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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결혼관

열려라 에바다 2022. 6. 2. 11:25

 

그리스도인의 결혼관

 

* 이 강설은 열린교회의 김남준 목사님의 강의를 대부분 참조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1. 결혼은 사명을 위한 것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신 제도가 흔히 세 가지가 있다고 전해집니다. 하나는 가정이고, 하나는 교회이고, 하나는 국가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국가는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신 제도라기보다는 인간이 하고자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소극적으로 허락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실 때 가장 좋은 체제는 신정체제입니다. 광야에서 모세가 정치와 제사의 양쪽을 쥐고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나라를 이끌어가고, 왕은 하나님이 직접 왕이 되어주시는 나라가 하나님이 이상적으로 생각하신 나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집을 부렸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소극적으로 허용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서를 보면,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호 13:11)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세 가지라고 하지만, 국가를 떼어버리고 나면 두 가지가 남는데, 그것이 교회와 가정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교회와 가정이 아주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을 보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바울이 무엇으로 설명합니까? 가정의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다른 무엇으로도 설명해낼 수 없고, 오직 부부관계로서만 가장 잘 설명될 수 있겠다 생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두 제도만의 독특한 공통적인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거기에는 영적인 연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도 그렇고, 부부관계도 그렇고, 거기에는 영적인 연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시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 있는데, 왜 하필 갈비뼈로 만드시는 것입니까? 그냥 여자도 흙으로 만드시면 안 되나요? 왜 아담을 잠재우시고 그 갈비뼈를 취해서 여자를 만드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둘이 한 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최고의 사랑 고백이 무엇이냐 하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고 고백했습니다. 부부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하는 그 심오한 신학적 사상을 정말 그 어떤 것보다도 낭만적이고 아름답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깊이 사랑하면서 온전히 하나로 연합하는 것이 진정한 가정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부간의 영적인 연합은 사실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된 것입니다.

“(26)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

여기 보면, 형상을 따라 모양대로 창조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을 닮게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닮게 창조하시는 목적이 무엇이냐 하면, 온 땅을 다스리는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27절을 보면,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됨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남자와 여자로 지으신 것도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른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홀로 계시지 아니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깊은 사랑 가운데 연합해서 온전히 하나로 계시는 것처럼 그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도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고 함께 더불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서 살아가는 그런 사회적인 존재로 지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태어나서 여러 사람과 수많은 관계들을 맺으면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인데, 그러한 수많은 관계들 중에서 특별히 이 부부관계라고 하는 것은 삼위 하나님의 연합을 가장 절정으로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관계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른 것이고, 그러므로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아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사명을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가정을 창설하신 진정한 목적은 바로 사명을 위한 것입니다. 무슨 사명이냐 하면, 이 온 세상을 다스리는 일, 생육하며 번성하며 땅에 충만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온 세상에 확장해 가는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가정이라는 것을 창설하신 것입니다. 그냥 지들끼리 잘 먹고 잘살고 행복을 느끼라고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물론 사명을 위해 가정의 제 역할을 다할 때 거기 행복과 기쁨과 만족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순서가 바뀌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명이 항상 먼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왜 결혼하냐 물어보면, 거의 예외 없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혼자 사는 게 너무 외롭고, 힘들고, 또 쓸쓸하고, 그래서 뜨겁게 사랑도 해보고 싶고, 성적인 욕구도 해소하고 싶고, 그리고 아이도 낳아서 키워도 보고 싶고, 그래서 스위트 홈을 이루어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이것이 불신자들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물론 이러한 필요들 때문에 결혼해야 되는 것은 맞습니다. 그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성적인 욕망을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혼은 그러한 필요들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러한 목적만을 위해서 결혼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스도를 주요 왕으로 고백하는 우리 신자는 결혼을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최우선적인 목적이 되어야 하느냐 하면, 그것은 내 행복, 내 필요, 내 만족이기 이전에 사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명을 위해 여러분의 행복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 사명 속에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이 사명의식이 딱 있어야 합니다. “내가 결혼하면 하나님을 더 잘 섬길 수 있겠다. 자녀들을 낳아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겠다.” 라는 마음이 우리 중심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사명은 뒷전이고 내 필요만 따져서 결혼한다면, 그것은 불신자들의 결혼과 다를 바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2. 가정의 회복의 시작은 믿음 안에서 결혼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결혼이라는 것, 가정이라는 것은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창설하신 성스러운 제도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타락하고 죄가 들어오면서부터 모든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관계가 파괴되어지고, 특별히 하나로 온전히 연합해 있던 부부관계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서로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고 부끄러워하여 옷으로 가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 전에는 부끄러움을 모를 정도로 하나가 되어 있었는데, 이제는 부끄러움과 서로 간에 수치심을 느낄 정도로 그러한 부부간의 관계가 파괴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결혼이라는 것은, 가정이라는 것은 더 이상 거룩한 것이라거나 성스러운 것이 아닌 것입니다. 도리어 죄로 말미암아 심각하게 변질되고 타락한 것이 결혼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남녀가 만나서 서로 뜨겁게 사랑하고 그래서 영원히 함께 하기로 약속하고 결혼하는 것을 그 자체로 무슨 거룩하거나 성스러운 의식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결혼만큼 세속적으로 것으로 묘사하는 것이 없습니다.

