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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시각에서 본 우리말 성경번역의 역사

열려라 에바다 2022. 7. 12. 07:59

바른 시각에서 본 우리말 성경번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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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시각에 대한 이해

성경을 번역한다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기록하고 보존하고 있는 책이기에, 성경을 번역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는 연장선상에 있다. 성경을 잘못 번역하게 되면, 원래의 말씀의 부분을 삭제하거나 첨가하거나 다른 의미로 변질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데,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번역하지 않는 편이 낫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자칫 살아있는 말씀을 담은 성경을 죽은 종교지식을 담은 경전으로 전락시키게 되고, 그 결과 수많은 영혼들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자체에서도 그같은 행위를 철저히 금하여, 말씀에서 첨가하게 되면 성경에 기록된 모든 재앙이 그 사람에게 더해질 것이며, 삭제하게 되면 아예 생명책에서 그의 부분을 제거해 버리겠다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계시록 22:18,19).

 

번역한다는 것은 옮기는 것(translating)이다. 한 언어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런 가감없이 순수하게 다른 언어로 옮기려면, 최소한 세 가지 요건을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

 

첫째, 말씀을 옮기는 사람이 거듭난 성도일 뿐 아니라, 말씀을 바르게 분간할 수 있는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어야 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신실하고 정직한 인격의 소유자라야 한다.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natural man)은 아무리 박식한 학자일지라도 결코 성경을 번역하게 해서는 안된다. 영적인 일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영과 생명으로서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겠으며,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 말씀을 제대로 번역할 수 있겠는가?

 

둘째, 번역의 대본으로 사용한 성경 자체가 바른 것이어야 한다. 이미 첨삭되고 변질된 성경을 가지고 아무리 잘 번역한다 해도 순수한 성경으로 복원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바른 성경이라 함은 초대교회 이후 지금까지 신실한 크리스천들과 참 교회들이 지키고 보존해 온 순수한 성경을 말하는데, 바로 안티오크 라인의 킹 제임스 성경이 그것이다.

 

따라서 킹 제임스 성경 이외에 알렉산드리아 사본계열(아프리카의 오리겐이 변개한 거짓성경의 사본)에 속한 그리스어 성경 혹은 거기서 번역한 역본들을 가지고 번역한 것은 결코 바른 성경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세째, 번역하는 방법도 중요하다. 철저히 정확하게 그리고 신실하게 번역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기 때문에, 번역하는 방법도 정확하고 철저한 것이라야 한다. 흔히들 정확하고 철저히 번역하는 것을 "직역"이라 부르는데, 그렇다고 그 의미가 기계적으로 "형식일치"를 시킨다는 것은 아니다. 형식일치의 번역은 직역이 아니라 사실상 오역이다.

 

그렇다고 "의역"을 한다는 것은 성경의 경우엔 더더욱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의역"이나 "자의적 번역"은 옮기는 행위가 아니라 창작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유진 나이다의 번역이론은 부패한 이론이다.

 

성경번역에서 "직역"(直譯)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런 손상 없이 충실하게 그대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형식일치도 의역도 아닌 "정역"(正譯)이다. 곧 말씀을 한 자도 빠트리지 않고, 말씀을 한 자도 첨가하지 않으면서, 의미도 통하고 흐름도 일치하게 번역하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각(mind)을 알지 못하고서는 그와같은 직역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거듭난 영을 소유한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영님(the Spirit of God)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바른 성경 번역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는 것이다(1Corinthians 2:9-12).

 

이제 성경번역의 최소한의 요건인 이러한 기준들을 가지고 우리말 성경번역의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비록 지면의 제한으로 요점중심의 정리가 되겠지만, 독자 제위께서 "바른 눈"을 가지고 읽으신다면, 과연 우리말 성경 번역이 지금껏 바르게 되어왔는지를 판단하실 수 있을 것이며, 앞으로 어떻게 되어져야 할지도 알게 되시리라 믿는다. 우리말 성경번역의 역사가 몇 번에 걸쳐 연재되기 때문에, 항상 이 세 가지 기준을 기억하고 있으면 이해에 큰 도움이 되시리라 믿는다. 세 가지 기준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드린다:

"누가 번역하였나?"

"무슨 대본(臺本)을 사용하였나?"

"어떻게 번역하였나?"

물론, 우리말 성경번역의 역사를 정리하려면 객관적이고도 진실한 자료들이 필수적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불행히도 충분한 자료들이 남아있지 않은데다, 그나마도 편향되어 있음을 본다. 인간의 역사란 항상 기득권 세력에 의하여 기록되기 때문에, 기득권 세력에 유리하게 편향될 소지가 상존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진정한 역사란 기록 안에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알려진 역사가 있는가 하면 알려지지 않은 역사가 있고, 드러난 역사가 있는가 하면 감춰진 역사가 있으며, 보이는 역사가 있는가 하면 보이지 않는 역사도 있는 법이다. 역사의 진실은 어쩌면 알려지지 않았고, 감춰졌으며, 보이지 않는 역사 속에 간직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어쨋든 우리는 지금 알려진 역사를 통해서만 진실을 헤아릴 수밖에 없는 한계 속에 살고 있기에, 역사의 이면을 들여다 볼 줄 아는 예리한 시각과 깊은 통찰력만이 바른 진실에 근접하는 최선책이 될 것이다. 그럴진대 우리말 성경번역의 역사도 기존의 알려지고 해석되어진 역사를 맹목적으로 수용하고 답습하는 데 그쳐서는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차라리 기존 역사를 바른 시각으로 재조명해 보고, 거기에 따른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것이 훨씬 현명할 것이다.

우리말 성경번역의 효시

처음으로 우리말 성경을 번역한 사람은 존 로스(John Ross)로서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United Presbyterian Church)에서 북중국과 만주로 파송한 선교사였다. 그는 함께 파송되어 온 매킨타이어(J. MacIntyre)와 함께 만주에 온 한국인들에게 선교하다가, 최초의 우리말 성경을 번역하게 되었다.

 

즉, 세례(sprinkle)를 가르치는 장로교 선교사에 의해 최초의 우리말 성경이 번역된 것이었다. 이 말은 우리말 성경의 역사가 유럽에서 성경을 지키기 위해 수 천만 명이 순교한 역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가령 유럽의 경우는 주로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밥티슴(baptism, 침례)을 지키다가 대부분 순교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적어도 밥티슴 때문에 순교할만한 이유는 처음부터 없었다는 얘기다.

 

어쨋든 존 로스는 동만주·두만강 유역까지 와서 한국인들과 접촉하며 선교하다가 1876년부터 한국인 청년 이응찬(李應贊)을 만나게 되었다. 몰락 양반 출신으로 한약장사차 만주에 왔다가 배가 난파되어 만주 우장 지방에 있던 선교사 로스의 보호를 받게 된 이응찬은 그 때부터 로스의 한국어 선생이 되었다. 로스는 이응찬에게 한국어를 배운지 일년만인 1877년에 영문으로 「한국어 첫걸음」(Corean Primer)을 내기도 했으며, 이응찬의 도움을 받아가며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이응찬으로서는 내키지 않은 일이었으나 '밥벌이'였기에 마지 못해 성경번역에 가담하였다(「빛과 소금」'93. 1월호 66쪽 우측상단 3째줄). 그 후에도 로스는 이익세를 비롯해서 이성하, 김진기, 백홍준 같은 젊은이들을 만주에서 만나게 되었고, 1878년경에는 인삼장사차 온 서상륜(徐相崙)을 만나게 되었다.

 

한문에 능숙한 서상륜은 로스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의주 청년들 및 김청송과 함께 성서번역과 출판에 힘쓴 나머지 1882년에 만주 심양(봉천)에서 「예수셩교누가복음젼서」, 「예수셩교요안내(요한)복음젼서」등 두 권을 출판하였고, 1883년에는 「사도행전」을 번역 발간하였으며, 마침내 1887년에는 신약성경 전체를 「예수셩교전서」란 표제로 출판하였다. 이것이 현재까지 우리말 성경번역의 효시로 알려진 소위 "로스역"이다.

 

존 로스가 1882년 본국에 보낸 선교보고서에 따르면, "로스역"에 사용된 대본은 주로 영국의 개역본(RV, Revised Version)이었고, 알포드(Alford)의 그리스어 성경은 참조만 하였다. 번역방법은, 한국인 번역자가 중국의 한문성경을 한글로 번역한 다음, 그 원고를 그리스어 성경 및 영어역본과 대조하여 수정하였는데, 문자적 번역보다는 의미 중심으로 번역하였고 한국어의 관용구를 그대로 살렸다고 했다.

 

즉 직역 대신에 의역을 택한 것이다. 또 주석을 참조하였는데 주로 마이어(Meyer)의 주석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United Presbyterian Missionary Record, July 1. 1882).

 

우리말 성경번역의 첫걸음은 이렇게 내디뎌졌다. 외국 선교사에 의해 외국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순수한 성경을 대본으로 하여 순수한 믿음의 사람들에 의해 번역되지 못했다는 사실은 우리를 가슴아프게 한다.

