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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무

열려라 에바다 2011. 11. 3.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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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무
참나무는 꿀밤나무라고도 하는데 맛은 비록 떫을지라도 강화도령이 배고픈 시절에 먹었던 지은 이름으로 격상하여 불렀던 것 같다.

1968년에 나온 ‘꿀밤 삼백석’이라는 대중가요에 보면 ‘깊은 산중 꿀밤촌에 길을 잃은 총각대감님 오죽이나 배가고프길래 스리살짝 혼자따서 먹었나, 꿀밤이 아무리 맛이 좋다지만 꿀님맛도 알아나 주오,........ 가 있다.

조선조의 역대임금들 중에서 가장 학력이 낮은 철종은 강화도에서 꿀밤을 먹고 등짐을 지며 자라다가 나중에 임금이 된다.

긴 것은 긴 뽕나무열매라는 의미의 상[桑]에서 온 상수리라고 하고 짧은 것은 ‘도토리 키재기’라는 속담이 있듯이 키가 작다.

가지가 된다는데 우선 3가지만 올려본다.

우리 집에는 32년 전 이름이 좀 복잡스러운 Woolworth and Lothrop라는 백화점에서 사온 여문 참나무[oak]원목으로 만든 무늬가 좋은 책상과 서가가 있다.

한국식품점에서 청포묵에다가 갈색을 넣어서 도토리묵이라며 파는데

도토리는 희귀한 열매이기 때문이며 나는 청포묵에다가 물감은 드린 가짜도토리 묵이라면 전연 먹지를 않는데 암갈색의 묵을 다른 사람들이 사서 먹더라도 유해색소를 사용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돈에 눈이 어두워져서 국민보건을 해치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동네에서 사시는 분은 도토리를 많이 주워 다가 집게로 껍질을 벗긴 후에 가루를 만들어 묵을 몇 번을 해먹다가 한국에 가서 몇 개월을 살다가 와보니 작은 나방이가 생겨서 버리게 되었다고 하셨다.

작년에는 아내가 많이 주워 와서 묵을 만들었는데 맛이 약간 떫떠럼 했는데 인터넷에 보니 타닌산은 적혈구를 파괴한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죄다 남에게 주어버렸다.

타닌산은 빈혈이나 저혈압인 사람에게도 좋지 않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유는 식품으로 공급된 철분이 흡수되기 전에 타닌과 결합되어 타닌산철로 바뀌게 되기 때문이란다.

나는 지금도 떫은맛이 나는 녹차나 약간이라도 떫은 바나나는 전연 먹지를 않는다.

참나무는 반드시 햇빛을 많이 받는 바깥쪽으로 벋은 가지에서 도토리가 열리게 되는데 숲속에 있는 것은 전연 달리지를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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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펀글


철종의 아명 강화도령 원범은 역모 사건에 휘말린 아버지 전계대원군이 죽음을 당한 뒤 남은 가족끼리 강화도로 피신하여 숨어 살아온 탓에 왕족인 자신이 누군지도 잊고 자랐다.

천민으로 살면서 양순 이라는 아가씨와 금씨 성을 가진 친구와 나무하러 다니고 놀면서 퍽 정답게 지냈다고 한다.

그런데 1849년 6월 조선 24대 헌종 임금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는 대신들을 모아놓고 영조의 혈맥은 강화도에 살고 있는 원범뿐이니 원범으로 하여금 후사를 잇게 하라는 교지를 내린다.

그때 원범의 나이 19살이었다. 명을 받은 부사 정원용이 보영 대신이 되어 강화도로 건너와, 德完君으로 봉해진 원범을 모셔왔고, 6월 4일 인정전에서 즉위를 하니 그가 곧 강화도령이었던 제 25대 철종 임금이다.

원범이 대왕대비의 부름을 받고 갑자기 한양으로 가게 되자 양순이와 친구는 헤어지기가 싫어 슬피 울면서 금씨 친구가 원범에게 어디를 가느냐 왜 가느냐고 묻는다. 원범은 그 사연을 차마 설명할 수 없어 이다음에 한양에 놀러오거든 제일 큰집을 찾아오라며 이런 말로 둘러대고 헤어졌다.

몇 년 후 금씨 친구는 강화도에서 살 때 원범이 좋아하던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원범을 만나러 한양 대궐을 찾아갔다. 그러나 시골천민이라 대궐출입을 못하므로 사정사정해도 대궐의 문지기가 통과시켜줄 리가 없었다.

때마침 철종이 행차하다 이 광경을 목격하고 즉시 신하를 시켜 불러들이라 고 명하였으나 벼슬이 없는 천민은 입궐이 안 된다고 고한다. 그래서 철종은 금씨 친구에게 도사라는 벼락감투를 씌워줬다.

철종은 친구인 금도사에게 양순의 소식도 물으며 후한 대접을 하고 보내면서 강화유수에게 명하여 금도사가 달라는 대로 농토를 주라고 명한다.
이에 금도사는 자기 집 뒷산에 올라가 보이는 땅을 몽땅 달라고 해서 얻은 농토로 일약 부자가 되었고 벼락감투까지 쓰게 된다.
지금도 금도사의 후손들이 강화면 옥림리에 살고 있다고 한다.


원문출처http://www.seoulpost.co.kr/paper/news/view.php?newsno=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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