(2)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3)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창 6:2-3)
(27)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눅 17:27)

사람들이 심판을 받아 지옥 가기 전에 열심히 하는 게 무엇이냐 하면,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입니다. 결혼이 세속적인 행위들 중에서 아주 대표적인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말에 가장 아름다운 것이 타락하면 가장 추하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이라고 하는 것, 결혼이라는 것은 사실은 어떻게 보면 창조의 꽃으로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는데, 죄가 들어오면서 가장 추하고 세속적인 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에 드는 모든 사람으로 아내를 삼는 것에 대해서 창세기 6장은 뭐라고 말합니까? 그들이 육체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동물적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결혼하는 것이 동물들 짝짓기 하는 것하고 전혀 다를 바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직 sex와 쾌락과 자기만족과 자기행복을 위해서 결혼하는 것입니다. 그 외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 무슨 진정한 연합이 있겠습니까, 사명이 있겠습니까? 그냥 동물적인 짝짓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이 이렇게 타락하니깐, 결국 이 가정에서 온갖 문제들이 양산되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갈등하게 되고, 그래서 이혼하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상처를 받고, 그래서 자녀들이 빗나가게 되고... 이렇게 불행하고 비참한 일들이 가정으로부터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가 들어오면서부터 모든 관계들이 파괴되어짐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이 사실에서부터 우리가 쉽게 추론할 수 있는 것은, 그러면 가정이 하나님이 처음부터 의도하셨던 그 가정으로 회복되기 위한 가장 본질적이고도 최대의 변수가 무엇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까? 바로 죄가 극복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돈이 많다고, 삶의 환경이 좋다고, 행복한 가정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데서 가정의 행복을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가정의 파괴가 죄의 문제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그러므로 가족의 구성원들 각자 각자가 어떻게 죄를 극복하고 하나님 앞에서 사느냐에 의해서 가정은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을 이루고 결혼을 함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건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을 믿고 죄 용서함을 받은 두 남녀가 만나서 결혼하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결혼해야 비로소 거기서 가정의 참된 회복을 논할 수가 있고, 참된 행복을 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결혼하다는 것 자체가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겨우 회복을 위한 출발선 상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 안에서 결혼해도 주님이 원하는 가정으로 회복해 가는데 있어서는 많은 어려움이 있고 회복의 긴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신앙 안에서 결혼해도 참된 가정으로 회복해가는 것이 쉽지 않은데, 더군다나 처음서부터 불신자하고 결혼하겠다라고 하는 것은, 좀 심하게 말하면, 신앙이고 뭐고 간에 자신의 인생을 그냥 환란과 고통의 시궁창에 내던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그렇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겠죠. 예를 들면 교회 안에 결혼한 형제가 없어서 그렇다거나, 아니면 자기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없다거나 등등의 이유를 댈 것입니다. 그러나 이유야 어찌되었든 그렇게 불신자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게 되면, 결국 그 가정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결혼생활이 행복하겠습니까? 행복은커녕 거기에는 말로다 못하는 고통과 환란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불신자와 결혼해서 평생을 고통하면서 지냈던 여러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성공사례가 가끔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보면서 너무 소망을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정말 예외적인 것이고, 대부분은 평생을 말 못할 고통을 당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좀 과격하게 그것은 자신 스스로를 시궁창에 내어던지는 것이라고까지 표현한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보나 교회적으로 보나, 아주 치명적인 손해와 피해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절대로 불신자와 결혼하지 마십시오. 불신자하고 할 바에야 차라리 안 하는 것이 낫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믿지 않는 자들과 함께 멍에를 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 안에서 결혼하는 것이 참된 가정을 이루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전제조건이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나 자신과 그리고 내 배우자가 될 사람이 예수님을 정말로 믿어서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난 자가 되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듭난 두 사람이 만나 결혼해야 거기서 비로소 가정의 회복과 행복을 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결혼을 위해 기도하고 준비하기 전에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내가 정말 거듭난 자인가 깊이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결혼을 왜 하고 싶어 하는지, 결혼을 통해서 도모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깊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것에 따라서 내가 하는 결혼이 정말 거룩한 것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아주 동물적일수도 있는 것입니다.

3. 결혼의 소명을 발견하라.

