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말씀

목적. 목표에 대하여

열려라 에바다 2022. 6. 5. 08:21

목적. 목표에 대하여        

 

목적

 

 무엇을 위해서 뛰었나?

옛날에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개 한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개가 특별히 자랑하는 것은, 자기가 아주 잘 달리는 선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개가 토끼 한 마리를 쫓아갔는데 그만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대 망신이었습니다. 다른 개들이 마구 놀렸습니다.

그러자 그 개의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자네들이 알아야 할 것은 그 토끼는 목숨을 위해서 뛰었고, 나는 그냥 저녁 식사거리를 위해서 뛰었다는 점일세!"

 

      알래스카의 값어치

 북아메리카 서북쪽에 있는 넓은 알래스카 주는 1867년까지는 러시아의 땅이었다. 그런데 러시아는 알래스카를 별로 가치가 없는 땅으로 여겨 720만 달러를 받고 미국에다 팔아 넘겼다.

 미국은 알래스카를 산 지 13년 만에 무려 3억 달러 어치의 황금이 묻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땅속에 3억 달러 어치의 황금이 묻혀 있는 것을 모르고 당장에 손에 쥘 수 있는 720만 달러에 유혹된 것이다.

 더구나 오늘날에는 금 못지않게 귀중한 석유와 천연가스가 엄청나게 땅 밑에 저장되어 있다는 것은 숨겨진 미국의 보화로 온 세계가 다 아는 사실이다.

 눈앞에 있는 것, 현실적인 것에만 착념하여 살다가 영원한 값진 보화를 잃어버리고 후회할 우매자의 삶이 이러하다.

 

 

       인생의 의미

 헤밍웨이가 쓴 "노인과 바다"를 보면, 노인이 바다에서 고기 한 마리를 잡기 위해 온갖 고생을 합니다. 그러면서 무엇 때문에 이 고기를 잡아야 하며 이 고기가 자신과는 무슨 원수가 있기에 이렇게 해야만 하는가 가만히 생각을 해 봅니다. 고기는 노인 자신을 원수인 줄로 생각하겠지만 노인은 사실 그 고기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노인은 힘도 없고, 고기를 잡아도 노인이 먹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노인은 고기가 걸렸으니까 그 고기를 잡았습니다. 굉장히 큰 고기였습니다. 그것을 끌고 뭍으로 나올 때 상어 떼들이 와서 다 뜯어 먹고 노인은 지쳐 쓰러지고 맙니다. 결과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모르면 아무리 부지런히 살고 열심히 살아도 이와 같이 결과는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존재의 목적

 목적론적으로 말할 때 모든 것은 다 존재의 목적이 있습니다. 이 볼펜도 전화기도 시계도 다 저 혼자 보기 좋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이 있어서 만들어졌고 또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 존재의 목적은 물건전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을 만든 사람의 어떤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시계는 자기 혼자 뱅글뱅글 돌아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시간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도 먹고 자고 일하고 자식 낳는 것이 존재의 목적이 아닙니다.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때에 진정한 행복과 만족이 있는 것입니다.

 이 목적에서 어긋날 때 혹은 알지 못할 때 아무리 명예와 재산을 다 소유했다고 해도 참 만족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치고 자기에게 만족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몇 년 전에 제가 어느 교회에서 청년들을 위한 세미나를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청년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난 뒤 그들의 질문을 받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때 어떤 청년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지금 재수생입니다. 그래서 고민이 많습니다. 독서실에 가서 공부를 하고 있노라면 제가 맡고 있는 교회 일에 소홀히 하는 것 같아 갈등이 생깁니다. 또 교회에 나와서 일을 하고 있노라면 공부를 해야 한다는 강박감 때문에 안절부절못하게 됩니다. 오늘도 특강을 한다고 해서 여기에 참석하기는 했지만 사실 공부 때문에 걱정이 됩니다. 목사님. 저와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당신은 이 재수생의 고민에 동정이 갑니까. 그 청년이 공부하는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에 두고 있다면 하나님의 일이 따로 있고 공부가 따로 있다는 사고방식에 빠져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날 저는 그 청년에게 주일성수하면서 공부에 최선을 다하라고 충고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대학에 들어가겠다는 사람이 자꾸 시험에 떨어지는 것도 주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공부한다면 그것은 분명 주님의 일입니다.

