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자료

헐몬산

열려라 에바다 2022. 7. 29. 10:00

헐몬산

 

하솔에서 본 헬몬산

 

 

쿠네이트라' 에서 바라본  북쪽 방향의 헬몬산

 

 

눈 덮힌 헬몬산과 아래 지역의 아름다운 꽃

 

 

사시사철 눈 덮혀있는 헬몬산

 

 

헬몬산 (Mt. Hermon)

 

이스라엘의 최고봉인 헬몬산은 그 정상 높이가 2814m이다.

헬몬산이 높이 융기되면서

동반적으로 주변에는 계곡이나 분지 등과 같은 낮은 지역이 생겼다.

즉 북서쪽의 리타니계곡,

남서쪽의 이온계곡,

남쪽의 훌레계곡,

그리고 북동쪽의 다메섹분지 등은 모두가 헬몬산 주변에 위치한 낮은 지역들이다.

 

헬몬산과 지형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곳은

북쪽의 안티레바논산지에 속하는 산지의 한 지류이다.

헬몬산의 폭는 약 30km이며, 연중 약 1500mm 이상의 강우량이 기록되는 지역이다.

헬몬산의 강우량은 대부분이 눈으로 내리는데,

겨울동안 내린 눈은 이른 여름철까지도 녹지 않고 쌓여 있다.

여름이 되면서 서서히 녹은 헬몬산의 눈들은 

지표면 아래로 스며들어 헬몬산 주변의 샘들을 통하여 다시 분출된다.

이러한 샘들은 남쪽의 요단강, 북쪽의 리타니강,

그리고 동쪽의 다메섹으로 흐르는 강의 수원지가 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헬몬산은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를 이루는 지역이었다.

모세나 여호수아에게 헬몬산은 눈 앞에 두고 있는 가나안 정복의 최북단 지역이었다.(신 3:8; 4:48; 수 11:17; 삿 3:3)

아모리사람들은 헬몬산을 '스닐'(Senir)이라고 불렀으며,

시돈사람들은 이 산을 '시룐'(Sirion)이라고 불렀다.(신 3:9)

이러한 지명들은 이집트의 저주문서나 우가릿 문서에서도 자주 언급이 되고 있다.

기원전 1330년경 히타이트왕과 수리아왕 사이에 체결된 어느 계약 문서에는

체결 증인으로서 레바논의 신들과 시리온의 신들과 더불어 헬몬산이 언급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를 이루고 있는 헬몬산 주변의 우거진 숲들,

산기슭에 위치한 여러 수원들,

그리고 눈으로 덮여있는 정상의 모습 등은

고대 시대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적인 경외심을 일으켜 주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헬몬산과 관련하여 유명한 성소들이 자주 언급된다.

사람들이 신탁을 얻으려고 찾아 왔던 '벧마아가 아벨'(삼하 20:15, 18)도 헬몬산 근처의 지역이였다.

여로보암 시대에 거대한 신전이 세워진 단(왕상 12:29; 왕하 10:29; 암 8:14)과

헤롯이 아우구스터스를 위하여 세운 로마 황제 숭배 신전이 있었던 가이사랴빌립보 등도 모두가 헬몬산과 관련된 지역들이다

 

요단강의 수원지 나할 헬몬 (나할 바니아스)

 

훌레계곡의 북동쪽에 위치한 헬몬산 기슭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나할 헬몬'은 헬몬산 기슭의 바위들 사이를 뚫고 나오는 거대한 샘에서 시작된다.

나할 헬몬의 주변에는 물가에서 자라는 나무들로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는데,

헬라시대 이곳에는 '판'이라는 자연신을 숭배하는 신전이 세워졌었다.

그런 것과 관련하여 현재 이곳을 '바니아스'라고 부른다.

신약시대 이곳은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도시가 있었다.

좁은 협곡을 따라 흐르는 나할 헬몬은 경사가 급한 지역에서는 폭포를 이루기도 한다.

이 강은 남서 방향으로 흐르면서 '나할 단'을 만나게 되고, 다시 '나할 스닐'을 만나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할 헬몬을 요단강의 가장 중요한 본류로 간주하기도 한다.

 

헬몬산 갈릴리 바다, 요단강 발원지 동굴

 

갈릴리바다 남쪽에서  요단강으로

요단강이 흘러 사해로

 

 

사해로 흘러들어감

 

요단강   

요단강은 수원인 북쪽의 갈릴리 호수로부터 출발하여 사해로 흘러드는 이스라엘의 유일한 영구하천이다.