 

마리아 숭배자인 웨스트콧트 및 호르트의 그리스어 성경에 기초하여 킹 제임스 성경을 대대적으로 개역해 버린, 영국의 개역본(RV, Revised Version)을 대본(臺本)으로 삼았다는 사실부터가 그러하거니와, 직역 대신 의역을 번역원칙으로 택했다는 사실, 그리고 주님의 명령(commandments)인 밥티슴과 주님의 만찬조차 세례와 성례전으로 바꾸어서 지키는 사람들에 의해 번역되었다는 사실도 뭔가 석연치 않은 아쉬움을 남긴다.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채운 식이 된 우리말 성경번역, 우리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무엇을 했고, 또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우리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이수정역과 고유명사의 음역표기

우리말 성경번역에 있어 아직까지도 뚜렷한 기준을 설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고유명사의 표기법 문제다. 물론 한글맞춤법 통일안에서도 아직까지 외래어 표기법 기준을 통일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긴 하지만, 우리글의 발전 보급에 있어 우리말 성경들이 미친 절대적 영향을 감안해 볼 때, 우리말 성경들의 책임이 사뭇 크다 하겠다. 사실 외래어의 인명, 지명 등의 고유명사 표기에 있어 가장 큰 혼란을 야기시킨 것은 "개역한글"이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령 일반 교과서에서 '이집트'로 번역되어 있는 것이 개역한글에는 '애굽'(천주교에선 '애급'으로 표기)으로 되어 있어 전혀 다른 도시로 착각되는가 하면, 로마 황제인 '케사르'가 개역한글에서는 '가이사'로, 일반 교과서에는 '시이저'로 표기되어 한 사람이 세 사람으로 둔갑하는 등 심각한 혼란을 빚고 있다.

 

개역한글의 표기법이 일관성 없이 혼란스럽게 된 원인은 당시 한국인 번역자들이 "음역"(transliteration)의 원칙에 대해 무지한 탓도 있지만, 중국 한자성경의 표기법에 따라가 버린 사대주의 정신 때문이기도 했다.

 

스페인이 서바나로, 페르시아가 바사로 번역된 것이라든지, 주님의 존함이 '야소'로 되었다가 '예수'로 변천한 것, 밥티슴(baptism)이 세례(洗禮)로 표기된 것 등은 순전히 중국 한자성경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말 성경역사에 있어 고유명사를 비교적 정확히 표기한 매우 독특한 성경이 있었는데, 바로 "이수정역"이 그것이다. 당시 이수정은 1882년 우리나라 수신사로 일본에 간 박영효의 일행이었는데, 로스역에 동참했던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과는 달리 일본 수신사로 파송될 만큼 사회적 지위도 있었고, 지적 수준도 높았다.

 

이수정은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기에 앞서 1884년에 한국사람이 우선 한문성경이라도 읽을 수 있도록 한문성경에 토를 단 「현토한한신약성서」(懸吐漢韓新約聖書)를 출간했고, 그 이듬해인 1885년에는 「신약마가젼복음셔언○」를 출간했다.

 

「언○」란 당시 '언문'이라 불려진 한글로 한문을 풀이했다는 것이며, 이는 최초의 국한문성경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한글을 언문(諺文) 즉 저속한 글이라고 부른 반면 한문자는 진서(眞書) 즉 참글이라고 하였고, 한문은 사대부(士大夫)의 글인 데 반해 언문은 하층민의 글이요, 쉬워서 여자들도 할 수 있는 글이라 생가하여 천대하였었다.

 

이수정이 "언○"를 출간했던 것은 성경이 지식인이나 양반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일반 대중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수정역인 「신약마가젼복음셔언○」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고유명사 표기법이었다. 지금까지 우리말 성경들의 대부분이 중국의 한자표기에 의존했던 것과는 달리, 이수정역은 "고유명사의 음역표기 원칙"을 그대로 적용한 최초의 우리말 성경이 되었다.

 

"음역"(transliteration)이란 "원천어의 발음 그대로를 수용어에서 최대한 가깝게 옮기는 것" 즉 소리나는 그대로 번역하는 것을 말하며, 인명, 지명 등의 고유명사는 원래 음역을 원칙으로 하게 되어 있다.

 

고유명사란 지구상에 단 하나 있는 것을 말하며, 따라서 고유명사는 나라와 언어에 따라 달라져서는 안되기 때문에 음역을 원칙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수정역이 이같은 음역의 원칙에 따라서 고유명사를 표기해 주었다.

 

이수정역은 「언○」의 성격이므로 문장에서는 우리말을 혼용하였고 한자에는 우리글로 음을 달았는데, 특히 고유명사나 우리말에 해당된 어휘가 없는 경우에는 한자 표기에다 그리스어 원어 발음을 우리말로 적었다. 가령 「耶蘇基督」에는 「예슈쓰 크리슈도스」를, 「耶路散冷」에는 「예루샬넴」을, 「洗禮」에는 「밥테슈마」를 달았다.

 

어쩌면 이같은 음역의 표기방식이 일본어 성경에서 영향을 받은 것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일본어 성경이 바른 음역의 원칙을 살렸다면 바른 표기인 이상 본받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일례로, 중국어 성경에서 "밥티슴"(baptism)을 "세례"(洗禮)로 표기한 것은 전적으로 그릇된 것이므로 따라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원래 중국어 성경을 번역한 선교사들이 "유아세례"(baby sprinkling)를 신봉하던 자들이었는데, 중국 한자어에서 정확한 해당어가 없다는 이유를 들면서, 밥티슴을 중국 토속신앙의 "정결례" 개념으로 토착화시켜 "세례"(洗禮)로 표기한 것이었다.

 

반면 일본어 성경에서는 이 경우에 킹 제임스 성경을 비롯한 영어 성경들이 음역을 해준 사실을 알고는 자기들도 음역을 하여 "밥티스마"로 표기하였다. 이수정역이 "밥테슈마"로 표기한 것은 일본어 성경을 따랐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바른 표기법인 음역의 원칙을 따른 것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반면, 이수정역을 제외한 다른 모든 한글성경들이 한결같이 "세례"로 표기하고 있는 것은, 명백한 오류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어 성경을 그대로 따른 사대주의의 소치로밖에는 볼 수 없다.

 

생각해 보라. 주님의 지상명령(至上命令)의 첫 항목(Mat. 28:19)에 나타나 있는 "밥티슴"을 주님께서 명하신 적이 없는 "세례"로 바꿔버린 것이 어찌 적은 일이겠는가! 더욱이 밥티슴하는 것과 세례를 주는 것이 전혀 다른 종류의 것임을 우리는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이같이 음역표기의 원칙을 무시함으로써 주님의 명령이 달라질 수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거나 빼거나 바꿔버리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 한국 교회는 뒤늦게나마 크게 각성해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말 성경들이 고유명사의 표기법에 있어 이수정역의 경우처럼 처음부터 "음역"의 원칙을 철저히 따랐다면, 오늘날과 같은 고유명사 표기의 대혼란은 야기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예는 우리 주님의 존함에 대한 것이다. 왜 우리말 성경들은 주님의 존함을 굳이 "예수"로 표기해야 했는가? 고유명사 중에서도 인명표기는 더더욱 음역의 원칙을 철저히 따라야 하는데, 잘못하면 이름이 바뀜으로써 사람이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의 인명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존함을 왜 정확히 표기하지 않는 것인가? 원래 하나님의 존함은 우리 인간들이 함부로 부를 수 없는 거룩하고도 죄인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이었다(Ex. 20:7).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면서 그분의 존함을 우리가 부를 수 있도록 계시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스"(JESUS)란 존함이었다(Mat. 1:21).

 

성경 전체에서 우리가 부를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존함이 곧 "예수스"다.

 

구원받은 크리스천들에게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존함 "예수스"는 처음 그리스어로 기록될 때부터 "예수스"(○○○○○ - '헬라어')였고,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세계 어느곳에서나 그분의 존함은 동일하게 "예수스"로 불리워져 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분의 존함은 변치 않을 것이다. 간혹 민족과 언어에 따라 고유명사의 어미변화로 인해 끝이 약간씩 달라진 경우가 있었지만(그리스어도 어미변화가 있다), 그래도 주님의 존함은 정확히 발음하는 것이 바른 것이다.

 

영어의 경우에도 원래 킹 제임스 성경이 처음 나올 때에는 "예수스"(IESUS)로 발음되었는데, 후에 'I'가 'J'로 바뀌면서 발음도 달라져 오늘날엔 "지저스"로 발음되고 있다. 표기는 바른데 발음습성이 달라진 것이다.

 

적어도 주님의 존함에 있어서 킹 제임스 성경의 표기는 정확하지만, 오늘날 영미인들의 발음인 '지저스'는 바르지 않다고 본다. 주님의 존함이 어느 잘난 민족의 발음습성 때문에 달라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존함을 잘못 발음하다보니 다른 인명, 지명도 틀리게 발음할 수밖에 없다.

 

가령, 유다스(Judas)를 주다스로 예루살렘(Jerusalem)을 제루살렘으로, 요세프(Joseph)도 조세프로, 요한(John)도 존으로, 요르단(Jordan)도 조르단으로 발음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발음을 잘못한다고 해서 킹 제임스 성경이 잘못된 것은 결코 아니다.

 

킹 제임스 성경의 표기는 여전히 정확하며 전혀 하자가 없다. 다만 현대의 영미인이 잘못 발음하고 있을 뿐이다. 어쨌든 이수정역에서는 우리 주님의 존함도 비교적 정확히 "예슈쓰"로 표기하였는데, 이는 음역의 원칙에 충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수정역을 제외한 모든 우리말 성경들은 왜 한결같이 "예수"로 표기하고 있는가? 그것은 중국어 성경이 "야소"(耶蘇)로 표기한 것을 그대로 따라서 "야소"로 표기하였다가 후에 "예수"로 바뀐 것이었다. 어차피 한번 바꿀바엔 정확하고 바르게 "예수스"로 할 것이지 왜 굳이 "예수"로 했단 말인가.

