠느냐?

우리가 일반적으로도 보면 성품이 좋은 사람이 있다. 쉽게 말하면 마음이 좋은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친구가 많다. 친구가 많은 사람은 가만 보면 물질을 잘 쓴다. 그러니까 또 친구들이 많아진다. 그런데 게으른 사람은 가난하기 때문에 물질을 못 쓴다. 그러니 친구가 없다. 우리가 세상 사는 이치를 알아야 한다.

그런가 하면 가난하지만 물질을 잘 쓰는 사람도 있다. 또 가난한데도 자기 분수도 모르고 헛으로 낭비해 버리는 사람도 있다. 이건 잘못된 거다. 그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혼자만 쥐고 있는 사람도 있다. 늘 얻어먹기만 하고 한 번도 대접하는 일이 없는 사람도 있다. 자기가 이런 사람 중에 한 명은 아닌지? 그렇다면 자기 혼자 살아라.

물질은 있는데 이웃을 위해 쓸 줄은 모르고 자기 식구에게만 써서 도무지 넓힘성이 없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까 돈을 벌어서 은행에 집어넣을 줄만 안다. 그러니 돈이 돌아야지. 돈이 돌면 가난한 사람의 주머니 속에도 들어가고, 물질은 돌고 도는 거다. 돈이 잘 돌도록 하면 가난한 사람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있는 사람의 주머니에서 억지로 뺏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건 평등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물질을 쓰되 지혜가 있어야 한다. 안 그러면 세상 사람들 뒷바라지밖에 안 된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좋다고 하겠지만 기독교회가 이런 일을 하는 거냐? 교회에 가면 의례히 불쌍한 사람 도와주고 그런 식으로 박혀버렸다. 교회가 뭐냐? 도둑을 기르는 곳이냐? 게으른 사람으로 만드는 곳이냐? 사람 만들어지는 공장이다. 깨닫게 해서 알도록 해야 하고 바로 살도록 해야 한다. 이게 교회다.

이성과 몸이 구원을 이루게 하는 것. 주님의 성품을 닮게 하는 것. 점차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만들어져 가는 것. 영적 차원도 올라가고, 언행심사의 모든 것도 올라가고. 이게 성화구원이요 구속이라. 죄를 안 짓게 만드는 것. 과거적 죄를 회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해 달라고만 하는 게 아니라, 이미 그건 지나가 버렸다. 지나간 것은 이미 다 흘러가 버렸다. 그걸 붙잡고 ‘용서해 주십시오’ 할 것 없고, 그것보다 더 적극적인 것은 ‘내가 앞으로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고 죄를 안 짓도록 말씀 깨달음을 주옵소서’ 하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나가지 않으면서 맨날 뒤만 쳐다보게 하는 게 마귀의 수법이다.

앞으로 나가자니 깨달아야 하고 자기가 무장이 되어있어야 한다. 그래야 적군이 앞에서 오더라도 돌격으로 나갈 수 있다. 또한 무장이 되면 뒤에서 적군이 오더라도 알아차릴 수 있다. 영특하다 그 말이다. 사방에 눈이 있다 그 말이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모든 환난은 성도 자기의 이룰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진행을 시키는 것인데, 성도를 위해서 이 사건 환난을 당신의 주권섭리로 해 나가는데 이를 위해 물질계와 신령계를 총동원 한다. 신령계와 물질계를, 천군천사들과 이 세상의 모든 존재와 사건과 마귀까지 총동원 시킨다. 누구를 위해서? 바로 나를 위해서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 믿는 자기는 하나님 앞에 어떤 사고방식으로 들어 있느냐? 인간 자기가 모르는 사이에 자기 앞에 날마다 사건 환경이 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줄 알아라.

야곱이 삼촌 집에 가서 20년 동안 사람 얻기, 또 짐승 얻기, 또 부자 되기 위해 살고 있었는데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네가 삼촌 집에서 네 마음대로 대 부자가 되어서 가족들과 짐승들을 끌고 나오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지?’ 하면서 야곱의 반대편에서 군대를 키우고 계셨다. 20년 후에 야곱이 부자가 되어서 아내와 자식들을 걸리고 업고 짐승들을 이끌고 나오는데 들리는 소문이 형이 군대를 끌고 온다고 했다.

군대를 왜 끌고 오느냐? 군대가 뭐하는 것이냐? 사람 잡이 죽이는 게 군대다. 아무리 평화의 군대라고 해도 쳐들어오는 놈을 죽이는 게 군대다. 또한 쳐들어가서 죽이기도 하고. 평화의 군대라고 해서 적군이 오면 ‘아이고, 잘 왔다’ 하며 얼굴도 닦아주고 잔뜩 먹여서 보내느냐?