이 강은 동쪽의 요르단지역과 서쪽의 가나안 땅을 나누는 자연적인 경계선이 기도 하다.

요단강 주변 지역은 삼단식 계단구조로서 맨 위쪽은 경작과 취락이 가능한 평지 로서 고르라고 불린다.

중간 지대는 사막이나 다름없는 불모지이다.

맨 아래쪽은 요단강가로 조르라고 불리는 밀림지역이 형성되어 맹수가 출연하는 지역이었다(렘 49:19).

갈릴리~사해까지는 100km 이다.

사행천인 요단강의 길이 320km(비교: 한강 514km)이다. 

 

지질과 지형을 보면

   1) 범람원, 충적토이다.

       렘 12:5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 하겠느냐.

       욥 40:23 하수가 창일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놀라지 않고 요단 강이 불어 그 입에 미칠지라도 자약하니

 

  2) 물이 부족하고 여름에는 50도를 기록하는 무더운 날씨해서 거주지로는 적당하지 않다.

        강의 물은 조르(zor)라는 덤불과 낮은 지역으로 인해 거주지로 이용하기가 어렵다.

 

3) 요르단의 야수, 정글 지역이다.

        렘 49:19 보라 사자가 요단의 수풀에서 올라오는 것같이 그가 와서 견고한 처소를 칠 것이라

                    내가 즉시 그들을 거기서 쫓아내고 택한 자를 내가 그 위에 세우리니

                   나와 같은 자 누구며 나로 더불어 다툴 자 누구며 내 앞에 설 목자가 누구뇨

 

(3) 홍해만큼이나 건너기 어려운 강 강은 해수면보다 낮다.

         성경상으로 요단강은 요단강 도하(수 3)사건이 있었다.

 

       이스라엘이 강을 건넌 때는 보리를 수확하는 시기이므로(수 3:15) 3월이나 4월로서 봄이었다.

       요단강은 평상시에는 폭이 약 27-30m이며 깊이는 약 1-3m이지만 봄에 늦은 비가 내리면

       요단강 하류부근은 강물이 넘쳐 홍수를 이루게 되어 그 폭과 깊이는 더해지고 급류를 이룬다.

       이때 강을 건너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아마도 여리고성의 왕이 이스라엘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고도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은 것은 그 무렵에 강을 건넌다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거나

       좀더 건너기 쉬운 상류 쪽에 군사들을 배치해두었는지 모른다.

       아무튼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쪽의 평지를 내려와 밀림지대를 통과하고 마른 땅이 된 요단강을 건너

       다시 여리고 평지를 향해 올라가야 하는 쉽지 않은 여정이었을 것이다.

 

요단강 서안지역

요단강과 사해 서쪽지역에 해당되는 요단강 서안지역은 그 면적이 5860㎢정도이며 현재 210여만명의 아랍인이 그곳에 살고 있다.

요단강 서안지역은 오늘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영토 반환의 핵심 지역으로서

팔레스타인의 대이스라엘 테러가 계획되고 감행되는 지역이며 동시에 이스라엘이 대대적인 테러범 소탕작전을 벌이는 지역이기도 하다.

오늘날 이스라엘 성지를 순례하는 사람들이 사마리아 벧엘 헤브론과 같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를 순례하지 못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테러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요단강 서안지역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향해 돌을 던지거나 혹은 무력 행사 등 테러를 서슴지 않는다.

이유는 관광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간접적으로 돕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중동평화회담의 핵심 사안인 요단강 서안지역으로부터

이스라엘 철군 문제는 다른 중동평화문제와 마찬가지로 복잡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요단강 서안지역에 대한 강제 점령은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선언후 요르단에 의하여 감행되었다.

요르단은 요단강 서쪽 지역과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이스라엘과 대립하였다.

그러나 1949년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에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소위 ‘녹색선’(the Green Line)이라고 불리는 경계선이 형성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 ‘요단강 서안지역’이라고 불리는 지역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으며 이곳에 아랍인들이 많이 이주하였다.

