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하나님께로 부터 난 자들(요일5:1-6)

열려라 에바다 2022. 5. 22. 14:16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

요한일서5:1-6 (권호만 목사)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로마군인에게 체포될 때 천부장과 나눴던 짧은 대화가 있습니다.

바울의 연설을 듣던 군중들이 소란을 피우자 천부장은 그 이유가 바울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채찍질을 하여 그 이유를 알아보라고 명령합니다.

이 말을 들은 바울이 옆에 있는 백부장에게 ‘너희가 로마시민인 자를 죄도 정하지 않고 채찍질 할 수 있느냐?’고 자신이 로마시민권자임을 밝힙니다.

그 말을 들은 백부장이 일이 잘못되었음을 직감하고 천부장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당황한 천부장이 바울과 짧게 대화를 하는데,

천부장: 네가 로마 시민이냐? 바울: 그렇다.

천부장: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다. 그런데 너는 어떻게 얻었느냐?

바울: 나는 나면서부터 로마시민이었다.

이 말을 들은 천부장은 로마시민을 결박한 것에 대해 두려워하면서 그때부터 바울을 잘 보살펴주게 됩니다.

바울이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자라는 말은 그의 부모가 로마시민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로마 시민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났기에 바울은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이 되었습니다.

로마 시민이 되면 누구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로마법에 따라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함부로 고문하거나 채찍질할 수 없었고, 반역죄를 제외하고 사형 선고를 할 수 없었습니다.

반역의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더라도 처참한 십자가형벌은 받지 않았습니다.

 

이와 반대되는 경우도 있는데요, 노예부모를 둔 사람은 날 때부터 노예가 되었습니다.

또한 전쟁의 포로가 되었을 경우 노예가 되기도 했는데요,

노예로 태어나면 부모님이 섬기는 주인을 섬겨야 했고 주인의 말에 순종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당시에 노예는 가축법에 적용되었는데 이 말은 가축과 같이 취급되었다는 뜻입니다.

노예를 말하는 가축정도로 생각하였고 가축처럼 주인이 마음대로 사고 팔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상황에서 누구에게서 태어났느냐? 그의 아버지가 누구냐? 그가 누구의 자녀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당시의 풍습과 전통을 깨트리고 세상을 이기며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상과 종교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요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는 말을 몇 차례 사용하고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는 말을 3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4절에서도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곧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이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두었다는 것은 이 세상의 어떤 아버지를 둔 것보다 더 귀하고 복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예로 태어났든지 평민으로 태어났든지 귀족으로 태어났든지 어떤 존재로, 어떤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든지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었다면 이 세상의 어떤 조건도 다 극복되고 넘어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5절)라고 반문하면서

예수님을 믿는 이 믿음을 가진 자가 세상을 이긴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향하여 그가 눈먼 것은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눈이 멀어서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며 낙망하고 소망 없이 구걸하며 살아가고 있는 자를 향하여 주님은 믿음으로 그 절망이 극복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믿음은 구원의 믿음이요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요 세상을 변화시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세상의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고 뚫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되었다는 말은 정말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이런 축복을 받은 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는 거듭남, 중생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오늘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일 먼저 생각해보야 할 것이, 누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냐? 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1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메시아라는 히브리어에 해당되는 헬라어인데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쉽게 설명하면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가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한 구원자는 예수님밖에 없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어떤 구원자를 보내지 않으셨고 오직 예수님만을 유일한 구원자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구원자로 믿는 자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12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도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로 믿고 영접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육신의 부모님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은 내 자의로 할 수 없습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아주시는 대로 내 운명이 결정되어집니다.

성별도 그렇고 얼굴색도 그렇고 신분도 그렇고 가정 형편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당시로 볼 때 정말 불공평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왕족으로 태어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노예로 태어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요한 귀족으로 태어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가난한 서민으로 태어났습니다.

이 불공평과 불이익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영적인 태어남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축복의 문입니다.

믿음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노예든지 귀족이든지 평민이든지 여자든지 남자든지 누구든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아버지의 사랑과 축복 속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예전 성경에는 이 구절을 ‘누구든지’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멸망을 받지 않고 영생을 받게 됩니다.

구원에서 제외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축복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되는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낳으신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1절 말씀을 보면,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에서 나를 낳으신 분이 누구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나를 낳으신 분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낳으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비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과 부끄러움을 참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이렇게 완성된 구원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게 하셨습니다.