세 번째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결혼을 하려면 결혼에 대한 분명한 소명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타락하기 전에는 워낙 모든 사람이 결혼하게끔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락하면서, 그러한 타락의 구조 속에서 신자들은 두 가지 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는데, 하나는 결혼하는 것이고, 하는 독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지를 알고 깨달아서 그 소명대로 우리는 결혼하든지 독신으로 살든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상황에 떠밀리듯 결혼하거나 독신으로 살아간다면, 그것만큼 영적으로 볼 때 불쌍한 인생이 없습니다. “왜 결혼 안 하고 독신으로 살아?” 물어보면, “그냥 하다보니깐, 데려가는 사람도 없고...” 이것도 불쌍한 것이고, “왜 결혼했어?” “하도 집사람이 졸라 데서 어떻게 하다보니깐 그렇게 됐어요.” 이것도 참 불쌍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그렇게 상황에 떠밀리듯이 사는 삶이 아니라, 분명한 소명감을 가지고 결혼하든지, 독신으로 살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위해서 우리는 우선 이 두 가지 가능성 모두를 열어놓고서 하나님 앞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아마 여기 있는 대부분의 청년들은 다 결혼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여기 혹시 주와 복음을 위해서 독신으로 살고자 계획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마 다 결혼을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저도 그러했지만),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결혼하면 행복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욕구 중에 가장 강한 욕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적인 욕구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뜨겁게 사랑하고, 그 사랑하는 사람과 육체적으로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서로 의지하고 살면서 자식들도 낳고 그렇게 알콩달콩 살아가면 참 좋겠다 라고 생각하면서 핑크빛으로 물든 결혼의 꿈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독신으로 살면, 참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지금 20년 동안, 혹은 30년 동안 혼자 살아 온 것도 쓸쓸하고 힘들어 죽겠는데, 평생을 혼자 살아야 할 걸 생각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나는 죽어도 독신으로 못산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어렸을 때, 우리 어머니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결혼하시고 나서 예수님 만나고 신앙을 가지셨는데, 그때가 아마도 믿음이 아주 뜨거우셨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말씀하시기를, “내가 만일 처녀 때에 주님을 만나고 신앙을 가졌었더라면, 나는 아마 결혼 안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 이렇게 자녀를 낳고 키우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고 감사한 것이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 저의 어머니의 말씀이 정답은 아닙니다. 옳은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가정을 가지고 그 가정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도 나름대로 가치가 있고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그 마음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이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이 말이 이해가 되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전혀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은 한 번 자신의 신앙을 깊이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내가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밖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고, 형제자매들을 심방하고, 교인들을 섬기고, 교회를 돌아보는 일에 더욱 헌신하고 싶은데, 가정의 여러 가지 일에 매여 있기 때문에, 교회를 마음껏 섬기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더 많이 더 헌신하고 더 많이 주와 복음을 위해 일할 텐데” 하면서 때늦은 후회라기보다는 교회를 마음껏 섬기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표현한 푸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보면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이 결혼한 사람은 그 결혼을 후회하며, 취소하고픈 마음이 들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분명 앞서 말씀드렸듯이, 가정을 섬기는 일도 중요하고, 그것도 주님을 위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대신에 교회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는 가정이 없는 사람보다 훨씬 많은 제약을 받는 것이 사실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나의 소명이 결혼이냐 독신이냐 상관없이 먼저 내 마음속에 주님을 향한 사랑과 그 주님을 위해서 내 삶을 헌신하겠다라고 하는 열정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일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해서 자기를 헌신하고픈 마음이 없으면, 그 사람은 두 말할 것 없이 결혼을 선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뭐하려고 자신이 꿈꿔온 결혼의 행복을 포기하고 자신이 불행할 것이라고 여기는 독신의 길을 스스로 걸어가려고 하겠습니까?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오로지 결혼만 생각하지 독신으로 살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자기 정욕을 좇아서, 자기 행복을 위해서 결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또한 주님을 믿고 사랑하고 나의 왕이요 주로 모시는 그것이 앞에서 배운 가정의 회복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이 결혼의 소명 부분에서도 그것이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건이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뜨거운 신앙이 있어야 무엇이 더 주님을 잘 섬길 수 있는 것일까, 결혼하는 것이 주님을 더 잘 섬길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독신으로 사는 것이 더 주님을 잘 섬길 수 있는 것인지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고민 가운데서 이제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결혼하고 살 때는 져야할 십자가가 어떤 것이 있고, 또 어떻게 주님을 섬길 수가 있는지, 반대로 독신으로 살 때는 어떤 제약이 있고, 그러나 주님을 섬기는데 있어서는 또 어떤 장점들이 있는지 잘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결혼하게 될 때에 져야 할 십자가부터 생각해보십시다. 보통 결혼하기 전에 청년들은 결혼생활을 마치 장밋빛 인생처럼, 행복하기만 할 것처럼 생각하고서 결혼의 꿈을 키우는데, 우선은 그 생각부터 교정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 결혼하면 그렇게 행복합니까? 영국 속담에 “집을 사면 1년이 기분 좋고, 새 말을 사면 1달이 기분 좋고, 이발하면 하루가 기분이 좋은데, 결혼하면 일주일이 기분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결혼해서 느끼는 즐거움이 말 한필 사는 것만 못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결혼을 해서 좋은 것도 있고, 행복한 것도 있지만, 그러나 이것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삶입니다. 김남준 목사님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연애가 만약에 둘이 함께 손잡고 어깨를 기대면서 서쪽 바다에 떨어지는 낙조를 바라보면서 노래 부르는 것이라면, 결혼은 낙조가 떨어지고 어두워지기 시작하는데, 파도는 거칠고, 날씨는 추워지는데, 둘이서 쪽배를 타고 노를 지어서 거기로 가는 것이다.”

