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자료

북한의 기독교 순교역사

열려라 에바다 2022. 8. 19. 10:17

북한의 기독교 순교역사

 

6․25전쟁이 끝나고 지금까지 북한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이유로 처형당한 사람은 15,657명이라고 모퉁이돌 선교회 총무인 이반석 목사가 밝혔습니다. 그러나 실지로는 이보다 더 많은 30,000명 이상이 순교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북한의 종교말살정책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순교를 각오하면서 신앙의 명맥을 유지하면서 “우리가 여기 있어요. 우리를 도와주세요.”라고 대한민국을 향해 부르짖으며 기도하면서 남북통일과 남한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북한 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다져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1. 1945년 해방 전
북한지역은 남한지역보다 먼저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조선 총독부의 통계에 의하면 1945년 해방되기 전에 북한의 기독교 신자는 약 30만 명 정도가 되었습니다. 1930년대에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북한 지역에서는 순교자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장로교를 비롯한 교단들이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면서 신사참배를 가결하였습니다.
​이 때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성결교회는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다가 교회가 폐쇄되고 많은 목사님과 성도들이 투옥되고 순교하였습니다. 신사참배 반대로 인해 전국적으로 200여개의 교회가 폐쇄되었고, 2,000여명의 신도들이 체포되거나 투옥되었고 신앙의 지조를 지킨 50여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이 때에 성결교회는 200여명의 교회 지도자들과 100여명의 평신도 지도자들이 투옥되어 고문을 당하고, 교단은 해산 당했으며, 교회 건물이 군수공장으로 빼앗기고 교회 기물들은 판매처분을 당하는 고난을 겪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킨 성결교회가 가시밭의 백합화를 교단의 상징으로 정한 것입니다.

2. 1945년 해방이후 1950년까지
1945년 해방 이후,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의 지원을 받고 북한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려고 했을 때에 이것을 끝까지 반대하며 저항했던 세력은 거의가 다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당시 북한지역에서는 기독교 영향력은 대단히 컸기 때문에 기독교세력의 도움이 없으면 북한지역 공산화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북한의 공산정권은 기독교를 말살시키기 위해서 갖은 일들을 행했습니다.
초기에 김일성은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전면적으로 하지 못하고 기독교 활동을 방해하면서 협력을 구하였습니다. 김일성은 교회, 성당, 사찰 등의 종교 시설을 묵인하면서 그곳에서 대규모 종교관련 행사는 못하게 하였고, 찬송가를 부르는 것도 이웃에게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금지를 시켰습니다. 그리고 점진적으로 기독교의 경제적 기반을 없애기 위해 전도를 방해하고, 교회의 재산을 음으로 양으로 빼앗기 시작했습니다.
1946년 2월 8일 김일성은 북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면서 토지개혁을 빌미로 기독교의 경제기반을 몰수하였고, 1948년부터는 주요 사업들을 국유화하면서 기독교인들의 재산을 몰수하였습니다. 이와 동시에 김일성의 외증조부이고 장로교 목사였던 강양욱을 내세워서 1946년 11월에 어용단체인 ‘조선기독교연맹’을 창설하여 중앙위원장으로 세우고, 모든 교회가 김일성 정권을 지지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조만식 장로는 1945년 1월에 조선 민주당을 창당하여 신탁통치반대운동을 하면서 김일성 공산정권과 맞섰으나 1946년 1월 체포되었고 1950년 10월 살해되었습니다.

3. 한국전쟁시기
1949년 말부터 김일성은 남침전쟁을 준비하면서 북한 내의 교회를 더욱 강력하게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배를 드리거나 전도를 하는 일이 눈에 띄면 즉시로 체포하였고, 기독교인들의 가택을 수시로 수색했고, 성경이나 찬송가나 기독교 서적이 발견되면 불온문서로 간주하여 체포 구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탄압에 맞서 싸운 기독교인들은 많은 순교의 잔을 마셨습니다.
한국 전쟁은 우리 민족에게는 아픔이었고, 기독교에는 수많은 순교자가 일어난 때였습니다. 북한에서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많은 성도들이 남한으로 월남했고, 끝까지 북한에 남아서 신앙을 지키던 사람들은 북한에서 순교를 당하거나 수용소에 끌려갔습니다. 당시 김일성은 후퇴하면서 기독교인을 무차별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려 많은 기독교인들을 살해했는데, 이렇게 순교한 기독교인들이 수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산하고 있습니다.