형이 군대를 거느리고 온다는 소식을 들은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한다. 말하자면 이게 씨름이다. 말씨름이다. 씨름도 힘 대 힘으로 하는 씨름도 있고, 말씨름도 있다. 이게 기도다. 그 자리에서 야곱이 20년 동안 모은 걸 다 내놨다. 마누라까지 자식까지 다 내놨다. 아깝다고 안 내어놓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야곱 자기가 죽는 거다.

그리고 자기에게 복을 빌어달라고 여호와의 천사에게 매달렸다. 자기에게 복을 빌어달라고 야곱이 여호와의 천사에게 매달리자 야곱의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꿔줘다. ‘네 이름이 뭐냐?’ ‘야곱입니다.’ ‘아이고, 이놈 순 욕심쟁이로구만. 너는 이제부터 이스라엘이라고 하라’ 하고 이름을 바꿔줬다. 그러니까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너 이놈, 안 되겠구나. 너는 천상 하나님인 내가 직접 다스리도록 하겠다’ 라고 하신 거다. 즉 ‘내가 이제부터 너에게 더 간섭을 하겠다’ 라고 하신 거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예수를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내 마음대로 살도록 그냥 두지를 않으신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일이 간섭을 하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은 게 큰 잘못이 아니냐? 생각을 해봐라. 부모가 자기에게 간섭을 해주는 게 좋으냐, 안 해주는 게 좋으냐? 부모님 집에 살면서 부모님이 번 돈으로 먹고 마신다면 그 부모님의 간섭을 받는 것은 당연한 거다. 간섭을 안 받으려면 일찌감치 시집 장가가서 제가 벌어서 먹으면 간섭을 안 받는다. 이치가 그렇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에게는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이 오게 되어있다. 이게 싫으냐? 생각을 해봐라. 자기가 뭐가 잘났기에 하나님께서 크고 작은 사건, 존재, 물질, 시간, 환경을 돌려서 나를 만들려고 하는 거냐? 인간 자기는 영적 이스라엘로서 죽음 저 너머 신령세계를 마음껏 다스리고 누릴 수 있는 신앙실력 믿음실력이 얼마나 중요하고 귀중하고 또 중요하기에 하나님께서 현세에서 나에게 이렇게 역사를 하실까?

이 세상에서 천국을 다스리고 누릴 영능의 실력, 신앙실력, 믿음실력을 만들어 가지 못하면 얼마나 한이 되는 것이기에 현재적으로 나에게 이런 역사를 하실까? 이게 하나님의 나를 향하신 사랑이다. 누구든지 각자에게 다 그렇게 되어있다. 어느 이방신이 나에게 이렇게 하겠느냐? 어느 부모가 나에게 이렇게 하겠느냐?

그리고 더욱 감사한 것은 환난을 통과하게 하면서 구속, 즉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이룰구원, 영원 궁극적인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고, 이것을 성경으로 알게 했다는 점이다. 임시적은 환난에서 영원한 소망을 발견하게 하셨고, 그 소망을 이 땅에 살면서 이룰 수 있도록 해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러니 우리가 현 세상에 사는 동안 크고 작은 사건을 만날 적마다 원망불평을 하지 말아라. 가난이 왔느냐? ‘조금만 노력하면 된다’ 라고 하면서 구원의 도리와 이치를 깨달으면서 최선을 다하는 게 신앙 믿음의 사람이 가질 바 이룰구원의 마음이다. 믿는 사람이 환난을 당할 때 마음이 이렇게 들어가야지 ‘너 때문에’ 이건 안 된다. 이건 잘못 깨달은 거다.

‘너 때문에’ 하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서로에게 핑계를 댔던 것과 같은 거다. 아담과 하와가, 남자 여자가, 또는 부부가 선악과를 따먹은 즉시로 ‘아이고 하나님,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이런 기도가 들어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그러지를 않고 서로에게 핑계를 대니 결국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오늘날 우리는 어떠냐? 세상 탓, 남 탓, 환경 탓을 하는 건 전부가 선악과 따먹는 사고방식이다. 우리는 핑계 대신 깨달아라. 깨닫는 인간이 지혜롭고, 지혜로우니 그 사람은 사는 날이 편안해진다.

26편 1절: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세상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를 좋아한다. 생활이, 사고방식이 늘 그렇게 젖어있다. 자고 일어나면 남의 말이다. 자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고, 그 말을 듣는 사람과 아무 상관이 없는 말인데도 멀리 있는 사람을 끌어다 놓고 그 사람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한다. 믿는 우리는 이런 버릇을 가지면 안 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판단을 받는 자신도 자기가 좋은 판단받기를 원하지 나쁜 판단을 원하지 않는다. 또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는 것이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을 한다. 우리는 이런 군중심리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진리성도 다윗은 좋은 판단이건 나쁜 판단이건 인간들에게 판단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판단받기를 원하고 있다. 왜 여호와 하나님께 판단받기를 원할까? 인간의 판단이 정확할까, 하나님의 판단이 정확할까? 지금 이게 들어있다.

