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관련자료

신약에 나타난 가정

열려라 에바다 2022. 10. 1. 16:47


신약에 나타난 가정

1. 한 가정으로서의 하나님의 백성

예수께서 가정을 등지고 밖으로 나돌아다니시면서 복음 전도에만 전념하고 있을 때,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그를 찾아 왔다(마 12:45-50 / 막 3:31-35 / 눅 8:19-21). 원래 예수의 가르침의 특기(?)는 일종의 임기 응변에 있었다. 어떤 가르침의 계기가 될 만한 일이 주변에서 일어나면, 그것을 그대로 흘려 보내지 않고 포착하는 것이 그의 장기였다.

가족들이 자기를 보겠다고 하는 말을 전해 듣자, 진정한 의미에서의 가족에 대하여 가르쳐야 하겠다고, 순간적으로 판단하였다. 그래서 동문서답 식의 질문을 한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이 반문을 그의 가족들이 들었다면, 얼마나 매정하다고 느꼈을까? 하지만 그런 사사로운 감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하여 말씀한다 :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그의 가족들에게는 매정하게 들렸을지 몰라도, 이 짧은 한 마디의 말씀으로, 예수는 가정에 대한 혁명적인 정의를 내린 것이다. 여기서 예수는 메시야 시대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가정에 대하여 말씀을 하고 있다.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 한 가정이다. 그 아버지는 하나님 한 분이시다. 위의 말씀에서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고만 말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왜 그런가? 아버지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성 신학자들이 말하는 "어머니 하나님"에 대한 주장과는 맥락이 약간 다르다. 예수는 여기에서 하나님이 남자라고 주장하려는 마음이 없다. 다만,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의 큰 가정으로 비유를 하고 있을 뿐이다. 당시의 가부장적 전통의 배경에서 보자면, 하나님은 아버지의 역할에 해당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한 비유로서만 그치지는 않는다.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행동해야 한다. 이 가정에서 예수는 특별한 아들이요, 맏아들이다. 복음서 전승에서 예수는 한 번도 자신을 포함한 의미에서 "우리의 아버지"라고 말한 적이 없다(마태복음의 "주의 기도문"에서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을 쓰고는 있지만, 예수 자신은 이 "우리"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 "내 아버지"이거나 "너희 아버지"라고만 썼다. 아들됨에 있어서 예수께서 가지고 있는 독특한 지위를, 이 용법은 암시를 해 준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기준은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출발점이다.

가정은 수직적인 관계로만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수평적인 관계도 중요하다. 하나님의 가정 안에서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의 동생이 되는 수직적인 관계를 맺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가정 안에서 믿는 자들은 서로 형제 자매로서 관계를 맺는다.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가정의 테두리를 무한대로 넓힐 것을 요청한다. 내 가정만을 생각하는 소아적(小我的) 사고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해 동포들을 모두 형제 자매로 생각하고 친교의 손을 내어 뻗는 변화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의 가족이 아니므로 무관심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예수 전승에도, 모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강조하는 말씀이 있다(예, 마 5:45). 믿지 않는 사람들은 남의 가족이 아니다. 본래부터 우리와 같은 가족이었다. 다만, 현재는 그들의 몰이해 때문에 하나님의 아버지 됨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뿐이다. 따라서 이들은 "잃어버린 가족"이다. 우리가 이들을 사랑으로 대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해 인류가 모두 하나님 아래에서의 한 형제요 한 자매인 것이다. 교회의 선교는 바로 잃어버린 가족을 찾는 일이다.

2. 한 가정으로서의 교회

위에서 말한 예수의 사상은 후기의 성서 저자들에게서, 특히 바울에게서 교회에 대한 한 비유로 발전을 한다. 말할 것도 없이, 예수는 교회를 두고 이 비유를 사용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예수의 부활 이후, 믿는 자들은 곳곳에 믿음의 공동체들을 세우면서, 그 안에서 생활을 해 나아갔다.