4. 한국전쟁 후 지하교회 형성
한국전쟁에서 패한 김일성은 북한에 있는 교회를 더욱 강하게 핍박했습니다. 기독교는 반김일성 정치세력이었기 때문에 이에 관계된 자들을 모두 숙청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예배당이 파괴되거나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었고, 월남하지 못한 교회 지도자들을 잡아 숙청하였습니다.
1955년 4월 당중앙위 전원회의를 소집하고 계급교양을 강화하였습니다. 계급교양은 “노동자들의 이익을 옹호하고 사회주의를 수호하는 노동 계급의 계급의식으로 무장하기 위해 필요한 교양”을 말하는 것으로, “유신론을 철저히 파괴하고 무신론에 입각한 사상교육을 인민들에게 시키라는 것”이 내용이었습니다. 이러한 계급교양을 통해서 김일성은 인민들을 사회단체나 부락별로 소집을 시켜서 남한으로 월남한 가족들과 기독교인들을 대중 앞에서 고문하면서 자아비판을 강요시켰고, 이런 일이 벌어지면서 기독교인들은 탄압을 피해서 지하교회를 형성하면서 믿음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 순교한 북한 기독교인들의 수가 5,000여명이 된다고 추정합니다.
1958년 북한은 중앙당 집중지도를 통해서 북한의 지하교회와 지하교인들을 찾아내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이만화 목사 사건이었습니다. 북한은 1954년부터 개인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도록 하면서 집단농장 체제를 통해 농업 경제를 강제로 운영했습니다. 그러자 이만화 목사는 집단농장에서 농장원으로 일하면서 신임을 얻어가면서 농장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접촉하면서 복음을 전하여 예수를 영접하게 하고, 그들을 말씀으로 양육했습니다.
이렇게 비밀조직으로 연결되어서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은 평안북도 용천군 내에 약 2,000명에 달했습니다. 본래 평안북도 용천군은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정도로 일제시대부터 기독교인이 많았던 지역이었는데, 심지어 공산당 간부들도 복음을 받아드리기도 했고 비밀 지하교회는 교세가 확장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1957년 8월 27일에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선거가 있었는데, 이만화 목사는 교인들에게 기독교를 박해하는 김일성을 지지하는 투표에 참석하지 말라고 독려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투표장에는 갔지만 투표용지를 흑백으로 되어 있는 투표함에 넣지 않았습니다.
​이런 결과 투표용지와 유권자의 숫자가 2,000명이 차이가 난 것을 알게 된 사회 안전원 300명과 중앙당 집중지도반 500명을 용천군에 급습시켜 기독교인을 일제히 검색하였습니다. 그 중 두 명의 성도가 예배를 드리고 있다가 현장에서 발각되어 처참한 고문을 받게 되었고, 이러한 모습을 지켜만 볼 수 없었던 이만화 목사가 자진 출두하여 지하교회 책임자임을 스스로 밝혔고, 교회 지도자 130명이 검거되고, 이중 36명이 총살을 당하고, 나머지는 수용소로 유배되었습니다.
북한 공산정권은 기독교를 말살하기 위해서 1959년부터 노동당 출판사를 통해 반종교 선전을 위한 소책자를 만들어 “지난 3년간 조선전쟁과 오늘 남조선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미제가 감행한 무구한 인민에 대한 학살, 약탈, 방화 등 비인간적인 야수적인 만행은 제국주의자들의 침략과 약탈에 이용되는 종교적의 추악하고 반동적인 본질을 말하여 주고도 남음이 있다”고 선전하였습니다.
​미제가 교회를 이용해서 조선반도를 침략하여 무구한 인민을 학살, 약탈, 방화했으니 반동적인 기독교 세력을 축출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1958년부터 1960년 초까지 주민들의 성분을 조사하면서 기독교인들과 그의 가족들을 반혁명계층으로 분류해서 특수 지역에 거주하도록 하였고, 특별 감시 대상으로 분류하였고, 북한 주민들에게는 반종교적 선전활동과 기독교 무용성을 주입시켰습니다.