얼마나 적절한 비유인지 모릅니다. 사귀고 연애할 때는 낙조를 보면서 사랑을 노래하고, 시를 읊고, 둘이서 뭔들 못하겠습니까? 그렇게 설레면서 야릇하고 애틋한 기분을 느끼며 서로 즐거워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연애하는 것이고 사귀는 것입니다. 발에 물 묻힐 일도 없고, 아무 비용도 안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그렇지 않습니다. 치러야 될 비용이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둘 사이에 연애할 때 있었던 설레고 야릇한 감정, 그런 것 결혼하면 싹없어집니다. 그런 감정은 길어보았자, 한 6개월이나 1년 정도밖에 안 갑니다. 금방 그런 감정들은 사라지고, 남은 것은 무엇이냐 하면, 세상의 험한 풍파 속에서 이제 둘이서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밖에 남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둘이만 있을 때는 그나마 나은데, 애까지 생기면, 정말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기 낳고 키우고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입니까? 아이 셋 나으면 영적 침체 10년입니다. 정말입니다. 우리교회 여 집사님들한테 한 번 물어보십시오. 간혹 그것을 성공적으로 극복하는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정말 예외적인 것이고, 이것은 거의 공식과도 같은 것입니다. 아이 한 명당 영적침체 3년, 셋 나으면 9년, 거기다 1년 더 보태어서 10년이고, 그리고 회복되는 데는 또 몇 년이 더 걸리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성격도 안 맞는 남편하고, 괴로워하면서 살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지불해야 됩니까? 어디 훨훨 날아다니면서 하나님을 섬길 수도 없고, 가정에 늘 매여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상관없이 살아도 되는 사람들한테 무거운 짐을 집니다. 시동생 챙겨야지, 시부모님 챙겨야지, 양가 친척들도 챙겨야지, 또 운이 좋으면 시동생도 한 일곱 여덟 있는데 가가지고 줄줄이 챙겨야 되는 것입니다. 전에 들은 얘기인데, 한 자매가 시집가서 시동생 둘 기르고 나니깐, 시어머니 드러눕고, 3년 병간호하고 나서 돌아가시니깐 시아버지 드러눕고, 그렇게 또 3년이 흘러서.. 그 사이에 13-4년이 훅 지나가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살았던 삶이 의미 없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모를 섬기고, 자녀를 기르고, 그런 평범한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져야 할 짐은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26)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27)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28)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고전 7:26-28)
(38)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 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 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니라(고전 7:38)

그래서 바울은 독신을 권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를 생각할 때, 그리고 가정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껏 사명을 감당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가정을 가질 때 져야하는 많은 십자가로부터 자유하다는 점에서 바울은 독신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할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할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치러야 할 비용들을 생각하고서 결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독신은 치러야 할 것이 없느냐? 독신도 만만치 않습니다.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되죠, 많은 정욕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도 생각해야 되고, 노후를 어떻게 대비할 것인지도 생각해야 되고, 독신으로 있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바라보는 따가운 눈초리를 어떻게 감당해갈 것인지도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통 결혼 안하면 사람들이 정상으로 안 보기 때문입니다. 남자가 안가면 성격이 이상한가? 여자가 안 가면, 과거가 있나? 별의 별 생각을 다합니다. 그래서 그런 시선들을 다 감내하면서 살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극복하게 만드는 어떤 가치가 있기 전에는, 그 소명이 있기 전에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깐 이것도 치를 비용이 많고, 저것도 치를 비용이 많습니다. 또 다르게 생각하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상황에 떠밀리듯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간절히 매달려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서 소명을 따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너는 결혼해라, 너는 독신으로 살아라” 이렇게 음성으로 들려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과정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계속 응답을 구하면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소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결혼하는 것보다는 독신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을 더 잘 섬길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막 불 일듯이 일어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혼자 사는 것보다는 결혼함으로서 하나님을 더 잘 공경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뜻입니다. 우리로 소원을 주셔서 그 길을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소명의식을 가지고서 결혼을 해야 될 요량이면, 결혼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하고, 독신이면, 하다가 걸리면 가고, 못 가면 독신의 소명으로 알자. 그러지 말고, 뜻을 정해서 독신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여교수님도 20대에 독신으로 살기로 뜻을 세우셔서 지금 신학교 강사로 사역하시고 또 교회에서도 사역하시고 계십니다. 그렇게 주와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시면서 곱게 늙어가는 것도 주님 안에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떠밀리듯이 가지 말고, 자기 길에 확신을 소명을 가지고 가라는 것입니다. 소명을 가지고 결혼하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결혼을 위한 준비