 

관용으로 굳어진 것을 존중하고 거부감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던가? 그럴바엔 처음부터 바르게 표기하면 될 것을. 그리고 이제라도 바르게 표기해야 후손들에게 면목이라도 있을게 아니겠는가. 더더구나 거룩한 주님의 존함을 말이다.

 

이수정역은 고유명사를 음역의 원칙에 충실하게 바르게 표기한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을 만하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본문까지 바르다는 얘기는 아니다. 단지 고유명사 표기를 음역의 원칙에 따른 것이 잘한 일이란 말이다.

 

우리나라 개신교의 첫 선교사로 알려져 있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1885년 4월 5일 인천에 상륙할 때, 그들은 일본에서 번역한 이수정역을 가지고 들어왔다. 이 두 선교사는 후에 이수정역이 언어상, 신학상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대폭적으로 수정한 「마가의 젼○복음서언○」를 내 놓았다.

 

그러나 미국성서공회 본부에서는 그들이 이수정역을 대본으로 삼아 번역한 것에 불만을 표시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성경번역을 위한 공식기구로서 번역위원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선교사가 입국한지 8년만인 1893년에 우리말 성경번역을 위한 상설성경실행위원회(常設聖經實行委員會, The Permanent Executive Committee)와 그 산하기구인 성경번역자회(聖經飜譯者會, The Board of Official Translators)가 조직되었다.

펜위익과 만민됴흔긔별

우리나라에 들어온 외국 선교사들 중에서 로마 카톨릭의 혼합주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은 선교사로서 화란의 침례교 선교사인 말콤 펜위익(Malcom C. Fenwick)을 들 수 있다. 그는 세례 대신 침례(浸禮)를 가르쳤을 뿐 아니라, 성직계 제도에서 볼 때 일개 평신도로서 교회개척의 사역을 감당하였으며, 교단의 입장보다는 성경대로 선교하려고 시도한 매우 이례적인 선교사였다.

 

펜위익은 1889년 12월에 내한하여 1898년에는 주한 외국 선교사들을 총망라하여 조직된 "성경번역위원회"의 부회장이 되었다. 그러나 펜위익을 제외한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세례"(洗禮) 표기를 강행하고자 하고 토착화 신학에 따른 혼합주의적 성경번역을 밀어부치게 되자, 펜위익은 동 번역위원회를 탈퇴하여 독자적인 성경번역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1899년에 요한복음젼과 비립비인서(빌립보서)를 번역 출판하여 배포하였고, 1917년에는 신약성경 "만민됴흔긔별"을 출판하기에 이르렀는데, 그의 활동지역이 원산을 중심으로 하여 만주, 시베리아, 몽고에 이르렀으므로 그가 번역한 신약전서를 "원산역"이라고도 부른다.

 

펜위익의 원산역은 대부분 기존 성경번역위원회에서 결정한 번역원칙에 따랐지만 몇 가지는 독특하고 참신하게 번역한 특징을 갖고 있다: "세례"(洗禮) 대신 "침례"(浸禮)로 표기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킹 제임스 성경의 "Holy Ghost"를 "성신"(聖神)이나 성령(聖靈)으로 하지 않고 "셩숨님"으로 표기하였으며, 대문자로 시작되는 "Spirit"은 "숨님"으로 소문자로 시작되는 "spirit"은 "숨"으로 한 것 등은 실로 획기적인 것이었다.

 

존대법에 있어서도 주님께 대한 존대어를 비교적 잘 반영했다는 점에서 다른 한글성경과의 차별성을 갖는다. 가령 마태복음 4장 1절부터 11절까지에서 다른 한글성경들이 죄다 마귀가 주님께 반말을 한 것으로 번역해 놓았으나 펜위익역만은 "태○님○셔 하나님의 아○ 되시거던(태자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시거든)…"으로 번역하여 마귀조차도 주님을 알아보았기에 함부로 반말을 할 수 없었음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또한 주님의 존함을 "예수씨"로, 크리스트님을 "긔독"(기독)으로 표기한 것도 독특하다.

 

하지만 펜위익조차 원본주의 및 알렉산드리아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그의 원산역은 알렉산드리아 원문을 대본으로 하되, 킹 제임스 성경의 본문이 확실하다고 믿어지는 부분들은 임의로 첨가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가령 마가 1:1; 누가 23:42; 로마 14:10; 요일 5:7; 계시록 22:14 등은 알렉산드리아의 변질된 원문에 그대로 따른 반면, 마태 6:13; 요한 1:18; 사도 8:37; 딤전 3:16; 계시록 22:19 등은 킹 제임스 성경의 본문에 따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공인번역위원회와 구역

우선 공인(公認)이란 말의 의미부터 규명할 필요가 있다. 만일 개인역이 아니고 위원회에 의한 번역이라서 "공인"이란 말을 붙인 것이라면, 언제든지 위원회만 조직하면 "공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되므로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영성서공회(British & Foreign Bible Society)나 미국성서공회(American Bible Society)가 인정해 주어서 "공인"이란 말인가?

 

혹은 대한성서공회(Korean Bible Society)의 번역이면 공인이 되는가? 그같은 기관들이 현대주의 학자들로 구성된 알렉산드리아 기관이고, 바티칸의 지시와 결정을 따르는 에큐메니칼 기관이라도 상관없이 말인가?

 

분명한 것은 적어도 성경에 관한한, 권위를 인정해 줄 수 있는 자격은 크리스트님과 교회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예수스 크리스트님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는 로마 카톨릭도 그리스 정교회도 아니고 개신교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에 의해 핍박을 당해오면서 기독교계의 스크린 뒤에 가려진 채 조용히 일반 대중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무리 가운데 참 교회가 존속해 왔다. 참교회의 특징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만을 최종권위로 믿으며, 성경 말씀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그리고 킹 제임스 성경이 출간되어 일반 대중 속에 보급되자, 그 성경의 최종권위를 인정하여 "권위역본"(the Authorized Version)이란 타이틀을 붙여준 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일반 대중 속에 존재하는 주님께서 친히 세우신 "참 교회들"이 그 권위를 인정하느냐이지, 위원회나 기관의 공인 같은 것은 사실상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어쨌든 공인역의 시초로 알려진 구역(舊譯)은 신약이 1889년-1900년에 번역 완료되고 수정보완을 거쳐 1906년에 간행되었으며, 구약은 1904년-1910년에 번역이 끝나 1911년에 출판되었다.

 

번역자들로서는 신약이 미국 북장로회 소속의 언더우드, 게일, 레이놀즈, 미국 북감리회 소속의 아펜셀라, 스크렌톤, 성공회 소속의 트롤롭 등의 선교사들과 한국인으로서는 최 병헌, 조 한규, 정 동명, 이 창식, 김 명준, 홍 준 등이 참여하였고, 구약은 레이놀즈, 언더우드, 게일 등의 선교사들과 이 승두, 김 정삼 등의 한국인이 참여하였다.

 

혹자는 구역의 대본으로 킹 제임스 성경이 사용된 것으로 알지만 사실과 다르다(실제로 쥬영흠 박사는 「성서번역의 바른 진로」, 한국성서번역회의, 예수교대한성경교회출판부, 1976년, 156쪽에서 '구역은 영어 흠정역<AV>과 중국어역에서 중역한 것'이라 주장했다.). 구역 한글이 번역에 사용한 원어성경은 신약의 경우 정확히 웨스트콧트, 호르트가 킹 제임스 성경을 대항하려고 만든 그리스어 성경(네슬 25판과 동일)이었고, 영어 번역본으로는 RV(The Revised Version, 영국의 개역본)와 ASV(The American Standard Version, 미국표준역본)를 대본으로 사용하였다. 특히 'LORD'를 '여호와'로 번역한 것은 ASV의 영향이었다. 그리고 한국인 역자들은 원어지식이 없으므로 주로 중국어 성경(아마도 대표자역본)과 일본어 성경을 참조하여 우리말로 다듬는 작업을 하였다.

 

구역이 킹 제임스 성경에서 중역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몇 가지 사례만 살펴보아도 바로 알 수 있다: 마태복음 10:1에서 킹 제임스 성경의 "unclean spirits"가 구역에서는 "더러운 귀신"으로 번역되었고, 누가복음 23:42의 "Lord"가 "예수여"로 번역되었으며, 사도행전 12:4의 "Easter"가 "유월졀"로, 로마서 14:10의 "the judgement seat of Christ"가 "하○님의 심판○"(하나님의 심판대)로, 계시록 22:19의 "the book of life"가 "○명 나무"(생명나무)로 번역되었을 뿐 아니라 디모데전서 3:16에서는 "하나님"이 삭제되어 버렸는가 하면 계시록 22:14의 "do his commandments"(그분의 명령들을 행하는)가 "그 옷을 씨슨"으로 번역되는 등 변질된 알렉산드리아 본문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간혹 요한복음 3:36이나 사도행전 8:37 등 몇몇 부분들이 킹 제임스 본문과 일치하게 된 것은 한국인 역자들이 중국어 성경에 맞추면서 되어진 결과일 뿐 그것이 구역이 킹 제임스 성경에서 번역되었다는 증거는 결코 아니다. 그리고 이같은 중국어 성경 및 일본어 성경의 영향으로 간접적으로나마 반영된 킹 제임스 본문의 영향은 후에 개역 한글판에 와서 그나마도 제거되어 버렸다.

일반언어와 성경언어

언어에 대한 학문적 업적을 우리는 지나치게 과신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만큼 이성주의에 세뇌되어 있다는 증거다. 아무리 그럴듯한 이론들이 즐비할지라도, 언어학은 결코 이성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 더군다나 언어를 만들고 다스리며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언어학은 철저히 배제하고 있다.