5. 지하교인들의 고난 시대
1960년 이전까지는 북한 교회의 명맥이 유지되었지만, 1960년에 들어서면서 예배가 진행되거나, 기독교 서적이 발견되면 체포 감금 폭행하였습니다. 그 결과 표면상으로는 북한에는 기독교인과 교회가 하나도 없는 신앙의 불모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북한 공산정권의 끊임없는 탄압에도 기독교인들은 살아남아서 지하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신앙을 유지했습니다.
1960~70년대까지는 북한의 기독교인들은 가정교회라고 불리는 기독교 공동체를 형성하였습니다. 각 지역에 있던 예배당은 모두 없어지고 파괴되고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고, 수많은 교회지도자들과 성도들이 순교를 당했지만, 성도들의 가슴 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없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북한 공산정권은 “극히 부분적이나마 일부 사람들 가운데는 자기 자신이 꾸준히 노력하려고 하지 않고, ‘신’이나 ‘하나님’의 힘을 믿음으로써 우리의 사회주의 건설과 자신의 생활에 막대한 해를 끼치고 있는 인민들이 있다”고 북한 인민들을 향해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북한의 기독교인들이 가정교회, 지하교회의 형태로 믿음을 지켜나갔지만, 1960~70년대 사이에 순교한 북한 기독교인은 무려 3,000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시기에는 북한교회는 로마의 카타콤과 같은 지하 동굴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발각되어 순교당하는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1966년 평안북도 박천군 상추리에서는 야산의 한 토굴에서 13명의 지하교인들이 발각돼 체포된 후 곧바로 처형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들은 머리털과 수염도 깎지 못한 채 짐승처럼 살았고 5년 동안 계속된 토굴 기도생활로 인해서 무릎이 쪼그라들어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김 목사라는 분에 의해 전도를 받았고, 1961년 김목사와 많은 교인들이 붙잡혀서 수용소로 보내졌지만, 이들은 토굴 속에 숨어살면서 신앙생활을 유지하다가, 5년 만에 토굴에서 발견되어 순교 당한 것입니다.
1967년 9월에는 평양 일대에 큰 홍수가 일어나서 평양의 지하 하수구에서 수년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아온 기독교인 집단이 발각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평양 시내가 홍수로 침수되면서 종교탄압을 피해 지하로 숨었던 기독교인들이 물속에 잠기면서 살아남기 위해서 지상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는데 이들의 행색을 이상히 여긴 북한 경비정에 의해 발각되어서 모두 체포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평양에 살던 탈북민 이민복 씨(자유북한인연합 대표)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내가 10살 때인데 대동강이 범람해 둑이 터지면서 아파트 아래층에 잉어가 들어와 잡힐 정도로 온통 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이때 6·25전쟁 때부터 20년 가까이 하수도 속에 숨어 있던 ‘악질 반동들’이 나타났는데 햇볕을 못 봐 얼굴은 창백하고 머리도 치렁치렁 길게 늘어진 모습이었습니다. 이들은 지하에 살던 기독교인들로 밝혀졌고 모두 처형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저주하며 살려 달라고 당 앞에 빌 줄 알았는데 하늘을 우러러 하나같이 초연하게 죽음을 맞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1968년 6월에는 평안남도 온천군 운하리에서 세칭 ‘박 목사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동네에서는 유언비어가 자주 퍼지고 김일성 초상화가 없어지는 일도 자주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사회안전원들이 밤낮으로 감시한 끝에 이 지역으로 강제 전출된 개성 출신 이주민들을 의심하면서, 박 씨라는 사람을 이주민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사실을 알고, 아무 증거 없이 그에게 반동불순분자라는 누명을 씌워 함경북도의 집단수용소로 보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땅 속에 묻어 두었던 성경과 찬송을 몰래 파내 짐 속에 넣으려다가 발각되었는데, 박 씨라는 자가 목사라는 것이 밝혀졌고, 그의 지도아래 지하교회가 10년 이상 운영되어 왔던 것이 밝혀졌고, 이로 인해서 120여명의 성도들이 처형당하거나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6. 1970년~ 1980년 지하교인 순교의 시대
1970년대에 북한 공산당은 기독교인을 정치범 수용소에 수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공산정권은 평안남북도에 밀집되어 있던 교회시설들을 몰수하여 회의장, 유치원, 선전장 등으로 용도를 변경해 사용했고, 예배당은 단 1개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북한 기독교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때를 북한 교회의 순교시대라고 평가합니다. 이 시기에 공산정권은 기독교인의 잔존세력을 색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주민등록사업에 의해서 인민을 51개 층으로 분류하여 기독교인 42번, 천주교인 44번의 코드번호를 부여하여 일반 감시 및 특별감시 대상으로 구분 하고 통제를 강화했습니다. 그리고 친사회주의적인 기독교 연맹이라는 공적 제도를 만들어 북한지역에 교회를 세우고 겉으로는 종교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외부에 선전물로 알렸고, 내부적으로는 종교말살정책을 유지하면서 잔존하는 지하교인을 색출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가정교회나 지하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유지하였는데, 70~80년 사이에 신앙을 유지하다가 발각되어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간 사람이 약 2,000명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적발된 지하교인들은 대부분 잔인하게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1973년 11월 30일 함경남도 신흥군에서 벌어진 공개처형 장면에 대해 이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안전원들이 달려들어 세 명의 노인들을 끌어다 철판 위에 눕히고 머리를 압축판 쪽으로 밀어 넣었다. 군중 속에서 선정적인 외침이 나왔다. ‘저 인간쓰레기들을 인민의 이름으로 처단하라!’ 작동 구령과 함께 25톤급 프레스가 서서히 작동하기 시작했다. 압축판이 노인들의 머리를 향해 조여들고 있었다. 잠시 후, 두개골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뇌수와 선혈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리고 탈북민 이영선 씨의 증언에 의하면 1974년 10월 함흥시 만세교에서 처형된 김태용 목사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김 목사는 함흥시 반룡구역 용마동 지역에 한국전쟁으로 인해 파괴되어 지하실입구가 막혀 있는 곳에 지하교회를 만들어서 김목사가 가족들과 함께 전도한 성도 36명과 함께 10여 년간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김일성이 그 지역 일대를 주택재개발을 하면서 발각되었는데, 이들 모두가 사회안전원에게 체포되어 함흥시 만세교 다리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며 순교하였습니다.