네 번째로 살펴볼 내용은 결혼을 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어떻게 준비시켜야 하는지에 대해서 배워보겠습니다.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4가지가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1) 육체적으로 성숙해야 한다.
그러니깐 원색적으로 표현하면 성관계가 가능한 상태에서 결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이야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워낙 육체적으로 다 성숙했기 때문에... 그러나 옛날 우리 증조할아버지 때는 12-13살 때 결혼했습니다. 그래서 이로 인해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야기 되었습니다. 남편이 어려서 성관계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내들이 힘들어 하고, 또 남편이 성에 눈을 뜰 때는 이미 아내가 나이가 많이 들어서 성적인 매력을 상실한 상태가 되어 있어서 남편이 만족하지 못하고 바람을 피거나 첩을 들이는 등의 문제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얘기들은 옛날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얘기고, 오늘날은 전혀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2) 인격적인 성숙이 필요하다.
이것은 안 믿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인데, 결혼할 배우자를 찾을 때는 반드시 인격적인 성숙을 결혼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돈이 없는 것은 벌면 됩니다. 인격적으로 된 사람이면, 자기가 지금 가정을 위해서 지게를 져야 할지 똥을 퍼야할지 알고, 또 그 상황에서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인격적으로 안 된 사람은 지금 돈을 좀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기 때문에 가정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격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인격을 가늠해 보기 위해서 세상 사람들은 그 사람의 부모를 보고, 가문을 보고, 또 그 사람의 살아온 환경이나, 주위 사람들의 평가들을 고려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믿는 신자들도 그런 것들을 살펴봅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그것에 크게 무게를 두지 않습니다. 도리어 어디에 무게를 두느냐 하면, 신앙 안에서 변화된 그의 인격과 성품에 중점을 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사람이 암만 인격이 훌륭하고 성품이 좋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인격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는 것이고, 상황에 따라 어떻게 돌발적으로 변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로서 거룩한 성품과 인격은 물론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것은 참되고 진실한 것입니다. 바로 배우자를 찾을 때는 이러한 참된 인격을 가늠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이 성화의 길을 부지런히 걸으면서 날마다 회개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변화 받고 성장해 가는 이 과정은 여러분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만나게 될 배우자와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많은 여러분들의 자녀들, (최소한 다섯은 나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 많은 자녀들을 위한 것입니다. 절대로 신앙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신앙은 없습니다. 신앙의 공동체적인 성격 때문에 각자 개개인의 신앙의 성숙과 그 결과로서 인격적인 성숙이 그래서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하려면 신앙 안에서 인격적인 성숙이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3) 사회적 성숙이다.
대학 1학년인데 결혼하려고 한다거나, 남자도 아무 직업이 없고, 여자도 아무 직업이 없는데 결혼하려고 한다면, 그 결혼은 반드시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공부하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 결혼하게 되면, 학업에 많은 방해를 받게 됩니다. 물론 학업에 있는 가운데서 예외적인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이도 어린 사람들이 결혼하려고 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결혼해서 서로를 책임질 수 있는 사회적인 성숙이 필요합니다.

4) 신앙적인 성숙이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싫을 때가 있고, 피가 섞인 형제간에도 재산 문제가 나오면 서로 원수처럼 지낼 때가 있는데, 부부 사이에는 무슨 피가 섞였습니까? 뭐가 섞였습니까? 단지 결혼이라는 것을 통해서 하나로 묶여졌다는 것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부부관계에서 갈등과 마찰이 생길 것이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인 것입니다.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사랑만 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부부간에 감정적인 균열이 생길 것이고, 인격적인 결합에 금이 가게 마련인데,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화해점이 없는 것입니다. 한쪽에서 참는다고 말하지만, 일방적으로 참는다고 해서 그것이 어느 때까지 가능하겠습니까?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꾸 깨어지는 것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것이 황혼 이혼입니다. 자녀를 출가할 때까지만 참고 지내고, 자녀들을 다 출가시키면 그때 이혼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한참 자녀들을 양육해야 할 때 이혼하는 것보다는 양심적이지만, 그러나 결국 그 가정이 파탄 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대부분의 가정이 다 형식으로만 부부로 남아있지 거기 내용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바람피우면서 사는 것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굉장히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신자는 어떠합니까? 신자는 이런 점에 있어서 세상 사람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의 부부관계에도 세상의 부부관계와 마찬가지로 많은 갈등과 마찰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깨트려진 관계를 다시 복원시킬 수 있는 단 하나의 장치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사람이 맘에 안 드는데,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사랑하고 살라고 하나님께서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때문에 용서하고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고 관계를 회복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부부의 관계를 이어가는데 있어서도 아가페의 사랑이 절대적입니다. 서로를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없이는 결혼 생활을 지속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깐 부단히 자기 깨어짐이 없는 부부가 뜨거운 정신적이고 영적인 결합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신앙적인 성숙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와 결합하는 또 한 사람과의 관계를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성숙된 신앙을 가진 사람이어야만 결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이 다 성숙한 것은 아니고, 신앙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도 결혼할 수 있겠지만, 그 후에 그 가정이 하나님의 뜻대로 세워가지는데 있어서는 신앙적 성숙이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배우자를 찾을 때, 그 사람의 가문도 중요하고, 살아온 과거도 중요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지금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어떤 꿈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려고 몸부림 치는가 그 흔적을 인격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배우자를 찾을 때는 바로 그런 신앙이 성숙한 사람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조건은 다 양보하더라도 real 크리스챤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외모를 많이 보는데, 사실 예쁘고 귀여운 것, 몸매 좋은 것, 물론 세상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런 것들이 전부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보면 그것이 다 헛된 것입니다.

