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자료

마카비 혁명에서 로마제국 통치까지

열려라 에바다 2022. 7. 22. 11:12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잇는 중간시대 400여 년에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알렉산더가 B.C. 323년에 갑자기 죽자 거대한 헬라제국은 그의 부하 4명에 의해 분할됐다. 이때부터 이스라엘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연이어 셀레우코스 왕조에 약 250년간 지배를 받았다. 지난 호에서는 헬라제국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까지 살펴보았다. 

3)셀루우코스 왕조의 통치시대

셀루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커스 3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정권을 인수받은 후 시리아의 안디옥에서 팔레스타인을 직접 통치했다. 문제는 안티오커스 4세(B.C. 175~163)가 통치하던 때에 일어났다. 안티오커스 4세는 교만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을 신으로 착각하여 ‘신의 현현(顯現)’을 뜻하는 ‘에피파네스’라고 개명하였다.

B.C. 168년에 안티오커스 4세는 애굽을 공격했지만, 대패하고 말았다. 돌아가는 길에 그는 예루살렘에 들어가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했으며,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우스 신에게 돼지머리를 제물로 바치게 했다.

결국, 이것이 마카비 혁명을 일으킨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된다. 유다 마카비는 성전을 청결케 하겠다는 일념으로 셀루우코스 왕조와 투쟁을 벌였다. B.C. 160년 엘리아사 전투에서 마카비가 사망했지만, 그 기세는 멈추지 못했다. 마카비의 형제인 요나단이 뒤를 이어서 혁명을 이끌었고, 요나단은 연이은 승리로 많은 영토를 차지했다. B.C. 153년에 요나단은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였으며 새로운 이스라엘 왕조(하스모니안 왕조)를 세울 기초를 다졌다. 그러나 그도 체포되어 죽고 만다. 또 다른 형제인 시몬이 뒤를 이어 오랜 전쟁 끝에 B.C. 141년 이스라엘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속박에서 벗어나 완전한 정치적 독립을 이루었다. 

4)하스모니안 왕조 시대

셀레우코스 왕조는 유다의 독립을 결국 인정했다. B.C. 63년에 로마가 이스라엘을 점령할 때까지 마카비의 후손들이 독립적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이 왕조를 하스모니안 왕조라고 부르는데, 이는 마카비 왕조의 시조인 ‘아스모네우스’의 이름에서 나온 말이다. 히브리어로는 ‘하스몬’이라고 한다.

하스모니안 왕조는 시몬의 아들인 요한 히루카누스 1세 때 전성기를 누렸다. 그는 남쪽 에돔과 네게브 북부, 욥바와 아스돗 사이의 평야, 사마리아 인근지역, 벧산 계곡과 남부 샤를 지역까지 국경을 넓혔다. 점령한 지역에 살던 유대인들에게는 유대교로 강제 개종하게 했다. 그런데 이때 신약 사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로 대표되는 종파 간 갈등이 심각했다. 서로 주도권을 잡으려고 끝없이 투쟁했다. 특히 이들은 율법관에서 분명한 대조를 이룬다.

바리새파는 후대에 탈무드로 대변되는 구전 율법과 글로 된 모세오경 즉 성문 율법을 모두 성경으로 인정하며 예언자들의 가르침도 성경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사두개파는 오직 모세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했다.

알렉산더 아네우스는 영토를 더 확장했으며 특히 예수께서 탄생할 때 있던 헤롯 대왕의 아버지인 안티파터를 유다 남쪽 이두메 지방의 지방 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B.C. 63년에 폼페이 장군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로마의 통치 시대가 시작됐다. 

5)로마시대

예수께서 탄생하시기 64년 전인 B.C. 64년, 로마의 폼페이 장군이 수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를 정복했다. 1년 후에는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복잡한 왕위 다툼에 개입하여 하스모니안 왕조를 억누른 후 식민지로 삼았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예수께서 탄생했고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열두 제자를 길렀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구원 사역을 완성하셨다.

 

마카비혁명 하스몬왕조

 

독립 유다 시대는 외세에서 독립하기 위한 혁명 운동 시대와 독립 왕조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1) 마카비 혁명 시대 (B.C. 166-143)

2) 하스몬 왕조 시대 (B.C. 142-63)

 

- 독립유다 시대는 셀류쿠스 왕조가 유대 지역을 헬라화하려고 하자 반대하여 일어난 유대인의 독립운동에서 시작되었다.

-> 약 23년 간의 혁명 기간을 마치고, 유대인들이 정치적으로 독립하여 하스몬 왕조를 세우고 난 이후에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점령당한 B.C. 166-63년까지의 약 100년 기간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 이 시기는 신약 시대에서 발견하는 바와 같이 정치적 성향이 매우 강한 유대교 분파들이 생겨난 때라고 할 수 있다.