7. 1980년 ~ 1990년 북한 지하교인들의 시대.
1980년이 되면서 북한의 지하교회는 대부분 색출되어 없어졌습니다. 단지 남아 있는 기독교인들은 한국전쟁 이전에 믿음을 갖고 있던 성도들 가운데 생명을 유지하고 있던 60세 이상의 고령자들뿐이었습니다. 이들은 죽음이 두려워서 자녀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혼자서 신앙을 갖고 있었는데, 훼손된 몇 장의 성경말씀을 생명처럼 여기고, 십자가 목걸이를 숨기고 있다가 기도할 때에 꺼내서 기도하면서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신앙생활을 숨어서 하다가 발각되어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간 이들이 200여명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북한공산당은 교회의 기본조직단위로 10여명으로 구성된 가정교회를 어용으로 만들고, 1930년 이후 한국장로교회가 사용했던 시편과 찬송가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83년~ 1984년에는 성경과 찬송가를 간행했고, 1988년에는 봉수교회와 철골교회를 세워서 북한정권에 기독교가 건재하다는 것을 알리면서 주일예배 및 부활절, 성탄절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1980~90년대에 북한 공산정권은 북한 기독교인이 5,000명이고, 전국적으로 500개의 예배처소가 있다고 하였으나 이것은 거짓말이고, 실질적으로 북한공산당은 형법 및 조선 노동당 규약 규범으로 주민들을 기독교와 격리시키고, 김일성 주체사상을 주입시키고 있습니다.


8. 1990년 이후 중국개방으로 북한지역에 선교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이 일어나면서 중국을 통해 북한의 지하교인과 연결되었고, 북한 지역에 선교가 일어나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1990년대에는 북한에는 성도들이 거의 없었고 지하교회 형태로 극소수만 존재할 때입니다. 그리고 북한의 지하교인들은 신앙양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신앙은 개인적이고, 기복적이며, 신비주의적 신앙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90년 초반에 중국의 동북삼성을 통하여 한국 선교사들에 의해 신앙 훈련을 받은 중국 조선족 전도사들이 북한지역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면서 새로운 북한 선교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1988년 이후 고난의 행군을 통해서 10여만 명이나 되는 북한 주민들이 중국이나 러시아로 탈북했고, 평안북도와 함경북도, 자강도와 중국 국경을 접하고 있는 지역에서 북한 선교를 위해 준비하고 있던 한국 선교사들이 탈북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들을 통해 북한 교회의 재건을 모색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복음이 북한에 다시 전해지면서 북한의 지하교회 수는 점점 더 늘어나게 되었지만, 북한 공산당에게 적발된 사람들은 간첩죄로 몰려 공개처형을 당하며 순교하였고,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간 사람이 300명이 넘었습니다.
1996년에는 함경도를 중심으로 40년 이상 지하교회를 지켜온 이윤심 목사가 순교당했습니다. 함경남도 금야군 병원에 양의사로 재직하던 탈북민 최주혁 씨의 증언에 의하면 이윤심 목사는 만성위장염으로 치료를 받으러 자기에게 왔었는데, 나중에는 의사인 자신도 전도 받고 복음을 믿고 예수를 영접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윤심 목사의 아버지도 목사였는데, 해방 전에 세워진 ‘칠골교회’에서 강양욱 목사(1904~1983, 북한 국가부주석)와 같이 생활했는데, 강양욱 목사는 김일성과 함께 기독교를 박해하면서 이윤심 목사의 아버지를 총살시켰다고 합니다. 이윤심 목사는 엘리트를 전도하여 40년 이상을 180여명을 대상으로 은밀하게 목회했으나, 1996년 10월 보위부에 의해 체포되어 순교당했습니다. 이 사건을 ‘1996년 함경남도 기독교사건’이라고 합니다.