(30)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 31:30)

암만 그 여자가 예뻐도 나이 들면 다 쭈글탱이 할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몸매 예쁜 것 얼마나 가겠습니까? 아이 낳고 키우면 아줌마 몸매 되는 거 금방입니다. 그런 썩어질 것들을 기준으로 삼지 말고, 무엇을 보아야 되느냐 하면, 그 자매가 또는 그 형제가 하나님을 경외하는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신앙을 보아야 하고, 그 신앙에서 나온 인격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말이 쉽지, 정말 정말 외모보다는 신앙과 인격을 보고 배우자를 결정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외모를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하나님은 그 마음 중심의 신앙을 더 가치 있게 보시지만, 사람은 그 내면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것보다 외모를 더 중요시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이 특별히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저 자신도 그렇습니다. 저도 남자이고, 예쁜 여자, 몸매 좋은 여자 왜 싫겠습니까? 그래서 지나가다가 예쁜 여자 보면, 본능적으로 고개가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는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예쁜 자매가 신학교에 놀러온 적이 있었는데, 총각전도사들이 순간 얼굴이 빨개지면서, 눈에 불을 켜고 그 자매를 자꾸 쳐다보고, 계속 의식하고, 또 관심을 보이는 것입니다. 만일 못생긴 자매가 왔으면 전도사들이 그렇게 반응하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전도사도 이렇게 외모를 보는데, 하물며 일반 평신도들이야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한계가 있는 것인데, 결국 외모를 보고 따지면 누가 손해를 보느냐 하면, 본인이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정말 신앙이 좋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자매가 있는데, 그 자매가 뚱뚱하고 아주 못생긴 자매라고 한다면, 형제분들 이 자매와 결혼할 의향이 있습니까? 아마 열이면 열 다 찰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예쁘면서 신앙도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외모가 최상은 아니어도 최소한 어느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다 자기만의 기준이 있는 것입니다. 이 온 세상에 내 기준을 만족시킬 만한 사람이 사실은 흔치 않습니다. 믿음도 좋고 예쁜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도 그런 사람을 기대하면서 암만 믿음이 좋아도 못생기면 차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무엇이냐 하면, 굴러들어온 복을 본인 스스로가 차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인물은 예쁜데 믿음이 없는 자매가 있으면, 그런 자매는 또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결혼해서 영적으로 많은 손해를 보고, 고난의 길을 스스로 자초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은 외모에 집중되어 있고, 우리의 안목과 시선은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그러니깐 암만 예뻐도 믿음이 없으면 결국 결혼생활이 행복할 수 없고 도리어 많은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당장 예쁜 것이 좋지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무지와 몽매 때문에 우리는 너무나 자주 그 사람의 내면의 신앙의 가치와 성품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하고 정말 어떻게 보면, 진국인데 어디가도 그런 신실한 자매를 찾는 것이 쉽지 않는데, 단순히 그 자매가 못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차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굴러들어온 복을 차버리는 것입니다. 자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매들은 주로 외모도 좀 보지만, 그 외모보다는 그 사람의 능력을 봅니다. 즉 돈을 봅니다. 여러분 만일 아주 믿음이 신실한 그런 형제가 있는데, 그런데 그 형제가 키가 작고 대머리이고, 나이가 좀 있고, 직장이 변변치 못하고, 재산도 별로 없고 그런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과 결혼할 의향이 있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그 정욕에 따른 기준들 때문에 너무나 자주 많은 실수들을 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결혼이라는 것은 자신의 신앙의 밑바닥을 다 보여주는 하나의 척도와 같은 것입니다. 그 신앙이 다 드러나고 그 가치관이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정말 사명을 중요시하는지, 주님을 사랑하고 신앙하는 그 내면의 가치가 중요한지,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것을 더 중요시하는지, 그 사람이 결혼을 어떻게 하는지 보면 다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자체가 그렇지만, 특별히 결혼이라는 것은 주님의 뜻대로 하려면, 오늘 말씀처럼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모로 보이는 것보다 내면의 아름다움의 가치가 더 중요시하면서 배우자를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가 교회 안에서 결혼했는데,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교회 다닌다는 것만 믿고 결혼했는데, 알고 보니 믿음이 별로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신앙적으로 전혀 통하지 않기 때문에 결혼생활이 불행한 경우를 저는 어렸을 때부터 많이 보아왔습니다.