 

가령 바벨 탑 이전의 인류의 언어가 하나였음을 언어학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천사들의 언어와 하늘의 언어를 언어학이 어찌 이해조차 할 수 있겠는가? 사도행전의 오순절 사건은 언어가 혼잡된 이래 처음으로 다른 언어를 가진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서로 통하게 된 사건이었는데, 언어학은 이 역사적 사건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일반적으로 언어란 인간의 사상과 행동, 생활방식이 변하면서 덩달아 변천하는 것이라 한다. 그것은 그만큼 인간이 변하고 있다는 증거인데, 인간의 변화는 회전하는 것이어서 새것이 옛것이 되고 옛것이 새것이 되는 변화라 할 수 있다(해 아래 새것이란 없다.).

 

누가 말하였듯이 "제로 섬 소사이어티"(zero sum society)처럼 인간의 변화와 발전은 전부 합계해 보면 아무것도 아닌 "허무"로 마감된다. 언어의 변화도 마찬가지다. 현재의 언어적 발달은 마지막에 가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마감될 것이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언어로 다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어의 역사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오래참으심과 긍휼의 증거다.

 

바벨 탑 사건 당시,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 때 인류를 심판하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노아와의 약속을 기억하시고 인류에 대한 무궁한 인내력을 발휘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단지 언어를 혼잡게 하는 정도로 그치셨다. 바벨 탑 이후 혼잡케 된 인간 언어는 심판을 유보하고 인간을 낮추사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한 특별조치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의 언어발달은 심판과 함께 마감될 것이며, 바벨 탑 이후부터 심판 때까지의 인간언어는 제 역할이 끝나게 되면 당연히 "무"(無)로 돌아가야 마땅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기간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보존한 성경기록을 인류에게 주셨는데, 이는 한시적 언어역사 속에서의 특별한 배려와 섭리인 것이다.

 

일반언어는 심판 때까지 회전적으로 변화 발전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보존된 말씀인 성경을 주시기 위해 언어 가운데 특별히 섭리하셨다. 즉 한시적이고 불완전한 언어 역사 속에서도 "성경언어"를 택하셔서 영원히 변치않는 성경을 주시고자 조치하신 것이다.

 

일반언어는 인간이 변함에 따라 변한다. 인간의 사상, 행동, 습관 및 생활방식이 바뀌면서 언어도 덩달아 변천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언어 만큼은 다르다. 성경언어는 하나님의 특별배려에 의한 특별섭리에 해당되므로 일반언어처럼 인간이 변화한다고 덩달아 변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언어는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언어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별하시고 선택하시는 언어이며, 그만큼 그것은 말씀을 맡은 민족과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갖게 된다.

 

처음 히브리 민족이 말씀 맡은 자로 선택되었을 때, 히브리 민족의 언어인 히브리어가 성경언어가 되었다. 성경에 관한 한 히브리인의 선택은 곧 히브리어의 선택이었고, 히브리어의 선택은 곧 히브리 민족의 선택을 의미했다. 히브리어가 최초의 성경언어가 된 이후 히브리어는 천년 이상 변치 않는 언어가 되었다.

 

그러나 히브리인의 배도로 히브리어 성경시대가 마감되자 곧이어 히브리어는 죽은 언어가 되고 말았다. 그리스(헬라) 민족이 히브리 민족에 이어 이방인 가운데 처음으로 택함을 받았다. 첫째는 유다인이요 또한 그리스인(헬라인)이었다(Rom. 1:16).

 

히브리인 곧 이스라엘 민족의 배도로 히브리어 성경시대가 마감되자, 그리스인의 그리스어(헬라어)가 새롭게 말씀을 담는 성경언어로 선택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어는 원어시대인 히브리어 시대를 마감하고 역본시대를 새롭게 여는 개막언어였고, 구유언의 시대 곧 이스라엘 시대를 마감하고 신유언의 시대 곧 교회시대를 여는 개막언어였음에 유의해야 한다. 개막언어였기에 그리스어(헬라어) 시대는 너무 짧았고, 곧바로 라틴어 시대로 이어졌다.

 

역본시대가 개막되면서 그리스어에서 곧바로 라틴어 성경시대로 이어졌고, 라틴어가 비잔틴 제국 시대 천년 동안 성경언어로 사용되었다.

 

드디어 영어시대가 도래하였는데, 영어는 성경언어의 마감부분에 해당되는 언어로서 영어의 킹 제임스 성경이 등장하면서 성경언어가 마무리되었고, 역본시대가 마감되었으며, 최종권위가 완성을 보게 되었다. 히브리인의 원본시대가 마감된 이래로 이방인의 첫 교회인 안티오크 교회에 의해 "역본시대"가 열렸는데, 그 시작은 그리스어(헬라어)였고, 중간에 라틴어 시대를 거쳐 최종적으로 영어가 마지막 성경언어로 선택된 것이었다.

원본시대와 역본시대

흔히들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원어라 하고 이 두 언어로 기록된 성경의 본문을 원본이라 말한다. 그리고 원본이 가장 권위있고 역본은 이차적 권위를 갖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적어도 히브리어 시대에는 그러했었다. 히브리어는 선택된 히브리 민족의 언어였기에 이스라엘 민족이 이방인의 언어로 성경을 기록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리스어로 번역했다고 하는 소위 70인역이 거짓 성경임은 여기서도 판명된다.

 

히브리어 시대에는 히브리어 원본 혹은 사본 외에 역본을 결코 허용치 않는 시대였다. 그러나 교회시대가 개막되면서 이방인의 첫 교회인 안티오크 교회에서부터 역본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안티오크 교회에서부터 시작되어 역본시대의 물꼬가 터진 것이었다. 수많은 역본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하나님과 교회가 인정한 역본은 둘이었고, 마지막에 가선 하나였다.

 

참 성경의 역사는 원본시대와 역본시대로 구분되며, 원본시대는 히브리인의 히브리어 시대로 막을 내렸고, 역본시대는 그리스어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라틴어 시대를 거쳐 영어시대로 이어졌다. 원본시대에 원어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자격은 이스라엘이었지만, 역본시대로 넘어오면서 그 권위는 주님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에게 부여되었다.

 

그리고 교회시대에 주님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들로부터 최종적으로 권위를 인정받은 성경은 유일하게 "권위역본"(Authorized Version)인 킹 제임스 성경이었고, 이로써 역본시대는 완성을 보았다. 교회시대에 참 교회들로부터 영어의 킹 제임스 성경이 최종권위를 인정받게 되자, 이전의 성경언어들은 사어(死語, the dead language)가 되고 말았다.

 

킹 제임스 성경이 출간되어 나오자, 이전의 모든 성경들, 심지어는 구 라틴어 성경과 제네바 성경까지도 제치고 오로지 킹 제임스 성경만을 권위역본(A.V.)으로 인정한 것은 황제도, 추밀원도, 주교회의도, 학자들도, 성서공회도 아니었고, 개신교 지도자들도 아니었다.

 

일반 대중 속에 살아 숨쉬고 있었던 참 교회들이 그 권위를 인정해 주었던 것이다. 세상은 그들을 알아주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오직 그들만을 인정하셨다. 참으로 놀라운 진실은 "참 교회들이 인정한 성경이 참 성경이고, 참 성경의 기초 위에 있는 교회가 참 교회"라는 것이다. 이 두 개의 상호기준 외에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할 수 있는 기준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영적 분별력을 가진 자들은 잘 알고 있다.

성경개정 혹은 개역은 정당행위인가

변덕스런 인간과는 달리 성경은 결코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배역한 인류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특별배려와 긍휼에 의해 성경이 주어졌는데, 그 성경은 놀랍게도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신비롭게도 불완전한 인간언어로 기록되었으면서도 완전하고 무오류한 것이었다. 불완전한 인간언어였기에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가 있었고, 마치 불완전한 인간들 중에서 말씀 맡는 거룩한 민족을 선택하셨듯이, 불완전한 언어들 중에서도 거룩한 성경언어를 선택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믿는다면, 성경은 결코 개정되거나 개역될 수 없는 책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우리의 시야는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성경을 주신 전과정을 훑어보면서 그분의 긍휼과 심판을 이해하는 데 고정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히브리어 원어시대에는 개정이나 개역은 고사하고 역본조차도 허용되지 않았지만, 교회시대로 넘어오면서 역본시대가 개막되었고, 역본시대는 최종적으로 "권위역본"(A.V.)으로 마감되어 완성되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주님의 교회들이 인정한 단 하나의 역본인 킹 제임스 성경만이 유일한 권위역본으로 드러난 지금, 다른 어떤 역본일지라도 하나님과 교회가 인정한 적이 없는 불법임을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더더구나 개정이나 개역은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강도행위임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만 한다.

개역(改譯), 공인(公認)이라는 두 불법의 역사

성경개역 혹은 개정이라는 불법 행위를 공공연히 자행한 최초의 장본인은 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의 플라톤 철학 신봉자 아다만티우스 오리겐(Adamantius Origen, A.D. 184-254) 이었다. 우리 주님을 피조물로 격하시킨 오리겐이 플라톤의 혼합주의 기법을 성경에도 적용한 이유는 기독교와 철학을 접목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

 

안티오크 크리스천들이 전해준 순수한 성경을 플라톤 철학으로 난도질하여 만든 오리겐의 "헥사플라"(Hexapla)라는 성경은 후에 콘스탄틴 황제의 심복 유세비우스에 의해 재편집되어 로마 제국의 "공인성경"으로 인정받았고, 로마제국의 "종교통합"을 위한 최초의 "에큐메니칼 성경"이 되었다. 오늘날 가장 오래된 사본이라고 하는 "시내사본"과 "바티칸 사본"도 바로 그 에큐메니칼 성경의 사본이다.