9. 2000년 이후 지금까지
2000년 2월 10일 12시에는 함경북도 무산시 장마당에서 37살의 리영희라는 여성도의 공개처형이 있었습니다. 공산당원은 장마당에서 영업을 하는 모든 주민들에게 가게 문을 닫게 하였고, 전 주민이 다 나와서 공개처형 당하는 것을 목격하게 하였습니다. 이때에 이미 리경희 성도는 심한 고문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되어 말뚝에 새끼줄로 목과 가슴, 허리를 묶인 상태로, 헝겊으로 눈을 가린 상태로 하반신이 부러져서 서 있지를 못하고 주저앉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북한 장교가 ‘발사준비’라고 명령을 하자, 리영희 성도는 “예수를 믿으시오! 주여!”라고 외마디 소리를 질렀고, 그 순간 총성이 울리고 리영희는 순교하였습니다. 3명의 저격수가 쏜 총알은 4발은 머리에, 4발은 가슴에, 4발은 배에 맞아서 온몸에 살점이 터지고 심장이 터지면서 피가 공개처형장에 끌려 나온 사람들에게까지 튀었다고 합니다.
​순교한 리영희 성도는 97년 가을에 굶주림을 견디다 못하여 두만강을 건너 중국측 접경지역에 있는 지하처소교회로 들어온 탈북자로, 대학을 나왔고, 당성도 좋은 사람이었는데, 어떤 사정으로 인해서 숙청당해서 남편과 아오지 탄광 노동자로 끌려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아오지 탄광에서 탈출하여 예수를 영접하고, 신앙양육을 받으면서 북한을 오고가고 하면서 먹을 것과 성경책으로 전도를 하다가 2000년 1월에 체포되어 2주간의 모진 고문 끝에 총살을 당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북한 교회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은 영화가 2014년에 만들어진 ‘신이 보낸 사람들’이란 것입니다.
2002년에는 함경북도 무산에서 일가족 10여명이 북한 인민들에게 성경을 나눠주며 복음을 전하다가 아버지는 국가반역죄로 총살을 당하고, 나머지 가족들은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2005년에는 극동방송을 통해 신앙생활을 시작한 평안남도 남포시 주민 102명이 한꺼번에 적발돼 40명은 총살 되고, 62명은 정치범 수용소인 요덕 15관리소로 보내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북한의 지하교인의 수는 중국의 개혁개방으로 숫자가 늘어나면서 약 1,000여개의 지하교회에서 135,000명의 성도가 있다고 추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북한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이 발표한 12,000명보다 10배나 넘는 숫자입니다. 북한에서는 은밀한 전도가 계속되고 있고, 중국여행이나 라디오, 비디오, 성경책, 직접 계시 등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탈북자들은 북한에 있을 당시에는 기독교의 존재를 알지 못했고, 탈북한 뒤에 중국에서 기독교를 접하였다고 말하고 있고, 북한 선교는 북한에서 중국으로 다니는 외화벌이 친척방문자들은 중국에서 복음을 접하고, 북한으로 들어가서 가까운 친지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 북한지하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순교를 각오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순교의 신앙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의 부요를 복되다고 자랑하지 말고, 내가 정말로 참된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정한 히브리서 말씀을 읽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히11:33~40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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