수많은 전도자들을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게 하셨고 우리에게까지 이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 복음을 듣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영접하게 하시고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렇게 수고하셨습니다.

우리가 무엇이라고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렇게 수고하셨단 말입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그 사랑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자녀 된 우리의 당연한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를 낳아주신 육신의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이 옳은 일이고 당연한 것처럼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 되게 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렇게 애쓰시고 수고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①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다른 자녀들을 사랑합니다.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은 나 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가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모 된 입장에서 자녀들에게 바라는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잘살든 못살든 형제들이 자매들이 서로 우애 있게 사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부모님들을 기쁘게 합니다.

반대로 형제자매들이 마음이 나뉘고 서로 불화하는 것을 부모님들은 가장 슬퍼하고 안타까워합니다.

그래서 주님도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계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②또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3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여기에서 말하는 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요한일서 4장 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그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밀어내고 그래서 잘 사는 자는 더 잘살게 되고 못사는 사람은 더 못살게 되는 양극화 현상입니다.

이러한 때에 주님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반칠환 시인이 ‘뻐꾸기의 서원’이라는 시를 썼는데요,

그 시는 ‘지빠귀를 밀어내지 않는다.’ 이게 전부입니다.

이 시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뻐꾸기의 탁란 습성을 알아야 하는데, 뻐꾸기는 지빠귀 둥지에 알을 낳습니다.

지빠귀는 자기 알과 뻐꾸기 알을 동시에 품습니다.

하지만 알에서 먼저 깨어난 뻐꾸기 새끼는 둥지 안에 있는 지빠귀 알을 둥지 밖으로 밀어냅니다.

그리고 지빠귀 어미가 물어다주는 먹이를 독차지합니다.

자기 몸집의 몇 배가 되는 뻐꾸기에게 먹이를 물어다주는 지빠귀 어미의 모습은 애처롭습니다.

어느 날 뻐꾸기는 진짜 어미의 울음소리를 듣고는 지빠귀 어미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뒤로 한 채 훌쩍 둥지를 떠나버립니다. (김기석 목사 설교에서 인용)

오늘 우리의 현실을 뻐꾸기의 모습이 아니라고 누가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남을 밀어내야 내가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남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밀어내고 둥지를 독차지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는 않는지요?

그렇다면 우리도 이제 뻐꾸기의 서원을 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웃들을 밀어내지 않는다.’

여러분,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을 밀어내지 않고 함께 살고 함께 사랑하고 함께 지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깁니다.

 

4절 말씀을 보면,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했습니다.

육신으로 태어난 자아를 갖고는 악한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노예로 태어난 자가 어떻게 세상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노예로 태어난 자는 현실에 순응하며 이렇게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인 줄 알면서 일평생 노예로 살아갑니다.

귀족으로 태어난 사람은 노예를 부리면서 자기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이 당연한 것처럼 세상 풍조에 휩쓸려 흥청만청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세상을 이깁니다.

세상풍조를 따라 살아가지 않고 세상유행을 따라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갑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다보니 세상을 이기게 됩니다.

 

골로새 교회의 지도자인 빌레몬의 집에서 노예살이를 하던 오네시모가 있었습니다.

오네시모가 어느 날 주인의 돈을 훔쳐 도망을 가게 됩니다.

사람이 많은 로마로 가서 노예 신분을 숨기며 살다가 사도 바울을 만나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됩니다.

모든 자초지종을 들은 바울은 빌레몬에게 편지를 써서 오네시모 편에 보내게 됩니다.

그 편지에는 오네시모를 종으로 받지 말고 형제로 받으라는 말이 쓰여 있었습니다.

그 편지를 받은 빌레몬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종이었던 그것도 자신의 돈을 훔쳐 달아난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함께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즉 형제로 받아들입니다.

그 후 오네시모는 에베소교회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당시 노예가 주인의 돈을 훔쳐 달아나면 죽이게 되어 있었습니다.

오네시모는 죽을 운명에 처해 있었습니다.

빌레몬도 당시의 법 감정이나 세상 풍습으로 볼 때 얼마든지 오네시모를 죽일 수 있었고 처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모도 빌레몬도 믿음으로 승리하고 세상을 이겼습니다.

모두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되었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믿음으로 승리하여야하고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세상의 잘못된 사상과 풍습과 전통을 이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의 잘못된 것들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2022.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