둘 다 교인이고 둘 다 똑같이 교회 나옵니다. 그래서 남들이 보면 다 집사고 장로고, 둘 다 신실한 크리스챤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면 부인은 날마다 남편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남편을 신실한 집사로 볼지 모르겠지만, 신령한 그리스도인인 부인이 볼 때는 저 사람이 real 크리스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real 크리스챤이 되어야 되겠다는 욕구조차도 못 느끼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깐 교회는 나오는데, 직장생활하고, 가정생활을 해나가는 사고방식이 전혀 신앙적이 아닌 것입니다. 그 사이에서 아내는 괴리를 느끼고 괴로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쪽이 신앙이 없으면, 그 결혼은 결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신령한 두 크리스챤이 만나 결혼했을 때를 상상해보십시오. 그 가정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서로 신앙생활의 아픔을 나누고, 서로 상담해주고, 도와주고 기도해주고, 그리고 교회를 함께 사랑하고, 함께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 아파하고, 그러면서 합심해서 주와 복음을 위해 충성하는 그 가정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진정한 결합이고, 정말 아름다운 연합 아닙니까? 그래서 청교도들은 결혼 하는 것 자체를 뜨겁게 사랑하는 연인을 만난다는 개념보다는 일평생 함께 걸어갈 신앙의 동지를 만난다는 개념으로 결혼에 접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연합이 우리의 결혼의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깐 다른 조건은 다 양보하더라도 신앙이 신실한 real 크리스챤을 배우자로 찾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아니면 최소한 real 크리스챤이 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을 구하십시오. 이왕 결혼하는 것 극상품 포도나무를 구하십시오. 왜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을, 같지 않은 사람하고 결혼해서 죽도록 고생합니까? 기왕이면 극상품 포도나무를 구하십시오.
그런데 자기는 불에 던져 마땅한 쭉정이 이면서 내 신랑은 극상품을 달라고 하면 그것도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극상품을 쭉정이가 만나면 감당 못합니다. 매일 새벽기도가자고 하면 감당하겠습니까? 매일 가정 예배드리자고 하고, 성경 공부시키고, 또 교회 지을 때마가 집 팔자고 하면 감당하겠습니까?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고 그리워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이 신앙적인 열심을 가지고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을 해서 끼리끼리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뭐가 되지 않겠습니까?