이것은 아마도 당시에 기독교 공동체의 사상과 행동에 큰 영향을 주었던 그리스-로마적인 사고에서 영향을 받은 결과이기도 했을 것이다. 당시에 그들은 국가를 하나의 가정으로 비유하곤 했던 것을 문헌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Plato, Xenophon).

바울은 예수의 전승과 당시의 문화적 영향 하에서 교회를 가정에 비유하여 가르침을 주곤 하였다. 그도 역시 하나님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아버지로 불렀다(예, 살전 1:1, 3 등).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의 양자와 양녀로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갈 4:1-7). 그리스도인들은 다만 하나님의 자녀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상속자가 되었다고 말한다(롬 8:14-17).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자식임을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교회 공동체에서의 삶이 하나님의 가정 안에서의 삶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예컨대, 빌레몬서에서 바울은 오네시모의 주인에게 회심한 종 오네시모를 더 이상 종으로 대하지 말고 형제로 대하라고 요청한다(몬 16). 그는 또한 교우들을 부를 때, "형제들"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였다. 단순한 형제로서가 아니라 뜨겁게 사랑하는 형제들로 부른다 :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빌 4:1).

이러한 관계는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공동체 안에서의 삶은 곧 가정 안에서의 삶의 맥락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바울은 설명한다 :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5). 이것은 아주 사랑이 충만한 가정의 그림,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후기의 편지들로 가면서 더욱 명시적으로 표현된다. 디모데전서를 보면, 이러한 권고가 나온다 :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 하고,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딤전 5:1). 신앙의 공동체 내의 모든 사람들을 가정에서 부모형제에게 대하듯이 대하라는 권고이다.

따라서, 초대 교회는 예수의 전승을 공동체 내에서 좀 더 구체화시킴으로써, 교회를 하나의 가정으로 보고, 그런 맥락에서 생활하는 전통을 확립시켰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됨으로 하여, 예수의 말씀에 있었던 좀 더 넓은 사해형제주의가 점차로 희미해지고, 지역교회주의로 좁아지는 경향이 생겨났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들은 사랑이 넘치는 한 가정으로서의 공동체의 삶을 구현할 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모든 사람들에게까지도 활짝 열려진 태도를 견지해야 할 것이다.

3. 개체 가정에 대한 권면들

우선, 예수 전승을 보면, 이혼에 대한 절대적인 금지를 명함으로써 가정의 신성함을 천명하고 있다(마 5:31-32; 19:1-10). 마태복음의 표현대로 한다면, 가정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19:6) 것이다. 가정의 기초는 하나님의 뜻에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만들어진 가정을 인간의 뜻으로 해쳐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반면, 예수 전승은 믿는 자들의 우선 순위에서 가정에 대한 관심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관심을 앞질러서는 안된다는 것을 명백히 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 자신도 가정을 뒤로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헌신을 했었으며, 그의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요청하였다. "먼저 가서" 부친의 장사를 지내겠다고 한 사람에게 거절한 것도(마 8:21-22 / 눅 9:59-60) 그렇고, "먼저" 집안 식구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 달라는 요청을 거절한 것도(눅 9:61-62) 모두, 믿는 자의 우선순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잘 가르쳐 준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이것은 실제로 가정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가정을 얻는 과정일 뿐이다. 예수 전승 안에 있는 하나의 보상의 말씀이 이것을 증언해 준다 :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 19:29 / 막 10:29-30 / 눅 18:29-30). 하나님을 우선 순위의 맨 앞에 둘 때, 가정이 옳게 설 수 있는 것이다. 가정을 위해서 하나님을 버린다면, 그것은 둘 다 잃는 행동이 되고 만다.

예수의 재림에 대하여 매우 강한 기대 속에서 살았던 바울은 독신으로 살았으며, 또한 독신으로 사는 것이 종말적인 상황에 더 어울린다고 말을 한다(고전 7:25-35). 하지만, 가정을 가졌다고 해서 뭔가 잘못 된 것은 아니라고 확인을 해 준다. 창조론의 빛에서 보면, 결혼이 하나님의 뜻이지만, 종말론적인 빛에서 보면, 결혼은 선택 사항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결혼을 했다면, 그 가정 생활에 따르는 모든 의무에 성실할 것을 주문한다.