 

- 이 시대에 대해서는 신약 성경에는 거의 언급이 없다.

-> 그러기에 대부분의 성도들은 구약의 말라기에서 바로 마태복음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아는 분들이 많다.

 

- 그러나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사이의 400년 공백이 있는 중간시대를 바로 이해해야 복음서에 빈번히 등장하는 예수님과 유대인들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 이 시대는 크게 헬라주의의 셀류쿠스 왕조에 대항하는 마카비 혁명이 전개되는 시대와,혁명이 성공하고 세운 유대인의 독립국가인 하스몬 왕조시대로 구분된다.

 

 

1) 마카비 혁명 시대 (B.C. 166-143)

- 셀류쿠스 왕조의 탄압

 

-> 헬라정부였던 셀류쿠스 왕조는 유대 지역에 헬라 문화를 강제 이식시키기 위해 유대 종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 정책을 폈다.

 

- 이런 탄압정책은 팔레스틴 지역에 있는 유대인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 하지만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N. Epiphanes. B.C.175-163)는 이러한 유대인들의 반발에도 개의치 않고 많은 관리들을 팔레스틴에 파견하여 계속 유대인들을 탄압했고,반대자들에 대해서는 가혹한 처벌도 서슴지 않았다.

 

- 그들은 예루살렘 성벽을 파괴하고,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번제 제단을 헐고 그 자리에 이방신을 섬기는 헬라 제단을 만들었다.

 

 

- 맛다디아(B.C. 167-166)의 의거와 하시딤

-> 왕의 대리인이 예루살렘 북서쪽에 있는 모데인(Modein)지역을 방문해서 이 지역의 제사장이었던 맛다디아에게 헬라식 희생 제사를 지내라고 요구했다.

-> 그러나 마타디아는 이 명령을 거부하고 아들들과 함께 왕의 대리자와 부하들을 살해하고 북동쪽에 있는 고프나 산지로 도망을 갔다.

 

- 이를 계기로 해서 셀류쿠스 왕조의 정책에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런 저항운동의 중심에는 헬라화에 반대하는 종교적 운동을 하던 ‘하시딤(Hasidim)’,경건한 사람들이 있었다.

 

-> 이들 하시딤들은 안티오쿠스 4세의 잔인한 종교탄압을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으로 보고,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향한 진노를 풀고 구원의 날을 내려주도록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 반란을 주도한 마타디아는 그와 뜻을 같이하는 유대인들과 함께 셀류쿠스 왕조에 대한 항전을 시작했는데,이러한 소식은 팔레스틴 지역에 퍼져나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게 되었는데, 이것이 초기 유대 독립 전쟁의 발단이다.

 

- 맛다디아는 효과적인 게릴라전을 펼치면서 셀류쿠스 왕조의 군대를 괴롭혔다.

-> 그리고 그들은 셀류쿠스 왕조가 곳곳에 만들어 놓은 우상들을 파괴시켰을 뿐만 아니라 변절한 유대인들에게 강제로 할례를 행했고 무너진 회당을 다시 건축하였다.

 

 

- 마카비(Judas’ Maccabeus BC 166-160) 혁명

-> 맛다디아는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B.C. 166년에 죽자, 셋째 아들인 유다 마카비는 셀류쿠스 왕조에 대한 유대의 독립 투쟁을 보다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 마카비는 소규모의 게릴라전을 지양하고 셀류쿠스 정부군에 대한 대규모의 공격을 감행하여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 B.C. l64년에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시리아인들에 의해 더렵혀진 성전을 탈환하여 율법의 규례대로 정화시켰다.

-> 이것을 가리켜 유대 역사에서 ‘마카비 혁명’이라고 한다.

 

- 마카비는 성전을 정화한 뒤 새롭게 하나님께 성전을 봉헌하고 8일간의 봉헌 축제를 지냈다.

-> 이것이 하누카(Hanukkah)라고 하는 히브리 ‘빛의 축제’(the Festival of Lights)의 시초가 되었다.

-> 이렇게 해서 성전은 안티오쿠스 4세에 의해 모독 당한지 3년 만에 다시 회복되었다.

 

- 한편 유다의 종교적 순수성만이 아니라 정치적 독립을 원했던 마카비(Makkabeus)는 당시 셀류쿠스 왕조의 내분(內分)을 유도하여 점차 정치적 실권을 장악해 나갔다.