우리 성도들은 누구로부터 판단을 받아야 정확하고 옳겠느냐? 인간에게인가, 하나님에게인가?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판단을 받아야 정확하다. 그 이유는, 첫째는 인간을 지으신 이는 창조주 하나님이시요,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에 따라 인간 자기에게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하는 성경을 지침서로 주었고, 그리고 인간에게는 ‘그 말씀대로 살았는지, 안 살았는지’ 하는 심판이 있다.

두 번째는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이 된 고로 이런 인간이 판단하는 지식은 하나님과 정 반대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인간판단, 세상판단은 절대 정확하지를 하지 못하니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의 판단을 하나님의 판단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판단만이 절대 정확한 것이고, 이 판단으로 판단을 해야 신앙의 옳은 판단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인데 하나님의 백성이 누구에게 가서 판단을 받고자 해야 하는 거냐? 대한민국 사람인데 아프리카 사람에게 자기를 판단해 달라고 하면 바른 판단이 되겠느냐? 이치적으로 말한다면 대한민국의 법의 판단을 받아야 정확한 판단을 받을 수 있다. 그런 것처럼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하늘나라 백성이고 하늘나라 국민이니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자기가 판단을 받아나가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에게 가서 ‘이러쿵저러쿵’ 하면서 자기 쪽이 유리하도록 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그 자체가 자기는 세상 사람이라는 증거가 되는 거다. 잘못된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인간 자기의 소원 목적이 세상에 둔 것이라면 세상인간으로부터 판단을 받으려고 할 것이고, 자기의 소원 목적을 천국에 두고 산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판단을 받고자 할 것이다.

목사가 남의 땅을 불법적으로 자기 땅으로 해 놓아서 세상 법 앞에 섰다고 하는데 이게 얼마나 우스꽝스런 일이냐? 얼마나 추하냐? 예수 믿는 사람이 도둑질을 해서 세상 법 앞에 판단을 받는다면 이게 얼마나 수치스러우냐? 말하자면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사고방식 언행심사가 올라가야 하는 건데 왜 내려가느냐? 왜 저질이 되느냐? 왜 그들로부터 판단을 받으려고 하느냐?

예수 믿는 교인이 세상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받고자 한다면 이 사람은 신앙의 기준을 어디에 둔 거냐?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듣고자 한다면 그 신앙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 거냐? 하나님인가, 세상 사람인가?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고자 한다면 이 사람의 신앙의 기준은 하나님이다. 반대로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자 한다면 이 사람의 신앙의 기준은 세상이다. 오늘날 교회적으로도 보면 누구 앞에 칭찬을 받고자 무슨 짓을 하고 있느냐? 진리지식,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았다면 그 기준에서 판단이 나오는 거다.

이 세상 모두는 땅에서 얻은 경험과 체험과 인간에게서 듣고 배운 땅에서 생산이 된 인간 기준적 판단이다. 땅, 세상을 염두에 두고 판단을 한다. 세상 법도 그렇다. 하나님의 판단은 땅에서 솟았느냐, 하늘로부터 오는 거냐? 하늘로부터 오는 거다. 하나님의 판단은 하늘에 목적을 두고 판단을 하는 거냐, 세상에 목적을 두고 판단을 하는 거냐? 하늘이다. 하나님의 판단은 하늘로부터 오는 것으로, 그 결과와 목적 역시 신령천국에 내려져 있다.

이런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마음도 ‘너는 죽음 저 너머 신령한 천국에서 지혜자가 되라. 영특자가 되라. 영광자가 되라. 면류관을 쓸 자가 되라. 영적인 면에서 영원히 부자가 되라. 나처럼 되라’ 라고 하시는 거다. 이게 안 되면 하나님의 간섭이 심하다.

그렇다면 믿는 우리가 하늘을 염두에 두고 그 생각을 가지고 판단을 하는 건지, 불타지고 썩어질 세상 것을 염두에 두고 판단을 하는 건지?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진리성도 다윗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다윗이 평소에 일반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자기가 일반적인 양심대로 바로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다윗의 성실함과 정직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둔 완전함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기준해서 살았다는 거다.

모든 인간에게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삶의 기준이 이미 성경말씀으로 주어졌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성경이 없으니까 이들은 성경대로 살지를 않는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양심껏 산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기준해서 사는 건 없다. 그리고 자기 양심껏 산다고 하는 그 양심도 사람마다 다 다르다. 하나님의 말씀에 맞춰진 양심이라야, 다시 말하면 진리말씀을 따르는 양심이라야 하나님께서 알아주신다. (계속)

김경형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