 

꼭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가장 오래된(最古) 사본이 가장 권위있다는 가설은 적어도 성경의 경우에는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가장 오래되었다는 것은 오히려 일반인들에게 사용되지도 않은채 로마 황제들에 의해서만 잘 보관되어 온 로마 카톨릭 공인의 에큐메니칼 성서임을 반증해 주기 때문이다.

 

진짜 성경은 크리스천들이 닳아지도록 애용하였기에, 자연히 초기 필사본들은 닳아 없어지고 주로 후기 필사본들이 남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경우는 가짜일수록 초기의 것이 많고, 진짜일수록 후기의 것이 많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역본시대의 주역인 안티오크 교회가 구 라틴어 성경(구 라틴 벌게이트, A.D. 120-150)을 번역하여 온천하에 보급하자, 로마 카톨릭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배도자 제롬을 시켜 개역 라틴 벌게이트(Revised Latin Vulgate), 즉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A.D. 405)를 만들어냈다. 바로 이 성경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로마 카톨릭의 공인성경으로 인정했다.

 

마침내 역본시대의 최종권위인 권위역본(A.V.1611) 즉 킹 제임스 성경이 등장하게 되자, 로마 카톨릭의 예수회는 마리아 숭배자인 영국의 웨스트콧트와 호르트를 이용하여 킹 제임스 성경을 개역해 버린 개역본(Revised Version)을 만들어냈고, 미국에서도 이에 발맞추어 미국표준역본(American Standard Version)을 비롯해 RSV, NASV, NIV 등 수많은 개역성경들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같은 불법적인 개역성경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예수회에서는 예수회의 수하에 있는 알렉산드리아 학자들을 주축으로 하여 성경 "공인기관들"을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대영성서공회(British & Foreign Bible Society)와 미국성서공회(American Bible Society)를 비롯하여 전세계적인 조직망을 갖춘 연합성서공회(United Bible Society, 혹은 세계성서공회연합회)가 그 대표적인 예다. 한국의 "대한성서공회"(Korean Bible Society)도 그 한 조직에 속한다.

 

이들 기관들의 역할은 로마 카톨릭과 예수회의 음모로 발행된 모든 불법적인 개역성경들에 "공인"(公認)이란 불법적인 타이틀을 붙여서 무지한 일반대중들로부터 공신력을 얻게 만드는 일과, WCC, WEF 등의 에큐메니칼 조직들 및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대학들, 신학교들, 학자 조직들 등과 긴밀한 협조체제를 유지하면서 에큐메니칼 운동의 기초를 다지는 일이었다.

 

이들 성서공회들이 바티칸 에큐메니칼 센터(교회일치 진흥국)로부터 직접, 간접으로 통제를 받고 있음은 물론이다. 가령 미국성서공회에서 찍어내는 모든 성경들(카톨릭 성서들과 개역성경들, 심지어는 킹 제임스 성경까지)은 바티칸의 출판허가인 "임프리마튜어"(Imprimatur)를 받아야 출판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대한성서공회가 1967년 12월 새번역 신약성경을 내놓고 나서, 당연히 연이어 출간해야 할 새번역 구약 번역계획을 돌연 취소한채, 1968년 1월과 1969년 1월에 공동번역위원회를 조직한 다음, 마침내 1977년 부활절에 신, 구교 연합으로 "공동번역 성서"를 내놓게 된 그 저변의 이유는 바티칸 에큐메니칼 센터의 지시 때문이었다.

 

1965년 제2 바티칸 공의회에서 채택된 "에큐메니칼 선언"이 발효되면서, 바티칸 에큐메니칼 센터(교회일치 진흥국)에서는 연합성서공회(UBS, 세계성서공회연합회)에 에큐메니칼 성경인 공동번역 성서(The Common bible)를 만들도록 지시했고, 대한성서공회(K.B.S.)도 이 지시에 따라 그들의 계획을 돌연 수정해야 했던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성서공회같은 예큐메니칼 기관이나 학자들의 조직이 성경을 공인(公認)한다는 것은 명백한 불법이라는 사실이다. 성경을 공인할 자격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이스라엘 민족"과 "주님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에게만 부여되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처음에는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그후 주님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에게 맡기신 적은 있었어도, 성서공회나 학자들에게 맡기신 적은 전혀 없다.

 

이제 교회시대인 오늘날에 성경을 공인하고 성경의 권위를 인정할 수 있는 유일한 자격자가 주님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뿐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 교회가 로마 카톨릭과 같은 혼합주의 음녀교회가 아님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오히려 로마 카톨릭의 혹독한 핍박을 받으면서도 일반 대중 속에 묻혀 지내며 이름없이 역사의 무대 뒤에서 줄기차게 존속해 온 모든 안티오크의 계승자들이 바로 그 교회이며, 킹 제임스 성경에 "권위역본"(The Authorized Version of The Bible)이란 유일무이한 타이틀을 붙여준 장본인도 바로 그 교회였던 것이다.

한글 개역성경의 등장

개역, 공인이라는 두 불법의 탁류가 온 세상을 휩쓸고 있는 동안, 우리나라에서도 처음으로 "개역"(改譯)이라는 이름이 성경에 적용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개역"이라는 용어는 세계적 흐름과는 의미상에 다소 차이가 있었다. 원래 "개역"이란 말은 주로 "킹 제임스 성경"을 개역했다는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비록 "의미는 다르더라도" 일단 "개역"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세계적 추세에 발맞추려 한 것이었다.

 

우리의 경우 비록 "구역"을 개역했다고 해서 "개역 한글"이라 칭했지만, "구역"이 킹 제임스 성경에서 번역한 것이 아닌 이상, 취지는 비슷해도 의미는 다른 것이었다. 어쨋든 온 세상이 "개역 한파"로 떠들석한 와중에서 우리나라에서도 "개역 한글성경"이 등장하였고, 의미는 달랐어도 결과적으로 세계적 배도의 흐름에 합류한 셈이 되었다.

 

성경개역의 더러운 물을 한반도에 퍼뜨린 자들은 대영성서공회(British & Foreign Bible Society)와 미국성서공회(American Bible Society)의 원격조종을 받는 선교사들과 그들을 분별없이 추종한 한국인 신학자들이었다.

 

한글 개역작업에 참여한 자들로서는 구약개역에 장로교, 감리교 소속 선교사들인 언더우드, 게일, 레이놀즈, 케이블, 엥겔, 베어드, 하디, 피터스 등과 한국인으로서는 남궁혁, 김관식, 김인준 등이었고, 신약개역에도 역시 장로교, 감리교 소속의 스톡스, 윈, 커닝햄, 로스, 크레인, 남궁혁 등이 참여하였다. 당시 미국의 장로교와 감리교는 현대주의 진화론 신학의 대두로 전반적으로 심각한 분열을 겪고 있었는데, 주로 킹 제임스 성경을 고수하는 자들을 근본주의자로 몰아 교단으로부터 축출하는 일이 대대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이는 미국에 뿌리내리고 있던 아나밥티스트들의 후예들에 대해 위협을 느껴온 바티칸이 대이민정책으로 유럽의 현대주의 알렉산드리아 학자들을 대거 미국으로 이주시키면서 야기된 일로서, 1910년경부터 이미 바른 성경신앙의 기초 위에 세워졌었던 대학들이 현대주의(자연주의 혹은 자유주의)의 급류에 하나 둘씩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가령 처음 하버드가 무너지자 프린스톤이 분리해 나갔고, 얼마 안되어 프린스톤도 무너지자, 웨스트민스터가 분리해 나갔으며, 곧이어 웨스트민스터도 무너져내리고 말았으며 대부분 그런 식이었다. 교단의 지도자들 중에서도 근본주의 신앙을 가진 것으로 판명되면 대부분 물러나야 했고, 특히 근본주의 신앙을 가지고서 해외 선교사로 인준받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런 판국에 한국에 선교사로 온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들이 대부분 순수한 성경신앙을 타협하고 현대주의 신학사상과 알렉산드리아 원본주의에 익숙한 자들이었음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비록 보수적 성향을 띤 선교사들도 없지 않았지만, 적어도 순수한 성경신앙을 견지한 아나밥티스트들의 후예는 그들 중에 하나도 없었다.

 

그들과 함께 개역작업에 참여했던 한국인 목사들(남궁혁, 김관식, 김인준 등) 역시 미국에서 오염된 신학교육에 세뇌되어 돌아온 자들이 전부였다. 가령 김관식은 프린스턴에서 공부하였는데, 그가 공부할 당시 프린스턴은 이미 현대주의에 오염된 신학교였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개역한글의 번역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 1611판 킹 제임스 성경의 권위를 바르게 알고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 모두는 밥티슴의 명령조차 유아세례로 바꿔 지키는 자들이었고 이성주의, 학문제일주의의 알렉산드리아 이데올로기에 철저히 세뇌된 자들로서, 혼합주의 복음과 토착화 신앙과 변질되고 개역된 성경을 이 땅에 퍼뜨리기에 적합한 자들일 뿐이었다.

한글 개역성경의 아이러니

한국의 교회들 가운데 한글 개역성경이 차지해 온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었으며, 그 권위는 독보적이었다. 비록 한글 개역성경에 사용된 대본이 변질되고 첨삭된 알렉산드리아 사본 계열의 네슬 25판이었고, 숱한 오역과, 자의적 번역, 문법과 맞춤법 및 띄어쓰기의 오류 등으로 점철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에서는 영어의 킹 제임스 성경만큼이나 권위있게 여겨져 온 것이 사실이다. 왜 그랬을까?