-> 마카비는 BC 162년 종교의 자유를 획득하고, 모데인 남동쪽에 있는 엘라사에서 셀류쿠스 군과 싸우다가 BC 160년 전사했다.

 

 

- 마카비의 동생 요나단

-> 마카비를 계승한 그의 막내 동생 요나단은 제사장으로서 헬라주의자였던 알키무스(Alcimus)를 대신하여 당시 최고 종교 지도자가 되었다.

->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최고 실권을 가지는 대제사장이 되었다(B.C. 153).

 

- 그러나 시리아인들의 음모로 요나단은 살해되었다.(B.C. 142)

-> 요나단이 죽은 후 군사령관과 대제사장의 직분을 계승한 둘째 아들 시몬(Simon)은 시리아군과 정면 대결하기 보다는 주로 외교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로마와 조약을 맺고 원조를 받았다.

 

- 이로써 시몬은 유대의 독립 투쟁을 다시금 활발히 전개할 수 있었는데,마침내 B.C. 142년에는 유대 지역에 었던 시리아군을 완전히 격퇴하여 실질적인 유대의 정치적 독립을 이루었다.

-> 시몬은 유대의 최고 지도자로 군림하여 하스몬 왕조를 세웠다.

-> 하스몬이라는 이름은 맛다디아의 아버지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다.

 

   

2) 하스몬 왕조 시대 (B.C. 142-63)

(1) 시몬 (B.C. 142-134)

(2) 요한 힐카누스 (B.C. 135-104)

(3) 아르스토불루스 1세 (B.C. 104-103)

(4) 알렉산더 얀네우스 (B.C. 103-76)

(5) 살로메 알렉산드라 (B.C. 76-67)

(6) 힐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 (B.C. 67-63)

 

(1) 시몬 (B.C. 142-134)

- 하스몬 왕조 시대(The Hasmon Dynastic Era)란 일반적으로 둘째 아들 시몬이 군사령관과 대제사장직을 겸직하며 유대의 실질적인 최고 통치자가 된 B.C. 142년 이후로부터 B.C.63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점령당하기까지 약 80년간 마카비 가문의 유대 통치 기간을 가리킨다.

-> 유다는 BC 586년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이후 처음으로 독립을 하게 되었다.

 

- 마카비 형제의 마지막 인물인 시몬은 자신이 여리고의 사령관으로 임명한 사위 아브보스에 의해 BC 135년 모반을 당해 죽게 된다.

 

 

(2) 요한 힐카누스 (B.C. 135-104)

 

- 시몬의 뒤를 이어 시몬의 장남인 힐카누스(B.C. 134 -105)가 유대의 최고 통치자이며 대제사장이 되었다.

-> 힐카누스는 팔레스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다시 회복하려는 셀류쿠스 왕조의 마지막 공격을 물리치고, 유대의 통치 영역을 급속히 확대해 나갔다.

-> 힐카누스는 이미 헬라화 되었던 시리아의 속주인 사마리아와 이두매 지역을 정복하여 그 주민들을 강제로 유대교로 개종시켰다.

 

- 유대는 힐카누스 때에 이르러 가장 정치적인 자유를 누렸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부유한 국가가 될 수 있었다.

-> 특히 힐카누스는 주화를 발행하여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은 최초의 군주(君主)가 되었다.

 

- 하지만 이러한 힐카누스의 유대 통치는 시간이 지날수록 경건한 유대인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이익을 중요시하는 힐카누스의 정책은 율법을 바르게 준수하려는 종교적 문제는 등한시했다.

더구나 힐카누스는 왕이란 칭호는 부여받지 않았지만 최고 지도자이면서 대제사장의 직무까지 겸직했기 때문이다.

-> 힐카누스는 약 30년간 유대를 통치하며 헬라문화를 도입했는데, 결국 종교는 정치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반목

-> 이런 힐카누스의 유대 통치에 불만을 품은 무리가 바리새인들(Pharusees)이었다.

 

- 왜냐하면 원래 대제사장 역할은 제사장 가문들이 반차를 따라 직분을 맡았는데, 하스몬 왕가는 그의 후손들이 이어가며 대제사장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 그런데 힐카누스의 이런 정책을 지지하는 무리들이 있었으니 바로 사두개파 사람들(Sadducees)이었다.

 

- 결국 유대는 마카비 가문의 통치 기간이 계속 되면서 그 통치에 찬성하는 사두개파와 반대하는 바리새파 사람들 간에 첨예한 대립이 생겨나게 되었다.

-> 이 때 바리새파 사람들이 율법주의를 주장하면서도 형식주의로 흐르게 되자, 사람이 없는 광야 같은 곳에 종교적 공동체를 건설하여 금욕주의와 경건운동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겼는데, 이들이 에세네파(Essenes) 였다.