그런데 요르단이 이스라엘과의 휴전협정을 어기면서

1952년 이 요단강 서안지역을 일방적으로 요르단 영토에 편입시키고 거주하는 모든 사람에게 요르단 시민권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1967년 6일전쟁에서 완승을 거두고 요단강 서안지역과 동예루살렘을 점령한뒤 동예루살렘은 자국에 합병시켰으나

‘요단강 서안지역’은 합병하지 않고 단지 군사적 점령지역으로 남겨두었다. ‘

요단강 서안지역’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갈등이 고조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베긴 총리 정부가 요단강 서안지역에 대규모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이스라엘 주택성장관은 현 총리인 샤론이었다.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한 결과 요단강 서안지역에는

140여곳의 정착촌이 건설돼 20여만명의 유대인들이 살게 되었다.

1978년 이스라엘이 이집트와 맺은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도

요단강 서안지역에서의 팔레스타인 자치권 확보를 위한 계획이 포함되어 있으나 그 목표는 달성되지 못하였다.

‘요단강 서안지역’에서 팔레스타인이 대이스라엘 무장 테러를 시작한 것은 1982년 ‘레바논 전쟁’ 이후부터이다.

레바논 전쟁은 레바논을 거점으로 테러를 일삼는 PLO 본부를 섬멸하고자 하는 이스라엘의 의도가 기폭점이 됐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무장 폭동을 일으켰고 이에 대해 이스라엘은 요단강 서안지역에 군사계엄령을 선포하고 병력을 증가시켰다.

요단강 서안지역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극한 대립은 점점 고조되었으며

특히 1987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민족봉기(인티파다)가 발생했을 때 요단강 서안지역은 인티파다의 중심지가 되었다.

1993년 미국 워싱턴에서 체결된 ‘오슬로 평화협정’은 이러한 양측의 첨예한 대립관계를 종식시키는 듯하였다.

이 평화협정에 의하면 요단강 서안지역에서 팔레스타인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서 이스라엘은

단계적으로 요단강 서안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을

1998년까지 철수하고 요단강 서안지역에 대한 모든 권한을 팔레스타인에게 넘겨주어

궁극적으로 팔레스타인이 자치정부를 수립하게 한다는 계획이었다.

평화협정문에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와 여리고로부터 철수하는 시점부터 5년간의 과도기간을 가지며

과도기간 3년안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최종협상을 하되

그 협상에서 예루살렘 문제,팔레스타인 난민 문제,정착촌 문제,국경문제 등을 다룬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평화협정에 조인하면서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은 자치정부가 테러와 그밖의 모든 폭력행위를 배격하고

그 위반자를 징계해서 팔레스타인내의 모든 구성원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문제 해결을 위한 최종 협상과정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현격한 입장 차이를 드러냈다.

즉 이스라엘은 자국의 안보가 보장된 이후에

요단강 서안지역을 팔레스타인에게 돌려주겠다는 ‘선안보 후반환’을 주장한 반면

팔레스타인측은 ‘선반환 후협상’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1996년에 들어서면서 팔레스타인의 대이스라엘 테러행위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더욱이 버스와 같은 대중교통수단에 대한 자살테러가 감행되면서

이스라엘 국민은 팔레스타인측의 평화협정 준수 의지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반면 팔레스타인측은 이스라엘이 선안보를 주장하는 것은 영토를 반환할 의사가 없기 때문이고

그 때문에 테러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모든 책임을 이스라엘측에 떠넘겼다.

이러한 양측의 뚜렷한 입장 차이는 수십차례의 평화회담에도 불구하고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2000년 7월 캠프 데이비드에서 개최된 최종 협상에서 양측이 아무런 결론에 도달하지 못 하자

같은해 9월 ‘요단강 서안지역’을 중심으로 제2차 인티파다가 일어났고

이스라엘 안보에 위협을 느낀 이스라엘의 에후드 바라크 총리는

2000년 10월22일 중동평화회담의 전면 중단을 선언하였다.

2001년 2월 강경파인 샤론이 이스라엘 총리로 집권하였고 계속되는 팔레스타인의 테러 행위를 뿌리뽑기 위하여

그 동안 이스라엘 군대가 철수해 있었던 ‘요단강 서안지역’에 대한 재점령에 나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지난 3월 예닌 사태가 발생했다

이러한 입장 차이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상호 불신의 골이 깊기 때문이다.

서로 책임을 공감하기보다 국내 정세에 따라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하는 이런 상황에서는 평화는 요원하다.

진정한 평화가 구현되기 위해서는 양측간의 상호 신뢰회복이 선결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