 

한글 개역성경을 펴낸 대한성서공회가 그토록 미더워서 였을까? 정작 대한성서공회에서는 이미 1960년에 한글 개역성경을 폐기하고 새로운 번역을 내놓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혹은 한글 개역성경이 우리 민족의 정서에 맞게 장중하고 권위있는 문어체와 위엄있는 스타일로 번역됨으로써 "보수성"을 고무시키고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내서 였을까?

 

아마도 그같은 보수성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되었기에, 대한성서공회가 개역성경을 새번역, 공동번역같은 현대주의적 성경으로 대체하려고 그렇게도 안간힘을 쏟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쨋든 한글 개역성경에 얽힌 기막힌 아이러니와 복잡미묘한 모순성은 한국의 교회들 가운데서 차지하는 그 대단한 영향력 만큼이나 우리의 비상한 주목을 끄는 관건임에 틀림이 없다.

한글 개역성경은 어떻게 번역되었나

한글 개역성경이 사용한 대본으로서는 구약의 경우 마소라 원문과 칠십인 역이었고, 신약의 경우는 네슬 25판이었다. 그러나 당시 번역자들 중 원어와 영어를 잘 알지 못하던 우리 나라 사람들은 한문 성경이나 일본어 역 성서를 저본(底本, Vorlagen)으로 사용하였고, 선교사들도 히브리어, 그리스어 원문을 대본으로 하긴 했지만, 주로 저본으로 사용한 영역 성서들(주로 미국 표준역<ASV>)에 많이 의존하여 번역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엄밀히 말해 한글 개역 성경은 사본상의 계보가 뚜렷하지 못한 '혼합역'이라 할 만큼 대본보다는 저본들이 많이 반영된 특징을 갖고 있는데, 이는 옛 번역인 구역(舊譯)의 경우와 흡사하다.

 

아마 미국 성서공회 측에서 구역이나 개역에 대해 계속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던 근본 이유도 구역이나 개역이 알렉산드리아 본문을 제대로 반영시키지 않은 때문이라 사료된다. 한글 개역이 킹 제임스 성경도 따르지 않고, 그렇다고 알렉산드리아 원문에도 충실하지 않은 증거들은 본문상의 첨가, 삭제, 불일치, 의역, 오역 등에서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 인명, 지명 표기법에 있어서도 주로 한자어 성경과 일본어 성서를 반영한 증거가 뚜렷히 드러나 있다.

 

또 하나 특기할 만한 것은 구역과 개역이 나올 당시 우리말 맞춤법이나 표기법이 커다란 변혁기에 있었다는 점이다. 문제는 성경 번역이 우리말의 형성과 정착에 주도적 역할을 하는 대신 오히려 따로 고립되어 버렸다는 데 있다. 개역의 경우 비록 1956년 판이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따른 수정을 거쳐 최종 결정판으로 출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맞춤법, 시상, 수, 태, 조사, 어휘 및 표기법 상의 숱한 오류와 문제점들을 드러내고 있다.

 

최근 대한성서공회 측은 새로 번역하여 출간한 표준 새번역을 부각시키는 일환으로 기존의 개역성경의 문제점들을 스스로 공표하는 모순을 저지르고 있는데, 그렇다면 먼 훗날 또다시 표준 새번역의 문제점을 스스로 공표하면서 또다른 번역본을 내놓고도 남을 그들이 아니겠는가.

피할 수 없는 증거들

 

한글 개역성경이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이 아니라는 피할 수 없는 증거들이 있다. 우선 한글 개역성경에는 삭제되거나 없는 구절들이 많은데, 가령 신약의 경우 마태 17:21; 18:11; 23:14; 마가 9:44,46; 11:26; 15:48; 누가 17:36; 23:17; 사도행전 8:37 등은 아예 절 전체를 삭제한 다음 (없음)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들이고, 요한일서 5:7 같은 경우는 절 전체를 삭제한 다음 다른 구절의 일부를 잘라서 대신 채운 경우이며, 그 밖에도 문장이나 구, 단어를 삭제한 경우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것을 본다. 생각해 보라. 어떻게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이 '없는 구절'들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애초부터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뒷 구절을 끌어당겨 이어주기라도 해야 성경답지 않겠는가. 아니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과거의 막연한 시점에만 완전한 성경을 주셨고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누더기 성경을 주실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무능하신 분이란 말인가? 오히려 하나님을 그렇게 무능하신 분으로 매도해 버린 모든 성경 비평학자들이야말로 우리가 멀리해야 할 가증하고 버림받은 퇴물들인 것이다!

 

비록 대한성서공회에서 한글 개역성경의 문제점으로서 주로 문법, 맞춤법, 표기법, 표현상의 오류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실상 보다 심각한 것은 본문상의 변개와 오류들이다. 지면의 제한으로 그 중 몇 가지 사례만 들어보겠다: 요한계시록 22:19의 '생명책'을 '생명나무'로 바꿔버린 것은 성경변개에 대한 경고 자체를 변개한 사례로 꼽힌다.

 

베드로전서 3:18의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는 주님의 영이 죽었다가 살리심을 받았다는 의미가 되어 주님의 몸의 부활에 대한 치명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영님에 의해 살아나셨으니"(quickened by the Spirit)가 정확한 본문이다.

 

또한 창세기 3:5의 "신들처럼 되리라"를 "하나님처럼 되리라"로 바꿔 버렸고, 다니엘 3:25의 "하나님의 아드님"을 "신들의 아들"로 바꿔 버렸다. 요한 9:35에서는 "너는 하나님의 아드님을 믿느냐?"를 "네가 인자를 믿느냐"로 바꿔 버렸다. 사도행전 4:27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이 예수스"를 "하나님의 거룩한 종 예수"로 바꿔 버렸다.

 

요한 1:18의 "유일하게 나신 아드님"을 아리우스 본문(여호와의 증인들의 본문)인 "독생하신 하나님"으로 바꿔 버렸다. 로마서 8:1에서는 "육신을 따라 걷지 않고, 영님을 따르는"을 삭제함으로써 육신적인 크리스천들이 스스로 죄없다고 주장하게 만드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요일 1:8,10). 베드로전서 2:2에서 '말씀의 젖'을 '신령한 젖'으로 바꿔 버렸고, "그로 인해 자라게 하려 함이라"(ye may grow thereby)를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로 변개하였다.

 

히브리서 9:15-20에서 '유언'(testament)을 '언약'으로 바꿔 버림으로써 유언으로 얻게 될 상속에 대한 법적 근거를 없애 버렸다. 데살로니가후서 1:7,8에서는 "타오르는 불 속에서"를 7절로 붙임으로써,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적들을 타오르는 불 속에서 보복하신다는 말씀을, 주님께서 불꽃 중에 나타나신다로 변개해 버렸다. 주님을 지옥 불꽃 중에 재림하게 만드는 실로 말도 안되는 성경이 한글 개역인 것이다.

 

그 밖에도 마태 28:19의 성경을 가르치라는 말씀을 '제자를 삼으라'로 번역하였고, 전도서 11:5의 "영의 길을 알지 못한다"를 "바람의 길을 알지 못한다"로 번역하여 '영적 세계에 대한 지식'을 '기상학적 지식'으로 바꿔 버렸으며, 출애굽기 21:22에서는 "그녀의 열매가 그녀로부터 떨어져 나왔으나, 아무 해가 따르지 않았다면"을 "낙태케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으로 변개하여 살인죄인 낙태를 무죄로 만들어 버리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첨삭과 오류들로 점철되어 있는 것이 바로 한글 개역성경인 것이다(보다 자세한 것은 8월 이전에 출간될 예정인 '킹 제임스 성경, 무엇이 다른가'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한글 개역성경과 한국 교회

한글 개역 성경은 분명히 바른 대본에서 번역한 것이 아니다. 부패한 알렉산드리아 원문을 대본으로 하되 그나마 거기에 충실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KJV, ASV, RSV 등과 중국어 성경, 일본어 성서 등의 저본들을 일관성 없이 반영한 혼합적인 번역으로서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더욱이 번역자들 중에는 순수한 믿음, 곧 거듭남과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을 증거할만한 사람을 찾아볼 수 없고, 다 한가지로 알렉산드리아 이성주의, 학문제일주의에 치우친 자들이요, 성경을 타협하고 배도한 자들임을 알 수 있을 따름이다. 그 결과 순수한 말씀의 밝은 진리를 전달하고 영적 세계의 참 맥을 제시하기 보다는, 토착화된 기독교 샤마니즘 체제를 전달하고 성경을 일개 종교 경전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데 기여한 격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 개역성경은 지난 반 세기 동안 한국 교회의 절대무오한 성경처럼 받아들여져 왔고, 예배용으로 전 한국 교회에 거의 독점적으로 애용되어 왔으며, 장중하고 위엄있는 문체로써 뭇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성경으로 자리잡아 왔다.

 

한글 개역성경이 어떻게 한국 교회에 그렇게도 절대적인 성경이 될 수 있었을까? 근자에 도마에 오른 한글 개역성경은 그것을 만들어낸 대한 성서공회에 의해 치부가 드러나고 있고, 그 자체로도 첨삭, 오역, 오류 및 사전에도 없는 어려운 한자 투성이로 인해 신뢰성에 현저히 금이 가고 있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런 성경이 지난 반 세기 동안 한국 교회의 최종권위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었단 말인가.