그도 역시, 예수의 전승을 따라서, 이혼하지 말 것을 요청한다(고전 7:10-11). 그러나 문맥의 앞뒤를 살펴보면, 바울은 이 명령을, 두 사람이 모두 그리스도인인 부부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를 한다. 만일에 둘 중에서 한 사람이 믿지 않고, 믿지 않는 쪽에서 헤어질 것을 요청하면, "평화를 위해" 망설이지 말고 이혼을 하라고 권고한다(고전 7:15). 하지만 바울의 권고의 무게는 믿지 않은 배우자와 계속 살아가서 그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데에 있다(고전 7:12-14).

일단 가정 생활을 유지하기로 선택했으면, 그 어떤 신앙적인 이유에 의해서도 서로에 대한 부부로서의 의무를 거부하지 말도록 요청한다(고전 7:3). 이러한 권면을 하면서, 책임의 비중을 남편과 아내에게 똑같이 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결혼과 가정은 상호간의 사랑과 성실성에 의해서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개체 가정에 대한 권면들로서 이것보다 더 명시적인 본문은 쌍둥이 본문인 골로새서 3:18-4:1과 에베소서 5:22-6:9이다. 이 두 본문은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주인에 대한 가정 생활 지침이다. 우선, 주목할 것은 당시의 사회적 제도 하에서 불이익을 당하고 있던 사람들(아내, 자녀, 종)을 먼저 거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당시에 주인의 재산 정도로 취급당했던 종을 가정의 한 구성원으로 인정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당시의 관념으로 볼 때 매우 특별한 배려가 아닐 수 없다.

최근에 여성 신학자들은 이 지침에서 여자가 부당한 취급을 받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아내들에게는 남편에게 순종할 것을 요청하는 반면, 남편에게는 아내를 사랑할 것만을 요청할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저자는 여기에서 전통적인 관념을 그대로 수용하는 듯하면서도, 내용적으로는 남편에게 더 많은 것을 요청하고 있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셨듯이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지침이다. 당시의 일반적인 남편들의 태도를 비추어 볼 때, 이 사랑에의 요청은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만하다!

따라서 저자는 당시의 가부장적인 틀을 뜯어고치는 데 마음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었다. 마치, 바울이 노예 제도 자체를 문제삼지 않고, 복음을 통한 변화로써 그것을 무력화시킨 것과 같은 방법을 사용하고 있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가부장적인 기존 사회의 틀을 혁명적으로 전복시키는 데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복음에 따른 삶의 태도의 변화에 그 관심을 둘 뿐이었다. 그런데, 복음의 요청을 그대로 따르다 보면, 결국 가부장적인 제도는 그 근거에서부터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그 "가정 생활 지침" 이전에 주어진 생활의 대원칙을 주목해야 한다. 특히 에베소서를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 지침 바로 전에 이렇게 대원칙이 천명되어 있다 :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 그 이후에 상술되어 있는 가정생활 지침들은 이 대원칙에 대한 설명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인의 가정 생활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피차 서로 복종하는 관계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이 이 말씀의 핵심이다.

4. 결론

우리는 현재 분열의 시대를 살고 있다. 나라마다 분열하고, 교회마다 분열하고, 가정마다 분열하여 와해되고 있다. 이러한 분열의 시대에 대한 진정한 치료제는 바로 복음이다. 이 복음 안에서 온 인류는 하나님의 한 가정으로서 서로 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며, 교회는 하나의 가정으로서 서로 뭉칠 수 있고, 가정은 그 거룩성과 온전성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신약성서의 가정관은, 이 온갖 분열의 문제에 대한 참다운 처방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이것을 얼마나 실현하느냐에 있다   

김영봉 (협성대 교수/ 신약학)