 

 

 

                 목표

 

     목표가 있는 삶

 여러분이 잘 아시는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농촌에서 태어나 16세에 디트로이트로 가 유명한 토마스 에디슨이 세운 회사의 직공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헨리 포드는 점점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그가 한번은 에디슨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에디슨에게 한 가지만 질문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가솔린이 기계를 돌릴 수 있는 힘을 낼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을 들은 에디슨은 두말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소." 포드는 에디슨의 이 한마디 대답에 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자동차 엔진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1년이 지나고 2년,3년이 지났으나 실패했습니다. 다시 5년,6년이 지났으나 또 실패했습니다. 7년,8년이 지나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13년 만에 헨리 포드는 자동차 엔진을 만들고야 말았습니다.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아무리 실패의 난관이 있다고 할지라도 목표를 이룰 때까지 좌절하지 않습니다. 꾸준히 목표를 향해 달려갑니다.

 

      변치 않음에 목표를 두고

 어떤 소년이 서울에서 공부하다가 방학이 되어 농촌에 돌아왔다. 아버지가 땀을 흘리며 밭을 가시는 것을 보고 그것을 도와드릴 생각이 났다. 소년은 소를 몰고 밭을 갈았다. 서투른 쟁기질로 한참 갈다보니 아버지가 간 밭의 고랑은 똑바르나 자기가 간 고랑은 구부러졌다. 아버지는 이것을 보고 [처음 보습 질을 할 때는 앞에 목표를 세우고 나아가야 똑바로 갈 수가 있다]고 하셨다. 소년은 그 말씀을 마땅히 여겨서 둑에 누워 풀을 뜯고 있는 황소에 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역시 고랑은 똑바르지가 않았다. 아버지는 [황소가 자꾸 움직이니까 너의 고랑도 구부러지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것에 목표를 두어라.]고 하셨다.

 소년은 앞에 우뚝 솟은 포프라 나무에 목표를 두고 밭을 갈았더니 비로소 똑바로 갈 수가 있었다. 여기에 세 가지 인생관이 있다. 하나는 목표 없는 데카당스. 그리고 환경에 따라 목표가 변하는 상황윤리, 마지막으로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신앙의 태도이다.

 

       용강 올꾼

 평안도 사람들의 우스갯소리 가운데 소위 "용강 올꾼"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한 익살이다. 옛날 평양에 올꾼이 있었다.

 그는 전연 생각할 줄 모르고 행동할 줄만 아는 머저리였다. 어떻게 보면 선량하고 어떻게 보면 바보이다. 주인이 그를 불러서 "애, 내일 아침에 일찍이 용강에 좀 다녀와야겠다"고 분부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주인이 심부름을 시키려고 올꾼을 찾으니 온 데 간 데가 없었다. 점심때쯤 되어서야 올꾼이 나타났다. "너 이놈, 심부름 갔다 오라고 부탁하였는데 어딜 갔었느냐?"고 주인이 책망하였다. "저 용강 갔다 왔는뎁쇼"라고 말하였다. 그는 왜 용강에 갔다 와야 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하지 못했다. 주인이 갔다 와야 한다기에 그냥 갔다 온 것뿐이었다. 왜 그런 행동을 하여야 하느냐의 이유도 모르면서 행동을 앞세우는 이가 있다면 역시 용강 올꾼보다 나을 것이 없다.

 

      인생의 침 목표

 1923년 시카고의 에지와트 비치 호텔에 당시 미국 최대 부호였던 9명이 자리를 같이했을 때 미국의 대표적인 신문들이 '20세기의 신화'라고 보도했습니다. 그때는 황금만능 시기였습니다. 그들은 돈만 번 것이 아니라 큰 회사의 사장들이었기 때문에 교육도 많이 받았고 명성도 있는 성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 표준으로 볼 때 스타이고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25년 후인 1948년에 그들이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하나는 미치고 셋은 파산해서 빚에 쫓겨 도피 생활을 하다 죽었으며 둘은 출옥해서 자살 직전 있었고 셋은 자살했습니다. 한 사람도 행복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인생의 궁극 목표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애의 기로 어디에선가 주님의 내게로 오라는 음성을 거부하고 다른 것을 목표로 삼아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유명한 사람들이 인생의 목표를 잃어버리고 비참한 최후를 마쳤거나 허무주의로 살고 있습니다. 동양 최대의 성자이고 인도인의 태양이었던 간디도 죽기 전에 자신은 괴로운 사람이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습니다. 부지런히 뛰어보았지만 그것은 궁극의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난 사람은 창녀가 되었든지 세리가 되었든지 구두닦이가 되었든지 간에 자기의 길을 또박또박 걸어갈 줄 압니다.

푯대가 있고 초점이 있고 목표가 있습니다. 우리는 목표가 있는, 인생의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예화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벌레 앞에 기도한 청교도들의 기적  (0) 2022.06.13
봉사에 대하여  (0) 2022.06.13
눈물에 대하여  (0) 2022.06.03
기도에 대한 예화 104편 모음  (0) 2022.06.03
지옥에 이르는 길 위의 장애물  (0) 2022.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