5. 연애결혼? 중매결혼?
그러면 마지막으로 결혼을 어떤 방법으로 할 것인지를 살펴보고 마치겠습니다. 결혼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연애결혼이 있고, 중매결혼이 있습니다. 옛날에도 그러했지만, 사람들마다 다 연애결혼을 꿈꾸는데, 그러나 성경적으로 보나, 경험적으로 보나 중매결혼이 훨씬 좋은 것입니다. 왜 연애결혼보다도 중매결혼이 나은 것이냐 하면 3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콩깍지의 위험성이 적다.
여성들이 사랑에 빠지면 눈에 콩깍지가 쓰입니다. 눈이 가는 것이죠. 그래서 뭐라 하느냐 하면, 터프하데.. 자기는 터프한 게 좋데요. 그래서 시집가서 맨 날 맞는 것입니다. 너무 터프하니깐, “가져와, 안 가져와?” 막 뭐가 날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그때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을 연애해서 하면 정말 운 좋게 좋은 사람 만나서 잘하면 90점이지만, 콩깍지를 써서 잘 못해서 40점 이하도 안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그런데 중매를 하면, 결혼 업체나 마담뚜가 해주는 중매 말고, 양쪽을 다 알고 있는 목회자나 교회 어른들이 판단해서, 그렇게 해서 맺어주면 못해도 80점 이상은 나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두 남녀가 콩깍지가 씨인 상태에서 서로를 들여다보는 것보다는 객관적인 상태에서, 바깥에서, 그들이 걸어온 길을 알고 판단하는 그 판단이 훨씬 더 정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중매하는 것이 매우 긍정적이고 좋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신앙의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실제로 제가 다녔던 교회에서 제 동기 두 명이 서로 공개 연애했는데, 몇 년을 사귀다가 결국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그 두 사람 다 시험 들고, 다른 형제자매들도 시험에 들고, 그래서 결국 그 두 사람 다 교회를 다른 데로 옮겨야 했고, 교회도 여러 가지로 상처를 입고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자유로운 연애를 허용하게 되면, 여기저기서 사귀다가 깨어지고 교회를 떠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교회가 아주 연애장이 되어서 혼잡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자기 마음대로 사귀고 헤어지고 하지 못하도록 그런 것들을 통제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매결혼 방법이 그 교회의 문화로 틀이 딱 잡혀 있으면, 그러한 난잡한 연애들을 통제할 수 있게 되고, 중매한 후에 설사 깨어지더라도 그것을 비밀로 붙이기 때문에 훨씬 그 피해나 파급효과를 최소화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같은 개혁신학을 추구하는 사람과 만나도록 하기 위해서
교회 다닌다고 해서, 신앙이 좋다고 해서 다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다닌다는 것은 똑같은데 생각은 완전히 다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한 사람은 말씀 중심적인 개혁신학을 추구하는데, 한 사람은 불건전한 영성개념을 가지고 있어서 매일 불 받으러 가자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두 사람이 대화가 통하겠습니까? 거기서 어떤 신앙적이고 정신적인 연합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 다닌다고 신앙이 뜨겁다고 다 만날 것이 아니라, 그 형제나 자매가 어떤 신학을 가지고 어떤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그 형제나 자매가 다니는 교회의 가르침은 어떠한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그것을 확인하고서 같은 신학을 추구하는 형제자매들끼리 맺어주면, 그 가정이 더욱 사상의 일치를 이루고 나뉨 없이 합심하여 교회를 섬길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혼할 때는 꼭 목회자의 지도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신앙적인 손해를 보지 않고 할 수 있는 좋은 길입니다. 그냥 아무 때나 이 사람 저 사람한테 접근해서 “나한테 시집올래?” 그렇게 하지 말고..., 그렇게 하면, 아무한테나 찝쩍대는 사람으로 소문나서 아무도 안 오게 됩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목사님 찾아와서 “저.. 요즘 결혼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데, 혹시 좋은 자매 있으면 한 번 소개시켜주십시오.” 라든지 “기도 하다보니깐 아무개 자매가 마음에 드는데 목사님 어떻습니까?” 하면서 찾아오십시오. 부끄러워하지 말고 찾아오십시오. 물론 이때 중요한 것은 찾아오기 전에 기도 많이 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결혼 하겠다는 마음 자세가 딱 자리 잡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정욕을 좇아서 자기 좋아하는 사람 딱 정해놓고 와서 “나 이 사람 아니면 안 된다.” 그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그 사람이 좋을지 모르지만, 상대방은 자기를 싫어할 수도 있는 것이고, 또는 서로 좋아한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호감을 갖는 것은 괜찮지만,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언제라도 포기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자기 정욕을 좇아서 결혼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많이 하고, 목회자를 찾아와서 “기도하면서 이 자매가 마음에 드는데 목사님 어떻습니까?” 하면, 그러면 목회자는 “알았다. 그래 기도해보자.” 그리고 판단을 합니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그 둘이 잘 어울리는지, 판단을 하고, 기도도 하면서, “아~ 그럴 수도 있겠다” 판단이 서면, 이번에는 그 자매를 불러서, “혹시 결혼하도록 하나님이 인도하시면 시집 갈 의향이 있냐?” 물어봅니다. 그 자매가 그럴 의향이 있다고 하면, “그러면 좋은 형제 주시도록 기도해볼래? 마음에 드는 형제가 있냐?” 특별히 마음에 두고 있는 형제가 없다고 하면, 그것이 확인되면, 이제 주님의 인도하심을 잘 보면서 기도하는 가운데, 마음의 결심이 서면, 목회자가 그 두 사람을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찍었다기보다는 그냥 만나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나보고 아니다 싶으면 정리하면 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어서 서로 확신이 들면, 본격적으로 사귀고, 그래서 결혼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중매로 만나서 연애하고 결혼하면, 교회도 평안하고, 그 결혼이 대체로 행복한 결혼이 됩니다. 우리 교회에도 그렇게 해서 크게 문제된 커플이 없습니다. 물론 중매결혼이 절대적인 법은 아닙니다. 그것을 율법으로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에서는 그것을 좋은 전통이라고 생각하고 장려하며, 우리 교회의 문화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내에서는 “자유연애”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좋은 결혼 문화가 한국교회 내에서는 마치 이단처럼 비쳐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통일교처럼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그것이 교회가 신학을 모르고 교회사를 모르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사를 공부해보면, 이러한 문화는 초대교회 때부터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요한의 직계 제자였던 초대교부인 이그나티우스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결혼할 남녀는 감독의 인준 하에서 연합을 이루셔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결혼이 하나님에 따라 이행되고 자신들의 욕심에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따라 모든 것을 행합시다.”(라은성 교수, “초대교회사”,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목회자의 지도를 받아야 그것이 자신의 정욕을 좇아 하지 않게 된다고 하여, 초대교회 때부터 중매결혼이 교회의 문화로 딱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것이 성경적으로도 어느 정도 지지를 받습니다. 이삭의 경우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결혼한 경우인데요, 아브라함의 종이 나가서 좋은 자매를 데려오면, 이삭은 그것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믿고 아멘으로 순종한 것입니다. 자매를 고르는데, 이삭이 전혀 관여한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가장 이상적인 결혼방법입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막 고르려고 하고, 그래서 내 기준에 안 맞으면 잘라내 버리고, 그렇게 하는 것은 사실은 자기 정욕을 따라 결혼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경우가 그러했죠. 야곱은 자기 마음으로 연애해서 자기가 마음에 드는 사람과 결혼한 경우인데, 물론 그렇게 해서 하는 결혼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만,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그 인생이 야곱처럼 꼬일 가능성이 아주 많습니다.  물론 연애결혼 한다고 해서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도하심보다는 내 정욕을 좇아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이성 교제할 때 더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결혼을 할 때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시고, 특히 다른 교회는 몰라도 우리 교회에서는 꼭 목회자의 지도를 받아서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께서 정말 그 사람에게 합당한 형제, 합당한 자매를 붙여주실 줄 믿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 가지를 말씀드렸는데, 결론은 단순합니다. 결혼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을 정말 믿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주님의 사랑 때문에 자기의 죄악된 본성을 부인하고 주님께 헌신하고픈 마음이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건입니다. 그래야, 자신의 정욕과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명을 위해서, 그리고 결혼의 소명을 가지고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배우자를 선택하여 주님이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결혼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오늘 강설이 매우 도전적이고, 또 직설적이어서 여러분의 마음을 무겁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마음에서부터 반발심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하는 성경적인 결혼관입니다. 그러니깐 오늘 강설을 마음에 새기고 성경적인 결혼관을 가지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결혼을 하기 위해 애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이 성경적인 결혼관을 가지고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대로 결혼해서, 정말 은혜가 넘치고 행복이 넘치는 그런 결혼을 하고 결혼생활을 해나가시는 모든 중고등부 청년부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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