토착화, 부흥회, 기독교 샤마니즘, 그리고 복음

한국 교회와 한글 개역성경의 신화는 한국의 토착종교인 샤마니즘과 깊은 관련이 있다. 개역성경의 번역자들 특히 선교사들은 로마 카톨릭이 신학교 체제를 통해 퍼뜨린 토착화 신학 사상에 오염된 자들이었다. 그들은 성경의 순수한 개념들을 한국의 토착 종교인 샤마니즘의 개념들을 빌어 번역하였고, 그 결과 개역 성경에서 가르침 받은 우리 한국인들은 무속 신앙을 버리는 대신 오히려 무속 신앙의 개념에 기초한 기독교 교리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 교회가 양적으로 팽창하게 된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이 각종 부흥회들이었는데, 한국 교회의 부흥회는 순수한 말씀으로 인한 변화보다는 무속적 분위기의 감정적, 혼적 엑시타시즘과 축복과 저주신앙으로 특징지워지는 것이었다. 한국적 부흥회의 샤마니즘적 흐름이 공교롭게도 20세기 오순절 운동의 흐름에 자연스레 합류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오순절 운동의 뿌리가 로마 카톨릭의 사도권 계승 교리에서 비롯되어 사도적 은사로서의 표적과 기사들로 대중화된 다음, 에큐메니칼 종교통합 운동과 뉴에이지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은, 그 흐름의 정체가-비록 성령운동으로 미화시켜 놓았을지라도-순수한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리기 위한 신바빌론주의의 대 미혹임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바벨 탑 이후 전 세계에 흩어진 자들에 의해 바빌론 종교의 씨가 각처에 뿌려져 토착종교 혹은 토착신앙을 형성하게 되었고, 한국의 샤마니즘도 같은 씨에서 자란 토착신앙이었기에, 신바빌론주의의 부활을 주도하는 오순절 운동, 뉴에이지 운동과 자연스레 맥을 같이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바빌론주의의 특성이 혼합주의이고, 학문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철학 역시 플라톤 혼합주의에 기초하고 있기에, 한국적 기독교가 토착화 성경에 기초한 기독교 샤마니즘으로 쉽사리 그리고 급속으로 팽창,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같은 한국적 기독교 토양에 순수한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게 된 것은 개역성경 때문이 아니라, 킹 제임스 성경의 직접, 간접적 영향 때문이었다. 한글 개역성경이 출간될 즈음에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 사변이 터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6.25 이후 한국민의 마음이 극도로 가난해져 있을 때 수많은 선교사들과 선교단체들이 우리나라에 물밀듯이 들어왔고, 그들 중에는 킹 제임스 성경의 순수한 복음을 아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물론 참전국 군인들의 영향도 참 복음을 깨우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음을 빼놓을 수 없다.

 

어쨋든 한국 교회는 1960년대를 지나 70, 80년대로 넘어오면서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닌 순수한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진리가 결실을 거두기 시작했다. 분명한 것은 우리 자력으로는 개역 성경을 통해 거듭남의 비결을 터득하지 못했고, 기껏해야 율법적이고 종교적인 신앙에 머물러왔던 것이 사실이다.

 

외국에서 들어온 거듭난 크리스천들의 도움으로, 그리고 한국 교회가 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신진 목회자들로 세대교체를 하면서, 한국의 교회들이 구원의 진리에 대해 점차 눈을 뜨게 되었고, 지금에 와선 구원의 진리가 상당히 보편화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 교회들이 킹 제임스 성경으로 구원의 진리를 확고히 다지게 되었지만, 지금에 와선, 킹 제임스 성경을 버림으로써 점차 복음의 진리마저 인스탄트화, 물질주의화 되고 있듯이, 한국 교회들도 그 전철을 밟게 되지 않을까 우려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기초가 무너지면 언제든지 성경의 진리가 변질되는 것도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다.

한글 개역성경 어떻게 할 것인가

비록 외부의 도움 때문이었다 해도 한국의 거듭난 크리스천들 대부분은 개역 성경으로 복음을 들었고, 지금도 개역 성경의 기초 위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또한 개역성경이 토착화의 영향 때문에 맹목적으로 신봉되어 왔고, 한문역 언해 문체가 발전한 장중한 성서 문체로 인해 권위와 감동을 주어 왔을지라도, 실상은 너무도 부정확하고 오염된 혼합역이었음도 지금에 와선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 해서 개역 성경으로 세워진 것은 무엇이든지 허물어버릴 수만도 없는 것은, 어쨋든 개역 성경 안에도 아직 덜 오염된 진리들이 있을 수 있고, 보존되어 남아있는 진리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개역 성경에서 순수한 말씀과 오염된 말씀, 바른 진리와 변질된 교리등을 낱낱이 가려내고 분별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차라리 지금의 우리 한국 교회에게는 당분간 개역 성경과 영어의 킹 제임스 성경을 일일이 대조하면서 바로잡고 새롭게 정립하는 노력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국의 교회들이 성경의 진실에 눈을 뜨고 회개하며, 모든 거듭난 크리스천들과 교회들이 일치 단결하여 킹 제임스 성경에서의 정확한 번역을 시도하는 일이 시급한 과제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도 바른 성경이 회복되고, 바른 성경에 기초한 바른 믿음, 바른 교회, 바른 크리스천 생활이 확립되도록 주님의 긍휼을 구하자.

한글 개역 그 이후

한글 개역성경이 나온 이후로 50년 이상을 한국 교회는 개역한글성경이 마치 '절대무오한 성경'인 것처럼 가르쳐왔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일반 크리스천들의 뇌리 속에 개역한글성경에 대한 권위의식이 뿌리깊게 형성되어 있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개역한글성경을 내놓은 대한성서공회에서는 이미 1960년도에 개역한글성경을 폐기하고 새로운 번역본을 내 놓을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처음에 그들은 새번역위원회를 조직하여 7년 3개월만인 1967년 12월 『신약전서 새번역』을 출간하였다. 번역진들로는 전경연, 박창환, 김철손, 서기에, 정용섭, 이상호, 박상증 등과 한글 고문으로 한갑수씨가 참여하였다. 그들이 사용한 대본으로는 주로 네슬(Nestle) 제25판과 영국성서공회가 번역자들용으로 펴낸 그리스어 신약성경(알렉산드리아 원문) 이었다.

이례적인 사건

그런데 대한성서공회는 새번역 신약전서에 이어 새번역 구약성서를 계획하지 아니하고, 돌연 개신교와 로마 카톨릭 공동으로 전혀 새로운 성경을 번역하고자 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 배경에는 1965년 로마 카톨릭의 '바티칸 제2공의회'에서 채택한 "에큐메니칼 지침"(종교통합의 일환으로 교회일치란 명분하에 신·구교의 화해를 모색하라는 지침)과 그에 상응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에큐메니칼 성경을 만들고자 한 바티칸의 음모가 있었다.

 

당시 바티칸의 에큐메니칼 센타(교회일치진흥국)는 세계성서공회연합회(U.B.S.)에 에큐메니칼 성경인 공동성경(The Common bible)을 만들도록 지시했고, 대한성서공회(K.B.S.)도 이에 따라 그들의 계획을 돌연 수정해야 했던 것이다. 또한 이미 알렉산드리아 원문이 신·구교 학자들에게 인정받게 된 것(그들은 이것을 TR을 정복한 것으로 표현한다)도 여기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 즈음에 미국성서공회(A.B.S.) 번역부 총무인 유진 나이다(Eugene A. Nida)의 번역이론이 대한성서공회에 도입된 것도 그같은 움직임을 뒷받침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번역이론(formal correspondence와 dynamic equivalence의 원칙)은 한 마디로 "의역"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킹 제임스 성경의 "직역 원칙"을 정면으로 깨트리는 것이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표준새번역에서는 지금까지 구약의 '여호와'로 표기하던 것을 바꾸어 '주 혹은 주님'으로 표기한 것이다. 이는 구역의 구약(1911년)에서 'LORD'를 ASV에 따라 '여호와'로 표기한 이래로 줄곧 '여호와'로만 표기해오던 것을 획기적으로 '주 혹은 주님'으로 바꾸는 것으로, 이는 킹 제임스 성경과 부분적으로나마 일치시켜 주는 일종의 제스쳐인 것 같다.

 

즉, 표준새번역을 명실공히 대부분의 개신교도들로부터 저항없이 받아들이는 대표적인 『에큐메니칼 성서』로 삼고자 하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표준새번역이 사용한 대본이 알렉산드리아 원문일 뿐 아니라 번역실장을 위시한 번역위원들이 대부분 자유주의 신학자와 포스트 모더니즘 신학자라는 점, 그리고 로마 교황의 출판허가이자 주교위원회 출판허가인 소위 '임프라마투르'(Imprimatur)의 통제 하에 있는 세계성서공회연합회 산하의 대한성서공회에서 공인하여 발행한다는 점 등은, 표준새번역이 어떤 형태로 발간되든지 간에 킹 제임스 성경과는 도저히 어울릴 수 없다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마치 옛적에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오리겐의 헥사플라라는 가짜 성경을 유세비우스를 시켜 50권을 복제하여 출간하게 한 다음, 그 성경만을 로마 제국의 "공인성경"으로 삼고 나머지는 금지해 버린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콘스탄틴은 기독교를 위하는 것처럼 에큐메니칼 성서를 만들어 기독교인들의 환심을 사려했지만, 실상 그의 저의는 바른 성경을 제거하려는 것이었기에, 누구든지 바른 성경을 소지하거나 읽는 것이 발각되면, 즉시 체포하여 목을 자르고 압수한 성경은 불태워버렸다. 오늘날도 로마의 하수인들이 에큐메니칼 성서를 만들어 공인성경으로 출간하는 것은, 바른 성경인 킹 제임스 성경을 이 땅에서 영구히 제거하려는 저의를 가지고 있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공동번역의 등장

그리하여 1968년 1월 신·구교 학자들이 중심이 된 공동번역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구약공동번역위원은 김정준(위원장), 정용섭(서기), 문익환, 선종환, 배제민, 최의원 등 6명이었는데 배제민, 최의원은 신·구교 공동으로 번역이 불가능하다고 사퇴하였고, 4명 중에서 번역 실무는 "문익환, 선종완" 두 사람이 담당하였다.