-> 세례 요한도 에세네파에 속한 사람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3) 힐카누스의 맏 아들 유다 / 아리스토불루스 1세 (B.C. 104-103)

 

- 힐카누스에게는 아들이 셋이 있었는데, 첫 아들의 이름이 유다였다.

-> 그런데 힐카누스는 유다라는 이름을 헬라식인 아리스토불루스 라고 개명을 했다.

 

- 힐카누스의 뒤를 이은 아리스토불루스 1세는 B.C. 104-103년 2년 동안 짧게 유대를 다스리다 병이 들어 죽었다.

 

 

(4) 알렉산더 얀네우스 (B.C. 103-76)

 

- 아리스토불루스의 뒤를 이어 유다의 동생인 알렉산더 얀네우스(B.C. 103-76)가 유대의 통치자가 되었다.

-> 얀네우스는 자신의 왕위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 형의 미망인인 살로메 알렉산드라와 결혼을 했다.

-> 현실 정치에 민감했던 진보적인 사두개파는 얀네우스를 지지했는데, 보수적인 바리새파와 대립하면서 유대의 내정이 불안하게 되면서 6년간 내전이 일어나게 되었다.

 

- 내전이 지속되자 바리새인들은 셀류쿠스의 데메트리오스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 셀류쿠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유대를 공격해 와서 얀네우스를 완패시켰다.

 

- 그러자 유대인들은 또 다시 셀류쿠스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하스몬 왕가를 지지하며 얀네우스에게 막대한 자금 지원을 했다.

-> 외세를 끌어들이면 반드시 화를 불러들이는 것이 역사의 가르침이다.

 

- 결국 얀네우스가 데메트리오스 3세를 물리쳤는데, 얀네우스는 데메트리오스 3세와 내통하고 반란을 주도하여 외세를 끌어들인 바리새인 800명을 붙잡아 처형을 집행했다.

-> 그는 이 때 800명이 매달린 십자가 앞에서 얀네우스는 그들의 가족들 약 6,000명을 몰살하는 잔인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 이와 같은 하스몬 통치자들의 횡포는 많은 유대인들의 불만을 고조시켜 내정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 이것은 그 때 이미 세계 지배를 꿈꾸며 힘을 키워가고 있던 로마로 하여금 보다 쉽게 유대 지역을 정복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만들어 주고 말았다.

 

 

(5) 살로메 알렉산드라 (B.C. 76-67)

 

- 얀네우스가 죽자 아내인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남편의 뒤를 이어 9년 동안 유다를 다스렸다.

-> 살로메는 두 아들 중 장남인 힐카누스 2세에게 대제사장직을 내렸는데, 이번에는 바리새파의 지지를 받았다.

 

 

(6) 힐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 (B.C. 67-63)

 

- 살로메가 죽자 힐카누스 2세의 동생인 아리스토불로 2세는 대제사장직을 맡고 있던 형 힐카누스 2세의 실권을 빼앗고 권력을 장악했다.

-> 이 때 도움을 준 사람이 이두매의 안티파터였다.

-> 권력을 장악한 아리스토불루 2세는 사두개파의 지지를 받았고, 실권을 빼앗긴 형 힐카누스 2세는 바리새파의 지지를 받았는데, 형과 동생의 내분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이의 내분으로 이어지면 하스몬 왕가의 힘은 계속 약화되었다.

 

 

- 로마 제국 폼페이우스 장군의 예루살렘 점령

-> B.C. 64년 로마제국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시리아를 점령하고 팔레스틴 지역을 위협하자 아리스토불루와 힐카누스는 서로 폼페이우스에게 손을 내밀었는데, 폼페이우스는 실권(失權)한 힐카누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 권력을 잡고 있던 아리스토불루스 2세가 폼페이우스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자 폼페이우스는 B.C. 63년,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힐카누스 2세를 대제사장으로 세웠다.

-> 결국 유다의 독립을 꿈꾸었던 하스몬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고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 한편 이 때 이두매 지역의 안티파터가 로마 편에 서서 도움을 주었는데,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두매인인 안티파터를 유대를 다스리는 행정관으로 임명했다.

 

 

# 유대 역사에 있어 하스몬 왕조의 의미

 

- 처음 마카비 혁명은 셀류쿠스 왕조의 헬라화에 반대하여 종교적 자유를 추구하는 반 헬라화 운동이었다.

->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외세를 몰아내는 정치적 성격으로 변하게 되고 결국은 하스몬 왕조라는 독립 국가를 세우게 되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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