 

신약공동번역위원회는 이듬해인 1969년 1월에 구성되었는데 박창환, 백민관, 허창덕, 정요섭, 김진만, 이근섭 등이 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공동번역에 들어간 외경의 번역에는 백민관, 김진관, 이상호, 이근섭 등이 선정되고 우리말로 다듬는 문장위원으로는 안신영, 김우규, 이현주, 양성우가 선정되었다.

 

번역에 사용된 대본은 세계성서공회연합회에서 발행한 「그리스어 신약성서」와 루돌프 킷텔이 편집한 「히브리어 구약성서」였다. 그리하여 1977년 부활절(이스터의 날)에 신·구약 합본이 출간되었는데, 그들은 스스로 자평하기를 우리나라 성경번역 사상 최초의 의역 또는 자유역이요, 개역한글 이래 40년 만에 나온 '공인된 성경전서'이며, 카톨릭으로서는 최초의 성경전서가 된다고 했다.

 

대한성서공회에서 공동번역을 적극 추진하게 된 것은, 앞으로 개역성경을 대체할 성경으로서의 공동번역성서를 개신교와 로마 카톨릭이 공동으로 사용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즉 에큐메니칼(교회일치와 종교통합) 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밑거름으로서의 에큐메니칼 성경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위에 열거한 번역자들의 대부분은 카톨릭 학자들이며, 개신교 학자들이라야 문익환 목사와 같은 거듭나지 않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었다. 대한성서공회가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들과 로마 카톨릭의 합작으로 만든 성서들을 공인(公認)해 주고 그 외의 것은 모두 사역으로 취급하는 소위 '성서공인기관'(聖書公認機關) 노릇을 하고 있는 동안, 한국의 거듭난 크리스천들과 교회들은 무얼 하고 있었는지 실로 아연실색할 따름이다.

그 밖의 번역판들

 

대한성서공회가 공인한 성서 외에 소위 개인역으로 번역한 성경들 중에도 킹 제임스 성경에서 번역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가령 팀 선교부와 서광문화사(말씀사 전신)에서는 '젊은이여 참삶을'(김의환, 지명관, 한제호, 한철하)이란 로마서를 냈고, 1977년에는 이순한, 김시백, 조무길, 문대규 등의 번역으로 생명의 말씀사에서 '신약 현대인의 성경'을, 이어 1985년에는 '현대인의 성경'이란 책명으로 성경전서를 출간하였다.

 

이 번역은 영어의 '리빙 바이블'(the Living Bible)을 대본으로 사용했는데, 리빙 바이블이라는 성서는 케니스 테일러가 알렉산드리아 원문을 중심으로 번역한 완전 의역 성서로서, 예수스 님의 하나님되심에 손상을 주었을 뿐 아니라 너무 의역이 심해 '현대인의 소설'이라 불러야 할 정도다.

 

그 밖에 말씀사의 표준신약전서(1983), 기독지혜사의 '현대어 성경'(1992) 등 여러 사역들이 있으나, 어쨋든 우리나라 국역 성서 서지 목록에는 킹 제임스 성경에서 번역한 기록이 전무하며, 오로지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거짓 성경들만 번역되어 왔고, 그 외엔 기껏해야 카톨릭 신부들에 의해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에서 부분적인 번역을 시도한 정도가 고작이다.

 

최근에는 이송오씨가 공인원문에서 번역한 새성경을 내놓기도 하였는데(참고 - <새성경/King James Version 한영판 신약>(1991년 7월 10일 발행)), 그는 공인원문을 표준원문이라고 부르기도 하고(이미 학계에서는 네슬 26판을 표준원문이라 부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킹 제임스 성경과 상당한 차이를 가지고 있는 새성경을 한국의 킹 제임스 성경이라고 주장하는 등 많은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다. 더욱이 급히 번역해서인지 의역과 오역도 많고, 판을 거듭할 때마다 상당부분이 이전 판과 달라지기도 하여, 오히려 공인원문과 킹 제임스 성경의 권위를 실추시키게 되지나 않을까 심히 염려되는 점이 많다.

공동번역의 실패와 표준 새번역의 등장

그래도 아직은 한국 개신교 내에 생명이 남아있어서인지 공동번역성서의 음모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공동번역이 나오자 당연히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 성경을 공인성서로 받아들여 지금까지도 그 성서만을 사용하고 있지만, 개신교는 공동번역을 거부하였다.

 

비록 개신교용 공동번역성서에는 외경을 빼는 제스쳐를 써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에 당황한 대한성서공회는 황급히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가장 적절한 대안으로 떠오른 것은 1967년에 신약만 발행했었던 새번역의 구약을 번역하고 최종 보완해서 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중단되었던 계획을 다시 재개한다는 명분도 있었고, 또 새번역 신약전서에 대한 개신교 측의 반응이 대체로 좋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1984년부터 구약 새번역의 번역작업에 착수하였는데, 번역실장으로서는 감신대 교수이며 예루살렘 에큐메니칼 인스티튜트 출신의 민영진씨를 선정하여 대한성서공회 총무로 영입하였고(현재는 김호용 목사가 총무), 그의 주도 하에 강사문, 김의원, 김이곤, 박철우, 손석태, 윤영탁, 이군호, 이양구, 임태수, 정규남 등을 번역위원으로 선정했다. 새번역의 대본으로는 네슬 제26판을 주로 사용하였는데, 학자들이 네슬 제26판을 "표준원문"(the standard text)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에 새번역의 명칭도 『표준새번역』으로 정하였다.

 

드디어 1993년 2월 10일 『표준새번역 성경전서』가 출간되었다. 현재 대한성서공회는 한국 개신교 전 교단이 표준새번역 성경전서를 사용하도록 이미 물밑 교섭을 끝내놓고 있다. 다만 예장 합동측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나서긴 했지만 이미 대세를 바꿔 놓기엔 역부족인 듯하다(가령 합동측은 이사야 53장 3절에서 "acquainted with grief"<슬픔을 익히 아셨다. 킹 제임스 성경>를 표준새번역이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로 번역함으로써 죄 없으신 우리 주님을 고질적인 병자로 만들어 버린 점을 지적해냈다.).

 

표준새번역의 번역실장인 민영진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일정 기간 한국 개신교계는 기존의 개역한글판과 표준새번역을 함께 사용하다가 머지않아 모두 표준새번역만 사용할 것이다." 그의 말을 뒷받침하듯 대한성서공회 측은 앞으로 개역한글판의 개정판을 내 놓아 당분간 표준새번역과 병용하게 한 다음, 결국에 가서는 표준새번역만 사용하게 할 방침임을 밝히고 있다.

한국교회의 수치

이상으로 우리말 성경번역의 역사를 간략히 정리해 보았거니와, 한국 기독교는 처음부터 오염되고 변질된 성경의 기초 위에서 태동했고, 자랐으며, 발전해 왔다. 한 마디로 한국 교회는 "성경 자체를 지키는 것"에 관한 한, 세계에서 가장 수치스런 나라 중의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더욱이 성경 번역의 원칙이나 기조도 의역과 토착화 신학에 기반을 두고 있어서 자의적 번역이 심하고 불교 용어, 유교 용어, 무당 용어 등으로 점철되어 있다. 실로 "성경"(Holy Bible)이란 말을 사용하기조차 합당치 않을 정도로 거룩하지 못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말 성경들인 것이다.

 

생각해 보라, 성경에서 밥티슴(Baptism)을 명령하고 있는데도, 밥티슴 대신 세례를 신봉하는 자가 성경을 번역해도 무방한 것인지? 또한 성경에서 주님의 만찬을 명령하고 있는데도, 오히려 주님의 만찬을 가증한 미사나 성례전으로 바꾸어서 지키는 자들이 성경보존을 책임맡아도 상관이 없는 것인지?

 

종교사학파, 종교다원주의자, 포스트모더니즘 학자에게, 거듭남을 정신적 개혁정도로 아는 자들에게, 주님을 사대성인 정도로 아는 자들에게, 민중운동하는 자들에게, 진화론 신학자들에게, 에큐메니칼(종교일치운동) 신봉자들에게, 과연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맡겨 놓고 안심해도 된다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현실이요 진면목인데도 불구하고, 감히 주님을 사랑하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실로, 거룩하신 주님 앞에 고개를 들 수 없는 수치스럽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 우리 민족이요 한국 교회가 아닌가! 필자는 성경의 진실을 알고나서는 필자를 포함한 우리 민족이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야만인들이라고 느낀 나머지, 주님 앞에서 긍휼을 간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무지한 자가 바로 성경이 말씀하는 어리석은 자요 야만인이기 때문이다(롬 1:14). 우리 주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명령들을 지키라"(If ye love me, keep my commandments., John 14:15, A.V.)고 하셨고, "내가 내 아버님의 명령들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한 것과 같이, 너희가 나의 명령들을 지키면 너희가 내 사랑 안에 거하게 될 것이다"(If ye keep my commandments, ye shall abide in my love; even as I have kept my Father's commandments, and abide in his love., John 15:10, A.V.)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주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처음부터 오염된 오리겐 성경의 기초 위에서 출발하였고, 지금껏 단 한 번도 바른 성경의 기초 위에 서 본 일이 없는 한국 교회가 어떻게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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